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군인들이 나란히 서 경례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빗방울이 그들의 어깨를 추적추적 적시더라도 그들은 군소리 없이 이를 앙다물고 있을 것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전쟁동지들의 마지막 선물을 받으며 그의 관은 소리 없이 내려가고 그리고 그 위로 흙이 덮일 것이었다. 비에 젖어 뭉개진 진흙들이 관위로 툭툭 떨어지고 목사의 마지막 기도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었다. 그중에는 떠나지 못해 엉엉 우는 여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검은 모자를 끌어안은 사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남자는 없었다.
남자는 비 내리는 창가를 가만히 보았다. 빗방울의 검은 그림자가 그의 창백한 얼굴위로 흘러 내렸다. 그의 뺨에 붙어있는 하얀색 거즈가 눅눅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고 가만히 창밖을 볼 뿐이었다. 화상을 입은 다리는 붕대로 둘둘 말려져 희미한 약품냄새를 풍겼다. 의사는 남자가 한동안 병원에 머물며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남자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허락할 수 없다는 의사에게 남자는 답지 않게 소리를 질러가며 당장 퇴원소속을 밟아달라고 했다. 온갖 욕을 다 하는 남자를 막은 것은 결국 그의 형이었다. 그의 형은 의사에게 정중한 부탁 -어디까지나 그의 선에서-을 했고 결국 남자는 모진 몸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엔 많은 비가 내렸다. 눈 대신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은 소름끼치게 차가워보였다. 그의 형은 온통 검은 옷을 입고서 남자를 찾아왔다. 그의 검은 레인코트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모자를 부여잡은 사내의 창백한 손가락을 보며 남자는 ‘비가 오니 나가고 싶지 않아.’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내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내에 입을 다물고 발걸음을 옮겼다.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사라지는 형의 뒷자태에 남자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일말의 고마움이 밀려들었다. 남자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창문을 보고 있던 그는 허기를 느꼈다. 온갖 잡다한 생각과 감정이 밀려옴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사람의 몸이란 정직했다. 남자는 이 공복이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기에 딱히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대신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아픈 다리를 움직였을 때 그는 문가에 기대어있는 초라한 나무지팡이 하나를 보았다. 나무지팡이의 기다란 그림자가 남자의 발치를 묶고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죽을 만큼 외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고통’과 ‘외로움’이란 단어를 입혔을 뿐인데, 그 감각들은 남자를 부여잡고 움직일 수 없도록 했다. 남자는 기다란 그림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혼자란 이토록 괴로운 것이던가.
A Single Man
After 'Ode to a nightingale'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윌터는 나에게 우리 부모님이 더러운 쓰레기들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에게 침을 뱉었죠. 그래서 나는 윌터가 한 그대로 침을 뱉으면서 ‘너는 욕심꾸러기에 먹는 것만 밝히는 돼지새끼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걔가 저한테 달려들었어요!! 정말 웃기지 않아요? 영국 남자는 신사라고 하지만 윌터에겐 전혀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에요. 나중에 세레나 선생님이 오셔서 우릴 말리셨어요. 그게 끝이에요. 걔가 제 얼굴을 할퀴었어요. 보이세요, 선생님? 아빠들은 흉이 질 거라면서 슬퍼했어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요. 선생님. 전 윌터 그 돼지에게 사과할 생각도 없고 또 사과 받고 싶지도 않아요. 기회만 된다면 다시 한 번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요.”
그녀는 거칠게 말을 뱉었다. 작고 어여쁜 아이의 입에서는 믿을 수 없이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수없이 꼬물꼬물 거리는 작은 손과 왔다갔다 정신없이 흔드는 발은 불안함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는 오스카의 녹색 눈을 마주하며 생긋이 웃었다. 사탕 먹겠니? 그녀의 상냥한 말에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7살의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오스카에게 막대사탕을 내밀면서 엘리는 아이가 사탕을 받을 때 어떤 말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아이는 상담가가 내미는 사탕을 부여잡으며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의 부모는 동성애자였다. 정확히 동성애자들이었다. 엘리는 들고 있는 파일을 넘기면서 오스카의 부모에 대한 자료를 훑었다.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자녀를 가지기로 결심할 때 입양을 선택한다. 할리우드의 유명한 배우들의 대부분이 그렇고 일반적으로도 많이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오스카의 부모들은 희귀하게도 체외수정을 성공하고 대리모를 통해 오스카를 낳았다. 신의 축복으로 오스카는 녹색 눈동자와 부드러운 금발을 가지고 태어났다. 녹색 눈은 그녀의 아버지 중 한사람인 제임스와 같았고 금발머리는 그녀의 난자대리모인 수잔과 같았다. 오스카는 제임스의 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라야힌의 딸이기도 했다. 비록 라야힌이 인도인인데 비해 오스카가 완벽한 백인이라 할지라도.
제임스와 라야힌이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 중에 체외수정이후 대리모를 선택하기로 했을 때, 모두의 정자를 이식해야한다는 제임스와 달리 라야힌은 그 조건을 완강히 거부했다. 라야힌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제임스를 설득하며 울었다. ‘평등을 강조한다는 영국이지만 아직 이곳은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난 내 아이가 인종차별에 힘들어 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제임스는 울며 말하는 라야힌을 황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꿈을 꾸더라도, 현실은 사람을 따라 꿈을 꿔주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힘겨운 몇 번의 재시도 끝에 오스카를 얻었다. 제임스의 녹색 눈을 꼭 닮은 아이에게 라야힌은 ‘사슴 같은 친구’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는 백인 딸을 품에 안고 라야힌은 펑펑 울었다.
단것을 좋아하나 보구나? 엘리가 서류를 읽고서 오스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귀여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것은 맛있잖아요. 하고 설탕 같은 발음을 뱉어냈다. 엘리는 이 작은 아이가 학교에서 얼마나 괴롭힘을 받았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졌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아이는 사탕을 입에 물고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때로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강했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여건을 떠나서 아이들은 견디어 낼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가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느낀 것들은 늘 이것이었다. 어른이란 자신이 견딜수 없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쓰러지기 바쁘지만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힘든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자신이 대항해야할지 협력해야할지 알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아이들을 설명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녀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봐라. 어른들은 벌써부터 이렇게 밀어내기 바쁘지 않은가.
“오스카, 선생님은 너의 부모님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단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잼은-오스카는 제임스를 이렇게 불렀다.- 좋은 일들을 많이 해요! 저번 토요일에는 노인정에서 공짜로 할아버지들을 고쳐줬어요. 라쟈-역시나 오스카는 라야힌을 이렇게 불렀다.-는 모두에게 차를 대접했어요. 사실 라쟈의 차는 좀 써요. 하지만 우유와 설탕을 넣으면 맛있어요. 우리 아빠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걸 잘 몰라요.”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게 많단다. 그에 비해 오스카는 참 많은 것을 아는구나.”
그녀가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오스카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엘리는 시간을 체크하면서 이제 곧 오스카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문밖으로 어른어른한 그림자가 보였다. 틀림없이 오스카의 부모일 것이다. 엘리는 오스카에게 ‘오늘은 이만하자구나.’하고 말했고 오스카는 사탕을 입에 문체로 알겠다고 말했다. 엘리는 그런 오스카의 입에서 막대사탕을 빼내며 ‘이걸 빼고 다시 인사해보렴.’하고 말했다. 여전히 엘리의 얼굴은 웃는 낯이었기 때문에 오스카는 그녀의 태도에서 강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스카는 옹알거리는 입술로 ‘안녕히 계세요.’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짧은 키스를 했다. 엘리는 다시 사탕을 물려주며 오스카와 똑같이 아이의 뺨에 키스를 해주었다. 오스카가 의자에서 내려와 문밖으로 향할 때 서류를 살피던 엘리가 오스카를 불렀다.
“오스카, 집 주소가 바뀌었다지 않았니?”
“맞아요! 이사 이야기를 깜빡했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금요일에 와서 말하면 된단다. 그래, 어디로 이사했니?”
“사실 주소를 아직 못 외웠어요. 어제 이사했거든요.”
“저런. 아버지가 밖에 계시니?”
엘리가 그렇게 말하자 오스카는 벌컥 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사이로 장신의 사내가 보였다. 오스카는 남자를 보자마자 화색이 되어 품에 안겼고 남자는 아이를 안아들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찌 닮아도 저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엘리는 부녀의 만남에 미소를 지으면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그녀의 부름에 답하면서 한걸음 안으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게 아니라 주소가 바뀌셨다고 들어서요. 바뀐 주소는 교체해주셔야 하거든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주머니에서 종잇조각을 꺼내었다. 남자 역시 오스카처럼 주소를 외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었는데. 붕어빵 같은 모습에 엘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엘리는 남자에게 종잇조각을 받아들면서 미소로 화답했고 남자는 다음에 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까르륵 웃는 아이를 들쳐 업고 나갔다.
한참동안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오스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남자에게 받은 종잇조각을 펼쳐두고 주소란에 베껴 쓰기 시작했다.
베이커가 221C번지
* * *
221B번지에는 이상한 아저씨가 살고 있다. 언제나 어두침침한 검은색의 옷만 입고 다니는 아저씨는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듯하지만 어떨 때는 일주일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오스카는 학교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라쟈-라야힌의 애칭이었다.-가 있는 가게로 뛰어갔다. 라쟈는 찻집을 운영했는데, 이번 이사를 하면서 라쟈의 가게도 함께 이사를 하게 되었다. 221B번지 1층에 있는 작은 가게였다. 그 건물의 주인인 Mr.허드슨은 3년전만 해도 그의 어머니가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했지만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가게를 그만두어야 했다고 했다. 한동안 이곳에 정육점이 세를 들고 장사했지만 Mr.허드슨의 어머니는 그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은 1년 반 동안이나 비어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오스카는 딱한 번 Mrs.허드슨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굉장히 마르고 창백해 보였지만 정말이지 말이 많았다. 그녀는 너희 아버지가 끓이는 차는 정말 환상적이라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드디어 알맞은 가게가 들어왔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오스카는 Mrs.허드슨을 딱 한번 보았던 그때, 처음으로 221B번지의 2층에 사는 사내를 보았다. 그는 정말 까마귀같이 온통 까만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창백하고 얼음같이 굳어져있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오스카가 기웃기웃 거리자 Mrs. 허드슨은 그는 이곳에 산지 정말 오래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사느냐는 오스카의 말에 허드슨은 그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고 말해주었다. 오스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가 이혼했느냐고 물었고 허드슨은 아주 시원스럽게 ‘그는 독신주의자야. 내 목숨을 그가 단 한 번도 연애 해본 적이 없다는데 걸겠어.’하고 말했다. 참 시원스런 할머니였다.
유감스럽지만 이 시원스럽고 다정한 할머니는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되어 한동안 보지 못했다. Mr.허드슨은 그녀가 시골로 요양을 갔다고 말했으나, 그의 얼굴이 침울한 것으로 보아 그녀의 건강이 회복되어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힘들어 보였다. 오스카는 그녀의 건강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느끼는 동시에 시무룩함을 느꼈다. 그녀 말고는 저 미스테리한 독신남에 대하여 설명해줄 이가 누가 있을까? 한번은 Mr.허드슨에게 2층사는 남자에 대하여 물었지만 그는 별로 설명해주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Mr.허드슨은 사내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듯 했다. 그의 어머니가 남자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던 것과는 달리 말이다.
그러나 이 장난꾸러기 꼬마숙녀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놓지 않았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때도 가끔 그녀는 공책에다 엉성한 그림을 그리면서 ‘까마귀 아저씨.’하고 화살표를 붙여넣었다. 한번은 잼과 라쟈에게 ‘221B번지 2층의 아저씨 본적 있어?’하고 물었더니 제임스는 보던 책을 잠시 때어놓으며 생각에 잠긴듯 하다가 인사는 해봤어. 하고 짧은 말을 꺼냈다. 그나마 라쟈는 몇 번 그를 본적이 있는것 같았다. 한번 가게 청소를 하고 있는데, 유리 너머로 그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오스카는 ‘누구랑?! 어떤 사람이랑?!’하고 달려들며 물어보았으나 라쟈는 잘 기억이 안난다며 설거지를 하러 일어나버렸다. 그에 대한 것은 온통 미스터리였다.
“왜 그렇게 궁금한거야?”
“아빠는 안궁금해? 온통 까만데다가 잘생기긴했지만 얼음같고! 그 아저씨가 사는 집에 들어가면 뭔가 있을것 같아.”
“뭐가?”
“……여자 시체?”
“.........라쟈, 얘 미스터리 드라마라도 시청하는거야?”
“오스카가 보는거라곤 꼬마양이 축구하는 애니메이션 정돈데.”
“아빠, 그건 꼬마양이 아니라 티미(Timmy)야.”
오랜만에 가족의 외식이었다. 평소 오스카가 노래를 부르며 먹고싶다는 파스타를 먹으러 유명 레스토랑 예약까지 했다. 파스타는 아주 맛있었다. 와인 대신 주스를 홀짝이면서 오스카는 녹색 눈동자를 빛냈다. 오스카는 그가 아주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Mrs.허드슨이 있다면 이것저것 물어보겠지만 그녀가 없기에 오스카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오스카는 그가 엄청난 악당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밤마다 사냥을 하러 다닐것이다. TV에서 나오는 나쁜놈들처럼 경찰을 따돌리고 유려한 걸음으로 휙휙 지붕을 넘으면서 고가의 물품들을 사냥할것이다. 그러다가 자신을 가로막는 사람이 생기면 품안에서 까만총을 꺼내어서 탕탕!! 하고 쏠것이다. 총구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연기를 후-하고 불면서 그는-
“우리딸은 대단해, 코로 파스타를 먹는군.”
오스카는 제임스가 자신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쟈가 넵킨으로 코를 닦아주었다. 너무 상상에 몰두한 모양이었다. 라쟈가 건내는 넵킨으로 코를 닦으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둑도 괜찮지만 그는 나이가 있다. 노인네정도는 아니지만 도둑들은 젊어야하는것 아니겠는가! 그는 좀더 쉬운일을 할지도 모른다. 쉬운일이라는게 뭘까. 만날 집에 있다가 어쩌다가는 일주일이나 집을 비운다. ...!! 어쩌면 그는 마피아 보스일지도 모르겠다. 잘 어울리는것 같다. 평소에는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시켜놓고 중요한 일이 있을때만 그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비록 그가 제임스의 책에 끼워있던 옆서의 남자처럼-그 남자는 윈스턴 처칠이었다- 마피아 두목같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요즘은 꽃미남 시대니까, 마피아 두목도 그렇게 생겼을지도 모른다. 저번 라쟈가 봤다는 사람은 아마 부하일지도 모른다. 틀림없다! 그는 마피아 두목이 틀림없어! 그의 집에는 수많은 보석들과 또 칼, 총이 있을것이다. 그리고 아까 말했던것 처럼 죽은 여자의 시신이-
“오스카.”
오스카는 여자의 시신이 널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던중에 자신을 부르는 단호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상상으로 충만해있는-초롱한 눈망울로 라쟈를 올려다 보았다. 라쟈는 그의 까만 눈동자로 안쓰럽게 바라보며 아직도 코에 붙어있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았다.
“코가 터지겠구나.”
제임스는 딸기같이 변해버린 오스카의 코를 보고 킬킬 웃으며 놀렸다.
* * *
밤공기가 제법 차갑게 느껴졌다. 오스카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눈앞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1시. 거리는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가로등만이 젖어 있는 아스팔트 바닥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고 몇 대의 차만이 그 아스팔트를 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오스카는 잠옷에 코트만 걸치고 있었다. 앙증맞은 손에는 빨간 후레시 하나가 있었고 주머니에는 꼬깃꼬깃한 종잇조각이 있었다. 오스카는 주머니에서 종잇조각을 폈다. 그것은 그녀가 그린 지도였다. 오스카는 만족스럽게 지도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온 것이었다.
오늘 오후 1시 오스카는 남자를 만났다. 그것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오스카는 남자의 푸른 눈이 단지 푸른 하늘색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얼음의 눈임을 알았다. 마치 동화 속에서 나오는 나쁜 사람들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해서 가지게 되는 그런 눈과 같았다. 하지만 그 마주침은 정말 한 순간이어서 오스카는 그가 시선을 땠을 때 자신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는 사실이 실제 같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오던 중이었다. 눈이 사락사락 내리기 시작했고 길은 텅 빈 체였다. 며칠째 계속되는 눈 때문에 아이들은 눈싸움도 지친 모양이었다. 일하는 라샤를 보기위해 기웃기웃 거리고 있을 때, 그때 오스카는 남자를 보았다. 메고 있는 회색 목도리와 긴 코트자락이 그녀와 살짝 부딪혔다. 남자는 작은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도 없이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볼 뿐이었고 오스카는 오스카데로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를 뚫어져라보았다. 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이 그렇게 궁금해 하던 남자임을 떠올리는데 과부화가 걸려 한동안 그 얼굴을 보고만 있었고, 이어서 남자가 다른 남자의 부름에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제야 그 남자가 ‘그 남자’임을 알아챘다. 그것은 오스카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에 속했다.
라쟈에게 자랑하듯이 남자에 대하여 떠들자 라쟈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여줄뿐 오스카의 폭발적인 반응을 물 넘기듯이 넘겨버렸다. 오스카는 사실 라쟈의 반응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방을 가게에 던져놓듯이 해놓고 -물론 라쟈의 잔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가게를 나와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기장을 찾아서 정신없이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함께 쓰는 비밀 일기장이었다. 둘이 쓴다는 자체에서 비밀이라는 단어가 글러먹었지만 그녀들은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스카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Dear. Jane이라는 글의 시작과 함께 남자의 존재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남자의 존재는 이 어린 숙녀들에게 수수께끼이자 비밀의 정원과도 같은 미스터리였다. 오스카뿐 아니라, 그녀의 친한 친구 제인도 그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남자가 마피아일지도 모른다는 오스카의 설명에 제인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친구의 동조를 기억하면서 오스카는 흥분으로 가득한 말들을 적어 내렸다.
‘제인, 나 방금 그 아저씨와 부딪혔어. 정말 그 아저씨는 새파란 눈을 가졌어. 이전에 흘깃 봤을 때도 정말 새파랗고 차가운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주하는 눈동자는 훨씬 더 무섭고 차가웠어. 하지만 생각보다 그 아저씨는 잘생겼어! ...음...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우리 아빠 보다는 못하지만 잘생긴 편인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빠 제임스가 정말 잘생겼잖아. 또 그 아저씨가 마피아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할 것 같아. 왜냐하면 그 아저씨는 너무 말랐어! 정말정말 말랐어! 코트를 입고 있긴 했지만, 정말 말랐다고! 휘청휘청 거리는 느낌이었다니까! ... 사실 이전보다 마른 것 같긴해. 예전엔 그렇게 마른 것 같진 않았는데. 계속 저 아저씨를 관찰해봐야 할 것 같아. 사실 정말정말 비밀이지만, 나는 오늘 저 아저씨의 집에 들어가볼 생각이야. 물론 몰래 말이지. 문이 열려있을지는 모르겠어. 닫혀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정말 만일의 경우로 열려 있을지도 모르잖아? 오늘은 꼭 들려보겠어. 그 아저씨의 정체를 꼭꼭 밝힐 거야. 슬프게도 지금 너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는 없지만 (왜냐하면 나는 오늘 계획을 시행 할테고, 너는 내일 이 일기를 읽게 될 테니까 말이야!) 내 마음이 너에게 전해졌다고 믿을게. 사랑하는 나의 친구! 행운을 빌어줘!’
급한 마음으로 적어내린 글은 엉망이었다. 글씨가 삐뚤빼뚤한건 둘째 치고 철자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오스카는 엉망인 일기를 두 번 거들떠보지도 않은 체로 접어 책상에 놓았다. 그리고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커다란 종이 위에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펴놓았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체로 -오스카는 아직 코트도 벗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당연히 남자가 사는 집의 구조 따위는 모른다. 오스카가 아는 것은 남자가 사는 2층은 검은 문이라는 정도다. 검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가 있을 것이었다. 오스카는 라쟈의 가게를 그려놓고 가게 옆에 221B번지의 문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검은 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검은색 크레파스를 들고 문을 그려 넣었다. 화살표로 동선을 그려 넣으면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정해놓았다.
길은 완벽하다. 아주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221B의 현관문은 걱정 없다. Mr. 허드슨은 만날 늦게 들어오는 남자를 위해서 문을 열어놓는다. 그것을 이용하면 될 터였다. 시간은 새벽 1시. 제임스와 라쟈는 11시면 잠에 드니까 자신은 뜬눈으로 1시까지 지새웠다가 그 집을 쳐들어가면 된다. 오스카의 계획대로라면 남자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오스카는 매서운 눈으로 달력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집에서 긴 시간 동안 머무는 주기와, 동시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주기는 일정하다. 만약 남자의 칸트와도 같은 행동력이라면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에 속한다. 오스카는 빨갛게 칠해져있는 오늘의 일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모든 미스터리는 벗겨지기 위해 존재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서 오스카는 걸음을 옮겼다. 내렸던 눈은 이미 녹아 그녀의 발자국을 희미하게 남길 뿐 사락사락 사라졌다. 그녀는 계단위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221B번지의 문을 열었다. 끼익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지만 다행이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닫았다. 내부는 깜깜했다. 벌써 자는건가. Mr.허드슨은 일찍 자긴 하는 모양이지만, 그녀는 주변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후레시를 틀었다. 노오란 빛이 그녀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고 계단을 찾았다. 그리고 계단위로 한걸음씩 아주 조심히 걸었다. 이 건물은 낡아서 끼익 끼익하는 소리가 많이 났다. 그래서 정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정체가 들킬 것이 뻔했다. 오스카는 정말 숨소리도 죽여가면서 계단을 올랐다. 한걸음. 중간에 정말 시끄럽게 끼기긱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이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스카는 안 그래도 죽인 숨을 더욱더 죽여야 했다. 한 3분 동안 그녀는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주변이 고요해지자, 그녀는 작게 숨을 내쉬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한걸음. 그리고 드디어 그녀는 문 앞에 서있었다. 비밀의 방을 앞에 둔 해리포터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오스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세밀한 행동으로. 그리고 그녀의 손에 차가운 금속의 기운이 닿자. 그녀는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정말 움직이듯이 말듯이 말이다. 사실 오스카는 문고리가 닫혀있을거라고 예상했다. 문고리는 닫혀있고 아마도 자신은 또다시 조심스럽게 집을 향할 것이라고. 제임스와 라쟈가 코- 자고 있는 그곳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은 열려있었다. 기적인지 저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스카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랬다. 그녀는 막상 앞에 둔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다. 궁금함도 있었지만 그것을 감당하게 될 자신을 생각하니 그것 또한 조금 두려워졌다. 하지만 오스카는 역시나 오스카였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믿기로 했다. 또 모르지 않는가. 이것이 신이 선택하신 방향일지도. 그녀는 끝까지 돌아가는 문고리를 잡고서 살짝 문을 밀었다. 그리고 문은 끼익-하고 가볍게 열렸다. 안은 깜깜했다. 문을 열어도 보이는 것은 역시나 어둠뿐이었다. 그녀는 그 어둠이 두려워졌다. 예전에 제임스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어둠이 두려운 게 아니고, 어둠속에 있는 무언가가 두려운 법이다’라고. 그녀는 그 말을 자세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한걸음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후레시가 그녀의 발을 비추었다. 바닥에 보이는 빨간 카페트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 빨간 카페트가 원래 빨간 카페트이길, 피로 적셔진 카페트가 아니길. 그녀는 질끈 감은 눈을 다시 뜨면서 앞을 향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후레시를 앞으로 비췄다. 까만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TV가 있었고 창가 쪽에는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테이블은 서류더미로 엉망이었다. 그녀는 한발자국 걸었다. 너머로는 부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과 그리 다른 것은 없었다. 조금 더럽긴 하지만 그냥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녀는 ‘뭐야...’하고 작게 말을 내뱉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에 탁자위의 종이들을 보기로 결심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스카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지만 겁먹지 않고 어서 후레시를 꺼버렸다. 오르지 창문가에서 떨어지는 작은 빛뿐이 그녀의 시야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녀가 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자 발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후레시도 켜지 않은 체로 조금 빠른 걸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조그만 틈으로 열려있던 문을 잡으려던 순간 뒤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정말 죽을 만큼 깜짝 놀랐다. 정말 사람이 놀라면 비명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낮은 목소리는 그녀의 뒤에서 똑같은 단어를 뱉어냈다. 그렇게 크거나 무시무시한 음성도 아니었지만 공포에 잠겨있는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오스카는 빠른 걸음으로 나서려다 발을 헛디뎠다. 몸이 미끄러지듯이 넘어갔고 큰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몸이 떨어졌다. 팔과 머리가 아팠다. 종국에 그녀의 몸이 계단 끝으로 떨어졌을 때, 낮은 목소리는 크게 외쳤다. 여전히 똑같은 단어였다. 여전히 사방은 어두웠고 들리는 것은 그 목소리뿐이었다. 그녀는 공포 때문인지 졸음 때문인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숨겨버리듯이 깨어있던 정신을 잠들게 해버렸다.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에 들은 것은 목소리가 흥분한 듯이 외쳐대는 단 하나였다.
“존!”
* * *
<꿈의 해석>을 쓴 프로이트는 꿈은 사람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재미없는 학자의 이론을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꾼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의미 없는 꿈들 역시나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다는 뜻이었다. 셜록은 그것들이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헛소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꿈은 현실의 여운이었다. 단지 현실 속에서 느꼈던 것들을 뇌가 기억하고 반수면의 상태에서 내비치는 것이었다. 셜록은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것들을 다시 상기시켰다. 꿈은 단지 꿈일 뿐이다. 그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꿈이 욕망이라는 것은 제법 들어맞는 이야기야.”
마이크로프트는 동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깐깐하고 여전히 꼿꼿한 남자였다. 눈가의 주름이 깊어지긴 했지만 그 날카로운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셜록이 한마디 할 때마다 저렇게 딴죽 거는 것 또한 변하지 않았고. 셜록은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마이크로프트의 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계속 이야기 해보라는 뜻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살짝 웃었다. 그는 이런데서 세월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흰머리나, 주름이나, 또한 셜록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서도 세월은 느낄 수 있었지만 조금은 변하는 셜록의 모습 또한 그에게는 세월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매우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서글픈 일이기도 했다.
“동양에서는 꿈을 파는 관습이 있다더군. 꿈을 팔면 그 꿈에서 예지하는 것들을 산사람이 누릴 수 있다고 말이야. 비록하나의 관습일 뿐이지만, 꿈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인간의 욕망으로 보고 있는 거야. 인간은 욕망함으로서 꿈을 꾸니까. 뿐만 아니라 정치가들은 늘 선거 하루전날 선거에 떨어지거나 붙는 꿈을 꾼다고들 하지. 미래를 경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꿈은 그 미래를 경험한 것마냥 나타내겠어. 그건 인간의 욕망이 그려낸 추상 아니겠어?”
“혹시나 해서 들어봤더니 역시나 헛소리군.”
물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 마이크로프트는 속으로 웃었다. 셜록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마이크로프트의 이야기에 대해 반박할 것들을 뱉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셜록은 ‘꿈은-’이라는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마이크로프트는 동생의 신경질적이면서도 논리적인 반박은 전혀 듣고 있지 않은 체로 셜록의 말라비틀어진 몸을 보고 있었다. 역시나 보지 않은 세에 많이 말라있었다. 뺨이 홀쭉하고 턱 선이 날카로웠다. 원래에 마른 동생이라지만 이건 조금 심했다. 셜록의 이런 꼴을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한탄을 하실게 뻔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셜록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셜록은 열심히 프로이트에 대한 이론을 펼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셜록의 입에서 프로이트라, 비록 ‘프로이트는 멍청한데다가 변태’라고 내뱉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자체가 참 의외의 일이었던지라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중얼중얼 말을 뱉는 동생의 눈을 마주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말허리를 자르며 ‘그쯤이면 됐다. 그래, 네 말대로 프로이트가 바보에다 변태인 모양이다.’ 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이랄 것도 없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셜록은 대충 말을 흘리며 항복했다는 마이크로프트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찻잔을 들어올렸다. 독설을 내뱉을 때는 언제고 다시 얌전한 양으로 돌아간 셜록을 보면서 그의 형은 끌끌 웃었다. 그리고 셜록의 허를 찌르듯이 ‘그런데 꿈에 대한 건 왜?’하고 물었다. 찻잔을 붙잡은 셜록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언제 그러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말을 뱉어냈다.
“그가 꿈에 나왔어.”
“누구?”
“존 왓슨 말이야”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마이크로프트를 향했다. 건조함. 마이크로프트는 그의 눈을 보면서 그것을 생각했다. 셜록의 눈은 매우 건조했고 그의 표정은 아무것도 담아 있지 않았다. 마치 ‘오늘 차를 두잔 마셨어.’하고 말하는듯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동생이 동요하지 않는 만큼 자신도 동요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말을 듣자마자 멈춰버린 자신의 손끝은 이미 당황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셜록의 입에서 존의 이름을 들어보는 것은 정말 오래된 일이었다. 오래된 일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마이크로프트는 존의 죽음이후로 셜록의 입에서 존의 이름이 오르는 것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동생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그것도 ‘존 왓슨’,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지칭하는 것과 같이.
마이크로프트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티스푼으로 차를 저으며 ‘그래?’하고 대답했다. 셜록은 대답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마이크로프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갈지. 아니면 다른 대화로 전환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마이크로프트의 고민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셜록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창문가에서 누워 있었어. 찬바람이 불었고 또 정말 추웠지, 그때 짐을 들고서 그가 들어오더군. 그리고서 추운데 누워있다고 나에게 잔소리를 했어. 그리고 창문을 닫아버리더군.”
“그래서?”
“그게 끝이야.”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에게 존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추측하고는 있었다. 존은 셜록에게 있어 첫 의미였다. 첫 플랫 메이트였고, 첫 친구였으며 또 처음으로 그가 마음을 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색하게도 셜록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가 존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존의 죽음이 명백하게 다가올수록 셜록은 존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우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는 듯이 했다. 과거 그가 틈만 나면 존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물론 그가 존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은 존이 셜록과 함께 사건을 다녔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얼음 같았다. 겨울바람에 꽁꽁 얼어버려 다시는 녹지 않을 것 같은 얼음 같았다. 마이크로프트는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서글픔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가 단 한번이라도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그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렇게 말함으로 존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그는 셜록이 무감각하게 모든 것을 부족하고 얼려버리지 않고 -마이크로프트가 그렇다고 유추하는- 사실을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셜록은 존의 이야기 따위는 끝났다는 듯이 자신의 방을 쳐들어온 꼬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을 자고 있었는데, 작은 소리가 들려서 깼다는 것이었다. 도둑인줄 알았지만 그것은 아니었고 셜록이 목소리를 냈을 때, 아이는 저만치 바닥에 떨어져 있었노라고 셜록은 말했다. 그 의미 없는 대화는 셜록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마이크로프트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셜록은 말하고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의무적으로 느끼는 것처럼.
“셜록.”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의 이름을 불렀다. 셜록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그립다고 말해도 돼.”
셜록이 이야기 하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셜록은 작은 아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꺼낸 것이다. 하지만 셜록은 그가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셜록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경박하거나 상대를 얕보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냥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을 뿐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셜록을 보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그의 귓바퀴를 매만짐에 따라 셜록은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마냥 젊었던 동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었고 또 그 흐름에 따라 더없이 딱딱해져가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한 번 반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셜록은 그의 말을 막기라도 하듯이 그를 바라보면서 나직하게 대답했다. 더없이 편안하게
“그리운적 없었어.”
동생의 단호한 대답을 들으며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그래.’하고 대답했다.
* * *
오스카는 진짜 된통 혼났다. 얼마나 혼났냐면 평소 화를 내지 않는 라쟈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정도로. 라쟈는 매는 들지 않았지만, 오스카는 그것보다 그가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더 무서웠다. 오스카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가 아주 띵하게 아팠다. 뒤통수를 만지니 무언가 부풀어 올라있었는데 이후에 그게 혹이란 것을 알았다. 라쟈는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제임스는 엄한 표정으로 Mr.셜록이 오스카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말했다. 그것도 기절한 오스카를 안아서 말이다. 잠에 빠져있던 라쟈와 제임스는 혼이 쏙 빠질 정도로 깜짝 놀라 오스카를 받아들었다. 기절해버린 오스카를 안고서 라쟈가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자 셜록은 ‘기절한 거니 곧 일어날 겁니다.’ 하고 쌩하니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이후에 뒤늦게 제임스와 라쟈가 ‘감사합니다!’하고 외쳤으나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오스카는 딱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와 진짜 쪽팔리다.
제임스가 이야기 해주는 것을 들으면서 기가 죽을 만도 햇것만 오스카는 기가 죽긴 커녕 침대를 때굴때굴 구르며 쪽팔려 죽겠다고 발광을 했다. 오늘 제인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오스카가 때굴때굴 구르며 부끄러워하고 있을 동안 제임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성의 기미라곤 보이지도 않았다. 라쟈가 손님을 맞이하러 가게에 내려갔을 때 제임스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 은근슬쩍 딸에게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길 간 거야?’하고 물었다. 사실 제임스는 오스카가 대체 왜 그곳을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저번부터 과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남의 집에 쳐들어갈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줄은 몰랐다.
오스카는 그나마 자신에게 관대한 제임스를 올려다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오스카는 정말 궁금했을 뿐이었다. 온통 미스터리에 싸인 이 아저씨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을지. 그리고 자신이 상상한데로 마피아 두목은 아닐지. 그 집 카펫에는 죽은 여자가 쓰러져 있을지 아닐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오스카는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으면서 ‘그냥.’하고 대답했다. 웅얼거리는 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제임스는 안타까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라쟈가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면서 조심해서 행동하라고 언질을 놓았다.
오스카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제임스는 그런 오스카를 말리면서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 제임스의 말이 의아한지 오스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오스카의 입에서 헉! 소리가 나왔다. 벌써 12시가 지나있었다. 제임스는 자신은 오늘 오후 출근이어서 이렇게 늦게 가는 거라고 말하며 좀 더 누워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오스카는 침대에 털썩 앉으면서 나가려는 제임스를 불렀다.
“아빠, 나 왜 안 깨웠어?”
“머리에 그만한 혹을 달고 학교가려고? 아서라. 오늘은 집에 있으면서 라쟈한테 애교 좀 떨고 있어.”
“라쟈가 저렇게 화났는데 어떻게 애교를 떨어.”
“이럴수록 애교를 떠는 거야. 아빠 다녀올게. 이리와 뽀뽀해줘야지.”
오스카는 쪼르르 달려가서 제임스의 품에 안기며 뺨에 키스했다. 딸을 꼬옥 안아준 뒤에 제임스는 방을 나섰다. 현관을 닫고 나가는 제임스의 등을 보면서 오스카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가게에 나가면 라쟈가 무서운 눈으로 보겠지. 그것은 싫은데. 하지만 집에 있기는 싫고. 오스카는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할 것을 생각했다. 차라리 제임스의 병원을 따라간다고 할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가버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앙상한 가지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파자마를 벗어던지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입으면서 등 부분이 아파서 몇 번이나 움찔움찔 거렸다. 머리에만 혹이 난 것이 아니고 등 부분에도 멍이든 모양이었다. 오스카는 옷을 갈아입고 신발까지 갈아 신으면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머리를 빗지 못해 엉켜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가게 뒷문으로 라쟈가 전화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내려가면 들킨다는 생각에 난간에 숨어서 라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쟈가 전화를 끊고서 한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오스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후다닥 남은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그리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빙판이 있어 미끄러질 뻔 했지만 중심을 잘 잡아서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옆집을 향했다. 221B ‘아마 내가 결혼한 뒤에도 이 사건은 잊을 수 없을 거야.’하고 오스카는 중얼거렸다. 오스카는 221B의 문 앞으로 다가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오스카의 노크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랬을 것이다.- 오스카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끼익 열렸다. Mr.허드슨은 관리가 소홀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있는 바깥과 달리 안은 따뜻했다. 들어가자마자 놓여있는 계단에 오스카는 두리번거릴 세도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어제 여기서 떨어진 거겠지. 제법 높은 높이에 잘도 굴렀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조금 열려있었다.
“여기에 공주님은 없어.”
오스카는 귀를 찌르는 낮은 목소리에 움찔했다. 한동안 그녀는 가만히 서 있다가 문을 살짝 밀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밀리고 쇼파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오스카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도모양을 한 자세로 눈을 감고서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팔에는 이상한 스티커 같은 것이 많이 붙여져 있었다. 오스카는 그녀의 녹음 같은 눈동자를 빛내면서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남자는 그녀의 눈빛을 느끼는 모양인지 그 자세 그대로 눈을 떴다. 그의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같이 흔들거리는 것은 참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오스카를 보았다. 손모양은 그대로였다. 밖은 이렇게 밝은데 남자의 집은 왜 이토록 어두운 것일까. 그녀는 창문의 빛을 의지해 어스름하게 있는 남자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공주님 때문에 온 것 아니에요.”
“그럼?”
“아저씨한테 사과하러 왔어요.”
“무엇을?”
“가택침입이요”
그 작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입술 한쪽 끝을 올렸다. 오스카는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잘못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변명하듯이 남자의 앞에서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궁금해서 그랬어요. 아저씨는 일주일동안 집에만 있다가 또 일주일동안은 집에 들어오는 않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Mrs. 허드슨은 아저씨가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당신이 꽤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반면에 Mr. 허드슨은 아저씨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질 않아요. 제가 아저씨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다지 좋은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거든요. 저는 가끔씩 아저씨가 밖에서 다른 아저씨랑 만나는 걸 봤는데, 저는 그게 아저씨 부하라고 생각했어요. -이 부분에서 셜록은 더욱 눈빛을 빛냈다.- 전 아저씨가 마피아라고 생각했거든요.”
“마피아?”
“네, 그래서 아저씨 집에 죽은 시체들이 쌓여있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네요. 그녀는 말끝을 맺으면서 옆에 있던 카페트를 툭 찼다. 남자는 퉁명스러우면서도 할말 다 하는 이 아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과하러 왔다고 해놓고서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나 없다. 남자는 자신의 팔에 붙어놨던 니코틴 패치를 하나씩 때면서 ‘확실히 공주님을 찾으러 온 것 같진 않군.’하고 말했다. 오스카는 입을 삐죽하게 내밀고 한쪽 발을 흔들흔들하다가 종국에 ‘죄송해요. 진짜 궁금해서 그랬어요.’하고 말했다. 마치 제가 궁금한 건 잘 못 참으니까 알아서 봐주세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니코틴 패치를 때서 탁자위에 내려놓더니 어둠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파란 눈동자를 그녀에게 고정했다.
“게이 부부 밑에서 자라는 여자아이들은 특히나 제멋대로 자라는 경우가 파다하지. 공주님에 대한 환상은 다른 여자애들 못지않게 거대하고. 그건 게이부부 밑에서 입양된 여자애들은 보통 외동딸인 동시에 적당한 여성모델을 찾지 못해 ‘디즈니 월드’에서 모델을 정하기 때문이야. 넌 공주님에 대한 환상은 없는 것 같아도 제멋대로라는 점에서는 어쨌든 일반적인 영역에 들어가는군.”
‘타인에게 사과를 할 땐 정중히, 똑바른 이유를 담아 하는 것이 좋아. 너처럼 변명만 하다가 대충 말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말이 끝났을 때 오스카는 눈을 깜빡깜빡 거리며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곧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자의 예상과 달리 아이는 ‘아아 그래요? 알았어요. 참고할게요.’하고 말을 툭 던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이겠다는 듯이 배꼽 손을 해보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남자는 아이에게서 눈을 때지 않고서 가만히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히다.
“제가 아저씨 집 마음대로 쳐들어와서 여자시체 찾아서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시면 제가 성은이 망극할 것 같아요.”
그리고서 고개를 들더니 제법 매서운 눈으로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하나 말씀 드려야겠네요. 저 입양아 아니에요. 정확히 저희 아빠의 수많은 정자 중 하나가 만들어낸 결실이 저거든요?”
알고서 쓰는 건지 모르고서 쓰는 건지. 앙큼한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에 남자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앙칼지게 바라보는 눈은 당최 사과를 하러왔다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아이의 잘못에 대해서 한수 가르쳐주려던 남자는 되레 얻어맞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이아이랑 싸워봤자 자신에게 이득 될게 뭐가 있냔 말인가. 고작 7살 난 여자아이랑. 비록 남자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상식선을 벗어난 짓들을 많이 저질렀지만 이 여자아이를 상대로 그런 일들을 벌리기엔 어쨌든 어른이었다. 남자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에게 사과를 받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멋대로인 아이가 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는 나가기는 커녕 남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남자의 곁에 살포시 앉는 것이 아닌가.
남자가 오스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너 거기서 뭐하는 거냐’라는 눈빛으로. 아니는 남자의 눈을 그대로 마주하면서 ‘아저씨 이름이 뭐에요?’하고 물었다. 그 물음은 아까전의 앙칼짐과 달리 퍽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것이었다. 마치 탈을 벗은 연기자 같았다. 남자는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미묘한 얼굴을 하더니 ‘셜록 홈즈’하고 말했다. 셜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스카는 ‘직업이 뭐에요?’하고 물었다. 셜록은 이름을 말했을 때랑 똑같은 얼굴로 ‘자문 탐정’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오스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저씨 탐정이에요?!’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 작은 손으로 그랬구나! 하며 박수를 짤깍짤깍 치는게 아닌가. 혼잣말로 탐정이라면 여태 아저씨의 행동들이 이해가 간다느니 아저씨랑 자주 이야기하던 그 아저씨는 경찰이 틀림없다니 하며 -그것은 놀랍게도 올바른 추측이었다.- 흥분한 얼굴을 했다.
“질문 더해도 되요?”
“하나만 해.”
“두개만 할게요.”
셜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를 마시기 위해 포트를 찾았다. -원래 쓰던 빨간 포트가 있었는데 녹이 슬어 버렸다. 셜록은 집안에 뒹굴던 포트가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워낙 잡다한 물건들이 산더미가 되어있어 쉽사리 포트가 보이지 않았다. 셜록이 바닥에 놓여있는 쿠션을 뒤지고 담요를 뒤지고 책상위에 서류를 뒤지고 있을 때, 아이는 어떤 질문을 던질까 고민하는 듯 했다. 셜록은 책상 의자에 놓여있는 포트를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포트의 열을 방지하는 플라스틱 손잡이 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이렇게 되면 물이 끓어도 포트를 만질 수가 없다. 셜록이 차를 마시기를 포기하고 포트를 내려놓았을 때 오스카는 질문을 정했다며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셜록에게 질문을 던졌다.
“존이 누구에요?”
순간 셜록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돌아있는 탓에 오스카는 셜록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등이 어떤 미동도 없이 돌처럼 서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질문을 다시 회수할 수 없었다. 셜록이 그대로 멈춘 상태에서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지?’하고 물었다. 굳어있는 그의 몸과는 달리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낮고 근사했다. 그래서 오스카는 그 이질감에 망설이지 않고 셜록의 물음에 답했다.
“아저씨가 어제 날 그렇게 불렀잖아요.”
“널 부른 게 아니야.”
“그럼 누굴 불렀는데요? 존이 누구에요?”
“난 그런 이름 부른 적 없다.”
셜록이 마지막 대답을 하며 몸을 돌려 오스카를 보았다. 그의 몸에 걸쳐있는 보라색 실크 가운이 움직임에 따라 살랑이며 움직였다. 적나라한 햇빛을 밟고 있는 셜록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하고 연약해보였다. 그러나 그 대답만큼은 굳건하고 확고하여 오스카는 마지막 자신이 들었던 소리가 어쩌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스카는 정신을 잃기 전에 확실히 그 이름을 들었었다. ‘존!’하고 크게 외치는 그 애절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를. 하지만 남자는 그런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오스카는 ‘아니에요. 제가 들었어요.’하고 말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난 그런 말 한 적도, 그런 이름 부른 적도 없다.’하고 대답했다.
“그럼 몰라요? 존이라는 사람?”
“....세상 천지에 깔린 이름이 존이야.”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아저씨는 모르는 거죠?”
오스카가 물음을 던졌다. 셜록은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망설인다거나 생각한다기보다는 마치 그냥 시간이 멈춰있어서 남자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렀을 때 셜록은
“모른다.”
하고 대답했다. 오스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셜록은 어서 마지막 질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녀를 재촉했다. 셜록은 아주 귀찮아 보였다. 게다가 그는 포트를 사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오스카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셜록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소파위에서 훌쩍 내려왔다.
“아저씨 집에 놀러 와도 되요?”
“내가 어떻게 대답할 것 같지?”
“안된다고요.”
“맞아. 안 돼”
내려놓았던 포트를 들고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쓰레기통이 덜덜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오스카가 눈을 빛내면서 셜록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포트 많아요. 아빠가 차를 팔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차를 더 많이 마셔요. 아저씨가 원하시면 제가 지금 포트를 가져다 드릴수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좋은 차도 가져올 수 있죠. 우리 아빠가 파는 차는 쓰리랑카에서 직접 재배하는 품질 좋은 찻잎이에요. 다들 우리 집 차가 맛있다고 말해요. 물론 아저씨께서 원하시면 그 찻잎도 제가 가져올 수 있어요. 어때요? 이정도 조건이면 괜찮지 않아요?”
* * *
“아저씨 티미 닮았어요. 티미.”
“....티미?”
정확히 셜록은 오스카의 당돌한 제안을 거절했다. 마치 기회삼아 어린아이를 등쳐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셜록은 제안을 단박에 거절하고서 어서 나가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훌훌 털고서 셜록의 방을 나갔다.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셜록이 만났던 어린아이들 중에서는 가장 영악한 아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런 아이들을 몇 번 본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생각해보기로는 어쨌든 그러했다. 순순히 물러가나 싶었지만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셜록이 노크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조금은 익숙한 인도남자가 셜록을 바라보며 ‘Mr. 홈즈, 저... 감사인사 하려고요.’하며 들고 있는 찻잔과 티 포트와 그리고 약간의 간식이든 쟁반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 남자의 다리에 붙어있던 아이가 방긋 웃으며 ‘우리 아빠 차는 정말 맛있어요.’하고 대답했다. -여담이지만 오스카는 정말 혼날 각오를 하고 라쟈에게 찾아갔지만 생각 외로 라쟈는 부랴부랴 차를 준비하며 어서 가자고 말했다.- 두 부녀에게 나가라고 말하지도 못한 체로 셜록은 반갑지 않은 이방인들을 집안으로 들여야 했다.
아이의 말대로 차는 매우 좋았다. 품질이며, 향이며, 맛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차를 마시지 못해 짜증이 났던 셜록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차가 있는 그 상황에 만족했다. 자신을 라야힌이라고 말하면서 옆에서 차(茶)를 팔고 있으니, 가끔 들려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작은 성의지만 받아달라며 최근에 들어온 신상품을 셜록의 앞에 내려놓았다. 셜록은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이 모녀가 자신의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셜록이 ‘제게 왜 이런 선물을 주시는지 모르겠군요.’하고 말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쓰윽 응시하자 라쟈가 멈칫하고 다시 하하 웃으면서 ‘저희 딸을 구해주셨잖아요.’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곁에서 얌전하게 쿠키를 먹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다.
“아저씨 티미 몰라요? 까만색 양인데. 정말 귀여워요.”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가 해를 끼쳐서 죄송하다며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민망함과 동시에 단호함이 서려있어서 셜록은 자신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우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부모 밑에 이런 아이. 딱히 나쁜 소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오스카의 돌발적인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면서 여전히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어중간한 상황에 셜록은 머물러 있었다.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라야힌이라는 남자는 어떻게든 이야깃거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셜록은 맞장구 대신에 늘 그렇듯이 침묵하며 가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라야힌은 정말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가끔씩 오스카가 라야힌의 말에 보태면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다. 지극히 어린아이 같은 대답이었다. 시간이 30분정도 흘렀을 때 남자는 가게로 돌아 가봐야겠다며, 비어있는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셜록은 예의상이라도 남자를 마중하기 위해서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 말쑥한 셜록의 자세에 라야힌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오스카는 라야힌의 뒤를 따라가면서 셜록을 마주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내일 와도 되요?’
하고 물었다. 곁에 있던 라야힌이 ‘오스카!’하고 불렀으나 오스카는 왜 부르냐는 듯이 그냥 눈만 껌뻑거리다가 다시 셜록을 올려다보았다. 셜록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 보다가 종국에는 ‘마음대로해라.’하고 말했다.
“이렇게 생겼어요. 얼굴은 까만색이고. 털을 하얗고. 귀가 길고. 눈은 커요.”
“난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음...그려놓고 보니 그러네. 그냥 분위기가 닮았다는 거예요.”
“분위기도 별로 닮지 않았어.”
셜록은 직접 그린 그림을 내미는 오스카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스카는 학교가 마치면 늘 가방을 던져놓고서는 셜록의 집으로 찾아왔다. 어떤 때는 셜록이 없어 문이 굳게 닫혀있었지만 대부분 그는 집에 머물러 있었다. 오스카가 노크를 하며 문을 벌컥 열면 셜록은 신문이나 책을 읽고 있었고 아니면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감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스카가 셜록에게 사과하러왔던 날 그러했듯이- 셜록은 찾아오는 오스카를 박대하지도 그렇다고 환대하지도 않았다. 오스카는 그저 셜록의 옆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따라서 동화책을 읽었다. 그리고 심심하면 TV를 켜고 만화를 보곤 했다. 셜록이 차를 마실 때면 옆에서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놀랍게도 우유는 셜록이 데워다주었다.- 한번은 오스카의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서 오스카를 데리러 셜록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미안하다면서 떼를 쓰는 오스카를 억지로 데리고 나가려고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셜록은 그 낮은 목소리로 ‘상관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제임스가 ‘네?’하고 깜짝 놀라서 다시 반문했을 때 셜록은 ‘오스카가 이곳에 있어도 상관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억지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었다. 셜록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오스카는 뛸 듯이 기뻐했다.
여느때처럼 오스카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셜록의 집으로 뛰어왔다. 셜록은 신문을 방금 나갔다 들어온 모양인지 눈이 쌓인 코트를 입고 있었다. 카페트 위에서 코트를 벗으려는 셜록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오스카는 ‘안돼요!!’하고 말했다. 셜록이 물음표를 띄우면서 그대로 멈추자 오스카는 셜록의 손을 잡고 방문 밖으로 나오더니 ‘여기서 털어야 해요! 거기서 털면 카페트가 젖는단 말이에요!’하고 말했다. 셜록은 어린애 주제에 꼬장거리는 아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착한 강아지처럼 코트를 벗어 그곳에서 눈을 털어냈다. 그리고 방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렸다. 창밖을 바라보자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눈이 쌓여 잘 녹지도 않은 계절이 온 것이다. 오스카는 눈싸움을 좋아했지만, 저번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린 이후로는 잘 나가 놀지 않았다. 그녀는 셜록의 옆에서 얌전히 그림을 그렸다. 셜록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렸던 까만 양에게 색칠을 해주면서 캐롤을 흥얼거렸다. 가사도 음정도 엉망이었지만 그녀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셜록의 곁에 있는 게 좋았다. 처음에는 그냥 이상한 아저씨에다가 재미있어 보여서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이 아주 편하게 느껴졌다. 이전 허드슨 부인은 그가 젊었을 때는 성질도 괴팍한데다가 성미가 급했다고 했지만 -정확히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싸가지가 바가지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퍽 침착해졌다고 했다.
오스카는 젊은 시절의 셜록을 모르지만 어쨌든 셜록이 편했고 그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셜록은 오스카가 동화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알려주었고. 가끔씩은 오스카가 졸라서 사건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너무 잔인한 사건이나 아이가 들어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들은 쏙쏙 빼놓고 이야기 해주었다. 셜록이 이야기 해주는 사건들은 퍽이나 재미있어서 오스카는 집에 돌아간 뒤에 저녁상에서 셜록에 대한 이야기를 제임스와 라쟈에게 해주었다. 제임스와 라쟈도 퍽 놀란 눈치였다. 여담이지만 라쟈는 Mr.홈즈는 정말 근사한 것 같다고 말하며 오스카와 수다를 떨었다. 특히 그의 파란 눈동자가 정말 아름답고, 그 낮고 깊으면서 심장을 짓누르는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근사하다고 했다. 그것에 질투한 제임스는 ‘참을 수 없으면 어쩔 건데!?’하면서 삐진 척 굴었지만 그 역시 셜록이 근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셜록은 제임스와 라쟈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그것은 단지 나이가 들었다고 설명하기보다는, 그의 곁으로 세월이 맴돌았다는 표현이 어울렸을법했다. 셜록은 참 신비한 사람이었다.
“뭘 그리는 거지?”
“이거요? 이거 몰라요?”
“……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갈색 비행기 같은데”
“맙소사! 이건 새에요!!”
셜록이 썼던 안경을 내려놓으면서 오스카의 그림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가까이서 봐도 그다지 새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비행기야 이건.’ 셜록이 중얼거리자 오스카는 깔깔 거리며 ‘새라니까요!’하고 말했다. 사실 오스카는 자신이 그림에 퍽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너무 심각하게 비행기라고 말하는 셜록이 우스웠을 뿐이었다. 오스카는 셜록에게 그림을 받아 들면서 다시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나이팅게일이라는 새에요.”
“....나이팅게일?”
네. 하고 오스카가 말했다. ‘나이팅게일은 갈색의 작은 새에요. 동양에서는 ‘밤꾀꼬리’라고도 불린데요. 오늘 수업시간에 배웠어요. 공작도 배웠고 까마귀도 배웠고 물총새도 배웠지만 나이팅게일이 제일 예뻐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까마귀 같아요. 만날 까만 옷만 입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오스카는 깔깔 웃었지만 셜록은 오스카의 웃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오스카의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색연필로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갈색 새는 곧 셜록에게로 날아들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셜록은 침묵하며 오스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셜록을 이상하게 여긴 모양인지 오스카가 셜록을 불렀다. 셜록이 그림에서 시선을 때며 오스카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경을 다시 끼고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그림 드릴까요?”
“........”
“음, 하지만 옆에 티미가 있으니까 제가 다시 예쁘게 그려드릴게요. 제가 드린 그림은 벽에다가 붙여 놓으세요!”
셜록은 아무 말도 없었고 끄덕임도 없었다. 그러나 오스카는 스케치북을 넘겨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그렸던 그림보다 더 정성스러웠다. 덕분에 셜록이 비행기라고 착각했던 그림보다는 훨씬 더 양호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갈색으로 색칠할 때는 선 밖으로 삐져나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셜록은 무관심한척 신문을 보면서도 아이의 그림을 힐끔 힐끔 쳐다보았다. 오스카는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이내에 전부 완성했는지 오스카는 새를 그린 종이를 부욱 찢더니 셜록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이건 걸작이에요!’하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림속의 새는 가만히 있는데 새도 아닌 오스카가 짹짹 거렸다. 셜록은 느긋하게 아이의 그림을 받아들더니 책상 서랍에서 핀이 담긴 통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벽에다가 그림을 걸었다. 한발자국 떨어져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언제 따라왔는지 오스카가 그 옆에서 ‘Brilliant!!'하고 소리쳤다. 박수를 깔짝깔짝 치는 오스카를 보던 셜록은 다시 시선을 그림에 고정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 하고 작게 읊조렸다.
이후 오스카가 돌아간 뒤에 마이크로프트가 찾아왔다. 그가 들어오든 말든 셜록은 움직이지도 않고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매정한 동생을 향해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보라색 벽에 걸려있는 묘한 그림을 보았다. ‘뭐야 비행기?’ 그렇게 말하며 마이크로프트가 그림 앞으로 섰다. 그리고 다시 동생에게 ‘이게 뭐야?’하고 물었다. 셜록은 신문에서 시선을 때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