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살, 호텔의 작은 유리창 너머로 새벽빛이 쏟아 들어왔고 술루는 그것들을 온전히 맞고 있었다. 새벽빛이 떨어지는 그 공간만큼은 마치 시간에 바래버린 사진과도 같아 보였다. 그녀는 울다 지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확인하고 술루는 조심스럽게 침대위에서 내려왔다. 그의 빨간 꽃무늬 원피스 자락이 술루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술루는 파란 빛이 닿은 카펫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곳에 손을 집어넣었다. 12살 소년의 밀빛 손이 새파랗게 변했다. 손목이 댕강 잘려버린 것 같았다. 잘린 손만이 세월에 퇴색하지 않고 그 안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 같았다. 술루는 그 빛속으로 몸을 우겨넣었다. 평행사변형으로 떨어지는 파란 빛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12살,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호텔. 그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 솔직히 말하자면 술루는 자신이 이따만큼의 관심을 받는 것이 불합리 하다고 생각했다. 체콥은 끊임없이 술루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헌신했다. 그가 그렇게 술루에게 애정을 퍼부을수록 술루는 스스로가 연인을 ‘덜 사랑한다.’고 느꼈다. 비록 그것이 상대적인 차이였다 할지라도 술루에게는 불편한 이야기였다. 가끔씩 술루가 농담처럼 조금만 덜 좋아해봐.하고 말할때면 체콥은 불편하게 젓가락을 잡고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안에는 상처도 미움도 없어서 술루는 목이 메는 것을 느껴야했다.
# 체콥은 상냥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애정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신이 줄 수 있는 애정을 주는 부류였다. 그것은 요즘 같은 세상에 보석처럼 귀한 존재임을 증명했다. 술루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루는 연하 남자 친구가 얼마나 자신을 배려하고 따르는지 명백하게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술루의 짐은 점차 무거워졌다. 자신은 그가 배려해주는 만큼 배려해 줄 수 없었고 그가 주는 사랑만큼이나 베풀 수 없었다. 그가 싫었다거나 힘들게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분명 힘들게 여겨지긴 했다. 그저 그가 싫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술루는 체콥을좋아했다. 모두가 칭찬하는 그의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다만 그것이 체콥이 자신에게 주는 것들이 비해 너무 작음을 인식 했을 뿐이다. 술루는 인생의 모든 것은 자기의 분수에 맞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체콥은 그런 술루에게 너무나도 벅찬 사람이었다. 체콥이 그런 사람인 것처럼, 술루도 그저 이런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 술루가 체콥에게 변명을 했을때, 체콥은 일말의 어떤 부분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술루는 체콥을 이해시키기 위해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라는 문장을 사용해야했고 이 문장은 체콥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술루는 그 문장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직접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했다. 술루가 그래도 우린 이전과 같은 사이처럼 지내는거야. 알겠어? 항법사와 조타수잖아. 같이 밥도 먹고 토의도하고. 그렇게 지내는 거야. 하고 말하는 동안에 체콥은 얇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고치겠다는 말도 좋은 방법이 있을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만을 내려 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라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고갤 들지 않았다.
# 사실 이 헤어짐 끝에 술루는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들 간에 성적인 접촉이 사라질 뿐이었고, 연인들 특유의 감성만이 절단될 뿐이지 여전히 그들은 어느 정도의 애정어린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친구였고 동료가 될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체콥에게 그렇게 설명했고 체콥또한 이해할 수 있다고 봤다. 술루는 미련이 상처를 남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미련이란 것은 끈적한 감정에서 남는 진액 같은 것이고 그것이 말라붙으면 그것이 상처가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건 술루의 생각이었다. 그 날 밤에 침대에 누워 잠드는 순간까지 술루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했다.
# 아침인사를 했다. 체콥은 언제나 그렇듯 일찍 나와 있었고 술루는 가볍게 인사를 던지며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함장이 오고 지시를 내렸다. 함대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느끼며 술루는 앞으로의 항로에 대하여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교대로 점심을 먹고 짧은 휴식을 즐겼다. 그 날의 소재는 잔업에 대한 것이었고 모두들 그것을 두려워했다. 엔진실에서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는 스코티의 전보에 함장은 엔지니어실로 내려갔고 부함장이 자리를 지켰다. 저녁이 되자 식사를 했고 술루는 당직이였기에 브릿지를 지켰다. 체콥은 저녁인사를 했고 술루는 그 인사에 마주 웃었다. 술루는 그로부터 6시간 동안 브릿지를 지켰고 이후에는 바통을 넘겼다. 씻고 난 후, 잠들기 전에 읽던 책 15페이지를 읽었고 30분쯤 뒤척이다가 잠들었다.
# 다음 날도,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이 흐른 무렵, 잠들기 직전에 술루는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이어지자 산새처럼 잠이 달아났다. 아침이 올 때까지 술루는 잠들지 못했다.
# 과장하자면 광대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을 달고서 술루는 브릿지로 들어섰다. 모두가 그의 몰골에 대하여 좀비같다고 한마디씩 던졌다. 가장 신난 것은 단연코 커크였다. 그는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파란 눈을 불쑥 들이밀면서 뭘 바른거냐고 물었다. 술루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고 말하며 뒤로 몸을 뺐다. 그 뒤에는 방금 들어선 맥코이가 드물게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인사만 할 생각이었으나 술루의 얼굴을 보고서는 늘 달고 사는 욕설을 툭 던졌다. 잠을 못잤군. 술루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체콥의 뒷통수를 바라보았다. 그 소란에도 그는 뒤돌지 않았다. 불면이 지속되면 의료실을 들리라는 간단한 지시와 함께 그는 함장에게 이번 진료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함장이 닥터에게 뒷덜미를 잡혀 나갈 동안 술루는 제자리로 돌아갔고 체콥에게 인사를 던졌다. 뒤돌아본 체콥은 언제나처럼 밝았고 상쾌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뿐이였다.
# 술루는 체콥이 웃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인사할 때나 지나칠 때 눈인사로 웃어보이곤 하지만 그런 웃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심이 드러나 보이는 함박웃음. 상냥하게 휘어지는 눈꼬리. 그런 것들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그것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체콥이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가 아니라 그가 술루의 앞에서 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체콥은 어디가서나 잘 웃었다. 의료실의 높은 의자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함장과 아무래도 좋을 농담들을 던지기도 했다. 다만 그는 술루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늘상 해왔던 단순한 안부들 (밥 드셨어요? 뭐 드셨어요? 어제밤에 뭐하셨어요? 아, 그 책 읽어봤어요. 재미있어요. 식물들은 잘 있어요? 등등) 조차 묻지 않았다. 가끔 술루는 그의 눈에 자신이 보이지 않는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먼저 말을 걸기는 늘 망설여졌기에 이 상항은 점차 길어졌다. 한달 즈음 지나자 술루는 자신의 불면이 어디서 도래했는지 깨달았다.
# 몇 번 정도 이유 없이 미움을 받곤 했지만 그것에 대하여 신경 쓴 적 없었다. 물론 사랑받는 것이 좋고 관심 받는 것이 좋지만 누구나에게 사랑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른 시절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술루는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체콥은 곁에 있었다. 연인사이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는 마치 술루를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브릿지에서 둘만 남은 순간에 술루는 숨이 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한 달 전의 상황이라면 체콥은 마지막 사람이 나가자마자 술루의 손을 덥썩 잡아 오며 셀죽하게 웃을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저 앞만 보고서 스크린을 두들기고 있었다. 술루는 차가워진 자신의 손을 꼬물거리며 겨우겨우 숨을 쉬었다. 그리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도 하지 못했다.
# 체콥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잘자라며 인사했겠지. 어쩌면 내일 보자는 말일지도 모른다. 술루는 가슴에 북받치는 무언가들을 느꼈다. 그러나 이게 대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저 답답한 가슴만 웅켜지고서 한층 어두워진 복도를 걸었다. 그날 밤도 잠들지 못했다.
# 체콥의 생일이었다. 체콥과 술루가 인사만 주고받은지 한달 반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모두가 귀여운 막내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함대 내에서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모두가 각각 나름의 선물을 준비했다. 특히 메이베이의 그녀들 중 하나가 그를 위해 직접 주방까지 빌려가며 케이크를 준비했다. 의외로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체콥을 위한 당근 케이크였다. 스팍은 갈색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케이크를 보며 화학적인 관계라고 칭했고 우후라가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체콥은 즐거워했고 기뻐했다. 술루는 자신의 데스크 아래 있는 화분 하나를 생각했다. 어렵게 구한 꽃씨가 손톱만한 새싹을 피워냈다. 언젠가 체콥이 입에 담은 적 있던 꽃이었다. 술루는 체콥의 생일을 앞에 두고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비록 그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할지라도 친구와 동료라는 관계는 얼마든지 생일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술루는 언제 이 화분을 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곁을 힐끔거리며 타이밍을 제고 있던 술루에게 커크는 장난어린 어조로 ‘이런이런 체콥의 베스트 프렌드가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거야?’ 하고 물었다. 시선이 쏠리자 술루는 당황어린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이 타이밍이면 괜찮지 않을까. 스쳐지나간 흐름을 쫒기 위해 술루가 데스크 아래로 손을 넣었을때 체콥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그 이후에는 아무런 단어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괜찮아요. 당황해서 서툰 목소리도 아니었고 삐진듯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는 평화롭고 온순하게 괜찮다고 말했다. 조용하지만 힘있는 목소리에 잠시 브릿지는 조용해졌다. 이 적막의 원인을 모르는 스팍만이 대인배군. 하며 단마디를 뱉었고 그게 구원의 끈이라도 되는마냥 여러사람이 붙어 체콥이 많이 컸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나 둘씩 꺼냈다. 술루는 어정쩡했던 손을 제자리로 돌리며 또다시 숨을 껄떡거려야했다.
# 결국 자기혐오란 자기연민의 연장선임을 알면서도 술루는 끝없이 자신을 탓했다. 점차 밤이 길어지고 그의 의식이 길어질수록 술루는 스스로의 뇌를 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이렇게나 감정에 휩쓸려 그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로 갈팡질팡 해매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감정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술루는 잠이 부족한 얼굴로 스팍에게 물었고 스팍은 무엇인가 떠올렸는지 짐짓 답지않게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벌칸인들의 풍습과 뇌구조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도 모르겠군. 하고 대화를 끝냈다. 술루는 지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맞선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과 맞는 조건의 여자로. 격한 사랑 없이, 격한 싸움 없이 그저 평화롭고 온순하게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여자로.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혐오가 밀려왔다. 그래,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이었다. 술루는 침대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였더라면 새벽당직은 힘들다며 투덜거렸겠지만 요즘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시간이 되면 일어난다. 그 반복이 뭐가 힘들겠는가. 술루는 최소한의 조명만 켜있는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브릿지의 동료에게서 바통을 넘겨 받았다.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자 온 몸이 내려 녹을 것 같았다. 브릿지는 어두웠고 자신의 스크린만 밝게 켜진 채였다. 술루는 그 빛에 의지해 자신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빛마저 꺼진다면 자신의 몸뚱이는 어둠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지 않은가. 그렇게 된다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어둠에 잠기는 순간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결국은 생각의 원념으로 남아버릴 테니까. ...원념이라니. 술루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슬픔이 밀려왔다.
# 술루는 자신이 체콥을 덜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원해주는 것 보다 훨씬 모자르게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헤어짐을 옳고 그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술루는 그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애정만큼이나, 그 비슷한 크기로 그를 원하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독일의 속담이 떠올랐다. 사람은 언제나 잃고나서 그 중요성을 깨닫는다. 잃은 것은 체콥이었고 남은 것은 술루의 마음으로.
# 브릿지의 창 너머로 푸른빛이 스며들었다. 술루는 그것이 새벽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곳은 우주였다. 우주에는 새벽이 없다. 아니 새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구의 새벽과는 달랐다. 술루는 창 너머로 푸른 행성이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정말 새벽빛을 닮아 있었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푸른빛을 마냥 바라보았다. 푸르고 시리게 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퍽 따듯해 보였다. 술루는 자신의 손끝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등이 푸르게 발하고 있었다. 멈춰 있던 빛은 점차 다가와 술루의 온 몸을 덮었다. 술루는 그 눈부심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끌어 앉았다. 술루는 온 영혼을 둥글게 말았다. 그렇게 둥글게 말고 말다가 이내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것처럼 그는 푸른 빛에 의존했다. 온 몸이 차갑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젖어가는 뺨만은 지나치게 뜨거워 무의식으로 빠져들 수가 없었다.
# 푸른빛이 일말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다시 찾아온 어둠 속,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스크린의 빛 속에서 술루는 스스로의 어깨를 부여잡고 울었다. 그 울음이 너무나도 괴로웠기에 누군가 자신을 껴안는 것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