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한 번에 퍼붓는 일이 없다. 찔끔찔끔 쏟아지다가 멈추고 다시 찔끔찔끔 내린다. 퍼붓나 싶어 창문을 바라보면 가느다란 빗줄기들이 바람에 휩쓸리다가 멈춰버린다. 3분 혹은 5분 간격으로 내리던 비들은 다시 멈춘다. 빌은 가만히 그 지루하고 재미없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어스름한 스탠드의 불빛에 마찰된 유리창은 여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끝낸 샤워로 머리카락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쓰윽 닦아내며 빌은 담배를 물었다. 어둡고 축축한 밤의 한 중앙에 놓인 기분이었다. 비를 맞고 있는 길바닥 타일 같은 기분이라면 알맞은 표현일까. 아니, 저 타일 옆에는 또 다른 타일이 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타일이 있으니.
앞으로 쏠리는 앞머리를 손목으로 넘기며 소파에 앉았다. 손가락에 끼인 담배는 파스락 사그라지고 있었다. 테이블에 있던 신문을 쥐어 무릎위에 올려두었으나 펼치지는 않았다. 어떤 일을 해도 내키지 않고, 어떤 말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빌은 한손에는 다른 손으로 신문을 쥐고 뒤로 기대었다. 하얀 천장위로 빗방울 그림자가 보였다. 담배연기가 그림자를 꿰뚫고 지나갔다. 빌은 욕설을 뱉어냈다. 밥을 먹을 때는 고기를 썰면 되고, 일을 할 땐 타자기를 두들기거나 이름을 휘갈기면 된다. 그러나 금요일 늦은 밤. 조용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집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가늠 되지 않았다.
한참 천장을 바라보다 어둠이 녹아내리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반질한 액자에 걸려있는 몇 장의 사진과 어설프게 핀에 걸려있는 엽서 몇 장이 있었다. 어디서 어떤 화가에게서 그려졌는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그림엽서는 짐이 출장을 마칠 때마다 건네주던 것이었다. 가끔은 그것들을 보며 그가 다녀온 곳을 추측해내고는 했으나 워싱턴을 다녀오고선 헤이안 민화 엽서를 건네주는 것을 보며, 여태 추측해왔던 노선을 머릿속에서 지워야했다. 짐은 그런 사람이었다. 가까이 있을 때 알 수 있는 것은 가깝다는 것뿐이었고, 멀리 있을 때에 알 수 있는 것은 멀리 있다는 것뿐이었다.
접때 주었던 헤이안 민화 옆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에펠탑 엽서가 있고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정말 싸구려 같았다.) 그 옆에는 그리스 수도원의 풍경이 담긴 엽서가 있었다. 차분한 눈동자로 훑었다. 어둠이 서려 모퉁이가 까맣게 보이는 액자들로 시선을 옮기자 입매가 살짝 움직였다. 낡은 액자에 걸려있는 사진은 옥스퍼드 졸업당시에 찍었던 사진이었다. 화사한 꽃다발과 방긋한 어린애의 얼굴이 함께 보였다. 그 옆으로는 코리의 사진이 있었다. 짐은 놈을 아끼고 예뻐했지만 본체만체 도도하게 굴며 냉대했다. 그에게 머리를 쓰다듬도록 내둔 적은 딱 한번이었다. 오늘같이 비가오던 밤, 놀러온 짐이 돌아갈 때에 녀석이 현관에 오도카니 앉아서 짐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웬일인가 싶었던 짐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놈은 갸르릉 소리를 내며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짐은 매우 기뻐했다. 어린애같이 기뻐하는 모습에 빌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짐이 돌아가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빌은 방석에 앉아 일어나지 않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아야했다. 늙은 몸뚱이는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그 고고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우아하게 엎드려 있었다. 빌은 삐져나온 앞발을 쓰다듬었다. 짐에게 전화했다.
나무가 지독하게 우거진 숲으로 찾아갔다. 계속되는 빗줄기로 축축이 젖어 있는 땅을 팠다. 합판으로 만들어온 나무상자에 놈을 넣었다. 뚜껑을 닫았다. 짐이 뚜껑을 닫기 전에 뭐라고 했더라.
빌은 싸늘한 냉기에 차갑게 식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그런 일이 있었다며 중얼거렸다. 힐끔 시계를 보았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간 것을 느꼈다.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든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은 망설임 없이 잠에 빠질 것이었다. 평소처럼. 맹목적인 시선을 다른 액자로 돌렸다. 만연한 기쁨이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찍은 졸업식 사진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조금은 농밀하고, 어쩌면 또 다른 의미로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짐의 얼굴 또한 행복해 보였다. 즐거움은 기억나지 않지만 즐거웠던 기억만은 기억되어있었다.
“!”
빌이 급하게 손을 털어냈다. 담배가 다 탄 줄도 모르고 붙잡고 있었다. 털어낸 담배는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중지 손가락의 옆면을 보니 빨갛게 데어있었다. 따끔함을 넘어서 아리기까지 했다. 차가운 물에 식히기 위해 엉덩이를 일으켰을 때 빌의 시야로 젖은 갈색 구두가 보였다.
“벨을 눌러.”
“문이나 잠그고서 잔소릴 해”
‘훔칠게 뭐가 있다고’ 농담서린 말에 짐은 어슬렁거리다가 ‘나 같은 놈이 들어오겠지.’하고 말했다. 빌이 부엌으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빠끔히 내보이며 ‘그렇다면 꼭 닫아야겠어.’하고 말했다. 짐이 웃었다. 수도꼭지를 열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손가락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물소리 때문에 잘 알아듣지 못하자 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차나 얻어 마시려고 들렸지.”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하는 목소리에 대답 하지 않았다.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렸다. 찌걱찌걱 플라스틱 버튼 소리가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타오르는 작은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짐은 거실에, 빌은 부엌에서 서로를 보지도 않은 채로 각자 서있었다. 찻장에서 잔을 꺼내기 위해 손을 올리자 짐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엽서가 좋을까.”
“뭐라고?”
“엽서 말이야. 일본, 프랑스, 그리스, 그리고 이태리. 내가 사왔지만 모나리자는 정말 끔찍하군.”
“떠나는 건가?”
“내일. 틀림없이 멀미할거야.”
“어디로?”
짤막한 말이 던져지자 침묵이 찾아왔다. 빌은 자신의 물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길어지는 침묵의 허리를 끊었다.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이 침묵을 이길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비행기 타기 전에 멀미약을 먹으라는 말에 짐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물주전자가 요란하게 끓기 시작했다. 찻잔에 물을 붓고 잎을 우려냈다. 따뜻한 우유를 붓고 한 잔에만 설탕을 넣었다. 차를 우리고 우유를 붓는 동안 너머의 거실에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었고, 대답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빌이 쟁반에 찻잔을 놓았을 때 불쑥 짐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거칠고 딱딱한 손이 찻잔을 잡았다. 앉아서 마시자고 하자 짐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차만 마시러 온 거야. 서커스로 가봐야 해. 놓고온게 있거든’
“거짓말만 하는군.”
“내가? 자네에게?”
짐이 웃었다.
출장을 하루 앞두고서 덤벙거릴 리가 없다. 서커스에 놔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웃기는 소리. 짐이 어째서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짐 또한 자신이 알고 있음을, 또다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다 알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았고, 모두 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마냥 겉돌고 있었다. 모두 다 알고 있음에도 짐은 설탕을 더 넣고 싶다고 말했고, 모두 다 알고 있음에도 빌은 단것 좀 줄여야 한다며 잔소리를 했다.
어느새 홀짝이며 차를 비워낸 짐이 벗지 않았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가보겠다고 짤막하게 말을 던졌다. 일찍 가냐는 핀잔도, 어서 가보라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내려놓은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보겠다 말해놓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짐을 슬쩍 바라보았을 때, 그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은은하게 비춰오는 유일한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 윤각이 흐리기만 했다. 그러나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굿 나이트 키스라도 기다리는 건가?”
“아니, 내가 하려고.”
뺨에 입술을 눌렀다. 매우 짧고 가벼운 키스였다. 7살짜리 아이들이 하는 입맞춤보다도 가벼웠다. 그러나 빌은 친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멍청히 자신의 뺨을 매만져버렸다.
“정말 가보지. 일주일 뒤에 보자고.”
짐이 등을 돌렸다. 빠져나가는 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간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현관이 열렸다.
“이봐! 짐!”
나무난간을 꼭 쥐고 짐을 불렀다. ‘왜?’ 힘 있는 물음이 던져졌다. 잠시 숨을 삼켰다. ‘몸조심해.’ 나직이 말했다.
“자네도.”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까만 어둠으로 녹아있는 1층을 바라보았다. 타박타박 걸음을 옮겨 창문에 붙었다. 저만치 가버린 남자가 보였다. 우산 없이 빠른 걸음으로 가는 모습이 사내답고 애처로웠다. 그가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엔 긴 시간 걸리지 않았다. 시야를 떠나버렸다. 빌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았다. 창문에서 떨어진 것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였다. 잔뜩 지쳐있는 얼굴이 보기 싫어 거칠게 커튼을 닫아버렸다. 소파에 털썩 몸을 묻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소파가 마치 무덤 같이 느껴졌다. 뜨거운 이마를 매만지며 짐의 얼굴을 생각했다. 쓸려오는 감각들을 도무지 통제할 수가 없었다. 힐끔 코리의 사진을 보았다. 코리가 죽기 전날 밤에 짐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벼대던 것이 생각났다. 빌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내 이상한 것을 발견한 듯, 시선이 다시 벽을 향했다. 굳어 있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천천히 유령에 홀린 듯이 일어났다. 액자 가까이에 섰다. 한 액자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비어 버린 액자 하나가 있었다.
화사한 졸업식 사진, 코리의 나른한 사진, 포르투칼에서 여행가서 찍었던 사진, 친누나가 보내온 조카들의 사진. 모두 아름답고 처량하게 걸려 있었다. 그러나 중간의 작은 액자 하나만이 텅 빈 체로 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도둑놈이었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점차 옅어졌고 천식환자 같은 울음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흘러나오는 소리를 막아보려 애썼지만, 구토할 듯이 차오르는 숨덩이를 참아내지 못했다. 빌은 텅 빈 액자 앞에서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