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비는 서두는 늘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은 횃불의 빛에 어른거렸다. 나는 그 올망졸망한 눈빛에 올빼미 새끼들을 떠올리곤 했다. 우리는 어떤 생명체들보다 동물 같았다. 날카로운 발톱도 부리도 없는 처량한 동물들과도 같았다. 그러나 알비는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늘 그렇게 말했다.
‘동물이 아니기에 남의 음식을 탐내선 안 된다.’
‘동물이 아니기에 욕심으로 남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규칙을 지킨다.’
어느 날 밤, 나는 단상에서 내려온 알비에게 ‘우리는 동물보다 더 동물 같아.’하고 말했다. 그 소리는 아이들이 움직이는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알비는 그 모든 것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알비의 눈동자는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올빼미 새끼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보다 훨씬 깊고 부드러우며, 또,
‘우리는 보다 동물 같기 때문에.’
나직한 말소리였지만 결코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알비가 가진 능력이었다. 작게 말하든 크게 말하든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의 단어와 그의 표현에는 힘이 있었다.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는 단단하고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 귀를 감쌌다. 그의 표정에 다정함이 흘러넘쳤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양으로 슬픔이 넘실거렸다.
‘나는 모두를 보호해야해.’
내가 그의 손을 붙잡기도 전에 머직하게 걸어가 버렸다. 횃불과 어둠의 공간이 아득하게 섞여 들었다. 자작자작 불이 태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걸음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크게 들리는 소리는 물소리였다. 기이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문득 알비가 그 틈으로 흘러가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주춤하는 발걸음으로 그가 걸어간 곳을 따라 걸어갔으나 얼마 못가 걸음을 멈췄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에 꿈을 꾸었다. 우리가 이곳에 남게 된 뒤로 처음 꾸는 꿈이었다. 알비는 물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검은 물이 차갑게 찰랑이며 그를 삼켜 들었다. 나는 흘러가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
우리는 글레이드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라고 시킨 사람도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이곳을 글레이드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었고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우리에겐 이곳이 전부였다. 물론 지금까지도 전부이자 마지막처럼 여겨지지만 그때와는 의미가 달랐다. 의심할 필요도 없는 마지막 세상이었다. 14살, 어제, 그제, 1년 전과도 비교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눈 아래로 햇빛이 스며들자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멍한 정신머리를 시간의 틈에서 꺼내려 애쓰는데 창문밖에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울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어른들이 몽땅 사라졌다. 마치 모두가 작정한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녁이 되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갈 무렵 무분별하게 먹은 음식에 창고는 비어갔고 아이들은 이성을 잃어갔다. 누군가가 마을 밖으로 나가 어른들을 찾아야 한다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발언에 모두가 엄숙해졌다.
한 달 동안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멍청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했던 말들이 있었다. ‘마을 밖 숲에는 그리버라는 늑대가 있단다. 아니 늑대라기 보단 괴물에 가깝지. 누군가는 늑대같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거미를 닮았다 말하고, 또 누군가는 악마와 같이 생겼다고 말하더구나. 그 괴물의 외형은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것은 마을 밖으로는 나가서 안 된다는 것이지.’ 소년들은 손가락을 걸면서도 그리버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정말 위협적인지, 우리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지. 그따위 것들을 생각했다.
내 또래들 사이에서는 그리버가 허구라는 대화들이 오갔지만 단정적으로 말해 그리버는 정말 존재했다. 그것이 정말 그리버인지는 확답하기 어렵지만, 그리버와 같은 괴물이 숲에 살고 있는 것은 진실이었다. 내가 10살 때 마을의 사냥꾼 3명이 그리버에 찔려 죽었다. 두 사람은 즉사했지만 한 사람은 전염되어 마을 사람들을 위협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게 달려드는 사냥꾼의 머리를 쳤다. 잘려나가는 머리통이 강으로 풍덩 떨어졌다. 떠내려가는 머리를 잡기위해 한 소년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시신 두 구와 또 머리 없는 시신 한구를 처리하고 있는 동안에 소년은 숲 앞에 앉아 흘러들어가는 강물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름뿐 아니라 그가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까지 알고 있었다. 그는 나무를 잘 깎았다. 가끔 통나무 한 토막으로 작은 집을 만들곤 했는데 그 모양이 어찌나 섬세한지 모두들 놀라곤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그의 아버지를 사랑했는지까지 알게 된 참이었다.
소년들이 남게 되었고 누군가 숲 밖으로 나가야 한다 했을 때 절대 안 된다고 소리친 것도 그였다. 숲 밖은 죽음이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소년들은 웅성거렸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진 못했다.
결국 사건은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에 소년 두 명이 사라졌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저녁에 숲으로 들어갔는지 혹은 새벽에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또 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햇볕에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소년들의 비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익숙한 얼굴이 창백한 모습으로 숲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단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턱밑으로 침이 흘렀고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있었다. 전염이 되다 못해 꽤 진행된 상태 같았다. 소년이 닥쳐들려는 때 누군가 앞질러 나갔다. 알비는 마을 소년들 사이에서 꽤 괜찮은 녀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성격이 올곧고 다정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놈이었다. 대부분 그가 가진 것이 고깝게 느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어쩌면 그때에 그가 칼로 죽어가는 녀석의 목을 찌른 행동 또한, 우리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 달 동안 알비는 혼동의 막으로 둘러 싸여 있는 마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계기가 그를 변화하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칼을 들었고 소년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남아있는 목재로 작은 뗏목을 만들었고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그것을 묶었다. 알비와 몇몇이 천으로 둘러 싸여 있는 시체를 뗏목에 올렸다. 알비가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누군가 줄을 끊었다. 그를 태운 뗏목이 강물에 따라 흘러갔다. 우리는 따라 걸었다. 어른들이 만들었던 세 개의 다리를 지나 그의 시신이 숲으로 들어서는 것 까지 바라보았다. 모두가 숲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둠으로 불타는 뗏목이 사라지고 있었다.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발등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모두들 숲 앞에 앉아서 멍하니 어둠을 응시했다. 그때 꼿꼿하게 앉아있던 알비가 입을 열었다.
‘위키드는 좋은 일을 하는 거야.’
우리에게 룰이 생겼다. 그것은 어른들이 만들었던 규칙과 같은 것이었지만 우리의 세계에서 다시금 태어난 것들이었다. 타인을 해쳐선 안 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하며, 숲으로 들어서선 안 된다. 알비는 나무를 잘 만지는 녀석들을 시켜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을 둥그렇게 감쌌다. 울타리는 아주 높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중요한 것은 울타리의 높이가 아닌 존재였다.
‘울타리를 친 이유는 넘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울타리를 보았을 때 규칙을 생각하란 의미지.’
자연스럽게 알비가 우리의 중심에 섰다. 알비가 정했던 규칙과 마찬가지로 알비를 제외한 우리들 간에 규칙이 생겼다. 그를 리더로 인정할 것. 그가 남긴 말에 대하여 생각할 것. 글레이드 내에서 말썽을 부리는 녀석들도 알비의 말에는 마음을 열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알비는 해냈다. 알비는 생존이었다. 우리에게 그의 존재는 생존이었다.
*
마을 중간에는 강이 있었다. 마을의 이름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그 강을 위키드라고 불렀다. 언제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주 넓지는 않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강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강이 넓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뚝을 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은 점점 넓어져갔다. 강물은 생각보다 유속이 있었다. 한번 빠지면 빠져나오기 힘든 정도였기 때문에 물놀이를 즐길 수 있을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강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강이 얼마나 긴지 알 수 없었다.) 숲과 같은 맥락으로 그곳은 아이들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다. 오로지 어른들만이 그곳에서 물을 퍼다 날랐다.
어른들이 사라진 뒤엔 우리들이 물을 퍼다 날라야 했지만 알비는 누구나 물을 푸게끔 두지 않았다. 마을에서 물을 담당하는 녀석 둘을 두고 이 두 녀석 이외에는 강 근처로 다가갈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예외적인 때가 있었는데 바로 장례식이었다. 누군가 죽었을 때 우리는 강 근처에 모여 배가 떠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처럼 나무를 하는 녀석들이 배를 만들고 (엉성한 뗏목은 점차 깔끔한 배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알비가 시신 위로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이 모든 것은 마을 내, 상류에서 시작되어 하류에서 끝이 났다. 배가 떠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배를 따라 뛰었다. 그리고 숲속으로 사라지면 그 자리에 서서 안녕을 빌었다. 이건은 우리 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마을 어른들이 있었던 때부터 시작된 관습이었다. 배가 사라지면 마을의 지도자가 ‘위키드는 좋은 일을 하는 거야.’하고 문장을 뱉었고 그렇게 장례식은 끝을 맺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과정은 우리만 남게 된 이례로 10번 동안이나 이뤄졌다. 놈들은 10번 배를 만들었고 알비는 10번 불을 붙였다. 그러나 놈들이 11번째 배를 만들었던 것과 달리 그는 11번째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
*
러너라는게 있었다. 이것 또한 마을 어른들이 만들어낸 제도였지만 우리 때부터는 조금 의미가 달라졌다. 우리는 숙련되지 않았고 그만큼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시작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 내에서 모든 것들을 자급자족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곡식을 키우는 과정이 그랬다. 풍년의 경우는 괜찮았지만 농사가 망하는 경우에는 대체할 곡물이 필요했다. 우리는 숲 안에 우리가 먹을 만한 음식들이 있단 것을 알았다. 그것도 꽤나 풍족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성이 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하지만 먹을 수 있는 과일등도 많았고 토끼나 멧돼지 같은 동물들도 꽤 있었다. 러너들은 이런 일들을 해야 했다. 채집을 해야 하고 사냥을 해야 했다. 가끔 도살을 맡은 녀석들이 함께하긴 했지만 아주 흔하진 않았다. 많은 인원이 숲에 들어가면 그만큼 컨트롤하기 어려워진다는 알리의 이론이었다.
이렇게만 설명한다면 이전 어른들의 ‘러너’와 같은 제도였지만 우리에겐 다른 것이었다. 우리의 러너들은 어른들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알비 또한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삶을 이어나가기 위하여 일을 하고 공존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흔적처럼 남아있는 어른들의 존재가 있었고 그것을 완전히 잊은 척 살 수는 없었다.
알비의 지시 하에 러너들은 사냥과 수색을 실행했다. 당연하게도 러너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0번의 장례식 중, 러너가 7명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러너들 가운데에서 처음 러너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도 그 일을 해내는 녀석이 있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녀석이었으나 많은 녀석들이 알비에게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녀석을 의존했다. 그가 죽게 된다면 누가 저 숲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냐고 떠들었다. 그는 숲속에서 나오면 바로 알비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넌지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고 물어도 알비는 그저 웃어 보일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연명의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집을 짓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또 누군가는 숲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알비가 있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동물 같기 때문에
그날 밤에 알비가 아이들 앞에서 외쳤던 말과 또 내게 나직이 속삭였던 말은 전혀 달랐지만 결국 같았다. 그것들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생존을 넘어 우리 모두의 생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읽은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렇게 외롭고 고독하다면 생존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읽었다. 그것은 이전에 보았던 위키드의 밑바닥보다 춥고 어두웠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것들을 오로지 끌어안고 있지 않기를, 자신의 안에 있는 따뜻한 것들은 모두 내주고서 차가운 것들만 남기지 않기를, 그의 자리에 내 손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기를. 이것들은 모두 내게 큰 의미였다. 그것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물론 중요했다. 그러나 불가능의 의미가 가치를 깎아내리진 못했다.
사실 그날 저녁에는 10번째의 장례식이 있었다. 알비가 10번째로 불을 붙이던 밤이었다. 불길한 꿈을 꾼 다음날 나는 새벽의 동이 트기 전에 알비를 찾아갔다.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알비는 깨어 있었다. 내 거친 숨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던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잠시 우리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움찔거릴 뿐이었다. 뭉치로 된 어떤 것이 머리와 목구멍을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알비는 적막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고. 그리고 차가운 손으로 내 귀를 감쌌다.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작아졌다.
‘악몽을 꿨어.’
반대쪽 귀로 내 목소리가 들렸다. 한쪽귀로만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쪽 공간으로만 소리를 울려대는 기분이었다. 알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날 보며 웃었다.
‘네가. 위키드로 떠내려가는 꿈이었는데.’
나는. 다시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그래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슬펐어? 무서웠어? 두려웠어?
‘나는. 너무 추웠어.’
그렇게 말하자 한기가 몰려왔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알비는 귀를 감쌌던 손을 내려 등을 토닥였다.
‘뉴트.’
알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보다 더 추위에 떨고 있어.’
어째서 그가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나직하게 하는 말들을 위로를 닮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진실이 담겨 있었다.
‘나는 너보다 두려워하고 있어.’
그는 다정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나보다 훨씬 강해.’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 너는 괜찮을 거야.’
도닥이는 손은 부드러웠고 다정했다. 여태 내게 그의 존재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부드러움과 다정함으로 나를 붙들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서로를 붙들고 있었다. 나의 두려움과 별개로 그의 고독과 외로움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이제야 나는 내가 그것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이였는지 깨달았다. 그가 위로처럼 말했던 것들은 사실 위로가 아닌 완벽한 진실이었으며 정말 그의 말대로 그는 추위에 떨고 있고 또 두려워하고 있으며.
생각보다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나는 괜찮다고.
*
11번째 배는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들었다. 아이들은 어떤 때보다 정성껏 배를 만들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고 튼튼한 배였다. 기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사용한적 없던 향유를 준비했다. 마을 녀석 중 어머니가 사용했던 것이라며 소중히 가지고 있던 것을 선뜻 내놓았다. 우리는 차분하게 장례식을 준비했다. 10번의 장례식과 같이 엄숙했으나 그 엄숙함에는 앞으로의 혼돈과 그에 대한 걱정까지 담겨져 있었다.
‘화장은 진행하지 말자.’
‘안돼. 마찬가지로 화장은 진행한다.’
‘그를 태울 순 없어.’
‘전염이 어떻게 돌아올지 몰라. 어쩌다가 짐승들이 그의 시신을 먹으면, 또 그 짐승을 우리가 사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예외는 없어.’
사실 여태와 달리 예외가 존재함에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 눈에 경멸이 일렀다. 지도자가 죽어 좋은 거라고 뒷소문까지 돌았다. 나를 이해해주는 녀석들은 그런 소문에 말도 안 된다고 악을 질렀지만 이미 많은 문제가 벌어져 있었다. 아마 알비도 이것들을 예상했을 터였다.
그가 죽고 난 뒤에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 그가 모두를 보호해야한다고 말했던 것은 어쩌면 여기까지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마저 고독으로 느껴졌다.
많은 러너들을 잃고 결국 알비는 자신이 러너가 되길 자처했다. 사실 그는 러너로서의 경험이 있었고 잘 수행해냈지만 리더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었다. 그가 숲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그가 돌아올 것을 믿으면서도 가라앉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늦은 시간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았고 아이들이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물음 속에 ‘돌아올 거야.’라는 말을 수 십 번 반복했다.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단념했다.
해가 졌다. 밤중의 숲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 횃불을 켜들고 숲의 입구에 섰다. 얼마가 흘렀을까 흐릿한 형태가 보였다. 아이들은 겁에 질렸지만 입구를 벗어나지 않았다. 형태가 드러났다.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 두 사람을 붙잡았다. 쌕쌕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고 있는 그와 달리 알비는 축 늘어진 채 움직임이 없었다.
우리는 현실 안에 있었다. 단 한 번도 현실 밖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 안에서 끝없이 고통과 어둠을 마주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더욱 깊은 현실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완전하게 죽은 채로 돌아왔다는 것을 감사해하기로 했다. 누구를 위한 감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과정은 내게 너무나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가 전염에 시달리며 울부짖는다면, 내가 그 머리를 쪼개거나 자른다면.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배가 완성된 것은 늦은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장례식을 진행하자는 소리도 있었지만 장례식을 늦추면 늦출수록 모두가 괴로움 또한 늦춰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씩 횃불을 들었다. 알비가 있는 배를 상류에 묶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배의 근처로 가 기름을 뿌렸다. 그리고 그 위에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갑자기 심하게 출렁이는 물결이 배를 덮었고 나 또한 휘청거렸다. 발밑이 쑥 꺼지는 느낌과 하반신을 덮치는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았다. 손바닥을 잡았던 하나의 손이 곧 여러 개로 변해 팔목과 팔뚝을 잡았고 쑥 끌어올려졌다. 지옥에서 끌어올려진 기분이었다. 뭍에서 쿨럭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외쳤다.
‘배가 뒤집혔어!’
고개를 들고 배를 보았다. 말처럼 배는 뒤집혀 있었다. 한 녀석이 서둘러 다시 배를 뒤집었지만 이미 안은 비어 있었다. 나는 다른 녀석이 들고 있던 횃불을 빼앗아 들고 강을 따라 달렸다. 뒤로 나를 따라 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최대한 강에 가깝도록 횃불을 들이 밀었으나 알비는 보이지 않았다. 눈에 흐르는 것이 강물인지 눈물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추위에 살이 도려 나가는 것 같았으나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한참을 달렸다. 우리의 마지막 러너가 내 앞을 질러갔다. 그리고 강 쪽으로 횃불을 내밀었다. 알비가 보였다. 정확히 알비의 일부가 보였다. 검은 물에 둘러 싸여 있는 그의 부분이 난파당한 배처럼 떠올라 있었다. 울컥울컥 눈물이 치솟기 시작했다. 심장부분에서 끌어 올라오는 뜨거운 고통이 온 몸으로 퍼졌다. 우는 소리를 막을 수도 없었다. 모두가 울기 시작했다. 흐느낌이 강을 덮었다. 그만이 우리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건너의 알비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눈앞으로 숲이 드러났다. 검은 그림자의 위용을 내세우며 우리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앞선 그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알비가 숲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를 위해 만든 배에 타지도 못한 채로 따뜻한 불길에 몸을 기대지 못한 채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숲속으로 가버렸다.
추울 텐데. 추워서 힘들 텐데. 정말 너무나도 추울 텐데.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강을 타고, 그 차가운 강을 타고 마냥 흘러갈 그를 생각하니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그의 시신이 화장 없이 흘러갔으니 약 2달 동안 멧돼지를 포함한 잡식 동물 사냥은 없을 거란 선포도, 해산하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휘청거리는 몸으로 들어갈 수 없는 숲의 앞에 서 있는 것뿐이었다.
알비는 자신이 약하다고 말하며 또한 내가 강하다고 말했다. 그래 그럴 것이다. 나또한 인정한 것처럼 그는 외로움과 고독에 자신의 영혼을 풀어 놓았고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가 인정해야하는 것이 있었다. 내가 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존재 때문이었음을. 그가 바로 생존이었음을.
차갑게 식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떨리는 숨을 겨우겨우 진정 시키며 중얼거렸다. 비록 그처럼 담담하며 힘 있게, 나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에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