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바깥으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레베카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에 잠긴 자신의 얼굴만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다시금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슬프고 불쌍한 소리였다. 선반 아래에서 구겨진 양철 그릇을 꺼냈다. 필립이 남긴 음식을 모조리 담고 우산을 들었을 때, 시야로 빛 바란 듯 창백한 손등이 들어왔다. ‘내가-’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의도엔 결코 모난 것 하나 없음을 알았다. 만약 모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 그자체일 뿐일 터였다.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산과 양철 그릇을 내밀었다. 남자가 나가고 첩자마냥 두 손을 모아 창문에 얼굴을 붙였다.
사내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빗물의 사이로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짖는 소리가 화답했다. 잠시 기다리던 남자는 걸음을 옮겨 어둠으로 들어섰다. 레베카는 정신없이 우산을 찾았다. 구멍 뚫린 우산을 바꿀 생각도 하지 않고 남자를 불렀다. 커다란 등이 어둠 속에서 오똑 서있었다. ‘밤바다는 위험해요. 언제 끌려들어갈지 몰라요.’ 꾸짖듯 말했으나 사내는 파도와 빗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여 어둠에 녹아드는 장면을 가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짭조름한 냄새에 코를 씰룩이며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바다로 들어갔어.’ ‘네?’ ‘개가’ ‘네?’ ‘개가 바다로 들어갔어.’
남자는 어둔 바다에서 시선조차 때지 않고서 물었다.
“왜 그랬을까.”
둘.
그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가죽 장갑으로 묻어나온 핏물에는 진득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그것이 사람의 살점이라는 것을 깨달은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오물들을 닦아내며 위액을 쏟아내던 때가 있었다. 역겨움에 몸서리치면서 머리로 몰리는 압력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었던 적 있었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위액은 코팅된 위벽을 타고 제 할 일을 할 테고, 각막은 건조한 겨울바람에 연신 눈꺼풀을 잡아당기고 있을 뿐이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코트 안으로 리볼버를 숨겼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마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끝이 구겨진 기차표 하나가 나왔다. 끝을 잡아 펴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타박타박 구두코로 진득 녹아내린 눈이 달라붙었다. 골목의 끝을 지나자 저 갈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괜히 코트를 털어내며 벽에 붙어 있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길지 않은 신호음 끝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탁합니다.’ 그 한마디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꺼칠한 손끝을 매만지고 있을 즈음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기차 시간이 지나버렸어.”
셋.
이 손님은 많이 먹지 않는다. 레베카가 자신 있어 했던 호박 파이도 조금 먹다 말뿐 연거푸 차만 마셔대고 있었다. 기분이 상해 남은 파이를 떠먹어 보았다. 짠가. 감칠맛을 내려고 시트 반죽에 소금을 넣었는데 과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라면 세 조각을 뚝딱 퍼먹고도 자신의 것마저 홀랑 먹어버릴 텐데. 괜히 포크로 표면을 쿡쿡 찌르고 있자니 남자가 손을 흔들어 그녀를 불렀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짙은 구름 틈 태양광에 서늘히 빛났다.
“더 드려요?”
“체크아웃을 더 미룰 수 있을까?”
“비수기니까요.”
‘삼일 더’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에서 돌아온 필립이 바리바리 짐을 들고 들어섰다. 짐을 덜어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일 더 계시겠데요.’ 그 말에 의아한 듯 힐끔 그를 보았다.
“별일이군.”
그 말이 맞았다. 손님은 남자 하나뿐이었다. 원래 이 주변 마땅한 볼거리가 없다보니 많은 손님들이 찾는 편은 아니었다. 여름 즈음, 가족단위의 단골들이나 친척들이 찾아오곤 했지만 겨울은 영업을 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재작년부터는 레베카 혼자서 카운터를 지키고 필립이 배를 타기 시작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은 하나뿐이었고 -예약된 손님까지 둘이지만- 손 많이 가도록 까다롭지도 예민하지도 않았다. 조금 이상해보이긴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장부에 날짜를 변경하며 손님의 이름을 읽었다. 너무 평범한 이름이라 어울리지 않았다. 속닥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니 필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넷.
짐은 빌의 집에서 자지 않는다. 시트를 쓸어내리던 맨발이 떨어뜨린 초침들을 떠올려 보자면 조금은 서러운 이야기였다.
깊은 새벽, 로맨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도록 잘 개어진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잠든 척 하는 연인의 이마나 뺨에 키스하는 일은 없었다. 문이 닫히면 빌은 비스듬히 일어나 여유도 없는 문틈을 바라보았다. 영원토록 빛조차 세어들지 않을 것 같았다.
포기는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서커스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던 해였다. 빌은 가까운 곳에 집을 구했다. 여유가 있을 때면 식사를 거르고서라도 집을 찾았다.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짐이 자고 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늦더라도 그는 돌아갔다.
‘늦었잖아.’ 한번은 자고가라는 말을 돌려 던졌다. ‘늦었지.’ 짐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웃었다. 나중에 보자며 문을 닫았다. 빌은 황당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옆자리는 차차 식어가기 시작했고 벌거벗은 몸에선 닭살이 일기 시작했다. 마음은 점차 짜증으로 변해 스카치를 찾았다. 차가운 병목을 잡으며 어째서 그가 자고 가지 않는 것일까 생각했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럴 리 없다. 학부생 시절만 하더라도 풀밭에 누워 쪽잠을 자곤 했던 그였다. 와이프라도 감춰두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미치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냔 물음이 되돌아 왔다. 그 물음 뒤에 있던 그림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가 자고 가길 바라는 거야? 왜?’ 빌은 침묵했다.
다섯.
“항구에서 싸움이 났더구나.”
불쑥 꺼내어진 말에 레베카가 고개를 들었다.
“날씨가 나빠서 결국은 항구로 돌아왔는데 제레미가 시뻘겋게 취해서 젊은 사람 멱살을 잡고 있더라고.”
“빵집의 제레미 아저씨요?”
“그래. 실비아랑 그 젊은 양반이 눈이 맞았네 뭐네.”
“실비아 아줌마요? 엄한 의심 아니에요?”
눈을 흘기며 찻장에 그릇을 넣었다. 그 순간에 문이 열렸다. 중년의 남자였다. 코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차분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레베카는 멀뚱멀뚱 남자를 바라보았다. 장부를 뒤지며 이름을 확인하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비가 이렇게 옴에도 불구하고, 저 끝에서 바다를 산책하고 있을 남자. 생김새나 체형 모든 것이 다른데도 마치 이 사람은 그 남자의 신체 일부분을 떼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필립이 유일한 손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동행분 맞으시죠? 그렇게 묻자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 어울리지 않게 너무 흔한 이름이죠.’ 웃는 모습이 순한 동물 같았다. 방을 알려주겠다 말했으나 남자는 여기서 기다리겠다며 창가에 앉았다. 레베카는 차를 끓여 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몰라. 주변 사람들이 뜯어 말리는 것까지만 보고 들어왔다.”
“아줌마가 얼마나 점잖고 좋은 사람인데요. 아빠도 알잖아요. 제레미 아저씨도 그렇게 애처가처럼 굴더니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아줌마 개쪽을 줘요?”
필립은 손님을 힐끔 보았다. 그리곤 조용한 목소리로 ‘사랑과 신뢰는 다르잖니.’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레베카가 발끈 하면서 그게 어떻게 다르냐고 말했다. 커다란 목소리에 필립이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본인이 꺼낸 이야기이긴 했지만 딸내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달갑지는 않은 듯싶었다.
“믿기 어려워도 사랑한다면 믿어야죠!”
손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레베카가 파이를 건네며 물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파이를 따라 레베카의 얼굴까지 올라갔다. 아, 그 단마디 이후에도 순한 동물같이 웃었다.
“그렇군요.”
여섯.
기차 안은 한적했다. 늦은 시간이여서 그런지 신문을 넘기거나 떠드는 소리 대신에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몇 칸쯤 떨어진 좌석에 젊은 남자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꼬꾸라진 모습이 분명한데도 선물 꾸러미를 쥐고 있는 손은 단단해 보였다. 짐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숨결에 따라 부풀었다 가라앉는 등을 보자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고 있는 얼굴, 아무런 세계도 담지 않은 표정.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 보기엔 좋지 않을 웃음일게 뻔했다.
일곱.
“기다리는 거라면 이력이 났어.”
“좋겠군.”
“농담이 나와?”
서늘한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엄한 레베카가 움찔거린 것에 비해 비난을 받은 남자의 얼굴은 오히려 편해 보였다. 오랜 기다림이긴 했다. 두 사람 치의 예약을 했던 것이 삼일 전이었다. 중년 남자의 여행인 만큼 비밀스런 여인이 나타날 거라 예상했기에, 등장한 동년배 남자를 보며 레베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 보다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태도였다. 차분하기에 그지없다 느꼈던 남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고 뒤늦게 나타난 남자는 그저 웃으며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었다. 저러다 싸우는게 아닐까 싶었으나, 대화가 툭 끊길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일말의 불편함 없이 잔잔했다. 마치 좋은 날씨의 밤바다와도 같았다. 넘실거리는 고요함 끝에서 담담히 서로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항구로 나가볼까? 오다 봤는데 괜찮은 펍이 하나 있더군.’
뜬금없는 권유에 맞은편 남자의 눈이 삐쭉해졌다. 그것도 잠시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걸쳐 놓았던 외투를 챙겨 입었다. 잠시 외출하겠다는 말을 남겨두고 두 남자는 문 밖으로 나섰다. 희한한 손님들이라고 맞장구쳐줄 부친이 없어 혼자 중얼거렸다. 테이블을 치우기 위해 움직였다. 한 사람은 그렇다지만 나머지 한 사람의 호박 파이마저 싹 비워져 있었다. 허. 레베카가 헛웃음을 지었다.
여덟.
빌에게는 많은 연인들이 있었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어린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떤 의미로든 어린애들은 아니었다. 빌이 그들의 집에 찾아갈 때도 있었고 그들이 빌의 집에 올 때도 있었다. 한번은 자주 가는 바의 바텐더와 관계를 맺었었다. 그는 짐과도 알고 있는 사이였다. ‘당신이 그 사람하고 자는 사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 있잖아. 키 크고 순한 동물 같이 웃는 사람.’ 순한 동물. 빌은 그 말을 곱씹으며 웃었었다. ‘자는 사이 맞아.’ 빌의 말에 바텐더는 파란 눈을 땡글하게 뜨다가 ‘뭐. 상관없겠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가 맘에 들어?’
‘응’
순순히 흘러나온 대답에 빌이 한쪽 눈썹을 세웠다. 바텐더는 대수롭잖게 속옷을 입었다. 그럴 줄 알았단 반응이어서 약이 올랐다.
‘왜?’
‘속앓이 할 것 같은 유형이라서.’
‘뭐?’
‘순애(殉愛) 몰라?’
‘뭐?’
‘살면서 그런 사랑 누구나 한 번씩은 받고 싶어 하잖아? 나만 바라볼 것 같은 사람.’ 툭툭 던져지는 말에 빌의 표정이 험하게 변했다. 테크닉이 좋을 것 같다느니, 얼굴이 마음에 든다느니 이런 대답일거라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오니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감당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연속 옷을 챙겨 입으며 ‘언뜻 보기에는 무뚝뚝해 보여도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으면 속이 보이지. 그런 사람 좋잖아. 사랑에 있어서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 하고 떠들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던 빌이 날선 목소리로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는데?’ 하고 물었다. 그 말에 단추를 잠그던 그가 어이없단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죽으면?’
당최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신한테 칼 맞아 죽으라고? 그 사람이 남이랑 말만 섞을라치면 눈깔이 이렇게 부리부리해져서 말이야. 있을 때 잘해. 그런 사람들이 등 돌리면 정말 쳐다도 안보니까.’
‘뭐?’
조금은 높아진 빌의 목소리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갈게- 하며 가방을 챙겨 나갔다.
아홉.
짐이 없는 동안에도 몇 번 항구로 나왔었다.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둘러보니 괜찮은 가게와 물건들이 종종 보였다. 짐은 낚시 도구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깎아 만든 낚싯대를 놓고서 상인과 흥정하고 있었다. 빌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모양새임에도 불구하고 짐은 매우 고심하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짐을 훑어보는 상인의 눈에서 귀찮음이 그대로 읽혔다. 빌은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낮에만 해도 기분 나쁜 구름떼들이 설쳐댔는데 밤이 되니 총총 별이 떠있었다. 살갗을 훑는 차고 짭짤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잠깐 이것 좀 보라며 부르는 짐의 손짓에 ‘난 아무 것도 몰라.’하고 대답하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괜찮지 않을까. 만약 은퇴하고 나서 이런 곳으로 이사를 온다면. 낮에는 낚시를 하고 밤에는 같이 잠을 잘 수 있다면. 집은 한 채로 침실은 한방으로. 잠들어야 하는 시간, 서로가 각각 돌아갈 길 없이 한곳에서 머무를 수 있다면. 불안도 의심도 없이.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열.
간 줄만 알았던 어린 얼굴이 빼꼼 문을 열었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고 있던 빌이 ‘뭐야’ 으르렁 거리며 말을 뱉었다. 대수롭잖게 깜빡한 게 있다며 머플러를 챙겼다. 총총 거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뒤돌아 보았다.
‘왜 미련이 생기는 줄 알아?’
‘몰라.’
‘기회가 있어서 그래.’
저런 성격이었나. 맹하게 생긴 탓에 성격도 맹한 줄 알았더니. 빌이 재를 털면서 창문을 열었다. ‘빨리 가.’ 그 말에 바텐더는 걸음을 돌려 문을 닫았다.
통통 계단을 내려왔다.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머플러 챙겼어요?’
그가 다정히 물었다.
‘일부러 두고 가려 했던 거였어요.’
‘왜요?
‘나중에 건네어 받을 때에 당신 얼굴이 보고 싶었거든요.’
‘빌이 몰래 줄 수도 있잖아요?’
‘안 그럴걸요. 보란 듯이 주겠죠.’
‘왜요?’
‘확인 받고 싶으니까.’
‘뭘?’
바텐더가 웃었다. 짐도 웃었다. 데려다 줄까요? 짐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린애 아니에요.’ 그 말에 짐이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바텐더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안녕. 그가 말했다. 이미 등을 돌린 실루엣에게 짐도 인사했다.
‘안녕’
열하나.
늦은 시간이었다. 푸른빛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긴 했지만 어둡기엔 매한가지였다. 레베카는 세수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안으로 들어서 냉장고 빛에 의지해 음식을 꺼내고 있는데 창문으로 히끄무리한 형체가 보였다. 테이블 위의 작은 전등을 켰다.
“깨셨어요?”
첫 손님이었다. 볶은 밀가루색 가디건을 걸치고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 서있던 모양새가 완연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는 말에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눈을 내리 깔았다. 전등 빛으로 가지런한 속눈썹이 빛났다. 그 모습이 애처로와 차 한 잔 드릴까요?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분은요?”
물을 올리며 물었다. ‘주무시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대답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하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예민한 손님. 예민한 손님. 속으로 중얼중얼 반복하며 찻잎을 꺼냈다.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자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 말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아픈 사람 같았다. 서서히 밀려드는 푸른빛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을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금세 나빠지곤 하지만 맑은 아침은 흔히 맞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자와 나란히 서서 새벽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 끝에서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창문의 레베카와 그를 발견한 모양인지 손을 흔들었다. 레베카가 뻘쭘 손을 드는 동안 곁에 있던 남자는 등을 돌려 창문에서 떨어졌다. 어? 하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돌려진 등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열둘.
‘가끔. 여기 목 끝까지 모든 것이 병들어 있다고 느껴. 내 안을 열어보면 멍들어 문드러진 것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아. 썩은 내 나는 덩어리들이 후드득 떨어지지만 나는 그것들을 주워 담을 수가 없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난 텅 빈 상태로 살아야해. 영원히. 내 안을 이렇게 비우고서. 텅텅 빈 채로. 영원히.’
‘취하니까 귀엽네.’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어?’
‘더 줄까요? 스카치?’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런 삶을 살 바에는’
‘여기요. 더 마셔요. 오늘 각 잡고 구경 좀 해보게.’
‘죽는 게 나은데. 죽는 게 나은데…’
‘그래. 차라리 죽지 그래. 텅 빈 채로 사는 바에 죽는 게 낫지.’
‘그래도 못 죽어.’
‘왜?’
‘기회 때문에.’
열셋.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흩어지는 빛이 가득가득 퍼졌다. 세상의 모든 빛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풍경에 레베카는 숨 가쁜 한숨을 뱉어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생을 보낸 곳이었지만 바다가 주는 아름다움은 지겹지 않았다. 가끔은 이곳을 벗어나 런던으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이 풍경을 떠올리면 ‘그래도’하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가만히 서서 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홀로 신문을 읽던 남자가 곁에 섰다. 첫 번째 손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요?”
레베카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빛이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죠.”
“가령?”
“내 안에 있는 것들.”
그 말에 레베카는 킁-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현실을 보지 않는 사람들의 변명이다. 마음을 읽은 모양인지 그가 웃었다. 정말인데. 레베카는 아무렴 어떠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안에 뭐가 있던가요?”
“아직 들여다보는 중이라.”
“잘 안보이나 봐요?”
“사람이라는 게 희한하죠.”
자기 마음에 있는 것도 볼 수가 없으니. 레베카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모든 표정을 버리고서 서있었다.
열넷.
짐 프리도가 서른 살을 넘어서던 때였다. 평소에 가지고 싶다고 난리를 쳤던 만년필을 손에 넣었다. 물량도 없을뿐더러 몇 배를 얹어주겠다고 말해도 파는 이들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만년필의 바디와 펜촉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오래된 카탈로그는 하도 들여다보아 너덜너덜해졌다. 손때가 그득한 카탈로그를 집게손으로 들어 올리며 빌 헤이든은 웃었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나?’ 야근으로 인한 피곤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죽을 만큼.’ 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죽을 만큼 가지고 싶었던 만년필이 우연찮게 손아귀로 들어왔다. 몇 십 배는 얹어줘야 할 거라 판단했던 것과 달리 정가에 가까운 가격이었고 갓 만들어 졌다 해도 믿을 만큼 완벽했다.
그러나 짐 프리도의 마음은 식어 내렸다. 만년필을 들어 올리는 순간부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애타던 마음은 쪼그라들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손아귀에 들어오니 아무 상관없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물건도 아니고 비싸긴 해도 아주 터무니없는 가격도 아닌데. 손가락으로 펜을 굴리다가 도로 나무 상자 안에 넣었다.
마음이란 참으로 간교하다. 머리와 가슴에 소악마를 두고 산다는 것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닌 듯 했다. 비참할 정도로 식어 내린 마음을 두고서, 차라리 가지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변태 같은 생각이지 몰라도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차라리 가지지 못하면. 영원히 가지지 못하면. 동전의 양면 중 어떤 면이 덜 불행할까.
열다섯.
짐은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빌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만지지 말라는 차가운 일갈에 웃으며 팔뚝을 쓸어내렸다.
“나는 물어보지 않을 거야.”
빌이 말했다. 짐은 대답 대신에 팔뚝에 쪼는 키스를 하곤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팔목이 잡혔다. 어둠을 투과하는 두 사람의 시선은 담담하고 평온했다. 날이 선 말투와 달리 빌은 뭉게진 눈동자를 어른어른 빛내고 있었다. 짐은 이 눈을 오랫동안 보아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손톱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되던 시절을 지나, 누구든 좋으니 이 텅 빈 마음을 채워 그를 잊게 해 달라 고함 지르던 때까지. 끝없이 상처 입으면서 그가 상처 입기를 바래왔다. 하지만 그가 상처 입는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그가 상처받음으로 자신 또한 상처 받을 텐데. 알고 있었다. 이 순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버티는 것만이 선택된 행로였다.
같이 나갈까? 날씨가 좋거든. 빌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얄미운 입술을 향해 덤벼들었다. 빌이 물러나 가디건을 챙기는 동안 짐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닦았다. 얼얼했다.
열여섯.
빌은 짐과의 첫 관계를 기억하고 있었다. 둘 다 멍청하기에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몸을 어찌 움직여야 할지 모르는 짐을 휘두르며 비웃고 있었지만 사실 자신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남자는 처음이었다. 방법이야 알고 있다지만, 알고만 있다 한들 제대로 할 줄을 모르니 피를 본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나마 성공했다고 표현할만한 때는 네 번째 시도였다. -첫 번째 시도에서 3개월가량 떨어진 시기기도 했다.- 평소 여자들에게 그랬듯 사납게 덤벼들던 빌을 누르고 –당연히 합의하에- 짐이 천천히 애무를 이어나갔다.
앞선 행위 때보다 빌은 쉽게 흥분했다. 빌이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짐이 모든 것을 주도했고 둘 모두 쾌락을 느꼈다. 짐은 빌의 목욕을 돕는 것부터 시트 가는 것까지 해결했다. 짐의 다정한 손길에 빌은 화를 냈다. 처음이라며! 난데없는 버럭질에 순한 얼굴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바보 같은 모습에 빌은 좀 더 그를 몰아 붙였었다. 의심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대놓고서 의심을 토로하고, 속에 있는 것들을 내놓으라 윽박지를 수 있었다. 그렇게 화를 내면, 짐은 난처하게 웃으면서 진실을 말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많은 것들이 뒤틀렸다. 빌은 윽박지르며 진실을 토로하게 할 수도 없었고, 짐은 능숙하게 웃기만 할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침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에 발을 담근 이상 뭍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맨발로 허우적거리며 점점 깊어지는 차가움을 감당해야했다. 부러 물어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물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깊은 밤, 자리를 비우는 이유. 서로 넋을 놓고 새벽을 보낼 수 없는 이유. 긴긴 시간 런던을 비우며 전화 한통, 엽서 한통 보내지 않는 이유, 암묵을 강요하는 혀, 침묵하는 선량한 키스, 채찍질보다 고통스런 고독의 매만짐. 모든 것은 애틋한 행위로부터. 그러나 모든 것은 대답 없는 침묵의 끝으로.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었음에도.
“바람이 차가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좀 더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오지 그랬나. 이 한겨울에 가디건 하나라니.”
따로 있었음에도.
“짐,”
빌의 부름에 짐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빌은 괜히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자기 전에 마셨던 필립의 브랜디 때문인가, 서러움에 손끝이 저렸다. 이건 자네의 복수인가? 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아 주고 평평한 곳에 앉히는 손가락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짐은 빌의 곁에 앉으며 바람에 휩쓸리는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오래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듯 했다. 빌. 짐이 불렀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자넨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 거야.”
그래, 차라리 죽지 그래. 언제적 들었던 청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열일곱.
확실하다. 이번 손님들은 잠이 없다. 그들은 레베카가 일어나는 시간에 앞서 해안을 걷거나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달라며 깨우지 않는 것이 감지덕지할 지경이었다. 문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물을 올렸다. 춥지도 않은지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새벽빛에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이 영 아니다 싶었다. 요새 날씨가 좋드니만. 쯧쯧 혀를 차며 찻잎을 꺼냈다. 김이 이는 컵을 내미니 보지도 않고 손잡이를 잡았다.
“다른 한분은요? 같이 산책하신 거 아니에요?”
남자는 말이 없었다. 식어가는 차를 방치하고, 태워 사라져가는 담배를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레베카가 추위에 몸을 움찔거릴 때, 그는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열여덟.
레베카는 남자의 고급스런 가죽장갑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할까. 척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가죽 장갑을 끼지 않은 나머지 손가락이 유려하게 사인을 끝내고 펜을 내밀었다. 레베카는 그것을 받으며 예의상으로 잘 쉬었느냐 물었다. 덕분에. 역시나 예의상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면 한동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상관없었다. 원래의 자리였다.
할 말이 있는 듯 답지 않게 뜸들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기억하지? 그 개 말이야. 비오는 날 밤에 짖던, 바다로 들어갔던 그 개 한 마리.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안가를 산책하다가 그놈 사체를 발견했어.”
정말로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왜 그랬을까?”
레베카는 곰곰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정말 왜 그랬을까. 20초 즈음 지났을까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 남자에게 저번과 같은 대답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