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길이 소복소복 하얗게 쌓여가고 있었다. 알비와 길을 헤매다 낡은 건물로 몸을 피했다. 그는 내 장갑을 벗기고 자신도 장갑을 벗더니 거친 손으로 손등을 비비기 시작했다. 까끌한 감촉으로 온기가 스며들고 쉽게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서로의 맨손을 마주 잡고서 계단으로 올라섰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눈발에 서로의 얼굴이 은은히 빛나는 듯 했다. 3층 즈음에 도달했을 때 째깍째깍 태엽 돌아가는 소릴 들었다. 문을 열자 늙수그레한 노인이 돋보기를 끼고 시계를 만들고 있었다. 잠시 쉬어가도 되냐는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창가에 잘 개어진 수건과 모포를 가리켰다. 우린 그 수건으로 머릴 닦고 모포를 뒤집어 쓴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많은 눈이 떨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바쁘게 어둠을 뚫고 있었다. 그때에 알비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는 짙은 어둠이 걸려 있었다. 어두워 내리는 함박눈조차 보이지 않는 땅이었다. 너머로 높은 산이 있는 듯 했으나 그 형태마저 희미해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담담하고 평화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위로하는 듯 따스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으나 그는 곁에 없었다. 놀라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는 없었다. 바람이 흩어지는 소리에 창문 밖을 보았다. 그가 아래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보려 했으나 굳게 닫혀 꿈쩍하지 않았다. 유리를 두들겼다. 억센 힘에 깨질 만도 할 텐데 견고히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손을 흔들던 알비가 뒤돌아 어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지마! 혼자 가지마!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계단을 밟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와 성큼성큼 올라왔던 계단이 아닌 것만 같았다. 종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둠 속을 향해 들어가는 그 등이 선연해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그의 곁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 돌아서는 그 모든 것이 서럽도록 당연해보여서, 귀를 막고 악을 지르며 누가 좀 깨워달라고 소리 쳤다. 세상에서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도와달라는 말이 목 끝에 걸렸을 때 눈이 뜨였다.
차가운 방 온도와 달리 지옥 불에라도 들어갔다 온 듯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창밖은 어스름했다. 차 몇 대가 도로를 지나가는 소리가 웅웅 크게 들렸다. 젖은 머리를 넘기며 눈가를 비볐을 때 어둔 창으로 스쳐가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함박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옷을 챙겨 입고 차를 몰았다. 텅 빈 도로를 쌩쌩 달리고 빨갛게 지켜보는 신호등을 무시했다. 날아올 청구서를 쥐고 골머리 아파할게 뻔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삐뚤게 박아둔 차를 내버려 두고 빠른 걸음으로 그가 있는 곳을 찾았다. 졸린 얼굴을 비비던 여자가 놀라 따라오려는 듯 했지만 얼굴을 확인하곤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번호를 확인할 것도 없었다. 유리문 너머로 스탠드 하나가 켜져 있는게 보였다. 잠들지 않았는지 책을 붙든 채였다.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바싹 마른 입술이 나직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부르려고 했다. 슬프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벌렸다. 와락 안긴 품에선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러나 보다 깊숙한 곳에서 그의 향기가 났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겨울날의 공원에서처럼, 그 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위로의 예고됨처럼, 오로지 이 향기만이 나를 현실로 평온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었다. 이전보다 여윈 몸에 끊임없이 품을 밀착시키며 가지 말라고 말했다. 알비는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이것으로 되었다. 불안함을 마음의 끝으로 우겨 넣으며 빛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잘한다.”
비아냥거림에 괜히 이불 끝을 쭉쭉 잡아당겼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마코는 겨울철 족제비 새끼들 마냥 엉겨붙어있는 우릴 보며 혀를 찼다. 알비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의 침대를 탐해선 안 된다는 당연하고도 암묵적인 룰이 만들어졌다. 허허실실 알비는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환자의 침대를 빼앗아선 되겠냐며 마코는 선을 그었고, 나는 내가 하려했던 말이었다고 날선 추임새를 넣었다. 그게 몇 주 전이었더라― 마코가 여전히 비아냥거렸다.
“눈 오는데 온다고 고생했어.”
“……차가 기어 다녀. 안되겠다 싶어서 근처 주차해놓고 걸어서 왔다니까. 그런데 길마저 얼어서 걷기 힘든 것 있지? 한동안은 지옥 같을 거야.”
알비의 만류에 눈을 흘기다가 냉장고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그녀의 입으로 흘러 나왔다. 익히 알고 있는 연구실 이야기엔 추임새를 붙였다. 팀벨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올 때면 함께 몸서리를 쳤다. 알비는 나직하게 웃었다. 한참 교수에 대해 욕설을 흩어놓던 마코가 다른 연구원의 병가 소식을 말하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감기는 괜찮아? 감기 때문에 윈스턴한테 내쫓긴거 아니었어? 걱정이 담긴 말에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미열이 조금 있던 것을 윈스턴이 알아채고서 등을 떠민 것이었다. 괜찮다 한사코 말했지만 감기 환자가 병실에 있어봤자 좋을 것 없다는 충고에 깨갱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집으로 내쫓기자마자 감기약을 입에 쑤셔 넣고 일찍 잠에 들었다. 결국은 불온한 악몽에 부리나케 알비를 찾았지마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았다. 부둥켜 안겨들었던 취침 시간은 안락했고 편안했다. 수면부족 따위의 변명도 필요 없이 말짱했다. 지긋 바라보던 마코가 시선을 돌리며 몸조리 잘하라 충고를 던졌다. 아무렴요. 누가 말씀하시는데요.
냉장고 정리를 끝낸 듯한 마코가 다리를 콩콩 두들기며 일어났다. 가봐야겠다는 말에 알비가 벌써 가는 거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월요일에 팀벨 교수의 연구 발표를 보조해야한다고 말했다. 가볍게 알비의 뺨에 입을 맞춘 뒤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쫓아가며 마중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알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 덕에 뺨을 스치는 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졌지만 느낌만큼은 포곤했다. 어깨에 있는 눈을 털어내며 담배를 꺼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끊은거 아니었어?”
“아주 가끔만”
“알비가 끊으라 했다더니?”
“끊으라고 했던 것은 아냐. 그전에 즐겨 피웠던 것도 아니고”
알비 또한 흡연자였다.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던 터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의 집에서 말갛게 비워진 재떨이를 발견했었다. 담배 피우냐는 말에 아주 가끔만 그렇게 대답했었다.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니 가까이하는 것보다야 멀리하는 것이 좋겠지만 하루에 몇 갑씩 비워내는 것은 아닌 듯 했고 본인이 어련히 할까 하는 마음에 간섭하지 않았었다. 동거하게 된 이후로 그의 집에 있던 재떨이는 베란다로 옮겨졌다. 가끔씩 그가 베란다에서 멍 때리는 것을 줄레줄레 다가가 곁에 서면 몇 번 물지도 않은 장초를 비벼 끄며 왔냐며 웃곤 했다. 장초를 왜 끄느냐 물으면 그냥 하고 웃었다. 불현 어린애 취급인가 싶어 한번은 나란히 서서 한 개비를 꺼내어 물었다. 담배에 불붙이는 것까지 보다 빙긋 웃어 버리곤 본인이 태우던 장초를 비벼 껐다. 막지는 않으면서 그저 보고만 있기에 어쩌려나 싶었으나- 어쩌기는 뭘 어째. 맛도 없는 이런거 뭐 하러 피우냐고 투덜거리며 눌러 끄자 그래그래 안에 들어가서 영화나 한편 보자고 손잡아 끌어 주었다.
알비가 입원한 뒤, 집에서 뒹굴던 담배 한 갑을 찾았다. 답답한 마음에 불을 붙이고 한껏 들이 마시다가 잘못 삼켜 오지게 기침을 해댔었다. 맺혀 있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고 이후에는 멈출 수 없는 오열이 흘러 내려 그냥 그렇게 울었다.
“런던 언제 가?”
“다음 주 수요일”
“결혼식이 금요일 아냐? 좀 빠듯할 텐데?”
“결혼식만 보고 바로 올 거야.”
“그래도 안 간다, 안 간다 하더니 결국엔 가네.”
“괜히 난리니까 그러지. 딱히 결혼식 안보더라도 나중에 얼굴 보면 되는 건데 왜 그렇게 유난인지.”
“야, 그래도 가족이 너뿐인데 누나 입장에서는 간절하지 않겠냐.”
“그렇게 사이좋은 남매도 아니야.”
마코는 연기를 뱉으며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천천히 그녀의 차가 있는 곳 까지 걸어갔다. 살금살금 차들이 기어가는 도로의 풍경과 질색을 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틈으로 아장아장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가는 아이가 보였다. 미끄덩 넘어져 곁에 있던 부모가 소스라치게 놀라도 재미있다며 깔깔 웃으며 일어섰다. 몇 살이려나. 6살 혹은 7살. 병원에 가는 것일까 부모의 품에 노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꽃다발을 떠안고 있으랴 아이의 손을 잡아주랴 정신없는 모습을 보며 웃어 버렸다.
“거의 다 왔어. 나 혼자 갈 테니 죽고 못사는 애인한테나 돌아가.”
“됐어. 끝까지 데려다줄게.”
괜찮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마코의 표정에서 전과 달리 망설임이 묻어나왔다. 얼굴에 맴도는 망설임 대신 연구실에서도 사정을 알고 있지만 너무 일찍 퇴근하진 말라며, 팀벨이 눈여겨보고 있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마코는 착한 사람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겐 독하고 날카로운 여자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만큼은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때론 그녀의 얼굴에 맴도는 그 착한 망설임이 미안하고 성가셨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어서. 그녀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뱉어내야만 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두서없는 말에 그녀는 반색을 하며 어떻게 걱정을 안 하는데? 하고 말했다. 어물어물거릴 때는 언제고 날카롭게 따박따박 던지는 단어들이 지나치리 그녀와 닮아 있었다.
“너 거울은 보고 다녀? 네 얼굴 엉망진창이야. 알비가 아니라 네가 곧 죽을 사람 같다고”
“안 죽어.”
“그러니까,”
“안 죽는다고.”
그리고 나도 안 죽어. 잠시 내 얼굴을 보던 마코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눌러 껐다.
“아무도 안 죽으면 그게 세상이니. 천국이지.”
슬프고 냉담한 얼굴이었다. 담담하게 던지는 말들을 주워 담았다. 아무도 안 죽으면 그게 세상이니. 천국이지.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리고 틀렸다. 어쩌면 나는 천국을 살고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아니 지옥이라도 괜찮았을 텐데. 어느 순간에 현실보다 더 현실을 닮은 순간이란 이름이 발치를 어물거렸다. 장난스럽게 말했던 죽을 것 같다는 말들을 더 이상은 뱉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 죽으면, 그러다가 정말 죽어버리면. 떠나가 버리면. 천국도 지옥도 세상도 될 수 없는 어딘가에 떨어져 평생을 울부짖으며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어서 가. 팀벨이 이갈고 있겠다.”
얼음 넝쿨에 발이 묶인 것처럼 말했다. 홀로 가라는 말 대신에 어서 가라고 말했다. 아직 그녀에게 남아 있는 망설임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듯이, 네 마음 잘 알겠다는 듯이. 그 모습에 등을 돌렸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서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저만치 걸어간 아이의 등이 보였다. 부모의 손을 꼬옥 잡고 사방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올려다보는 말간 눈동자도 보였다.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과 커다란 눈송이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 * *
손등을 덮는 넉넉한 손이 좋았다. 그 넉넉한 아귀에 닿는 따뜻한 체온도 좋았고, 서그럽게 미소 짓는 얼굴도 좋았다, 화가 났을 때면 누나처럼 미들네임까지 붙여 부르는 것도 좋았다. 편식 없이 골고루 먹는 것도 좋았고, 보기보다 엉망인 요리 실력과 야무진 설거지 실력도 좋았다. 쇼핑을 갈 때면 물품 리스트가 적어도 카트를 끌고 다니려는 어린애 같은 모습도 좋았고, 아침마다 커피가 없으면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도 좋았다. 때론 서늘하리만치 따박따박 상태를 정리하며 따지려드는 모습마저 좋았고, 종국엔 손을 매만져주며 미안하다 속삭여주는 것도 좋았다. 이불 안이 아니면 관계 맺기 싫어하는 나의 답답한 성격을 탓하기는커녕 폭삭한 이불을 망토처럼 휘두르고 차분히 내려 앉아 꼬옥 안아 주는 것도 좋았다. 피부를 차분히 쓰다듬어 주는 까칠한 손가락 끝도, 원할 때까지 너를 마음에 담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 네 곁에 있을 테니 걱정 말아라 그렇게 속삭여주는 목소리도 좋았다. 모두 좋았다.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나지 못했으면 어찌했으려나. 한번뿐인 인생에, 아니 한번뿐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 번 흩어져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이 순간, 이 시간들 속에서 그를 알지 못했다면 어찌했으려나.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좋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최근 제대했다며, 너도 그를 보면 껌뻑 반할 거라고 마코는 음흉이 손짓을 했었다. 대수롭잖게 군인은 싫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차분히 기다리는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식사 중 쓸모없는 말들은 배제시킨 상태로 담담 조분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또 다시 호감을 느꼈다. 마코가 좋은 사람인만큼 마코의 친구도 참 좋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느꼈던 감상은 어느새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를 넘어 알비라는 이름 안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버렸다.
처음 함께 봤던 영화도, 서로의 집에 발끝을 닿았던 시간도, 조분하게 서로의 감정을 이야기 했던 것들도, 서로의 취직에 기뻐하고, 동거를 결심하고 집을 보러 다녔던 기억들 모두 마음에 남아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맴돌고 있었다. 늙어가는 것도 사라져가는 것도 잊은 채 영원한 줄 알고서 맴도는 행성들 같이 살고 있었다.
병을 끌어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밤에 알비는 소파에 눕듯 앉아 있는 나의 발을 매만지며 말했다. 런던에서 지내보는 것은 어떨까. 너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 했었잖아. 새삼스러운 이야긴 아니었다. 가끔 알비에게 런던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고 누나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다. 누나는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나도 이곳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윤 없었다. 알비가 함께 가주기만 한다면 어디든 상관없었고, 런던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물어야 했다. 왜? 알비는 웃었다. 그 웃음이 평소처럼 편안하고 나긋해서 불안이 밀려 왔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라서 때론 깊은 상처를 주곤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불안을 모를 척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네가 거기에 가 있으면 나는 정리하고 따라갈게. 1-2년 뒤엔 전부 끝날 테고 그땐 새로운 터전에서 편안하게 살자.’
따뜻하게 발을 주무르는 손을 붙잡았다. 거짓말 따위 없다는 깨끗한 눈동자를 보면서, 그 안에 투영된 나의 불안함을 읽었다. 심드렁하게 여기는 드라마나 영화의 신파였다. 스토리도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각들도 전부 부질없는 신파 덩어리들이었다. 알비가 뱉어내는 것들도 전부 터무니없는 로맨스들이었다. 하지만 신파로도 로맨스로도 평할 수 없게끔 내 앞에 던져진 모든 것들은 현실이었다. 현실을 깨달은 나는 알비의 멱살을 붙잡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울며 부탁해야했다. 그것은 누굴 위한 외침이었을까. 내 눈을 감기고 요람에 태워 편안한 거짓의 바다로 떠밀려던 알비에게 였을까, 아니면 날 요람에 태우는 알비의 손을 붙잡아 차차 끌어가려던 어둠에게서 였을까. 상관 없었다. 둘 중 하나 혹은 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러지 말라달란 부탁뿐이었음으로.
내게서 이 넉넉한 손과, 피부를 다독여주는 까칠한 손끝과, 다정한 웃음과, 미안하다 속삭여주는 목소리를 빼앗아가지 말아달라고. 남겨달라고. 그렇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부탁뿐이었음으로. 그뿐이었음으로.
* * *
“친구는 어때?”
“나아지는 중이에요.”
“그 친구 가족이 없다고 했지? 힘들 텐데 고생이 많구나.”
“강하거든요. 금방 일어설 거예요.”
조금은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매부도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속 지나가는 가로등의 불빛은 어떤 별보다 형형하게 제 몸을 태우고 있었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들을 쫓다가 뒤늦게야 누나의 안부를 물었다.
“네 방 정리한다고.”
“제 방 아직 남아 있어요?”
“응.”
“누나가 아기 방 만든다고 했는데.”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기 방을 벌써 만들어. 나중에 차근차근 준비해도 되는데. 너 런던 돌아올 때면 거기서 지내야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낭비에요.”
“때론 그런 낭비가 필요해.”
마음의 공간이랑 똑같거든. 그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직 식 전임에도 그의 손에 끼어 있는 반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그 반짝임을 바라보다가 마음의 공간. 하고 나직이 따라 중얼거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누나는 그 큰집에 홀로 지냈다. 집을 팔고 작은 집을 구하는게 어떨까 했지만 결국은 집을 남겨두는 것으로 결정했다.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지냈던 오래된 주택은 곳곳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길이 묻어나 있었다. 부엌의 타일이며, 마당 울타리에 칠해진 녹색 페인트칠, 욕실 거울에 붙어있는 캐릭터 스티커 따위들. 보면 볼수록 빈자리를 상기시켜 외로움만 그득 남게 될 텐데도 우리 남매는, 아니 정확히 누나는 그것들을 포기하지 못했다. 이것들마저 없애면 정말 아무것도 남질 않는다며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내가 뉴욕으로 떠나고 누나 홀로 런던에 남게 된 뒤에도 그 집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그 집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런던에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알비를 만나게 되며 조금씩 미루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꼭 이곳에 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준비는 끝났어요?”
“끝낸 지가 언젠데. 네 누나나 나나 크게 벌일 생각도 없고 그냥 너랑, 친한 친구 몇몇 그리고 우리 부모님만 있으면 되는 거지.”
“도움 하나도 못되어서 미안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그래. 와준 것만으로도 네 누나한텐 큰 도움이니까. 아닌 척 하면서 계속 기다렸거든. 너희 남매 친하지 않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렇게 서로를 찾는다니까. 하여간 런던 토박이들.”
그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어느새 도착한 거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낯설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연습하던 거리와 어머니가 들던 장바구니를 들어보겠다며 낑낑 걸었던 거리였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벌컥 열린 문틈으로 하얀 손이 뻗어 나왔다. 부둥켜안은 몸에서는 따뜻한 냄새가 났다. 누나는 울었다. 당황한 매부가 울지 말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며 나를 꼬옥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 있었던 마음에 부싯돌이 부딪힌 듯 따갑고 뜨끈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고 울컥 울음이 나왔다. 안간 참으려 했던 눈물이 터져 나와 누나의 목덜미에 파묻어 나도 울어버렸다. 그제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힘들었구나. 나 정말 힘들었어. 무섭고 두려웠어. 지금도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켜켜이 쌓이는 투정은 무섭도록 많은데 단 한마디도 뱉어내지 못하고 그저 울었다.
몇 십분 실컷 울고 난 뒤 우리 남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툭툭 서로에게 인사를 뱉어 매부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준비된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한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했다. 그 사이 매부는 이직을 했었고 누나는 화원을 개업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원체 아버지를 따라 식물 만지는 것을 좋아했던지라 의아함보다는 잘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 다시 한 번 알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고민했다. 마음에 있던 것들을 털어 놓고 싶었다. 아까 전 누나와 부둥켜안고서 가슴 미어지듯 자각했던 것들을 털어 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아질 거야. 강하거든. 금방 일어날 거야.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직전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알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겨있는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혼자야? 그 물음에 아니, 윈스턴이 새벽같이 왔어. 하는 대담이 돌아왔다. 다행이었다.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비행시간은 어땠는지, 피곤하지 않았냐며 물어왔다. 누나와 매부에 대한 안부와 더불어 뉴욕은 다시 눈이 오기 시작했다는 사족도 덧붙였다. 소소한 이야기가 오간 후에 어서 자라는 자장가 같은 인사가 건네졌다.
잘 자, 뉴트. 소곤소곤 전해지는 마지막 말에 알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곧 갈게.’
그래. 어서 와. 알비가 말했다. 머잖아 전화가 끊겼다. 창밖으로는 칠흑같은 어둠이 섞여 있었고 유리에 반사된 나의 얼굴은 조금은 수척하니 우울해보였다. 스탠드를 끄자 어둠만이 놓여 있었다. 어서 오라는 알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엄치고 다녔다.
* * *
날씨가 흐려 아쉬웠다. 누나의 새하얀 드레스로 햇볕들이 데굴데굴 뒹굴었으면 좋았으련만 느닷없이 몰아치는 비바람에 야외 사진촬영은 취소되고 말았다. 빠질 수 없는 날씨에 대한 농담들이 오갔다. 그렇게라도 신랑과 신부를 다독였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듯 수줍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찰칵 휴대폰으로 축사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었다. 사진을 첨부해 메시지를 보냈다. 행복해 보인다는 답장이 곧 날아왔다.
자잘한 행사들까지 마무리가 되고 작은 연회식이 준비 되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준비된 소박하고 따뜻했다. 이리저리 안부를 묻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락을 느꼈다. 간만에 느끼는 감각들이었다. 늦저녁, 손님들이 돌아갔고 모든 것들이 정리된 시간이었다. 신혼여행을 여름휴가로 미룬 누나네 부부는 그들의 여행 대신 나의 배웅을 목적으로 공항에 함께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유리창을 때리는 빗줄기와 바람이 심상치 않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2시간 연착되던 비행기는 이내 결항 소식을 알렸다.
날씨 정보를 검색하던 매형은 소멸될 줄 알았던 태풍이 다시 자리를 잡은 모양이라며 혀를 찼다. 결국 비행기 시간을 재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주 늦저녁은 아니었기에 뉴욕은 새벽녘일게 뻔해 메신저를 남겼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다시 잡긴 했지만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다고. 어서 돌아가고 싶다고. 뉴욕은 아직도 눈이 오는 걸까. 알비는 눈이 내리는 것을 좋아하니 좋을지 모르겠지만 마코는 질색팔색을 하며 짜증을 부리고 있을 터였다. 팀벨에게 잡혀 있는 만큼 그 짜증은 배로 솟아났겠지. 마지막, 이미 자고 있겠지만 잘 자. 문장을 찍어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 * *
아침 비행기도 결항이었다. 눈을 떴을 때 밤 마냥 어둑한 하늘을 보며 글러먹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혹시나 싶었다. 부리나케 공항으로 왔지만 빨갛게 뜨여진 도시명들을 보며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내일 오후부터 잠잠해진다니 그때까지 기다려보자는 매부의 위로를 들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를 쓰담는 누나의 손을 붙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돌아온 답장은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긴긴 신호음이 지나갔지만 받지 않았다. 상담 시간이던가. 식사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다시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불안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제발 받으라는 목소리가 쥐어 짜내지듯 흘러 나왔다. 초초하게 얼어붙은 손끝이 갈 길을 헤매다 마코의 이름을 찾았다. 마찬가지 긴긴 신호음이 흘렀다. 신호음에 따라 마음이 조각조각 나는 것 같았다. 신호음이 끝나며 정적이 흘렀다. 마코.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마코의 흐느낌이 들렸다. 뉴트야? 뉴트인거야? 주변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중 가장 듣고 싶은 목소리는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거지? 잠깐 나빠진 거지? 의사는 뭐라고 하는데? 그렇게 묻고 싶었다. 최악의 축을 무너뜨려 모른 체하고서 그저 잠깐의 고통이라 대답해 달라고 그녀를 윽박지르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흐느낌은 점차 커져갔고, 어떻게 하냐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를 붙잡는 애달픔에서 결국 무너지지 못한 축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싫어. 결국 입 밖으로 꺼내는 말들은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다. 싫다고 정말 싫다고 수 십번을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온몸을 끌어안았다. 끌어안고 끌어안다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냥. 떨리는 온몸을 끌어안은 가운데 다급히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를 품는 것이 느껴졌다. 그 따스한 품에서 내가 알비에게 남겼던 마지막 메시지를 떠올렸다.
* * *
“알비가 그렇게 처리하긴 했지만 억지로라도 진행하겠단 의사는 아니었어. 뉴트. 네가 남고 싶으면 남아도 돼.”
“…….”
“너도 알겠지만 알비는 그냥. 그냥 네가”
“내가”
내가 슬퍼하지 않도록.
나와 알비가 함께 했던 아파트가 팔렸다. 나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대신 남은 것은 더 좋은 터의 더 좋은 아파트였다. 이전 알비에게 저런 곳에 이사 가면 참 편할 거라고, 나중엔 저런 곳에 이사 가자고 말했던 그곳이었다. 대부분이 새것이라서 뉴욕의 아파트에게서 고질적으로 보이는 창문이라거나 가전제품의 공간 문제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식기세척기까지 붙어 있으니 할 말 다했다 싶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기쁠 리가 없었다.
알비는 나도 모르게 자신의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었다.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내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내가 그의 흔적들을 부여잡고 울지 못하도록. 전부 지우고 치우며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슬퍼하지 않도록.
우습게도 알비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에 나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항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리에 앉아 계속 기다렸다. 누나는 연속 자기 가슴을 치면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곳에서 기다려봤자 뭐할거냐고 집에 돌아가서 기다리자고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집은 알비에게서 가장 먼 곳처럼 느껴졌다. 내가 자라온 곳이었고 부모님의 기억이 있는 소중한 땅이었으나 순간만큼은 알비에게서 가장 먼 곳처럼 느껴져서 그 공간에 머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얼음처럼 굳어있는 내 팔을 잡고서 연속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던 누나네 부부는 결국 내 곁에 앉아 비행기를 함께 기다렸다.
정확한 사망 시각으로부터 나흘이 지나던 때였다. 나 하나 때문에 알비의 장례식을 늦출 순 없었다.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장례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알비를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알비는 그 곳에 있는 나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고, 그곳에서 쫓겨나야할 손님이었다. 나는 가장 슬픈 손님이었음으로 초대받을 수 없었다.
장례식을 마쳤다는 전화는 내가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도달했다. 누나네 부부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서 좌석에 앉아 넋을 놓고 있었다. 긴긴 비행시간 동안 너무나도 괴롭고 힘들어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케네디 공항에 착륙하고 나서 알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전화를 받을까봐 일말의 희망으로 그런 짓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신호가 가고 있단 자체가 너무나 이상하고,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해서 연속 그에게 전화를 하면서 마코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병원으로, 그렇다고 알비의 장례식장으로 갈 수도 없었다. 한참 전화기를 붙들고 있을 때 먼 곳에서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와락 안아주는 마코의 온기를 느끼며 연속 누군가의 품에서 울고 있구나 떠올렸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낯익은 기계음을 들으며 한손으로 마코를 꼬옥 안고 눈을 감았다.
“알았을까?”
“응?”
“자기가 그렇게 갑자기 가게 되리란 것.”
차곡차곡 정리된 알비의 박스를 들여다보던 마코가 나를 보았다. 글쎄.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래, 그것은 알비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알고 있었을 것 같지.”
“그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내가 슬퍼하지 않도록. 알비는 애써 이것들을 정리해오고 준비해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장 슬픈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슬퍼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앗아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되었다. 그가 팔아버린 아파트를 억지로 되찾을 생각은 없었다. 유언이 없었으니 이것은 알비의 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빠른 시일에 나의 짐들은 새 아파트로 옮겨지고 알비의 짐들은 사라질 테지만, 그렇다 한들 알비가 내게 잊힐리는 없었다. 그의 바람처럼 그리 쉽게 잊힐리는 없었다.
슬퍼하지 말라하여 더욱 슬플 수밖에 없었던 이 희극은 오롯 나만이 무대 위에 남아 멍청히 서있게 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아 더욱 비참할 이 희극은, 그래, 알비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떠나면 금세 커튼이 내려올 줄 알았을 것이다. 참으로 멍청하게도.
마실 것 좀 사오겠다며 나선 마코를 두고 베란다로 나왔다. 덩그러니 놓인 재떨이에 장초 하나가 눌러 꺼져 있었다. 알비의 것이 아니다. 내가 울다가 남긴 장초였다. 가만 그것을 들어 바라보았다. 변색되어 흉한 몰골을 남긴 꽁초는 제발 좀 자신을 버려 달라 비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럴 수야 없지. 다시 재떨이에 꽁초를 놓고 비스듬 머리를 기대어 창밖을 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어둠으로, 저 끝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걷는 틈으로 익숙한 등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몸을 들어 그 환상을 보았다. 아, 손을 흔들어 줘야 하는데, 마주 손을 흔들어서 보내주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왈칵 다시 따갑게 흘러나오는 눈물에 얼굴을 감추며 꿈속에서처럼 가지 말라고 다시금 되뇌었다. 이 꿈은 깨어나지도 않는다. 식은땀을 흘리며 네게 뛰어갈 수도 없고 위로 받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