Charles 19XX년 4월 13일 맑음 학교를 세우기 위해 시의 승인이 필요했다. 학교 이름을 고민하던 중에, 행크는 고민할게 뭐가 있냐며 '자비에 학교'를 말했다. 스스로의 이름을 붙인 학교라니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를 쓰는 도중 창가위로 까마귀 한마리가 내려앉았다. 새까만 까마귀가 반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휘갈겨 내리던 팬을 내려두고 까마귀를 마주보았다. 까마귀는 제법 커다란 등치로 나를 위협했지만 덩치와 달리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빛나는 눈동자에 있는 내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흔들거리며 삐뚜름하게 갸웃거리다 까마귀는 날아갔다. 까마귀가 날아간 자리로 태양빛이 스며들었다. 그때 무언가 반짝하고 빛났다. 익숙하지 못한 휠체어를 끌고 창가 문을 여니 동전하나가 있었다. 1센트. 막상 웃음이 터졌다. 다리병신인 내 모습이 불쌍해 1센트라도 던져주고 간 것인가. 황당함과 어이없음에 한참동안이나 웃다가 그렇게 울어버렸다. 커다란 웃음만큼이나 커다란 울음은 쉽사리 멈추질 않았다.
Erik 베를린에서 머물다. 그곳은 아직 춥다. 에릭은 초저녁에 커피와 흰 빵을 먹었다. 흰 빵은 맛이 없기에 남겼다. 웨이트리스가 몰래 흰 빵을 챙기는 것을 보다. 에릭은 아무 말 없이 거리고 나갔다. 미군병사들이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춥고 배고파 보인다. 에릭은 옷깃을 여미며 거리를 걸었다. 작고 아담한 남자가 에릭의 너머로 걷고 있다. 까만 머리통이 퍽이나 귀엽다. 에릭은 깜짝 놀라 남자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나 남자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차들이 도로로 험하게 지나쳐 건너갈 수가 없다. 에릭은 너머의 남자를 보며 망연한 얼굴을 한다. 쓰게 웃는다. 저 남자는 그가 아니다. 쓰게 웃는다.
Charles 친애하는 포스터에게,
사랑하는 내 친구 포스터 맥홀. 네가 보낸 편지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 너도 알다시피, 옥스퍼드 시절 너와 나는 대판 싸운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잖아. 그 뒤로 역시나 우리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하지만 네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주어 나는 정말 기쁘게 생각해. 주소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제임스 그녀석이 알려줬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물어보진 않을게 (그 새낀 비밀이 없어. 어차피 비밀일 것도 없지만) 네가 아프리카로 선교활동을 나갔다니 놀라워. 조기졸업을 마치고 다시 의학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었지만, 네가 선교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대단해! 이후에 네가 선교하는 곳으로 나도 가봤으면 좋겠어. 착하고 예쁜 아이들이 많이 있겠지? 네가 흥분하면서 궁금했던 것과 달리 나는 큰일을 하고 있진 않아. 몇 년 전만해도 대학교수를 생각했지만, 지금은 일반 사립학교를 열 준비를 하고 있어. 다음해부터 신입생을 받을 예정이야. 빠르면 이번 여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친애하는 친구. 이후 뉴욕에 오게 된다면 꼭 연락을 줘. 헤어졌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웃는 얼굴로 만나고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장담해. 너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며 이만.
Ps.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해. 대신 작은 선물을 함께 보내니 너에게 위안이 되기를.
너의 친구, 찰스 자비에가
Erik 레이븐은 에릭의 방에서 산더미 같은 영수증을 발견한다. 그가 베를린, 뮌헨을 다녀오면서 가지고온 영수증이다. 버린 것 하나 없이 곱게 모아서 감싸놓았다. 레이븐은 이것을 버려도 좋을지 말지 생각한다. 그러나 버리지 않기로 한다. 궁금증이 생긴다. 어째서 이렇게 모아둔걸까. 그가 가계부를 쓸것 같지는 않은데. 레이븐은 끈을 풀어 영수증을 본다. 펍에서 맥주 한잔. 로렌이라는 식당에서 블랙커피 한잔, 라끄흐라는 가게에서 검은 셔츠 한 벌, 멕흐쉬라는 호텔에서 4박 5일의 숙박 영수증. 그렇게 한참을 보던 레이븐은 다시 영수증을 정리하다 하나를 떨어뜨린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영수증의 뒷면으로 무언가 보인다. 그러나 레이븐이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 에릭이 들어온다. 에릭은 산더미 같은 영수증을 낚아채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레이븐에게 나가라고 말한다. 레이븐은 미안하다 말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다.
Charles 기분이 언짢으시겠지요. 당신에겐, 점잔을 빼며 못된 놈이라고 욕할 권리가 있습죠. 마음이 순결한 자도 무엇 없인 살 수 없다는 말을 순결한 귀에는 말해선 안 되는 건가. 요컨대 나는 당신에게 때로 자신을 속이는 즐거움을 허락하리라. 하지만 당신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게요. 벌써 또 실증이 난 모양이구려. 이렇게 더 계속됐다간 완전히 지쳐서 미쳐버리거나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쯤 해두고! 당신의 애인은 집안에 틀어박혀 세상만사가 답답하고 슬픈 듯이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녀의 머리에서 도대체 당신의 모습이 떠나지 않으니 오매불망 당신 생각뿐이지요. 처음엔 당신 마음에도 사랑의 열정이 녹은 눈 흘러드는 개울처럼 넘쳐흘렀죠. 그 열정을 그녀의 가슴에 쏟아 붓더니, 이제 당신의 개울물은 말라붙었단 말인가요? 내 생각엔, 숲속에서 왕처럼 앉아 있기보다 저 가련한 어린아이에게 사랑의 보상을 보내주는 것이 위대하신 나리에게 어울릴 듯싶은데요. 그 애에겐 시간이 못 견딜 만큼 길게 느껴지겠지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답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밤중까지 <이 몸이 새라면>이란 노래만을 부리고 있지요. 어쩌다가 명랑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울적해 있어요.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안정돼 보이지만, 줄창 사랑에 빠져 있는게 틀림없습니다.
- 파우스트, 비극 제 1부의 숲속과 동굴 中 메피스토텔레스의 대사-
Erik 맥흐쉬 호텔, 영수증의 뒷면 뮌헨은 춥다.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시간 전 길거리에서 총기사건이 났다. 어린아이가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공포가 있다. 독일은 죽었다. 도움을 받고자 찾았던 프로우만 박사는 전쟁당시 결핵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곳에 온 의미가 없다. 길거리를 지나다 쇼윈도에서 블랙 몽블랑을 보았다. 전신이 검은색으로 된 만년필이다. 가격대가 높다. 게다가 쓸 일도 없는데 사버렸다. 포장된 체로 내 가방 안에 있다.
Charles 19XX년 6월 4일 맑음 결국 이번 여름에 신입생을 받기로 했다. 한 작은 신문사에서 취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끈질기게 요구해온다. 알렉스는 늘 그들은 문전박대한다. 껄렁한 알렉스의 모습에 취재진은 작은 다람쥐들같이 겁먹은 얼굴을 한다. (기자 양반들은 하나같이 작아 보인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은 체로 조금만 말해달라며 부탁한다. 골치 아프다. 신입생 명단을 작성한다. 학생이 학교를 찾는게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을 찾는 게 조금 우습지만, 우리는 돌연변이 학교를 만드는 것이니 이해할 수 있는 특수점이라며 스스로 납득해버린다. 세리브로로 많은 아이들을 찾았다. 그 중에는 나처럼 생각을 읽는 아이도 있다. 우습게도 아이는 아직 2살이다. 무분별하게 부모의 생각을 읽고 있을게다. (대부분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그러고 보면 내 어린 시절 또한 그러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내 양부양모의 생각을 읽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적었다. 그것은 슬프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이런, 초인종이 울렸다. 창문 밖으로 보니 다람쥐 기자양반들이 서있다. 머리가 아프다.
Erik 몽블랑(만년필 가게), 영수증 뒷면 나는 이 만년필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어야 할까. 5년? 10년? 30년? 꿈속에서라도 네가 이것을 쥐고 있으면 좋을 텐데.
Charles "나는 오드리 햅번같은 여자랑 결혼하고 싶어"
"심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션, 알렉스가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보기엔 네 눈이 너무 쓸데없이 높다는 것을 간략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한 것 같아."
"죽을래? 꿈도 못 꿔? 야, 내가 진짜 오드리 햅번이랑 결혼할지 엘리자베스 테일러랑 결혼할지 어떻게 알아?"
"그건 모르지, 그런데 네가 얻어맞고 살 남편으로는 뻔 하게 보인다."
"닥쳐, 알렉스"
"...그러고 보니 찰스는 왜 결혼은 안하는 걸까?"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 아닌가?"
"안하는 거지. 저번에도 모이라랑 썸씽있는거 못 봤어?"
"그걸 썸씽이라고 하나?"
"썸씽이라면 썸씽이지, 교수님 여자한테 관심도 많잖아? 전보다는 덜하지만."
"나 본적 있어!! '아가씨, 아가씨는 D-34 케이스에 해당한 돌연변이군요.' 제기라알- 난 찰스가 한거 보고 먹힐 줄 알았는데 싸대기만 맞았잖아."
"그걸 보고서 따라할 의욕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멋져보였다니까?? '돌연변이라고해서 별게 아니죠. 단지 특별할 뿐-' 으아~"
"너 여자랑 한 번도 못 잤지?"
"알렉스 저질!!!!! 너 저질이야!!!"
".....그런데 교수님은 왜 결혼을 안하시는 거지?"
"알렉스 저질!!!!! 교수님!!!! 알렉스 변태에요!!!!!"
"씨발, 너 안 닥쳐!?"
Erik 찰스의 사진은 너무 작았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지역신문의 모퉁이에 실려 있는 사진을 에릭은 뚫어져라 보았다. '자비에 학교'라고 쓰여 있는 밑으로 찰스의 이력에 대해 대충 나와 있고 학교설립 목표가 나와 있다. 평범한 영재학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에릭은 그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에릭은 그런 내용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신문 사진만을 바라볼 뿐이다. 찰스는 의자에 앉아있다. 의자일까. 아니다 저건 의자가 아니야. 에릭은 신문을 덮은 체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빈다. 에릭은 스스로가 예민한 것임을. 그렇게 빈다.
Charles 뉴욕에서 인상파 특별전이 열리다. 찰스는 알렉스와 함께 그곳을 향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찰스는 장애인대우로 쉽게 입장했다. '다리병신이어서 좋은 일도 있군.' 자조하는 찰스에게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양보를 받으며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큰 그림 앞에 멈췄을 때 찰스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그림만을 보았다. 알렉스가 모든 그림을 다 보았을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그 그림 앞에서만 서 있었다. 알렉스는 뒤편에 앉아 휠체어를 탄체로 그림을 올려보는 찰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찰스는 미동도 없이 그 그림을 보았다. 알렉스는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체했다.
The Enigma, 1871 Giclee Print by Gustave Doré
Erik 카페 로렌, 영수증 뒷면 (어째서인지 커피자국이 있다) 비가 내린다. 내일은 러시아로 간다. 추운 곳에서 더욱 추운 곳으로 간다. 그러나 3일 뒤에는 다시 미국으로 갈 것이다. 추운 곳은 지겹다. 화로가 있고, 체스 판이 있던 곳이 그립다. 영수증, 앞면 약해지는 것은 곧 죽는 것이다.
Charles 19XX년, 7월 7일 학교를 열었다. 신입생은 13명이다. 션은 수가 너무 적다고 했지만, 행크는 수가 많다고 놀랐다. 신입교사가 들어왔다. 회색 머리를 가진 벨이란 여교사다. 그녀는 나이가 지긋하다. 모든 물건을 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녀는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고 싶네요.'하고 말했다. 아직 교사도 적고, 아이들도 적지만. 이제 시작이다. 이 시작은 결코 전쟁을 하거나 혹은 막기 위한 시작이 아닌, 행복과 평등을 위한 시작임을 나는 고백한다.
Erik 찰스, 내게로 와서 나 때문이라고 말해줘.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말해줘.
Charles 19XX년, 7월 9일 아이들은 이곳에서 배우는 것들에 당황스러워한다. 부모들에게는 영재학교라 들었는데 반해, 정작 배우는 것들은 스스로 감춰왔던 것들이니 당황스러울 것이다. 능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 모든 일반교육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배우는 많은 것들을 모두 배울 것이다.
Ps. 어제 저녁, 에릭이 나오는 꿈을 꿨다. 해변에서의 꿈이었다. 나는 언제나 후회한다. 그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는데.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이다.
Erik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말해줘. 제발.
Charles 어째서죠? 당신은 키스할 줄도 모르시나요? 잠시 떨어져 있었다고 키스까지도 잊으셨나요? 당신 목을 끌어안고 있는데도 왜 이리 불안할까요? 전에는 당신 말씀, 당신 눈길 한 번에 온 하늘이 내려와 절 감싸 주었는데, 당신의 키스만 받아도 숨이 막힐 것 같았는데, 키스해 주세요! 아니면 제가 키스해 드리겠어요! 어머나! 당신 입술이 싸늘하군요. 말씀도 없으시고. 당신의 사랑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누가 내 사랑을 뺏어갔나요?
-파우스트, 비극 제 1부의 감옥 中 파우스트에게 키스하는 마르가레테-
Erik "레이븐, 난 사랑을 믿지 않아. 남자라는 족속들은 전부 하나같이 바라는 게 전부 그거거든. 나도 사랑을 믿었던 시절이 있었어.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잠들고 싶었던 때도 있었어. 하지만 늘 상처만 받았어. 내 직업뿐만 아니라, 등 뒤에 붙어있는 지랄 맞은 날개도 한몫했지. 그 누구도 나를 나로 봐주지 않았어. 너희들은 그때 쇼우에게 가는 나를 나쁘게 봤을지 모르지만, 난 그게 내가 원하는 선택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 사랑도 못하는 내가, 사랑받지도 못하는 내가 인간들의 곁에 있어봤자 뭐하겠어? 난 사랑을 안 믿어. 사랑은 없어."
"난 사랑을 믿어."
"어째서?"
"존재하니까."
Charles 19XX년 7월 18일 흐림 16번째 아이가 들어왔다. 입학식을 제외하고 전학 온 아이들이 벌써 3명이나 된다. 이번에 들어온 아이는 놀랍게도 레이븐을 참 많이 닮았다. (피부가 파랗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말하는 것들이 그렇다. 저번 내 방에 들어오더니 ‘교수님! 좀 치우고 사세요!’하며 화를 냈다. 그러면서 하나씩 물건을 치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서 서류에 있는 내 글들을 보더니 ‘악필이 천재라고는 하지만...이건 좀 심하네요...’하고 날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나뿐만 그녀가 레이븐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듯하다. 션과 알렉과 행크는 리틀 레이븐이 들어왔다며 감탄과 경악 속에서 오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제인이라는 번듯한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븐이라 불리고 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가 그리워진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와 버렸다.
Erik 에릭은 조력자를 찾고 있다. 그는 더욱 열심히 몰두한다. 그의 복수는 결국 쇼우가 아니었다. 화살은 그대로 인간을 향해 돌아왔다. 엠마는 그를 복수에 중독된 남자라고 말했다. 그는 엠마의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릭은 프랑스를 향했다. 짐을 싸고 떠나며 그는 ‘따뜻한 곳이로군.’하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레이븐은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은 이상, 그에게 따뜻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Charles 19XX년 7월 30일 리틀 레이븐이 학교 복도가 너무 휑하다며 불평했다. (불평하는 모습까지 레이븐과 꼭 닮았다.) 그림이나 사진을 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사실 이전에 양부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학교일을 시작하며 떼어버렸다. (창고에 고이 모셔 놨다.) 아무래도 그림을 사는 것이 좋겠다. 이왕 거는 김에 멋진 그림을 거는 것이 좋겠지. 벨은 좋은 생각이라며 입구 쪽과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그림을 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그림을 사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교수님 어떤 그림을 사실 생각이신데요?’하고 물어보았다. ‘고흐? 샤갈? 아니면 모나리자라도.’ 그녀는 호호호하며 웃다가 어리둥절하는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진심이세요?’하고 물었다. 이런, 얕은 내 미술지식이 탄로 나게 생겼다.
Erik 에릭이 떠나기 전날 레이븐은 그의 책상위에 검은색 다이어리를 두었다. 비록 참견일지라도 영수증에 낙서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했다. 끈으로 묶을 수 있는 작은 가죽다이어리였다. 그녀는 그가 다이어리를 쓰레기통에 버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그는 다이어리를 프랑스로 챙겨 간듯했다. 에릭은 밖을 향하며 레이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양이처럼 그녀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떠났다. 비가 내린다.
Charles 마테오 센델씨께
평안히 지내시는지요? 격조한탓에 이리 목적을 가지고 편지를 보내기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회화를 구매하고자 하는데, 제가 회화 쪽으로는 영 문외한인지라 마테오씨의 도움을 받고자합니다. 지인을 통해 들은 소식으로는 이번 나치가 강탈했던 물품들이 마테오씨께서 일하시고 계시는 소더비 경매회사를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나 괜찮으시다면 답장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평안을 기원하는 찰스 자비에 드림
Erik 에릭은 도착한 호텔에서 가죽 다이어리를 꺼낸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체다. 창밖에는 여름이 만연한 파리가 웅성인다. 그는 호텔에 배치되어있는 볼펜을 잡는다. 그리고 맨 앞장에 날짜를 쓴다. 유려한 필기체가 종이위를 흐른다. 'Erik Lansherr' 그리고 그는 한 장을 더 넘겨 날짜를 쓴다. 19XX년 8월 2일 나는 네가 저주스럽다.
Charles 찰스 자비에 교수님께
이럴게 아니라 만납시다. 5일 뉴욕 퀸즈가 12번지의 ‘Cafe Bassett'에서 교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제 사무실에서 교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제 서류뭉치들이 교수님을 깔아뭉갤 테니까요.
Ps. 부끄럽다뇨, 당치 않습니다. 사업가의 솔직한 발언을 하나 던지자면, 사업가는 돈 많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마테오 센델은 자비에 교수님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돈을 사랑하는 마테오 센델 드림
Erik 에릭은 쿠쟁박사를 만났다. 그는 에릭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쿠쟁은 에릭의 가지런한 그 손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고 있었다. 쿠쟁의 이마위로 땀이 두두둑 내렸다. 에릭은 그에게 곁에 있던 냅킨을 건넸다. 쿠쟁은 그 냅킨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에릭은 못생기고 더러운 이 남자가 싫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에릭에게 필요했다. 그의 과학적인 힘이 필요했다. 프로우만 박사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봤자 도움 되는 것은 없다. 에릭은 땀을 닦는 남자에게 ‘선택은 두 가지가 있소. 돕거나. 죽거나.’하고 대답했다. 쿠쟁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난 죽기 싫소.’라고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이었으나 그 대답마저 듣고 싶지 않았다. 에릭은 남자에게 비행기 티켓을 던졌다. 문을 열자 느껴지는 뜨거운 태양이 에릭을 후려쳤다. 에릭은 푸른 눈을 얇게 뜨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까며 갈색 도보를 보았다. 자신의 일기장과 같은 색이다.
에릭은 일기 쓰기를 망설인다.
Charles 19XX년 8월 5일 미스터 마테오는 엄청난 사람이다. 그는 휠체어로 들어오는 나를 보며 깜짝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 카탈로그를 펼치더니 ‘마침 금으로 만든 휠체어가 있어요!!’하고 흥분하면서 말했다. 정말 어이없었지만, 동정하는 이들보다는 훨씬 더 반가운 반응이다. 그는 내가 부탁했던 여러 가지 회화들을 보여줬다. 삐까뻔쩍한 그림 속에서 이것저것을 물어보니 그는 필요이상으로 대답을 해준다. (어쩐지 비싼 그림들만 말해주는 것 같다.) 멋진 그림들이 많다는 것은 알겠지만 대체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겠다. 마테오는 나에게 수십 장의 카탈로그와 자료들을 안겨주면서 당일까지 미발표되는 그림들이 있노라고 말했다. (틀림없이 값비쌀 것이다.) 그는 천천히 고민해보라고 말하며 나를 배웅했다. 헤어지는 끝까지 그는 ‘많이 고민하세요!! 많이 고민하셔서 많이 사세요!!’하고 말했다. 정말 엄청난 사람이다.
Erik “타인의 존재를 감당할 수가 없으면, 때때로 타인이 증오스러워지지. 상대가 사랑스럽고 안타까울수록 느껴지는 감정의 폭풍은 견디기가 힘든 법이야. 그것을 견디지 못할 때, 혹은 절벽위에 있을 때. 사람은 증오를 느끼는 거야. 그래서 애증이 있는 거지”
“엠마, 당신도 레이븐의 말에 동의해?”
“레이븐이 뭐라고 했는데?”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을 믿는다고.”
“앙큼하군. 사랑이 존재하기에 사랑을 믿는 건 너무 위험한일이야”
“왜?”
“존재하는 것들은 언제나 위협받으니까”
Charles 19XX년 8월 10일 비 경매장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려 힘들었다. 일요일에 비라니. 끔찍하다. 아이들은 밖에서 뛰놀지도 못하고 있었겠지. 따라오겠다는 션을 물리치고 벨과 함께 경매장으로 갔다. 그곳은 별천지다. 엄청난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유명야구선수들의 배트와 글러브에는 꼬마손님들이 매달려 있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제임스가 본다면 아주 좋아 할텐데. 배트를 구경하고 있는데 미스터 마테오가 쌍수를 들고 날 반겼다. (너무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민망했다.) 그의 도움과 벨의 도움으로 그림 세 점을 샀다. 하나는 내방에, 둘은 복도에 걸기로 했다. 복도에건 2점의 그림은 같은 화가다. 매우 훌륭하다! 나는 몇 점을 더 사려했지만 벨이 3점이면 된다고 나를 설득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은 매우 다급했다.) 사실 내방에 걸 그림까지 살 생각은 없었는데. 그림을 보는 순간 꼭 사고 싶었다. 예약자가 있던 모양이었지만 미스터 마테오의 도움을 받았다. (‘돈 많은 사람이 왕이야!!!’하고 소리 지르던 그가 생각난다.) 그림은 내일 도착한다. 아이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다.
Erik 레스토랑 봉주롱, 영수증 뒷면 어느새 이것에 익숙해져버렸나. 이유도없이 영수증을 쌓아놓고 있다. (다이어리엔 영수증을 끼울 뿐이다.) 프랑스는 매우 덥고 활기차다. 그러나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에릭은 영수증에 휘갈기던 글씨를 멈춘다. 뒤에 있던 금발여자가 에릭의 어깨를 짚으며 말을 걸어온다. 에릭은 비웃듯이 웃지만 여자는 호의의 미소라 착각한다. 에릭은 자신의 어깨로 기대는 여자의 어깨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여자의 온도는 따뜻하다. 에릭은 자신의 몸이 차갑다는 것을 느낀다.
Charles “어머~미스터 스미스~ 미안하지만 내 눈알이 빠졌으니 주워주겠어용?!(가성) 허허허허 미스 로렌스, 어찌 눈알이 내 앞에 떨어졌을까요. 이럴 수가!!! 이렇게 아름다운 눈알이라니!? 그대의 눈동자는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낮게 깔고)”
“........그걸 지금 그림해석이라고 하고 있냐?”
“아 그러면 알렉, 네가 해보던가. 네가 나한테 물어본 거잖아.”
“모르니까 물어봤잖아. 제기랄, 대체 이 그림은 뭐야? 행크, 너 똑똑하잖아. 네가 말해봐.”
“...글쎄....그냥 제목 그대로 가로줄이 있는 그림 아닐까...”
“나중에 교수님이 ‘그림 어때?’하고 물어보면 그렇데 대답할거냐!? 너 진짜 하버드 나온거 맞아?! 구라아냐!?”
“그러면 네가 대답하면 되잖아!”
“그래! 알렉 네가 대답해!!”
“이걸 뭐라고 말하냐!!!!!”
“...........................”
“...........................”
“...........................”
“...............난, 진짜 가끔 찰스가 무섭다.”
“난 이거랑 똑같은 그림이 동쪽 복도에도 있다는게 더 무섭다.”
“씨발, 이럴 때 에릭이 있었으면 막아줬을텐데”
“공감”
“공감”
Transverse Line, 1923, Print by Wassily Kandinsky
Erik 19XX년 8월 11일 여자는 내 침대에 누워있다. 커다란 창문으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인다. 영수증을 구겨서 버렸다. (에릭은 무엇을 쓸지 망설인다.) . (그리고 길고 강하게 점을 찍어 내리 누른다) 꿈에서 찰스가 나왔다. 찰스는 아무 말이 없다. 다만 휠체어를 타고 나를 응시할 뿐이다. . (다시 강하게 점을 내리찍어 누른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 마지막 줄은 황지우 시인의 구절 인용
Charles 19XX년 8월 16일 맑음 아이들이 모두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저번 주에 전학 온 조지는 그림을 보고 3분이나 명상하는 것 같았다! 알렉에게 나지막이 물어보니 알렉은 아주 좋은 그림이라고 소리치며 달려갔다.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활기찬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다. 평화가 찾아오니 마음은 또 슬퍼진다. 평화로운데 왜 슬플까. ... 사실 나는 대답을 알고 있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봄이 오지 않는 자리가 있다. 그곳에는 그가 산다. 다른 곳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아이들이 뛰어놀아도, 그곳은 비조차 오지 않는 사막이다. 그곳에 그가 산다.
Erik 19XX년 8월 17일 잠드는 것이 두렵다.
Charles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네.
그대들의 기쁨이란 탈을 벗은 그대들의 슬픔. 그대들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샘이 흔히 그대들의 눈물로 채워지기도 하리라. 그러니 어찌 다른 것일 수 있으리오? 슬픔이 그대들 존재 내부로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그대들의 기쁨은 더욱 커질 수 있는 것. 그대들의 술을 담는 잔이 도공의 가마니 속에서 구워낸 바로 그 잔이 아닌가? 그대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피리는 칼로 후벼 파낸 바로 그 나무가 아닌가? 그대들 기쁠 때 마음 속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대들에게 슬픔을 주던 것임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들 슬플 때 다시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진실로 그대들에게 기쁨이었던 것 때문에 울고 있음을 알게 되리라.
칼린 지브란, 예언자 中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Erik 19XX년 8월 20일 다시 태어난다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겠다. 이 지겨운 감정에 휩쓸려가며 살지 않겠다. 차라리 짐승으로 태어나 먹고 자고 죽이고 사는 것에만 익숙해지겠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겠다. 사람으로 태어날 바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겠다. 결코 태어나지 않겠다.
Charles 제인은 울며 찰스의 방을 기웃거렸다. 찰스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놀라 문을 열었다. 그녀가 찰스에게 와락 안겼다. 찰스는 제인에게 '우리 리틀 레이븐'하고 속삭여주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저주스러운 다리는 그녀를 온전히 안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녀는 찰스에게 울먹이며 '엄마가 데리러 온데요.'하고 말했다. 찰스는 잘됐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데리러 온다는 것은 단지 방문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예측한다. 그들은 그녀를 다시 데려가려는 것이다. 찰스는 겉으로 침착하게 그녀를 쓰다듬지만 겁을 먹는다. 그녀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녀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공장을 다니게 될 것이다. 찰스는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에 그녀를 너무 사랑한다. 찰스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젖은 뺨에 키스를 한다. 너를 놓지 않으마. 내가 너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으마. 찰스는 참지 못하고 울먹인다.
Erik 카페 쉘링던에서 일하는 드레프쉬는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을 확인했다. 조금은 짧은 치마와 그에 맞는 하얀 앞치마가 정갈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마자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남자는 테이블에 앉는다. 이렇게 더운데도 상기된 얼굴이나, 땀을 흘린다거나 하지 않는다. 드레프쉬는 남자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주문을 받는다. 남자는 블랙 커피를 시킨다. 디저트나 음식은 일절 시키지 않는다. 남자는 한동안 밖을 바라보다 무언가를 꺼내 적기 시작한다. 고급스런 노트에 비해 필기구는 형편없어 보인다. 드레프쉬는 그에게 커피를 따라주며 힐끔힐끔 쳐다본다. 정갈한 글씨가 언뜻 보인다. 남자답지만 조각 같은 손목도 매우 멋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목덜미를 향한다. 그리고 멈칫한다. 흐리게 쓰여 있는 번호에 그녀는 몸을 굳히며 얼른 주방으로 들어선다.
"아까 왔던데? 말 걸어봤어?"
"제기랄! 말 걸기는 뭘 걸어! 유태인이던데!"
"세상에? 유태인이야? 전혀 그렇게 안보이던데"
"짜증나! 괜찮다 싶었더니."
"뭐 어때, 유태인이면. 잘생겼잖아. 게다가 옷입는 거 봐도 귀티가 좔좔 흐르던데."
"난 유태인은 싫단 말이야!"
"왜?"
그녀는 물음에 입술을 잘근 씹는다. 그녀의 동료 조안나는 제멋대로에다 짜증만 부리는 드레프쉬가 달갑지 않다. 너머로 힐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본다. 무언가 쓰다가 고개를 들어 생각한다. 파르르 햇볕에 떨리는 속눈썹에 조안나의 마음이 떨린다. 유태인이면 어때. 저렇게 아름다운데. 그와 눈이 마주친다. 조안나는 숨어버린다.
Charles 19XX년 8월 24일 비 나는 이토록 무력하다.
Erik 19XX년 8월 25일 아침마다 가는 카페의 여자들은 나를 두고 속삭인다. (쓰레기 같다.) 쿠쟁박사가 미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나를 도와 기지를 만들어 갈 것이다. 잊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을. 비록 인간의 몸을 하고 있으나, 나는 인간이 아니다.
Charles "벨 선생님, 왜 제인이 오지 않죠?"
"... 그녀는 잠시 집으로 갔어요."
"제인은 돌아오지 않나요?"
"...글쎄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나는 그녀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마리안은 어떤가요?"
"사실 제인은 다른 선생님들께 예쁨을 너무 받아서 질투 나요. 하지만 그 애는 착하고 친절해요. 그래서 나는 그 애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찰스 교수님도 시무룩해보여요. 나는 웃고 있는 교수님이 좋아요."
"마리안은 친절하군요. 밤마다 그녀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겠어요?"
"기도하면 그녀가 돌아올까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마리안. 우리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답니다. 다만 우리는 바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너무 슬퍼요."
".....그러네요. 그건 정말 슬프네요."
Erik 에릭은 꿈에서 깬다. 그는 숨을 헐떡이다 곁에 있던 스탠드를 집어치워낸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스탠드가 부셔진다. 그의 손에 피가 흐른다. 날카로운 표면에 베인 손바닥에는 피가 흥건하다. 그는 그것도 모른 체로 어둠속에서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헐떡이는 숨 아래로 그는 흐느낀다. 그는 찰스를 죽이고 싶다. 단지 그는 남자의 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볼 뿐인데. 에릭은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남자는 소리도 없이 표정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존재만으로 에릭을 죽인다. 남자는 찰스를 죽이고 싶다. 남자는 죽고 싶다. 남자의 얼굴위로 피가 흐른다.
Charles 19XX년 9월 2일 맑음 별이 떴다. 오늘은 특히나 맑고 아름답다. 션은 오리온자리를 찾았다고 행크에게 자랑하다 비웃음을 당했다. (오리온자리는 늦가을, 겨울에 나타난다) 알렉스는 가만히 별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밤소풍이 좋은지 풀밭위로 뛰어다니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천사들이 따로 없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그와 가끔 별을 보곤 했다. 나는 우스개 소리로 그에게 인공위성을 움직여 보라고 했고 그는 나의 농담을 받아주며 '으으윽-'하고 신음을 내다가 '다 옮겼어.'하고 말했다. 시원한 웃음을 보이며 말하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힘들 때면 그의 생각이 난다. 나는 과거의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자책하고 싶지 않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기고 싶다. 제인에게 안부편지를 보냈지만 소식이 없다. 그녀의 잔소리가 그립다.
Erik 19XX년 9월 4일 (일기장의 가장자리에 잉크기 번져있다. 그 옆에 커피 자국이 있다. 그뿐이다.)
Charles 19XX년 9월 10일 흐린 뒤 맑음 제인에게 답장이 왔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자비에 스쿨보다는 좋지 못하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사귀고 있노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자랑스럽다. 그녀가 떠난 지가 벌써 2주가 넘게 흘렀다. 아니 거의 3주가 다되어간다. 보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편지를 받았다는 기쁨 뒤엔 슬며시 슬픔이 고개를 든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 늘어간다. 한명씩 내 곁을 떠나고, 나는 그리움에 가득 찬다.
Erik 19XX년 9월 10일 (날짜만 쓰여 있다.)
Charles 찰스 자비에 앞으로.
제인 그레인저의 사망을 알립니다. 9월 13일 (토) 텍사스 주의 엘 파소, 그린우드 공동묘지에서 예배와 하관식이 있습니다. 참석 바랍니다.
그레인저 가족 일동
Erik 19XX년 9월 13일 찰스, 나는... (이것뿐이다.)
Charles 19XX년 9월 13일 비 이 순간에도, 너는 내 곁에 없다.
Erik 에릭은 미국에 도착했다. 가을이 다시 오고 있다. 아직 날씨는 후덥지근하지만, 뺨을 스치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화장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메말라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치 해골 같은 모양새라고 생각하며 자조한다. 인간이기에 복수를 꿈꿀 수 있었는데, 이젠 인간이기에 이렇게 약해져버렸다. 아직도 잠을 자는 것이 두렵다. 화를 내고 소리를 쳐도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응시하기만 한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영혼이 죽어있는 것 같다. 영혼 없는 찰스 자비에라니. 에릭은 비소한다. 엠마가 마중 나왔다. 에릭은 그녀가 운전하는 차위로 몸을 싣는다.
Charles 도와주세요! 난 누군가가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 말고
도와주세요! 당신은 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잖아요.
도와주세요!
내가 지금보다 아주 어렸을 적엔
다른 사람의 도움은 결코 필요치 않았어요.
그러나 그런 시절은 지나고 이제 자신이 없어요.
이제 마음이 바뀌었어요. 문을 열었어요.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도와주세요. 난 우울해요
당신이 곁에 있어 준다면 정말 좋을거에요.
내가 두 발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지 않겠어요?
이제 내 마음이 많이 바뀌었어요.
독립심은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아요.
요즘에는 자주 불안함을 느껴요
그 어느 때보다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요.
내가 두 발로 설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지 않겠어요?
Beatles - Help!
Erik “레이븐, 나 네가 말하는 사랑을 믿기로 했어.”
“어째서? 그렇게 완강히 막아내며 나를 바보 취급했잖아.”
“엠마가 그랬어. 죽이 되었든 밥이 되었든 사랑은 존재한데.”
“엠마가 말하면 믿고 내가 말하면 안 믿는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나 사랑을 증명 받았거든”
“뭐?”
“나 남자친구가 생겼어”
“맙소사.”
“자, 이것 봐”
“....에르메스 가방 아냐?”
“맞아. 이게 바로 사랑의 증명이라는 거지.”
“이건 사랑이 아니야!”
“왜? 이것도 사랑이야. 장미꽃 한 송이도 사랑이고, 사랑한다는 작은 말 한마디도 사랑이고, 마련해주는 집한 체도 사랑이고. 에르메스 가방도 사랑이지. 네 말대로라면, 사랑의 존재는 어떤 모양을 하고 어떤 성질을 가져도 결국 중요한거 아냐?”
“그러면 너는 증오와 미움도 사랑이니?”
“무슨 소리니? 그 둘은 원래부터 사랑에 속했어.”
Charles 알렉스는 묻어가는 작은 관을 본다. 검은 타이가 이상하도록 답답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다. 곁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그러나 알렉스는 저것이 거짓임을 안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역겨울 뿐이다,) 찰스는 말하지 않았지만 학교의 모두는 알고 있다. 그녀의 가족들이 그를 죽인 것임을. 그녀의 명치를 맞고 즉사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그녀의 어머니는 큰아들밖에 모른다. 이곳에서 리틀 레이븐은 숨을 쉬었다. 리틀 레이븐은 부모를 무서워했다. 자신이 돌연변이인 것을 알면 그들은 수치스러워할 거라며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녀의 울음에 행크는 늘 그녀를 안아주고 달랬다. 션은 씩씩거리며 절대로 부모에게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찰스는 그녀를 가족들의 품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이것이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간지 3주 만에 따뜻했던 몸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 목사가 기도문을 외운다. 알렉스는 참지 못하고 셔츠의 첫 단추를 푼다. 찰스는 이곳에 오지 않고 알렉스를 보냈다. 그는 이곳에 알렉스를 보내며 ‘보기만하고와’하고 말했다. 그의 손에는 리틀 레이븐의 마지막 편지가 있었다.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이것은 찰스에게 너무 가혹하다.
Erik 19XX년 9월 20일 꿈에서 나는 찰스의 목을 조른다.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찰스의 목을 조른다. 가냘픈 목덜미는 손안으로 들어온다. 조금만 힘주면 그 목이 부러질 것 같아, 그의 목숨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차마 힘을 주지 못한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그가 잡아온다. 그의 손답지 않게 그것은 매우 차갑다. 죽어있던 그의 눈이 깨어진다. 그는 맑고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로 내가 보인다. 찰스의 메마른 입이 열린다.
‘에릭, 이건 너 때문이야.’
결국은 이것인가. 그대로 무너져 내려 울고 싶지만 무너져내릴 수도 없게 나는 굳어있다. 너에게 내 탓을 해달라고 수없이 외쳐 봐도. 결국 내 탓이라는 너의 한마디에 나는 부스러진다. (종이가 보기 흉하게 구겨져있다. 일부분은 찢어져있다. 에릭은 일기장을 던져버렸다.)
Charles 존경하는 찰스 교수님께
교수님, 저는 잘 살고 있어요. 편지 보내주신 것 읽고 너무 기뻤어요! 이곳은 먼 시골이라 답장이 늦게 도착할지 모르겠어요. 일찍이 보내주신 편지에 늦은 답장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전 가족들과 함께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랑 아빠랑 함께 지내는 건 그다지 즐겁진 않아요. 두 분은 저보다 오빠를 더 많이 좋아하세요. 특히 아빠는 저를 정말 싫어하세요. 이러니 하는 수 없이 제가 돌연변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모두들 저를 더욱 싫어할지 모르니까요. 짜증나고 슬프지만 어쩔 수 없죠.
저는 낮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일을 해요. 일이라고 해도 그렇게 힘든 건 아니에요. 그냥 소를 돌보는 일이에요. 이번에 제가 돌보는 소가 송아지를 낳았어요! 이름은 알렉으로 하기로 했어요. (비밀로 해주세요) ... 이미 교수님도 아시겠지만 전 알렉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어요! 알렉 선생님은 잘생기고 상냥하니까요! (절대 비밀이에요!) 물론 교수님도 정말 좋아요. 이렇게 좋아하는데 다신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와요. 교수님 정말 보고 싶어요. 이렇게 계속 편지를 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텍사스에 오실일이 있으시면 꼭 들려주세요. 그땐 잔소리 안하고 가만히 있을거에요. (정말로요!) 이만 줄일게요.
교수님의 제자 제인 그레인저 올림.
Erik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마음의 앙심을 드러내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맨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들까지 떠오른다.
-니체
Charles “예쁜 아가, 그 모양이 탐이 난다. 거부하면 폭력으로라도 너를 잡으리.”
“아버지, 아버지, 나를 꼭 안아주세요. 저 마왕이 너무 무서워요.”
공포에 떨며 숨 가쁜 아기. 가슴에 안고 말을 타며 달려간다. 품속에 도착하니,
아기는 이미 죽어있다.
슈베르트 <마왕> 中
Erik 닥터 쿠쟁이 죽었다.
Charles 19XX년 9월 30일 흐림 머릿속으로 보이는 제인의 모습은 처참했다. 제인은 그의 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 아이의 멍든 얼굴과 피 흘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우는 막내 동생을 달랜다며 손끝에서 피어나는 불로 꽃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아기동생은 손바닥을 치며 웃었지만, 뒤에서 지켜보던 그의 오라비는 웃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쌓여오던 의심과 공포는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내 아이는 그렇게 죽음의 구석으로 떨어져 영원히 보지 못하는 그 세계로. 에릭, 가끔 나는 후회한다.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걸까.
Erik 19XX년 9월 30일 닥터 쿠쟁은 미련했다. 그는 나를 신고하고 도망치려했다.(덕분에 기지가 발각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맞이한 것은 죽음뿐이다. 다시 모든게 원상태로 돌아왔다. 새로운 조력자를 찾아야한다. .……(무언가 쓰기 망설인 듯 점이 흔들려있다.) 어김없이 꿈에 그가 나왔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목을 꺾어버렸다. 힘없이 꺾이는 그 목을 보며 나는 웃었던가. 비참하다. 나는 꿈속에서 너를 죽이고, 너는 현실에서 나를 죽인다.
Charles 사랑하는 제자 제인에게
네가 보낸 편지를 보고 나는 정말 기뻤단다.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너무 기뻤어. 잘 지내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나도 잘 지내고 있단다. 뉴욕은 가을바람이 제법 크게 불고 있어. 감기에 걸릴까봐 다들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있지. 텍사스는 덥겠지? 건강 잘 챙기렴. 네가 안고 있는 고민들은 분명 지금의 너를 괴롭게 하겠지만 언젠가 더 이상 너를 괴롭게 하지 않을 거란다. 만약 너의 부모님이 혹은 너의 오빠가 너를 힘들게 한다면 그들을 용서하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네가 더 잘 알고, 또 많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그들을 위해 너는 조금의 희생을 해야할 거야. 물론 힘들겠지. 하지만 그 순간을 넘김으로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나는 네가 더 좋은 사람이 될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가 알렉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다. (하하하!) 내 능력을 쓰지 않아도 그건 너무 뻔 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어! 송아지 알렉을 꼭 보고 싶구나. 지금은 힘들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로 꼭 너를 만나러 갈게. 텍사스는 꼭 가보고 싶단다. 다시 못 볼일은 없어. 우리는 꼭 만날 거란다. 그러니 눈물 흘리지 마렴. 나를 만날 그날까지 씩씩하게 웃고 있는 너의 모습이 보고 싶다. 그때까지 건강해라. 아주 많이 사랑한다.
너의 잔소리가 그리운 찰스 교수가.
(제인 그레인저는 이 편지를 받기 전에 장례식을 치른다.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다.)
Erik 나를 자게 내버려두오. 조금 더……
그것은 잠자는 이에게 약속된 기나긴 전쟁 중의 휴전이라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달을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내 마음속은 그다지 어둡지 않게 될 거요
아 일시적인 죽음이여, 우리를 완성하는 아득함이여.
내 절정의 한도여, 아주 올바른 심오함이여,
내 모든 피의 혼돈이여, 또한 혈기의 순수함이여,
네 안에서는, 그 뿌리에서는 내 두려움조차 두려움이 아니구나.
내 다정한 주인 잠이여, 나를 꿈꾸게 하지 마오.
그리고 내 안에서 웃음과 눈물을 뒤섞어주오
나를 몽롱하게 놔두오.
내면의 이브가 적대적인 격정으로 내 옆구리에서 빠져나오지 않도록.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잠자는 남자
Charles “오늘 저녁도 안 먹은거야?”
“입맛이 없데. 뭐라도 좀 먹으라고 하니까 계속 웃기 만해.”
“제기랄...”
“찰스에겐 소중한 제자였잖아. 학교가 열리고 처음으로 닥쳐온 위기인 만큼 그에게는 큰 아픔일거야.”
“틀림없이 그 남자가 죽인거야. 장례식에서는 우는 척, 슬픈척하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 남자가 죽인 거라고!”
“어째서 찰스는 그를 신고하지 않는 거야? 세리브로로 그 상황을 읽었을 게 틀림없잖아.”
“....그 집에는 갓난아기가 있어.”
“그것 때문인 거야?? 말도 안 돼! 제인을 죽인 그 남자가 그 아이를 제대로 키울 리가 없잖아!! 게다가 혹시나 그 아이마저 돌연변이라면!”
“진정해, 션.”
“제기랄. 제기랄!!”
“.....찰스가 기다려야 하는 거라면.”
“.............”
“.............”
“우리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야.”
Erik 19XX년 10월 8일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다.
Charles 친애하는 찰스에게
찰스, 제임스에게 들었다. 네가 상심하고 있다는 것을. 이 편지가 너에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이든 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지금 아프리카에 있다. 이곳에는 굶주린 아이들이 아주 많아. 저번 내가 돌보던 아이는 부모에게 방치된 채로 아사했다. 난 그 아이가 죽은 줄도 몰랐어. 그게 벌써 2개월 전 이야기다. 어제 무덤가를 다녀왔는데 그 척박한 땅에, 그 무덤에 꽃이 피었더라. 새하얀 꽃망울에 난 울 수밖에 없었다. 찰스, 삶과 죽음이 바람에 휘날려도 그 가운데 희망의 존재함을 알려주던 것은 너란 것을 난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 너에게 세상물정 모른다고 탓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탓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네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않길 기도한다. 너에게 신의 사랑과 은총이 있기를 기도하며. 이만 줄인다.
Ps. 내 아내 줄리가 널 매우 보고 싶어 해. 다음해 여름에 뉴욕에 들릴 성 싶다. 그때 꼭 너의 얼굴을 보았으면 좋겠어. 그때까지 건강해야해.
너의 친구 포스터 맥홀이
Erik 19XX년 10월 10일 모든 게 쉽지 않다. 별 볼일 없을 것 같았던 쿠쟁박사의 빈자리가 꽤나 크게 느껴져 곤욕스럽다. 엠마가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에서 근무하는 죠수아 박사에 대해서 말해왔다. 그녀의 말로는 꽤나 영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고려해봐야 할 문제다.
더 이상 찰스의 꿈은 꾸지 않는다. 두려운 마음으로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뜰 때면 아침이 되어있다.
Charles 베드로는 로마의 감옥을 탈출해 아피아 가도를 지나가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스도를 본 베드로는 외쳤다.
“Domine,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리스도가 대답했다.
“Venio iterum crucifigi"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
Erik 에릭은 자신의 방에 앉아있다. 창문하나 없는 공간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눈을 감는다. 어둠이 보인다. 눈을 뜬다. 역시나 어둠이다.
Charles 19XX년 10월 14일 맑음 마지막 일기가 9월이었다. 벌써 2주가 흐른 건가. 거식증 덕분에 몸이 많이 말랐다. 사람은 이토록 한순간에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였던가. 나는 한동안 무력함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무엇인가 행함으로 존재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아무것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존재자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떠나간 에릭이 어른거렸다. 눈을 감으면 그의 푸른 눈이 ‘그것 봐. 우린 그들과 함께하지 못해.’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에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나는 그 손을 잡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리안은? 그러나 조지는? 그러나 헤밀은? 그러나 테리는? 벨은? 션은? 알렉스는? 행크는? 내 아이들은?
Erik 19XX년 10월 15일 어이없다. 꿈속에 그 때문에 잠 못 이루던 날들이 어제건만. 오늘은 꿈 속, 그가 사라져 잠 못 이룬다.
Charles 세상만사에 지쳐서 평온한 죽음을 바라며 흐느끼네.
순수한 믿음이 비참하게 거짓 맹세를 하며,
처녀성이 무지막하게 매춘당하고,
쩔뚝임의 힘이 다친 자를 지배하며,
예술이 권력에게 혀를 묶이고.
선한 포로가 부도덕한 수령을 돌보네.
세상만사에 지쳐서 나는 그저 사라질 작정이었다지.
다만, 내가 죽으면,
내 사랑을 홀로 내버려두게 되어서.
William Shakespeare, Sonnet LXVI
Erik 아자젤과 이야기하던 에릭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아자젤이 깜짝 놀라 그를 받아 올렸다. 에릭의 얼굴이 파리하다. 레이븐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땀 흘리는 이마를 닦아 내렸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흔들린다. 에릭이 어떤 말을 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아자젤이 그를 방에 데려놓는 동안 레이븐은 땀을 닦을 수건을 준비한다. 곁에 있던 엠마가 수면제를 가져가라고 말한다. 엠마가 알고 있듯이 레이븐 또한 알고 있다. 그가 한동안 잠 이루지 못했던 것을. 그러나 에릭은 한사코 레이븐의 수면제를 거절한다. 결국 레이븐의 손을 쳐내며 그는 불같이 화를 낸다. 레이븐은 씩씩 숨을 몰아쉬는 에릭을 가만 보다 결국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바닥에는 하얗고 작은 알약 두개가 뒹굴고 있다. 에릭은 침대에 누우며 시크를 끌어다 얼굴에 파묻는다. 꿈속에서 조차 그는 오지 않는다. 에릭은 그의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찰스를 보았던 그때를 기억한다. 자신은 찰스의 목을 부러뜨리고 있었다. 에릭은 소리 없이 흐느낀다.
Charles 벨은 수업을 진행한다. 이번 수업은 문학이다. 모두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배울 것이다. 학생들에게 모두 이 책을 읽도록 시켰다. 벨은 책을 들며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때 마리안이 손을 들며 벨에게 물어본다. '선생님, 찰스 교수님은 언제 오세요?' 벨은 말하기를 망설인다. 이어서 조지가 물어본다. '교수님은 더 이상 우릴 가르치지 않으실 건가요?' 벨은 아니야 하고 말하지만 그녀는 망설여진다. 그녀조차 찰스를 얼마간 보지 못했다. 가끔씩 마주하는 얼굴은 그가 슬픔으로 무너져 내려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게 한다. 그녀는 아이들을 달래며 수업을 시작하려한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아이들이 뒤를 돌아본다. 문이 열린다.
"이런, 이상하네, 내 수업 시간인걸로 아는데."
찰스가 문을 닫으면서 말한다. 찰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비록 이전에 비해 그의 마른얼굴과 몸이 여실하게 느껴지나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벨은 찰스를 보며 놀라지만 이내 그녀 또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럼, 다음 시간에 보자꾸나.'하며 돌아선다. 그녀가 찰스를 향해 활짝 웃는다. 찰스도 활짝 웃으며 그녀를 지나쳐 강단으로 나온다.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찰스는 아이들의 책상위로 놓여있는 <앵무새 죽이기>를 본다.
"<앵무새 죽이기>. 다들 이 책을 읽었겠지? 좋아. 조지.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해서 말해보겠니?"
"....저요?"
"그래, 내가 영국 조지 6세를 부른 건 아니지 않겠니?"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주인공 스카웃은....교수님이랑 비슷해요."
"오호라-"
찰스의 얼굴에서 호기심과 감탄이 떠돈다. 어떤 점이? 찰스가 묻는다.
"황당한 점이요."
교실에는 찰스와 아이들의 웃음이 가득해진다.
Erik 19XX년 10월 20일 네가 죽었을 리 없겠지. 내 꿈속에서 죽을 지언즉 네가 죽었을 리 없겠지. 억척스럽고 질긴 네가 그렇게 사라졌을 리가 없겠지. 그러나 나는 너를 한번만 보면 된다. 네가 살아있는지를. 단 한번만 네가 살아있는 것을 보면 된다. 그리고 나면, 이 지랄 같은 고통 속에서 나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단 한번만, 단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Charles 19XX년 10월 24일 맑음 가을바람이 많이 차다. 아니 이제 거의 겨울이라도 해도 될 정도다. 뉴욕은 유독도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도시다. 그러나 그만큼 가을의 밤하늘은 아름답다. 드디어 오리온이 뜨기 시작한다. 행크는 저번 일을 기억하는지 션에게 '저게 오리온이야'하고 알려준다. 션은 '저게 무슨 오리온이야!?!? 저게 어딜 봐서 사람 모양이냐고!!'하고 흥분한다. 충분히 이해하는 바다. 아이들과 밤하늘을 구경하며 천체 망원경으로 별을 보았다. 달의 표면이 그대로 보인다. 마리안은 정말 신기해하다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중력을 사용하는 그녀의 능력을 활용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천문학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 더 나아질 것이다.
Plus. 다음 주에 다 같이 링컨 기념관에 가기로 했다.(션의 아이디어다) 나에겐 추억이 있는 곳이라 더욱 각별하다.
Erik 에릭은 폴란드로 향한다고 말했다. 레이븐은 그의 몸이 걱정됐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이븐은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옷가지와 여권을 챙긴다. 레이븐은 탁자에 있던 그의 비행기 표를 본다. 11월 2일.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오늘은 10월 26일이다) 어째서 이렇게 그가 서둘러 짐을 싸는지 모를 노릇이다. 레이븐이 입을 열기 전에 에릭은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레이븐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에게 비행기 표를 내민다. 그는 저만치 걸어가 버린다. 언제 온 건지 그의 등을 바라보던 엠마가 혀를 찬다.
Charles "이 멍청아!! 하필이면 왜 링컨 기념관이야!?"
"그래!! 많고 많은 기념관 중에서 하필이면 그곳이냐고!!!"
"너...너희들 왜 화를 내고 그래....너....너희들 링컨 싫어해?...링컨 조..좋은 사람인데..."
"아오 답답해!!!!"
"션, 들어봐. 링컨 기념관은 에릭이랑 찰스가 바람 쐬러 다녔던 곳이란 말이야. 찰스에게 추억은 있겠지만 결코 기분 좋기 만한 추억은 아닐 거 아니야. 나는 에릭과 찰스가 갈라선 뒤로 한 번도 찰스가 그곳에 간것을 본적이 없단 말이야. 그게 뭘 의미하겠어? 응? 뭘 의미하겠냐고? 응? 응?"
"...행...행크야 진정해봐."
"진정이고 나발이고!! 분위기 좀 살았다 했더니 거기다 대놓고 '우리 링컨 기념관 가요오! 와아아 신난다아!!' 아 진짜 빡쳐!!"
"으악! 때리지 마!! 행크!!!살려줘!"
"션, 나도 오늘은 막아줄 수가 없겠다."
"으아악!!!!"
Erik Nothing
Charles 19XX년 10월 28일 맑음 션의 얼굴에 멍이 들었다. 걱정되어서 괜찮냐고 물으니 괜찮다며 쓸쓸하게 걸어가 버렸다. 깡패를 만난게 아닐까. 알렉스는 션과 퍽 친하니 잘 알고 있을 거다. 한번 물어봐야겠다. 새로운 교사를 맞이해야겠다며 벨 선생님이 부탁해왔다. 나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행크가 잘 해주고 있지만, 인문학 쪽의 힘이 부족하다. (행크나 나나 이과계열인지라 인문계열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우리 아이들은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한다. 교육청으로 서류를 내보내야겠다. 아, 그리고 소풍 날짜가 잡혔다. 다들 들떠있다. 벤자민은 링컨 기념관이 처음이라고 한다. (벤자민은 로스 앤젤리스에서 왔다.) 나도 마찬가지로 기대된다.
Erik Nothing
Charles 19XX년 10월 29일 비바람 날씨가 거칠어서 불안하다. 아이들 몇몇이 감기에 걸렸다. 소풍을 좀 더 미뤄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가 벤자민이 엉엉 우는 바람에 참 난감해졌다.)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Erik Nothing
Charles 19XX년 10월 31일 맑음 결국 내일 소풍을 가기로 했다. 아이들의 건강이 놀랍게 호전된 탓이다. 정말 대단하다. 소풍이라는 동기부여는 감기까지 고치는 것인가. 웬만한 의사보다 낫다.
Erik 19XX년 11월 1일 그는 살아있다.
Charles 19XX년 11월 1일 맑음 결국 우리는.
Erik 19XX년 11월 2일 오늘은 잠들 수 있다.
+
"마리안, 교수님 방에는 마음대로 들어가면 안된단 말이야!"
"잠깐 테이프만 빌려가는 거잖아."
"테이프는 교실에도 있잖아! 너 괜히 교수님 방이 궁금해서 이러는 거지!?"
"아 조지, 너 진짜 남자 맞냐? 고추 때버린다."
"!! ...맙소사! 넌 여자애가 어쩜 입이 그렇게 거치냐!!"
"좀 닥치고 따라와"
마리안은 이전부터 찰스의 방이 궁금했다. 딱히 찰스가 아이들에게 그의 방을 금지했다거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야박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찰스를 제외한 교사들은, 교장선생님의 방에는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며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노크를 하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아이들은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르고 궁금증이 쌓여가니, 찰스의 방이 마치 비밀의 방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마리안은 찰스가 출장을 간 틈에 그의 방을 탐험하기로 했다. 겁쟁이 조지는 따라올 필요 없었는데도 그녀를 따라와 귀찮게 굴었다. 그녀는 찰스의 방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와- 하며 조지가 탄성을 질렀다.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있는 방이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나무 책상과, 커다란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들에 쌓여 아이들은 탄성을 질렀다. 아주 멋진 방이었다. 교수님은 만날 이 방에 계신 걸까. 마리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는 책상 위에 있던 사탕을 발견했는지 '왓!'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 멍청한 녀석.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마리안은 조지의 뒤통수라도 한대 때려주려고 걸음을 옮기다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목적도 잃은 체로 오도카니 자리에 섰다.
"멋지다!!"
"우와. 이게 뭐야."
"멍청아 그림이잖아."
"나도 그림인건 알거든?"
"복도에 걸려있는 이상한 그림이랑 같이 사셨다는 게 이건가 봐"
"동쪽하고 서쪽 복도에 걸린 그 이상한 그림하고? 세상에나."
"차라리 거실 거면 이 그림을 복도에 거시지."
"그러니까 훨씬 멋진데 말이야."
아이들은 그림을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우와우와 탄성을 질렀다. 마리안은 그림을 더욱 가까이서 보고 싶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발자국을 옮기자마자 누군가 문을 활짝 열었다. 알렉스였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으악 소리를 지르며 다른 쪽 문으로 쏙 빠져나갔다.
"이 녀석들!!!! 너희들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아이들을 쫒아가며 알렉스가 크게 소리 질렀다. 복도를 크게 울리는 동안 열려있던 문은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려 끼익-하고 닫혔다. 텅 빈 찰스의 방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Two Men Contemplating The Moon, 1819, Print by Caspar David Friedrich
나를 자게 내버려두오. 조금 더……
그것은 잠자는 이에게 약속된 기나긴 전쟁 중의 휴전이라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달을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내 마음속은 그다지 어둡지 않게 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