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헤이든에게는 날개 두 짝이 있었다. 끝부분이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을 제외하곤 눈송이처럼 새하얗고 보송했다. 몇 천 년의 세월도 그 눈송이에 스미었다. 그는 날개를 자주 드러내지 않았다. 모세가 광야를 헤맬 때만 해도 만나를 뿌리고 다닌다 날개를 퍼덕여야 했지만 이후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몇몇 인간 친구를 두었고 그들이 죽기 직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빌을 숭배하지도 은총 받았다며 감격에 겨워하지도 않았다. 일 년에 한번 느지막한 새벽까지 천사를 기다리며 시간을 더듬었을 뿐이었다. 친구들 가운데 장님 노파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시력을 잃기 전까지 찻잎을 따고 말리는 일을 했었다. 이후에는 자식들이 그 일을 물려받았다.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진하게 우려낸 차를 내놓았다. 빌은 그 차가 좋았다. 그리고 노파도 그랬다. 대부분 노파가 이야길 늘어놓았고 빌은 다리를 꼰 상태로 차를 마셨다. ‘천국에도 그런게 있나요?’ 대부분이 이런 질문들이었다. 빌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하곤 ‘그래.’하고 대답했었다. 그녀가 죽고 나선 차를 마실 일이 없었다. 빌은 상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인간은 영생을 모른다. 노파는 나이가 많았고 병까지 앓고 있었다. 인간을 떠나보낸 것이 한두 번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보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빌은 상실을 씻어 보내지 못했다. 영생을 미워할 수 있을까. 감상적인 의문은 품고 싶지 않았다. 존재의 부재는 상실을 불러일으킬 뿐. 다만 그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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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사람은 지옥에 갔을 겁니다. 행실이 빌어먹은 남자였거든요. 생애 좋은 일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죠.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 차있고 자기밖에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와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그가 지옥으로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냄비 위의 마늘 조각처럼 달달 구워지는 그를 상상했어요. 처음에는 유쾌했지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그리워서라거나 안타까워서 그랬다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다만, 내가 죽고 난 뒤에 나 또한 그 냄비 위에서 볶아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거지요. 당신의 존재에서 천국을 읽을 수 있지만 또한 당신의 존재에서 지옥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거니까요. 빌, 천국에 가면 당신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좋을 텐데요. 지옥에서 그 남자를 만나는 것 보다야 훨씬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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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그에겐 모세 5경 중 출애굽의 전초가 단계가 적힌 양피지 한 장이 있었다. 모세가 기록하다가 잃어버렸던 양피지였다. 성질급한 모세는 이내 다른 곳에 기록을 시작했다. 빌은 이 버려진 양피지를 모래더미에서 발견했다. 졸다 쓴 흔적이 여실했다. 그 외에도 베르길리우스가 직접 손으로 적어내린 시 구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또 루도비코의 광란의 오를란도 첫판본 등등이 있었다.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기 보단 모으는 것에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취미생활이었다. 빌은 런던 시내의 고서점과 버려진 도서관을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낡은 책들을 찾았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이상한 파일들을 찾았다. 세계대전의 잔여물이었다. 방치가 아닌 보호였을 것이다. 빌은 둥지로 가져가기 위해 품안에 넣었다. 평소의 심술이었다. 빌은 검은 머플러를 둘렀다. 추위를 느끼는 일은 없지만 갖추어 입는 것이 좋았다. 겨울 코트도 그랬고 검은색 폴라 니트라거나 잘 닦여진 구두까지 모두 좋았다. 몸에 천을 두르고 감추는 것은 인간의 연약한 성질을 되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빌은 이것이 좋았다. 감추면 감출수록 가리면 가릴수록 더욱 좋았다. 끼익 거리는 낡은 승강기를 타고 코트 자락을 팔락이며 걸었다. 눈이 오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제법 쌓여있는 눈 위로 발자국 하나 없었다. 빌이 걷는 곳으로는 발자국이 찍히는 일이 없었다. 빌은 부러 세게 발걸음을 눌렀다. 똑같았다. 여전히 새하얗고 가지런했다. 자박자박 걷는 소리도 없이 빌은 길을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한 남자가 보였다. 밭이 씨앗을 뿌린 듯 핏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눈 위에 천사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엎어져 있었다. 빌은 무감정한 얼굴로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가까이 가져간 귀로 잔잔한 호흡이 들렸고 이내 거친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타액 섞인 핏방울이 빌의 뺨과 코트에 묻었다. 신경질적으로 뺨을 닦자 가물가물 눈망울이 뜨이는 것이 보였다. 외로울 정도로 커다란 눈망울은 아이들이 놀이 중 따낸 희귀 구슬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났다. 쪼그려 앉은 다리를 펴기도 전에 남자는 빌의 손목을 잡았다. 소매에 묻어나는 핏자국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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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친구, 내게 눈 위를 걷는 방법을 알려주게. 자네처럼 걸을 수 있다면 총 맞아 죽을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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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은 우연찮게 오스카 와일드의 초판본을 구했다. 고서점의 루크가 구해다준 책이었다. 낡았지만 훼손되지 않은 매혹적인 상태였다. 창백한 손가락으로 책을 펼쳤다. 따옴표에 묶여진 제비의 대사가 눈에 띄었다. ‘나는 죽음의 집으로 가요. 죽음은 잠의 형제죠. 안 그런가요?’ 멍청한 제비. 혀를 차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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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짐을 선택하지 않았다. 짐이 천사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이 상황이 기쁘지 않았다. 여태 친구들과 누려왔던 것과는 완전 달랐다. 그들이 빌을 숭배하고 무릎 꿇는 것은 아니었으나, 숨길 수 없는 동경은 빤하게 드러났다.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빌의 존재를 알면서도 담담히 있을 뿐이었다. ‘자네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자네의 가슴팍으로?’ ‘그래.’ 빌은 웃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눈웃음에 짐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았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스미고 있었으나 짐은 문을 닫지 않았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작은 소녀의 구두가 땅을 튕겼다. 간지러운 웃음소리에 빌이 천을 자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창가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다시 가위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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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찾아가지?’
‘아무도’
‘아무도?’
‘스무 명을 돌아가며 만났던 시기도 있었어.’
‘일 년에 한 번 씩?’
‘한 명 씩 사라졌고 나중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어.’
‘마지막이 누구였지?’
‘눈이 멀었던 노파. 그마저 오래되었지.’
‘그 뒤로 계속 혼자였나?’
‘그래.’
(침묵)
‘인간은 너무 빨리 늙고 빨리 없어져. 억겁의 시간 뒤에 남는 것은 시대를 이어가는 허무함 뿐이야.’
‘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여기 있잖아.’
‘인간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 아닐세’
‘그렇다면?’
(침묵)
◆
짐은 자신이 하는 일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억겁의 세월동안 인간들을 보아왔고 그들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들에 매달리는지 알았다. 짐은 천사에게 눈 위를 걷는 방법을 물은 것 치고는 예민하고 조용하게 움직였다. 아주 조용했다. 그는 악몽처럼 찾아왔고 새벽처럼 떠나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때도 있었고 한 달, 때로는 일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그는 언제가 되었든 살아 찾아왔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로가 당연하게 되어버린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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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의 옆머리로 삐져나온 하얀 머리카락을 보았다. 툭 뽑자 놀란 얼굴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친구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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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점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서 책을 쌓아가며 시간을 보내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 친구를 만드는 것은 오래전 그만 두었지만 한 곳에 처박혀 있고 싶진 않았다. 구석에 자리한 가게로 몇몇의 손님들은 꾸준히 찾아왔다. 변하지 않는 주인장의 얼굴을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빌은 자연스럽게 대를 이은 2대가 되어 있었고 3대, 그리고 4대까지 되어 있었다. 싫증나지 않았다. 천을 자르고 바느질 하는 것이 좋았다. 아침마다 이곳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읽는 것도 좋았다. 노을이 지는 저녁이나, 이른 새벽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도 좋았다. 빌은 시계를 보았다. 스탠드 사이로 먼지들이 깃털 마냥 춤을 추고 있었다. 날이 둔해진 가위를 서랍에 넣었다. 그가 오는 날이면 날카롭게 갈려있을 것이다. (그는 가위나 칼을 놀랠 정도로 잘 다듬었다.) 빌은 스탠드를 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 너머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하나의 그림자가 둘로, 둘에서 셋으로 변했다. 서랍을 열었다. 스탠드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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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발로 카펫의 끝단을 뒤집었다. 나무 바닥에 흥건히 스며든 핏자국들은 검게 변해 있었다. 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천사도 다칠 수 있는 건가?’ 빌은 고개도 들지 않고 ‘그래’하고 대답했다. ‘상처 입더라도 이내 회복하네.’ ‘심장을 찔리면?’ 빌이 피식 웃었다. ‘천사에겐 심장이 없다네.’ 냉소에 짐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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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은 이사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는 이 땅에 있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귀찮은 일들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짐 프리도의 행방을 묻던 이들이 다시 나타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새벽이면 정신이 맑아졌다. 등이 꼿꼿해지고 긴장감이 더해졌다. 며칠을 날 선 밤을 보냈으나 커다란 인기척을 느끼진 못했다. 짐도, 무뢰한들도 찾아오지 않았다.
새벽, 빌은 2층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동이 터왔다. 짙푸른 새벽빛을 기대하며 현관으로 내려갔다. 문을 열었을 때 신문은 없었다. 대신 자신의 신문을 들고 머직히 서있는 소년 하나가 보였다. 빌은 가운을 여닫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이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쓰레기통에서 삐죽 튀어나온 다리 하나. 그 옆으로 뒹굴고 있는 또 다른 다리 하나. 빌은 소년의 귀에 경관을 불러 오라 속삭였다. 얼떨떨한 어린 얼굴이 허둥지둥 뛰어갔다. 이사를 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가 찾아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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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엔 무엇이 있나?’
‘사탄이 있네.’
‘그리고?’
‘사탄의 자식들이 있지.’
‘지옥을 본적이 있나?’
‘내가 살던 곳은 지옥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어. 지옥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증류수를 만들었지.’
‘과학적이군.’
‘왜? 지옥에 갈 준비를 하려하는 건가?’
‘준비야 언제든 되어있지.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준비한다네.’
‘천국은 어쩌고?’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재판관들이 치룰 일이지.’
‘자네는 어디에 있을 건가? 지옥에? 천국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연히 런던에 있겠지.’
‘자네를 보지 못하는 건가?’
‘……천국에서는 그렇지.’
‘지옥은?’
(침묵)
‘지옥에서는 볼 수 있는 거군.’
(침묵)
‘그렇다면 지옥에서 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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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뒤에도 천국을 엿본 적 있었다. 노파가 천국에 잘 도착했는지 보고 싶었다. 그녀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빌은 구멍 너머로 노파를 보았다. 행복해 보였다. 세상 것들을 다 잊은 듯 했고, 걱정도 고민도 분노도 없어 보였다. 다른 이에게 들키기 전에 천국의 담에서 빠져나왔다. 지옥의 천장에서 존재의 부재를 생각했다. 그녀는 존재하고 있었다. 천국에서 구름 위를 뛰어다니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왜 이리도 외로운가. 존재의 부재는 상실이 아니었다. 존재가 잊히는 것이 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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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빌은 짐이 지옥으로 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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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두고 외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은 이례적이었다. 가까이 돌아왔을 때는 해가 진지 오래된 시간이었고, 돌아갔을 거란 예측이 무색하게 짐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퉁이의 소파에 쭈그려 누워 있었다. 긴 다리가 접혀 있는 것이 애처롭고 우스웠다. 빌은 샛별처럼 넘쳐 오는 기쁨을 느꼈다. 생소하나 그에 관해서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의자를 끌어다가 소파 옆에 앉았다. 어둠에 녹아든 얼굴을 보았다. 노곤함과 뒤섞인 무의식의 평화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빌은 자신의 우정 가운데 그와 같은 사람이, 그와 같은 관계가 있나 생각해보았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빌은 질문을 바꾸었다. 자신에게 짐 프리도란 누구인가. 나른한 눈꺼풀을 깜빡이며 긴긴 시간 친구를 바라보았다. 새벽이 왔다. 찾아온 이명이 빌의 뺨을 푸르게 물들였다. 짐이 빌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 빌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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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가 구슬치기를 하는 남자아이들 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짐이 빌에게 물었다. ‘런던을 떠날 생각은 안 해봤나?’ 빌은 바느질을 멈추었다. 근처 빌라를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런던을 벗어난단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튼튼한 날개로 사방을 날아다니던 것은 아주 먼 옛날 이야기였다. ‘왜?’ 빌의 되물음에 짐이 콧등을 긁적였다. ‘자네 여행 해본 적 있나?’ 어딘지 톱니가 맞지 않았다. ‘난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어. 여행이라니. 터무니없지.’ ‘하지만 좋을걸세. 더블린 가보았나? 아예 바다를 건너 오슬로로 가는 것도 괜찮지. 추운게 싫다면 파리도 괜찮고.’ 짐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도망가는 건가?’ 빌이 물었다. ‘돌아오지 않을 건가?’ 빌이 다시 물었다. 짐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마주쳐오는 눈동자에 바늘을 내려두었다. 짐이 웃었다. 서글픈 눈을 한 채로 입 꼬리만 억지로 올렸다. ‘내가 싫다 말하면 자네만 떠날 건가?’ 짐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메마른 손등너머로 사라지는 얼굴에 마음이 다급해져왔다. 작업 테이블에서 벗어나 짐의 앞에 섰다. ‘자네 말대로 날개가 있으니 나를 보러 올 수 있을 테지. 와주겠나? 자네의 친구들에게 일 년에 한번 우정을 확인시켜줬던 것처럼.’ 빌은 할 말을 잊었다. 어디서 어디까지 받아들여야할지 또 수정해주어야 할지 가늠 서지 않았다. 잘된 일일 수도 있다. 빌은 짐을 기다려야했다. 시선들은 문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제 그가 자신을 기다릴 터였다.
‘자네를 따라가면.’ 빌어먹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속으로 욕설을 뱉어내며 다시 입을 놀렸다. ‘자네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짐은 커다란 눈으로 빌을 올려다보았다. ‘매일 새벽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겠지.’ ‘인간들은 그걸 우정이라고 부르나?’ ‘……아니.’ ‘그러면?’ 연속되는 질문에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내 목을 가다듬으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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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창문을 굳게 잠갔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안내문까지 붙여 놓았다. (전화가 있을 때까지 신문을 놓지 말아달라는 쪽지까지 붙여 두었다.) 모든 것을 재점검하고서 문을 잠갔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리멍덩한 하늘을 응시했다. 약속 시간이 지나갔다. 눈이 오기 시작했다. 어깨로 소복하게 쌓이는 눈을 털어냈다. 눈송이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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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은 문에 붙여 놓았던 안내를 뜯지 않았다. (친절한 쪽지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쌓여만 갔다.) 가방을 풀지도 않았다. 시간이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으로 찾아갔다. 새벽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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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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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하고 옷을 차려 입었다.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둘렀다. 눈이 오고 있었다. 가방을 들었다. 문을 열고 흔적 없이 눈 위를 걸었다. 그때 어린 소년 하나가 시야로 들어왔다. 신문을 들고 있는 소년이었다. 이전처럼 소년은 골목 사이를 멍하니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빌은 예감했다.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서 가방이 떨어졌다.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어린 시선 곁에 얼굴을 두었다. 기다란 남자 하나가 골목의 벽 틈에 기대 앉아 있었다. 이마에는 피가 흥건했고 고개는 옆으로 기울어 마치 술 취한 사람 같았다. ‘경관을 부르렴.’ 빌이 속삭였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뛰어갔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천천히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몰골은 더욱 더 처참했다. 유난히 커다랗던 눈망울은 핏물로 엉켜들었고 목덜미에서는 콸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빌은 깨끗한 손으로 상처를 막았다. ‘몰골 흉한가?’ 짐이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숨결에서 죽음의 냄새가 짙게 났다. 빌은 ‘그래.’하고 대답했다. ‘코피도 나는걸.’ 그 말에 짐이 후들후들 거리는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쌍코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에 빌은 울컥 눈물이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뜨끈해지는 눈시울을 가리고 싶었으나 이미 손은 짐의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짐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목을 가다듬자 울컥 핏물이 흘러 나왔다. 빌은 두 손으로 상처를 막았다. ‘어쩌면 다행이지도 몰라.’ 짐이 말했다. ‘자네는 하나 늙지 않고 탱탱할 텐데, 나만, (잠시 말을 쉬었다.) 나만, 머리카락이며 또 이며 다 빠진 노친네로 살고 싶진 않았거든.’ 짐은 잠시 망설이다 붉은 손으로 빌의 뺨을 매만졌다. ‘지옥에서 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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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따라온 경관들은 무참한 시신 하나를 발견했다. 고통스러운 흔적들이 수도 없이 할퀴어져 있었다. 시신에게서는 어떠한 신분을 찾을 수 없었다. 경찰들은 시신을 챙기며 소년이 증언한대로 옆집의 사내를 만나기 위해 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문 너머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저한테 경관들을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에 소년은 열불을 내며 말했다. 혀를 차던 경관은 문 하단에 있는 작은 안내카드를 발견했다. 혈흔으로 추측되는 빨간 흔적들이 뭉개져 있었고 그 사이 가지런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카드를 읽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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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히. 저는 한동안 천국과 지옥을 샅샅이 뒤질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모두들 영원히 안녕,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