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척이 허크가 아끼던 만년필을 부셔 놨다. 실제 허크는 그 만년필을 애용하지도 않았고 지니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사치스러워 들고 다니기엔 지나치게 이목을 끄는데다가 묵직한 무게까지 있어 거추장스러웠다. 그는 그런 만년필 보다는 몇 번 쓰고 버릴 수 있는 싸구려 볼펜을 선호했다. 그러나 허크는 그날에 아들을 앞에 두고 화를 냈다. 이 만년필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네가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거냐.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척은 맥스를 끌어안지도 못하고서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회고하자면 그때는 어느 순간 때보다 척이 덜 망나니 같았던 어린 시절이었고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허크 자신은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어느 때보다 더 예민했고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깟 만년필 하나에 하나뿐인 아들을 몇 시간이나 세워두고 꾸중 했을지도 몰랐다.
참 이상하게도 그때가 떠올랐다. 신호가 끊기고 더 이상 아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던 그 순간에 허크 한센은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병아리 같은 머리통이 푹 숙여서니 잘못했다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던 것이. 그리고 그 아이에게 아내가 자신에게 마지막이라고 남긴 것이라고 설득하던 자신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내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것은 그 만년필이 아니라 그 아이였음을 알면서도 결국은 그깟 물건에 연연하며 길고 긴 슬픔을 연장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이에게 상처 줬던 기억들만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서로에게 욕하며 삶을 미워했던 모든 시간들. 오로지 그것들만이 떠올랐다. 전쟁시계가 멈추고 허크 한센이 혼자 있는 시간이 돌아왔다. 그는 차가운 벽에 기대었다. 그는 가슴을 끌어안고 울었다. 뱃속의 커다란 구멍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02.
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단지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03.
‘형을 잃고나서 삶이 두려워졌어요. 내게 있어서 형은 단지 핏줄 뿐만은 아니었어요. 형이 있어서 두렵지 않았어요. 부족하더라도 형이 다 채워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형이 결혼하고 또 내가 결혼하고, 그 이후에 각각 아이들을 낳고 바쁘게 산다 하더라도 형과 멀어질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내가 한동네 옆집에서 살자고 했었던게 기억나네요. 물론 그는 ‘그 나이까지 내가 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진심이야?’하면서 질색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을 거예요. 우린 정말 사이좋은 형제였거든요. 형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잠시 생각을 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 앞에는 작은 버찌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나이를 제법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작았어요. 우리 형제는 그 앞에서 신나게 뛰어놀곤 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그 나무 한그루가 통째로 없어져 버렸더라고요. 헐레벌떡 엄마한테 가서 여쭤보니까 나무가 병들었데요. 안쪽부터 벌레들이 갉아 먹어서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요. 인간으로 치면 암 정도 되겠죠. 그래서 나무가 더 고통스러워하기 전에 뽑아 버렸다고 했어요. 형하고 저는 충격 먹었었죠. 형은 엄마한테 대들면서 그게 강아지나 고양이였으면 그렇게 했을 거냐고 했어요. 형은 그 나무를 정말 좋아했었거든요. 나보다 더 그랬어요. 엄마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에 친절하게 말해줬어요. 대충 이랬던 것 같아요. 가슴 아픈건 알겠다. 하지만 나무의 고통도 생각해야하지 않겠니. 그 나무가 겪었어야할 고통을 네가 조금 나눈 거라고 생각해주면 안되겠니. 그건 너무 어려워서 어렸던 우리 형제들은 이해하지 못했어요. 형이 크고 난 뒤에, 아마 형은 그걸 이해했을 거예요.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형은 그걸 이해하고 있더라고요. 우리의 이게 –웃으며 머리를 툭툭 쳤다.- 연결 되어 있을 때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난 여태 몰랐거든요. 가족들을 잃고 나서도 몰랐어요. 그가 있어서 더 그랬을 거예요. 형이 내가 알 필요 없도록 해줬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형이 그렇게 죽고 나선 그것들을 몇 배 더 처절하게 이해해야 했고요. 상실은 고통을 넘어선 무언가예요. 하지만 그걸 표현 할 수 없으니 그저 슬프다고 할 뿐이죠.’
‘어떻게 견뎠지?’
‘5년을요?’
‘그래.’
‘견딘 적 없어요. 그저 흘려보냈을 뿐이죠.’
04.
허크는 무언가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편백나무로 만든 튼튼한 상자 쯤 되는 크기였다. 하지만 개를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이게 무엇인지 알만한 것이었다. 마지막 사포질을 마치는 그의 손은 거침없었다.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표면을 쓱 쓸어내리고는 가득 따온 꽃을 넣었다. 빨간 꽃, 노란 꽃, 하얀 꽃, 어느새 상자 속에 꽃들이 가득해졌다. 허크는 가만히 작은 꽃밭을 내려다보았다. 아득한 꽃냄새에 잠시 눈을 감았다.
맥스가 노견이긴 했지만 그래도 건강한 편이였다. 전쟁 내내 척은 맥스를 데리고 다녔다. 음식을 굶긴 적도 없었고 운동을 시키지 않은 적도 없었다. 언제나 쓰다듬어주고 예뻐해 주고 사랑해줬다. 그런 사랑을 받으니 아플 일도 없었을 게다. 하지만 척이 죽고 난 뒤 맥스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2년이 안되던 즈음, 잠들 듯 떠나버렸다. 차가운 새벽 허크는 축 늘어진 맥스를 내려다보며 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크는 맥스를 꽃이 가득한 관에 넣었다. 그 사이로 맥스가 꽃냄새를 킁킁 맞으며 깨어날 것 같아 몇 분간 기다렸다. 그러나 맥스는 그저 가만히 잠들어 있었고 이내 뚜껑을 닫았다. 허크는 트럭 뒤로 1인용 보트와 맥스가 누운 관, 그리고 작은 종이 박스 하나를 실었다. 머릿속으로 30분간 운전해야할 루트를 그려냈다. 망설임 없이 시동을 걸었다.
전쟁이 끝나고서 허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쟁 후의 뒤처리에 어느 정도 가담했지만 긴 시간을 투자 하지 않았다. 그는 숲속에 처박혔다. 긴긴 시간을 보냈다. 한번 롤리와 마코가 찾아왔지만 그 이후로는 손님이 없었다. 허크는 혼자가 되어 가는데 매우 익숙해졌다. 그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었다. 작은 보트를 만들기도 했고 가구를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목각 인형을 만들어 소아병원에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자신이 만들었던 이 작은 보트가 이런 식으로 사용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죽음이란 언제나 이랬다. 이럴 줄도 그럴 줄도 몰랐던 것들이 찾아왔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방법 밖에 없었다.
머지않은 곳에 물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호수였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물안개가 가득 끼어 있었다. 트럭에서 가볍게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하나 없이 고요한 혹은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허크는 보트를 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 맥스의 관을 올렸다. 뚜껑을 열자 은은한 꽃향기가 올라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종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엔 아주 자잘한 것들이 있었다. 없어진 줄 알았던 낡은 장난감들, 어린 시절을 찍은 사진, 곱게 접혀 있는 외투 한 벌. 많지 않았으나 적지도 않았다. 작은 것들을 꽃가지 사이에 놓고 낡은 외투로 맥스를 덮어 주었다. 몇 장 안 되는 사진은 상자 사이에 끼워 넣었다가 다시 빼어 속주머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만년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옷가지 사이로 덮었다. 상자 안에는 온통 아들의 것뿐이었다. 맥스조차 그랬다. 허크는 ‘안부 전해줘라.’ 마지막 인사를 하며 뚜껑을 덮었다.
배를 물가로 밀었다. 그의 손이 떠나기 전 한 번에 성냥 대여섯 개를 피워 배로 던졌다. 자글하게 빛나던 불빛이 불길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허크는 배를 띄었다. 배가 점점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롤리 베켓은 견딘 적 없다고 했다. 그저 흘려보냈을 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허크는 메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들을 생각했다. 차갑고 뜨겁게 잠겨오는 온 감각을 내맡겼다. 새파란 새벽은 어둔 밤처럼 느껴졌고 거대한 호수가 그날의 밤바다처럼 여겨졌다. 손가락 사이로 활활 타오르며 사라지는 배 한척을 보았다. 어린 아들이 말했던, 그리고 바라던 바이킹의 장례식이었다. 해주지 못한 것을 맥스에게 대신하며 허크는 이 모든 것을 버티고 있었다. 아니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에 또다시 롤리의 말을 인정했다. 견디고 버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이런 부류의 것들은. 결국 인간이란 연약한 존재라서 견딜 수 없는 것들은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니까. 살아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