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까치발을 들었다. 작은 발가락 끝이 희게 변했다. 짧게 깎인 손톱 끝이 쭉쭉 뻗어 나갔다. 겨우 걸린 책 밑을 툭툭 걸러냈다. 책이 떨어지는 순간을 잘 잡아내려 했지만 결국 소음을 내고야 말았다. 볼품없게 추락한 표면으로 폴폴 먼지들이 날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나 들려올 발걸음 소리에 대비했다. 기민하게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한참 뒤에야 나긋해졌다. 책을 주워 먼지를 털어냈다. 몽글몽글 뭉쳐진 형태로 보아 저 스스로가 쌓아온 것은 아닌 듯싶었다. 양장 하단 흑박으로 입혀진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책을 폈다. 종이끼리 스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천사들의 필체가 반듯반듯 향연을 이루었다. 낯선 날짜 밑으로 마찬가지 낯선 이름들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죽음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였는지 천박하게 나열되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팔락팔락 종이를 넘겼다. 한참을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다 어느 순간 손가락을 멈추고 말았다. 넘길 수 있는 페이지가 없었다. 칼로 도려진 수십 페이지 다음으로 ‘기록될 수 없음’하고 쓰여 있었다. 기록 될 수 없음. 이게 무슨 말일까. 기록 되어서는 안 된단 것도 아니고, 기록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기록 될 수 없음. 그녀는 혼잣말로 단어들을 뇌까렸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을 때 어디선가 옹성옹성 소리가 들렸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찾았다. 휘갈겨진 마지막 날짜뿐이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책을 덮고 갈팡질팡 거리다 발밑으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빛을 향해 뛰어갔다.
◆
짐이 모르고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니, 짐은 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빌은 수십 세기를 살아왔고 죽어왔다. 능청스러운 짐의 말에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지만 사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한 이야기들이 짐의 앞에선 불분명하게 자리 잡길 바랐다. 그에게서는 천사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 마지막 순간에 저 혼자 늙어 죽는 게 무서웠다 말했던 짐의 고백처럼 빌 또한 저 혼자 살아남아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두려웠다. 시간은 옴팡 친구를 베어 물어갈 텐데 저 혼자 방부제 입힌 설탕 인형마냥 케이크 꼭대기에 서 있을까 무서웠다. 수많은 친구를 보내고 상실을 얻어 왔으나 짐이 떠나고 나서 그 상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가늠되질 않았다. 그러나 이 공포를 나눌 수는 없었다. 짐의 앞에서 천사이고 싶지 않았으나 인간이고 싶지도 않았다.
세상을 닫은 친구의 눈꺼풀을 수백시간 바라보았다. 오똑한 코밑으로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따뜻한 숨결이 피부로 스며들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통은 어디서 분배되는가, 평화와 안위는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는가. 외로움은 어떻게 치유되는가. 너는 죽어 어디로 가는가. 네가 죽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녀가 천국으로 간 뒤처럼 상실을 앓고서 너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까. 너를 따라 지옥에 가게 되면 어떨까, 살을 찢는 형벌 속 고통스러워하는 너의 맞은편에 앉아 함께여서 다행이라 자위하게 될까. 이 생각의 끝은 어디일까.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그 꿈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은 오래된 레코드가 뱅글뱅글 도는 것과 같았다. 누군가 이 고통을 연주하는 캔틸레버를 떼어주길 바라며 긴긴 시간 침묵에서 허우적거렸다.
짙은 어둠 뒤 새파란 새벽빛이 짐의 얼굴을 덮었다. 따뜻한 손이 움찔움찔 거리다 빌의 손을 잡았다. 안녕. 짐이 눈도 뜨지 않고서 말했다. 안녕. 빌이 따라 말했다. 짐이 손목을 끌어 손등에 입 맞추었다. 그의 숨결이 스며든 곳이었다. 자네가 죽은 뒤 이 손목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 말에 짐이 웃었다. 그것 참 로맨틱 하군. 그의 말이 맞았다. 정말 로맨틱한 일이었다.
◆
천상을 휘젓고 다니는 빌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의 뺨엔 선혈이 굳어 있었고 코트 끝 또한 그의 날개 끝 마냥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구멍 틈의 어린 노파는 그의 몰골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구멍 틈으로 전해지는 하얀 천 조각에도 빌은 뺨을 닦지 않았다. 그는 부탁했다. 딱딱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초리는 투그리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그 안에 있는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어린 노파는 고민에 빠졌다. 종국 고개를 저으려는 그녀에게 빌은 다시 부탁했다.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담 구멍에 시선을 맞추려는 움직임이 다급하고 처량해 보였다. 재우치는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나쁜 일이 아님이 분명해요?’
‘절대로.’
‘맹세할 수 있어요?’
‘그래.’
‘좋아요. 말해준 몇몇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만 확인하면 되는거죠.’
‘그래.’
‘알았어요. 여기 틈에 쪽지를 끼워 넣을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어지는 발걸음에 옹송그렸던 몸을 펴 뒷걸음질 쳤다. 그 사이 다시금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멍 틈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에요?’
빌은 가만 뺨을 만졌다. 굳어진 선혈이 가루처럼 부스러졌다. 손가락에 묻어나오는 가루를 보다가 빌. 하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
녹색 양장, 흑박으로 이름이 적혀 있었음. 자세히 읽지 못했으나 사람을 많이 죽인 모양으로 별별 이야기가 다 적혀져 있었음. 수십 장의 페이지가 오려 있어 많은 부분이 확인 불가능했음. 중요하다던 마지막 페이지엔 날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음.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해 유감스러움.
◆
인간의 세계에 호구조사서가 있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에도 호구조사서가 있다. 어떻게 천국 혹 지옥으로 들어섰는지 간략히 기록된 틀이었다. 이것은 요약본에 불가했다. 이 내용들은 몇몇 천사들에 의해 요약되는데 본 내용은 인생록에 기반을 두어 있었다. 인생록은 천사들이 인간들 따라다니며 기록한 것으로, 한권의 책으로 한정되어지며 똑같은 양식과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은 죽고 난 뒤 재판이 이뤄지기 전 딱 한번 이 책들이 정리 되어 있는 곳에 올 수 있었다. 더 이상 천사도 그렇다고 인간도 악마도 아닌 빌이 짐의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 했으나 오래된 친구라면 다른 이야기였다. 쉽지 않더라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얻게 된 것이라곤 그의 인생록 중 자신과 함께 한 시간들은 모두 뜯겨 나가 있었으며, 재판 이후의 목적지란도 비어 있단 의문점뿐이었다.
짐은 지옥에서 만나자 말했지만 빌은 확언할 수 없었다. 그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국의 세계는 견고했고 지옥의 세계는 복잡했다. 인간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간단한 흑백논리가 아니었다. 빌은 서성이던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비워둔 옥탑 방을 찾기로 결심했다.
◆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쌓아온 명성들이 의미 없어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생전 유명한 이들은 죽어서도 유명인이었다. 히틀러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는 천사는 없었고 알버트 슈바이처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악마는 없었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짐 프리도는 유명세를 따질 수 없는, 그 누구도 모르며 모를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천사와 악마를 거론하기 전, 그는 지상의 주민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그림자였다. 살면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을까, 살면서 그를 미워했던 사람이 있을까. 짐을 죽였던 사람도 그가 미워서 죽이진 않았을 터였다. 그들은 이념의 꼭두각시로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들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념은 천국에도 지옥에도 들어설 수 없었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동물과도 같이 문 앞을 서성이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개살구처럼 썩어갈 무명(無名)의 운명이었다. 천사는 이것들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오롯 악마들만이 이념을 들먹이며 인간들을 희롱하고 회유했다. 짐 또한 자신이 모르는 틈으로 악마의 조롱을 받으며 이념에 함몰 당했을까. 그도 결국은 인간임에 생생한 빛깔의 개살구에 연연했던 것일까. 자신이 그의 밤잠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안녕”
빌은 열려있는 문으로 구두코를 들이 밀었다. 문이 전부 열리기 전, 단정한 목소리가 인사를 해왔다.
“얼마만이지? 오십년? 백년? 이백년인가?”
계산한 적 없었기에 자신 또한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재미 좋았어? 그 사이에 얼굴도 들이밀지 않는 것 보면 재미 좋았겠지. 여긴 왜 왔어? 담 틈으로 지켜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어?”
문을 열자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천장에 달려 있는 증류 기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들반들한 유리 너머로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이 반사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가느다란 입매가 그믐달처럼 웃었다.
“자네가 궁금해 하고는 했잖아. 인간들이 잠에 빠지는 순간 말이야. 우리들이야 평안도 평화도 없는 몹쓸 존재들이지만 유사 감각이라도 누리겠답시고 이렇게 한참 누워 눈 감고 있곤 했는데 말이야. 런던에 있는 침대에서도 그랬어?”
“네가 사라지고 몇몇 놈들이 그러더라고. 얼마 안 있어 재판소에 선 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야. 택도 없는 소리. 천사가 타락해 악마는 될 수 있어도 인간이 될 수는 없지. 하지만 말이야- 지금 네 모습을 보니 그 소리가 영 불가능한 소리 같질 않아.”
소년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일어섰다. 킁킁 가슴팍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인간냄새. 말하는 소년에서 유황 냄새가 끼쳐졌다. 빌은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이 폭소했다. 유황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타락 천사라. 여과 없는 비웃음에도 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입 다물고 계시면 아무것도 도와 줄 수가 없어요-”
빌거나 무릎 꿇거나 바짓가랑이를 붙잡거나 그 정도는 해줘야 측은지심이 생기지. 떼록떼록 굴러가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영혼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
“오르페우스 흉내라도 내려고?”
소년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다 알고 있단 것을 빌은 알고 있었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빌이 생전의 노파와 우정을 다졌던 것도, 노파 외의 수많은 인간들과 깊은 밤중 뱅쇼를 머금었던 시간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는 알고 있었다. 짐 프리도와의 순간들, 그 순간의 끝을 붙잡고 있는 빌 헤이든의 멍든 손가락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 데리고 나간다고 치자. 그 뒤에 뭐하려고? 평생 구름 사이를 누비며 살거야? 아니면 카론의 배에서 노를 저으며 데이트라도 하려고? 수만번 사랑고백을 망각하고 또다시 구애하며 평생을 그렇게? 빌 헤이든 너는 참으로 미쁘게 만들어진 신의 숨결이지. 잔인하게 등급으로 나누고 싶진 않지만 네가 신의 발꿈치를 바치고 있어야할 미물이라 하더라도 너는 근사해. 내가 보아왔던 천사들 가운데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인간답지.
“있지, 그게 널 죽일 거야.”
소년은 빌을 지나쳐 선반 위의 와인을 꺼내들었다. 수백 년 동안 쌓인 먼지들이 너울너울 흩어졌다. 라벨을 읽는 듯 내리깔아지는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흥도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약속했어. 내가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그 분도 모르는 게 없어. 모를 수가 없지. 모든 것은 그 손의 안배로 이뤄지는 거야. 더 이상의 오르페우스가 없다면 더 이상의 에우리디케도 없는 거잖아?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아이참, 우리 너무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말자고. 우리 그런 사이는 아니었잖아?”
어렵지 않게 코르크 마개를 따며 너스레를 떨었다. 빌은 자신의 코트 끝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는 모양새가 새벽 눈틈 사이로 얼어버린 뱀허물 같았다. 차라리 뱀허물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벗어 던지고서 잊어버린다면, 그의 말처럼 레테의 강에서 물장구라도 치다가 모든 것을 망각해버린다면.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데리고 나갈 수는 없어.”
그를 잊고 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한결 편안할 수 있을 터였다. 수십 개의 세계와 수천 개의 초침들을 넘어 왔었다. 그 가운데에 짐과 함께 했던 시간은 거대한 호수 가운데 작은 물고기가 숨을 고르다 나온 기포 한 망울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그러나 그를 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리 더듬어 봐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과 목소리에, 아무런 삶도 인연도 없었노라 치부하면서, 거북한 속을 토닥토닥 두들기면서. 그는 없었노라고.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만날 수 있으면 돼.”
그렇게 자신을 기만할 수 없었다.
“그 다음은 어쩌려고? 지옥에 갔다 한들 유항냄새 들이키며 내내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 볼 수 없는 노릇이고, 만약에나마 천국에 갔다 한들 황금 철문 너머로 주인 기다리는 개 마냥 서서 기다리고만 있을 텐가?”
그 말에 짐은 웃었다. 기나긴 여행 혹은 도피를 약속한 두 남자는 어둔 방의 어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주변을 아우르는 공기는 알싸히 따스했으나 피부를 훑는 한기는 여전했다. 빌은 진심으로 짐의 말이 궁금했다. 그는 가끔 자신에게서 바람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귀찮도록 반복되는 말에 대충 말을 흐리곤 했으나 오늘 밤은 유난히 그 말이 고막을 차게 훑었다.
‘몇 천 년의 시간을 날아다녀 그랬을까.’
‘그렇다면 나또한 날개를 가지고 싶네.’
‘…….’
‘왜 아무 말 없나?’
‘어떤 말을 원하는데’
‘이렇게 꼬옥 안고 있으면 그토록 좋아하는 냄새가 옮아갈 것이라는 둥, 내 날개 한 짝을 떼어주겠다는 둥.’
‘…망측한 인간 같으니라고.’
껴안는 짐의 품에서 졸속이 빠져나가며 중얼거렸다. 짐은 웃었다. 웃음소리가 방안을 은은하게 매웠다. 잔잔 흩어지는 웃음의 끝에 빌은 어렴풋 잠의 기색을 느꼈다. 짐의 눈망울에서 점차 나른함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빠져나가며 타박할 때는 언제고 빌은 짐의 손바닥을 얽혀 잡으며 잠들지 말라고 말했다.
‘잠을 자야 사랑의 도피를 마무리 할 수 있지. 나는 자네와 달라서 잠을 자야하는 미물일세.’
잠진 눈두덩을 보며 빌은 입술을 달싹였다.
‘자네가 잠들면 나는 혼자야.’
그 말에 짐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한참 빌을 바라보다 그의 얼굴을 파묻고 있는 어둠을 거둬내기라도 하듯 뺨을 쓸어 내렸다.
‘죽음은 잠의 형제라는 이야기가 있네.’
‘그 멍청한 제비.’
‘그래. 그 멍청한 제비가 왕자의 단에서 죽기 직전 한 말이지.’
‘그래서, 그 금쪽같은 구절은 왜.’
‘자네는 삶과 죽음의 가운데 있다네. 내가 잠에 깨어 있을 때엔 그 가운데 서서 망충망충 삶에 끌려가는 나를 보아주고, 내가 잠들어 죽음에 가까워 있을 때엔 반대편을 돌아봐 손짓해주게. 자네의 손짓을 따라가다 보면 새벽이 오고 나는 자네와 함께 할 거야.’
‘미친 소리.’
짐은 웃었다. 웃음 뒤에 작은 하품이 따라왔다. 다시 눈이 감겼다. 빌은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짐은 꼬옥 손을 잡아 주었다. 얽혀 있던 손가락이 더욱 얽혀 천국의 포도덩굴처럼 견고해졌다.
‘잠에 빠지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
단 한 번도 잠들지 못했던 천사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공간으로 천천 빨려 들어가는 것이지.’
‘죽음으로?’
‘죽음으로’
‘두려운가?’
‘아니, 편안하네.’
‘아무것도 아닌 공간인데도?’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기에’
삶의 절반을 잠에 빠져 사는 인간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숨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꼬륵꼬륵 따뜻한 물이 방안을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살갗을 가르던 한기가 속히 빠져나가고 물결이 그 공간을 채웠다. 가만 잠에 빠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친 손등을 품안에 넣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높게 뻗어 있는 침엽수를 보았다. 목을 한참 꺾어도 나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려진 너머로 붉은 해가 너울거리고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감파르잡잡한 남색 하늘이 밀려오고 있었다. 한참이나 헤매고 있었다. 긴 시간이었다. 몰려오는 피로함에 고단함 보다는 생소함을 느꼈다. 연속 눕고 싶단 욕망에 헛웃음까지 나왔다.
소년은 손짓 하나로 자신의 두 쪽 날개를 뜯어갔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 또한 한 순간이었다. 반은 검고 반은 하얀 깃털 하나가 발치로 떨어졌다. 소년은 그것을 주어다 코트 단추 구멍에 꽂아 주었다.
‘너는 이제 타락천사도 마귀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도 아니지.’
그럼 자신은 무엇일까. 빌은 대롱대롱 달려 있는 깃털을 보며 생각했다.
‘너는 천상에도 지옥에도 머물지 못한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너 혼자의 힘으로는 갈 수 없다.’
빌은 깃털을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몸을 쪼갰던 고통의 여파로 등이 저 혼자 움찔거렸다. 들썩이는 몸짓을 멈추지 못하고 가만 깃털의 끝을 보았을 때, 파스슥 떨어지는 검붉은 가루를 보았다.
‘미물들 표현에 정이란 게 있다지. 지상의 주민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에 나를 불러. 그때 내가 너를 보내주겠다.’
빌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지상에는 아무런 미련 없었다.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보인 것은 소년의 바지자락이 아닌 투박한 나무껍질이었다. 습하고 서늘한 흙들이 너르게 깔려 있었고 사이사이 빨갛고 노란 버섯들이 우후죽순 올라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간 세계일까. 의문은 긴 시간 뒤에 해결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다. 고장 난 시계마냥 노을을 품고 멈춰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짐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이야기 했다. 네가 한 짓을 각오하라고 말하면서도 약속은 지킬 것이라 했다. 빌은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믿음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연속 지나쳤던 나무 앞에 섰다. 무심결 자신의 등을 매만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날개 없어 평생 한 곳에 머물러야 하는 텃새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 채로. 빌은 화나지 않았다. 심판 앞의 망자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상에서는 경험치 못했던 감각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여태 느꼈던 불안함의 정도가 아니었다. 무엇인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날개가 없기 때문일까. 더 이상 천사도 마귀도 아니기에,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감각들을 오로지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인간도 아닌 채로. 빌은 자리에 앉았다. 나무 근처에 있는 편편한 바위에 머리를 눕혔다. 곤했던 몸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온 몸이 아래로 쏠려 땅 밑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수천 번 인간들을 따라 지푸라기와 침대에 몸을 뉘였었지만 이렇게 편안히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눈을 감진 않았다. 눈을 감는 순간에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둠이 몰려오면 자신은 그 안에 갇혀 평생 옴짝달싹 울부짖으며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가라앉는 몸을 추스르려 할수록 한기가 스며들었다.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어수룩한 나무 틈으로 밀려들어오는 뿌연 공기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손끝하나 제 멋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죽음에 떨어지는가. 지옥의 천장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수 억 번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살아왔는데, 그의 말대로 삶과 죽음에서 저울질을 하며 수많은 시간을 살아왔는데, 이제야 혹은 드디어 죽음에 미끄러져 들어가는가. 스르륵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어둠이 피어올랐다.
누군가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뜰 수가 없어 멍청하게 허우적거리려는데 뺨으로 따끔한 채찍질이 가해졌다. 눈이 번쩍 뜨였다. 뿌연 시야로 사냥총을 들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등을 부여잡으려 했으나 가슬가슬한 손등은 예민하게 빠져나갔다.
“짐”
부름에 남자는 눈썹을 째삣하게 세웠다. 그리고 여유 있게 웃었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이지.”
깊고 온화한 듯하지만 본디 자신을 깎아내리며 비웃던 사람이었다.
“그럼 자네 이름은?”
◆
그의 오두막은 볼 품 없었다. 틈틈 이끼가 고여 있었고 쿰쿰한 냄새가 여과 없이 흩어져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기괴한 사슴뿔은 손질 되지 않은 채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만 바라보고만 있자 원래 있었던 것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이 던져졌다.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코트를 깃을 당기는 손끝도 차가워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온 몸이 꽁꽁 얼어가는 기분이었다. 짐은 어디선가 모포를 가지고 와 그의 몸에 둘러 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술이 굳어 떨어지질 않았다. 이어 손아귀로 따뜻한 컵이 들어왔다.
짐은 아무런 말없이 옆으로 앉았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쥐어 터져 널브러져서도 눈 위를 걷는 방법을 알려달라던 남자였다.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건가?”
짐이 물었다.
“자네는?”
빌이 대답하며 물었다. 또다시 짐의 눈꼬리가 삐쭉 올라갔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다 허탈스레 웃곤 ‘나도 몰라.’ 그렇게 말했다.
“눈을 떠보니 여기였어. 어떤 놈한테 칼빵 맞고서 널브러져 있던 마지막은 기억이 나는데 말이야. 그 다음은 도무지 모르겠어. 아무런 기억이 없어. 붕대는커녕 상처하나 없어. 어이가 없어 주변을 돌아봐도 온통 나무뿐이고 안개뿐이고. 곰곰 생각해보는데 조부의 오두막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더군. 아마 맞을 거야. 벽에 걸려 있는 저 사슴뿔이며 사냥총이며. 그렇다 한들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아. 한참을 걷다보니 이 집이 다시 나오더라고. 또 걸어도 다시, 또 다시, 다시. 다시. 그때야 깨달은 거지. 여기가 지옥 아니면 천국이겠구나. 그 뒤엔 포기하고 그냥 앉아 있었어. 지옥이라면 언젠가 채찍을 든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테고, 천국이라면…….”
짐은 말을 멈추었다. 빌은 가만 그를 기다렸다.
“평생 동안 이 곳에서 나 혼자서 살아가겠구나.”
빌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거 정말 행복한 천국이구만.’ 짐은 따라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지만 억지로 삼키려드는 것이 보였다.
빌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 애매한 감각들을 입꼬리에 걸고 있었다. 울컥거리는 망울들이 식도 아래서 똬리를 치고 있었으나 어찌 꺼낼 방법을 몰라 무거운 침만 삼키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했던 페이지가 찢겨 나갔다는 것을 알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택한 방향은 아니었다. 이 선택이 전부였다. 그를 찾으면서 점차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번엔 자네 차례야.”
날개를 포기하면서 다른 것들은 알아서 떠밀려 갔다. 유속에 재우치는 미련들을 붙잡으려할 만큼 미련스럽진 않았다. 자신에게 ‘끝’이 허락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끝에 짐 프리도가 있었으면. 그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병신 같은 인간이 있었으면.
“사람을 찾으러 왔네.”
“사람? 여긴 나밖에 없는데.”
“그리고 잠잘 곳을 찾으러 왔지.”
“아 그래서 거기 누워 있었나?”
“돌베개에 누워 있으면 천사들이 사다리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꾸게 될 줄 알았거든. 그 다음은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거지.”
“그 전 에서에게 죽을 먹였어야 했을 텐데”
“그래, 누군가에게 죽을 먼저 먹였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래야 천사가 나타날 텐데, 그것 없이 누워만 있었더니 자네가 나타난 거로군.”
“원한다면 다시 돌베개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 거기서 벌벌 떨다가 천사나 만나시게”
두 사람의 농담이 의미 없이 흘러갔다. 애처롭고 불편한 상황임에도 빌은 이 모든 것들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피로한 몸은 여전히 진득한 점액질마냥 흘러내리는 것 같았고 정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불투명한 시간들 속에서도 더없이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람, 찾으러 갈 건가? 충고하지만 정말 이 곳에는 나 밖에 없어.”
“내가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건가?”
“사람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군. 자네가 원한다면 나가도 좋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미지옥에 떨어졌다는 것뿐이야 아주 중요하면서도 가벼운 충고지.”
짐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허풍에 구멍을 뚫어줄 생각도 없이 빌은 마냥 바라보았다. 창문 틈으로 세어 들어오는 노을빛에 그의 옆얼굴이 붉게 빛났다.
“그래도 아주 지루하지는 않아. 가끔씩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거든.”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주변 공기가 웅크러들기 시작했다. 몸 가득 엉겨드는 공기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눈 감은 틈으로 사물이 엉켜들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타다타닥 구슬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작은 구두가 땅을 튕기는 소리도 들렸다. 간지러운 웃음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창밖을 보았다.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저번에는 여섯이었어. 어느 날은 다섯이 되더니 오늘은 셋이군. 시간이 지날수록 한명씩 사라져.”
짐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첫날에 놀라서 문을 벌컥 열었는데 다시 숲이더군. 개입하는 순간에 모든게 사라져. 허락되는 것은 지켜보는 것뿐이지. 이 공간도 마찬가지야. 만지고 쓰다듬을 수는 있어도 간혹 옮기거나 부수려는 순간 모든 게 사라지고 오두막으로 돌아오지. 오두막이야 기억의 파편이라지만 난 이런 곳은 기억에 없어. 이런 고급스런 양장점과는 인연이 없었거든.”
짐은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늦은 밤, 텅 빈 샵 가운데 그가 누워 자곤 했던 소파였다. 빌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가끔씩 기억에 남아있는 공간으로 인도 되곤 하지. 어릴 적 빨래터라던가, 접선 장소, 피로 낭자한 골목이라던가, 하지만 그 가운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공간들이 속속 등장하곤 해.”
“그렇군.”
“새 손님이 왔으니 어쩌면 자네의 공간으로 인도할지도 모르겠어.”
빌의 공간이 궁금하다 묻는 짐에게 작게 끄덕였다.
“자네 정말 피곤해 보이는군. 침실에서 쉬겠나?”
“침실?”
“2층에 침대가 있네.”
“올라 가봤나?”
그 말에 대답하려던 짐이 말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빌은 안도했다. 그 안도함은 따뜻하고 잔잔했다. 목구멍을 갉으며 괴롭히던 고통들이 녹아 사라졌다. 테일러 샵에 도달하면서부터였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은 이곳에 도착하고 나선 다른 의미가 되었다. 이젠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기억의 성은 견고했으나 그 안에 있는 것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여섯에서 다섯, 다섯에서 넷, 넷에서 셋, 그 다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아이들처럼 짐의 기억은 점차 허물어져 이젠 제 이름 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래서 어찌할 텐가. 상관 없었다.
빌은 몸을 일으켜 2층으로 향했다. 모포가 미끄러져 떨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짐이 따라 올라왔다. 문을 열자 익숙한 침대가 있었다. 빌은 몸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였다. 짐은 제집처럼 익숙하게 자리 잡는 빌을 보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가까이 다가와 잘 텐가? 하고 물었다. 빌은 자신을 덮어오는 것이 수마임을 깨달았다. 아, 이것이었다. 짐이 자신을 두고 가물가물 빠져들던 것, 곁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외롭게 하던 것. 빌은 손짓했다.
“올라오라고?”
“그래.”
“망측하게”
빌은 힘없이 웃었다. 자신이 하곤 했던 말을 짐의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빌은 다시 한 번 손짓했다. 잠시 고민하던 짐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빌이 살짝 몸을 일으켜 짐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짐의 몸이 허물어졌다.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잠들어 본적이 없다네.”
“그거 웃기는 농담이군.”
짐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면서 따라 자보려고 눈 감기도 했고 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괜히 수면제를 살 때도 있었네. 먹진 않았어. 그냥 사보고 싶었던 거니까. 한참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도 다시 잠에 빠진 얼굴을 바라보았지. 편안해 보였어. 내가 없는 곳에서 아주 편안하게 가라 앉아 있는 것 같았어. 마치 해저 밑 나이 먹은 전투선같이 말일세. 나는 같이 가라앉고 싶었던 거야. 그냥 삶 혹은 죽음의 중앙에서 떨어져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고. 함께”
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빌을 바라보았다.
“몸을 짓누르는 나른함이 좀 두렵긴 한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아니, 아주 좋아. 이대로 나락으로 떨어지면 아주 편안할거란 믿음이 생겨. 인간들이 영원한 잠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를 알겠어.”
“그래, 죽음은-”
“잠의 형제니까.”
빌은 자신을 바라보는 짐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가물가물했으나 표정 가득 여실한 당혹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 끝에 짐은 아까처럼 웃었다. ‘나 자네가 왜 이렇게 익숙한지 모르겠어. 아니 정말 처음 보는 얼굴이긴 한데 이 집처럼 익숙해. 혹시 자네 이 집주인인건가? 이 집을 찾으러 온 거야?’ 빌은 눈을 감았다. 짐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머리를 울렸다.
이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힘없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짐의 손을 잡았다. 메마르고 거친 가죽. 움찔거리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억지로 빼지는 않았다. 그 손을 잡아 올려 자신의 품안에 넣었다.
“아무렴 어떠한가. 다 잊어도 좋네. 다 잊어버리고, 지금 나와 함께 누워 꿈을 꾸세. 그리고-”
영원토록 일어나지 않는 거야. 빌은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고 수마에 빠져 들었다. 언젠가 짐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아주 편안했다. 그의 평생 가운데 가장 찬란하고 충만한 안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