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두 번째던가. 아마 그럴 것이다. 첫 번째로 도망나왔을때는 알렉스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숲속에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인 지금에는 알렉스도 그 누구도 없었다. 자신 혼자였다. 아니, 정정. 첫 번째는 나름으로 도망나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알렉스가 떠나라고 직접 말했으니 이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행크는 자박자박 걸어갔다. 그래도 그때보단 나았다. 그때엔 칠흙같은 어둠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밝은 빛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행크는 나이테와 바람을 방향을 체크하며 길을 찾아갔다. 확실히 험한 길이었지만 사람의 발길이 없는 길은 아니었다. 알렉스 무리들로 추정되는 말발굽 자국도 있었다. 행크는 꺽여있는 나뭇가지들과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그렇게 걷고 걷다가 멈춰서기를 반복했다.
마을에 돌아가서 어떤 말을 해야하지. 정말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야 할까. 미리암도 잊고 알렉스도 잊고 베니와 제이크도, 모두를 잊고서 아버지의 곁에서 살면 되는걸까. 그렇게 차기 마스터가 되면 되는걸까. 아니, 행크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채로 살 수 없었다. 행크는 알아야 했다. 자신의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내막을 알아야 했다. 어쩌면 정말 마을 내부에 곪고 있는 문제가 있을수도 있고, 아니면 알렉스 무리들의 오해일 수도 있다. 행크는 그 중간에서 중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답을 알아야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인 머리와는 달리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실없는 웃음과 함께 가슴 한켠이 지끈거렸다. 그렇게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을 서 있다가도 다시 걸었다. 가야했다. 그리고 돌아와 알렉스를 보길 원했다. 어떤 진실이 그들의 앞에 놓이더라도, 행크는 알렉스와 함께이길 원했다. 그것 만큼은 명백했다.
행크가 한참을 걸었을때 경사가 나왔다. 꽤 높은 경사였지만 선명하게 오르내린 발자국이 있었다. 행크는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올랐을때 눈앞에 커다란 나무 두 개가 아주 촘촘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뿌리가 서로 얽혀 있는 듯 했다. 그 곁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려던 행크는 순간 그 틈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터널.”
터널이 있었다. 저 터널은 행크가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다. 저 터널을 지나 사냥 구역을 지나가면 마을이 나온다. 알렉스의 보금자리에서 떠난지 약 4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렇게 따지면 마을에서 그들의 기지까지 약 2~3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인데 (행크가 길을 잃고 헤메이는 것을 제외하고), 이정도면 꽤 가까운 측에 속했다. 그 ‘늑대들’이 마을의 근교에 자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혀를 찼다. 행크의 마을에는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알렉스로선 정말 현명한 생각이었다. 마을 사람들, 여자들은 물론이고 장정들까지 분지를 넘어서진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금기로 알고 있다. 마을 너머서 약을 가져와야하는 그린우드 정도가 분지를 넘어가곤 했지만 왠만한 사람들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분지 밖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평지, 더불어 비가 오더라도 배수가 빨라 물이 빨리 스며들었다. 행크는 그 와중에도 알렉스답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평평한 바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이끼에 신발이 미끌렸다. 행크는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꼬꾸라지고 떼굴떼굴 굴렀다. 행크가 올랐던 경사는 꽤나 높았고 이대로 떨어지다간 바위에 허리를 부딪힐 수도 있었다. 행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변에 있는 것을 거친 손아귀로 잡았다. 손이 미끌렸지만 온힘을 다했고 결국에는 삐죽 튀어 나왔던 나무 뿌리를 잡았다. 손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마을에 다왔다지만 피냄새를 풍기며 사냥터로 들어설 순 없었다. ‘미치겠군.’ 행크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부러지거나 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예전같았으면 온몸이 아작났을텐데, 그나마 다행인걸까. 행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봐!!!”
메아리치는 소리에 행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야! 여기!”
행크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경사 밑으로 한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놈의 <USA 투데이>. 행크가 그녀의 이름을 더듬으며 기억하고 있을때 많이 다친거아니냐는 큰 목소리가 울렸다. 더불어 비상약이 있으니 내려 올 수 있으면 빨리 내려오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쪽팔리게 깡통처럼 구르는 모양을 다 본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척척 위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행크는 그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행크는 몸을 추스르며 아래로 내려갔다.
“이야, 너 그 큰 덩치로 잘 구르더라. 누가 봤으면 곰이 구르는줄 알았을거야.”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겁니까?”
“저기 아래. 운전하면서 가고 있는데 네가 쫄래쫄래 어디론가 가더라고. 그런데 영 위험한 구역으로 들어가기에 걱정되서 와봤지.”
행크는 지긋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퍽 경계어린 눈빛에 그녀는 껄껄 웃으면서 ‘어머, 뭘 그렇게 경계하고 그러니.’하고 웃었다. 멀리서 지켜봤지만 참 쾌활하고 에너지 넘치는 여자였다.
“이미 알겠지만 루이즈 스윈이야. 넌 행크 맥코이 맞지? 자 통성명 끝. 이제 모르는 사람아니니까 어서 따라와. 차에 구급약이 있으니까 치료부터 하자.”
그녀는 커다랑 행크를 개 끌 듯이 끌고 가기 시작했다. 상처난 팔을 붙잡힌 행크가 아프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아픈게 당연하지 그렇게 굴렀는데. 하고 말하며 대차게 그를 끌고 갔다. 머지 않은 곳에 그녀의 지프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는 행크가 안쪽에 걸터 앉도록 했다. 그리고 찢어진 손바닥을 치료했다. 새까만 머리통이 퍽 작아 보였다. 몇 살정도 되었을까. 미리암보다야 많아 보인다지만 그렇게 들어보이지도 않았다.
“산파 경험이 있는거에요?”
“어쭈, 먼저 말도 걸고?”
“......”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나저나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산파를 하니? 대부분 병원에서 낳는데.”
행크가 사는 마을에는 산파들이 있었다. 아니 대부분 나이든 여자들은 산파의 일을 겸업한다시피 했다. 마을의 여자들은 자식을 많이 두는 편이었고 이에 따라 산파 경험을 쌓아가는 노부인이 늘어갔다. 안에서 보지 않아 모르겠다만, 천막안에서 들리는 루이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행크는 그녀가 산파 경험이 있을거라고 당연시 생각했다.
“애가 셋이야.”
“네?”
“애가 셋이라고. 론, 빌리, 크리스틴. 론하고 빌리는 쌍둥이고 크리스틴은 막내딸.”
행크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암만 보아도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진 않았다. 행크의 눈빛을 느낀건지 그녀는 뿌듯하게 웃으면서 ‘이래뵈도 마흔이 다되어 간답니다.’하고 말했다. 종군기자였다고 하더니 그렇게 빨빨 싸돌아 댕겨서 나이먹은 것도 잊은 걸까. 그녀는 행크의 손에 거즈를 감아주곤 밴드를 붙였다.
“자 됐다. 그렇게 심한건 아니니 금방 나을거야. 물 좀 마실래?”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서 차안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행크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검은눈이 퍽 부담스러웠다. 행크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렉스랑 뽀뽀는 해봤니?”
행크가 그대로 물을 뿜었다. 행크의 물쇼를 구경한 루이즈는 무감동한 얼굴로 물이 떨어지는 곡선을 바라보곤 다시 행크를 바라보았다. 행크가 입을 닦으면서 대꾸하려했지만 말문이 턱 막혔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대꾸해야하는건가, 아니면 알 필요 없다고 해야하는건가. 그렇게 대답하면 긍정이 되어버리니 그건 그것대로 민망했다. 행크가 말문이 턱 막힌채로 우물쭈물거리자 그녀는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잘생긴 것들은 잘생긴 것들하고 사귀네. 야 내가 사고가 트여있는 사람이라 뭐라 말은 안하는데 그거 인류에 대한 크나큰 배반이야. 너희들이 유전자를 물려줘야 예쁜 애들이 태어나지.’하고 중얼 거렸다. 대체 이 여자가 뭐라고 하는거야. 행크는 물기도 없는 입을 닦으며 그녀를 보았다.
“대체 뭘 보고-”
“딱보면 알지. 나이 40쯤 되어보렴. 뭐가 뭔지 다 안단다. 잘은 모르지만 너에 대한 것도 조금은 알고 있고, 알렉스가 네 이야기 할때마다 짓는 표정을 보고 딱하니 알았지. 아 그거구나.”
“....그게 뭔데요?”
“어머, 너 웃긴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녀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행크를 보았다. 남의 연애사만큼 재미있는게 어디 있을까. 허파에 구멍뚤린것마냥 계속 웃어대는 그녀를 보며 행크는 난색을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마저 재미있는지 루이즈가 깔깔 웃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라.”
행크가 가벼운 목례를 하고 뒤돌아 서려했을때 그녀가 툭 말을 던졌다. 행크는 고개만 돌려 그녀를 보았다. 아직도 걸터 앉은채로 구급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우리 막내딸을 귀하게 키워서 알지. 그애한테 힘든 것, 어려운 것들은 하나도 알려주고 싶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운것들만 알려주고 싶은거야. 전쟁이런거 말고 사랑, 희망, 용기 이런거 말이야. 그런데 내가 이리저리 전쟁가운데를 뚫고 다니며 느낀건데, 그건 부모가 애들을 기만하는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귀하게 자라봤자 어차피 그 애들은 어른이 되야하는거고 어른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자신의 짐을 짊어져야하거든. 어른이 애를 약골로 키우면 그 애는 자기 짐도 짊어지지 못하고 평생 병신으로 살아야하는거야. 그것만큼 비극적인게 어디있겠어.”
“제가 병신이라는 겁니까?”
“거의 그렇지.”
그녀는 검지 손가락을 바짝 들어 올리며 유쾌하게 말했다. 행크는 한숨을 푹 쉬었다. 화가나기보단 이 시간이 아까워졌다. 밤이 오기전에 어서 터널을 지나야했다. 등에 걸린 사냥총이 안전을 지켜줄거라고 방만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짐승이란 인간의 사정따윈 봐주지 않는다. 행크가 다시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행크가 저 만치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녀는 끝없이 혼잣말을 할 것 같았다. 그말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첫문장부터 행크는 사로잡혀버렸다.
“내가 알렉스를 처음 만났던건 3년전이거든”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그 당시에 내가 이혼당하고나서 아주 개고생을 했어. 애들 셋 다 찾아오고 싶은데 이놈의 배심원들이 내가 종군기자라고 아주 양육의 양자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잖아. 그래서 전남편한테 애들을 빼앗기기 직전이었지. 회사에서 오래된 오이피클마냥 썩어가고 있을때 알렉스가 찾아왔어. 어린애가 왔다기에 처음엔 우리 첫째 아들인가 싶었지. 용돈이라도 얻으려고 온건가 싶어서 말이야. 그런데 정말 거지꼴의 남자애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있지, 그때의 알렉스는 정말 살기가 넘쳤어. 왜 그랬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데 말이야.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노장처럼 느껴진다니까.’ 그녀가 불붙은 담배를 빨아들이며 말했다. 행크는 어느새 가만히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기에 손을 내저으면서 꺼지라고 했지. 골머리 아프니까 상대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그 녀석이 대뜸 ‘당신 전쟁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이라면서요. 내가 밥값벌게 해줄게요.’하고 말하는거야. 이런 당돌한 애새끼를 봤나. 그냥 욕 몇마디 내뱉어주고 가려는데, 마주친 알렉스의 눈이 말이야. 파랗게 날이 서 있으면서도 한쪽면은 무뎌져 있는게. 그 눈빛에 끌려서 그애 이야길 다 들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줬어 걔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 있는 순간까지 말이야. 그리고 난 망설일 필요 없다는걸 알았어. 그래서 화끈하게 당시의 이라크행 비행기표를 내려놓고 회사도 옮겼어. 자료를 수집해야하는 시간들 동안에도 밥은 벌어먹어야하니까 말이야. 뭐 덕분에 우리 애들도 되찾고 잘됐지 뭐. 배심원들은 내가 애들을 찾기 위해 일을 내려놓은 줄 알더군. 뭐 아무렴 어때.”
행크는 입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고 있던 알렉스의 과거를 이 사람은 알고 있었다. 3년전뿐만 아니라, 알렉스가 가지고 있는 다른 것들 또한 사전처럼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전쟁거리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점잖게 말할게 뭐있어? 전쟁이야. 그건.”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서 퍼져나가는 매캐한 공기를 감상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그녀는 눈빛이 잠시 빛을 잃었다. 그리고 빛잃은 눈동자는 내버려 둔채로 담배를 물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네 아버진 천재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네 아버지가 빠진다면 아무 소용없어. 결국 전쟁의 중심에는 네 아버지랑 알렉스가 있거든. 물론 알렉스의 여러 가지 동기 중에 ‘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아, 혹시 이것도 모르나? 하기사, 오늘 아침에 솔리먼하고 쌈박질 하는걸 보니 모르는 것 같더라. 참 편하겠어. 아는 것 하나 없으니. 얼마나 살기 편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에요?”
“내가 보기엔 너 괜찮아. 저번 사슴을 보면 사냥 실력도 괜찮은 것 같미리암을 통해 보아서 인격적인 부분도 꽤 괜찮지. 콤플렉스 덩어리란 점이 거슬리지만 그건 현대인이 끌어안고 살아가야할 문제니 언급하진 않겠어. 하여간 넌 괜찮아. 하지만 문제는 네가 이어받아야할 구시대적인 것들이지. 알렉스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아. 그 애 정말 널 위해서라면 불에 뛰어들 것 같이 좋아하고 있잖아? ...하지만 한편에선 어떻게 널 좋아하고 신뢰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거지. 이런거 보면 하늘에 계신 양반도 참 못돼 처먹었어. 일을 이렇게 만들고 말이야.”
남의 연정에 이러쿵저러쿵 이해한다, 이해못한다 설명하는 그녀가 훨씬 이해가질 않았다. 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행크로선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일까. 정말 베니가 말했던대로 마을 여자들을 통해 많은 후손을 가지려 했던 아버지의 문제와 아들인 자신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자체 알렉스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녀의 말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같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차라리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나을 판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 정말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띄우며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의 뺨을 긁었다.
“참 알렉스가 나쁜 새끼야. 어떻게해서든 너한테 미움받기 싫어서 말이지.”
그녀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행크는 저 만치 밀려오는 붉은 빛을 보았다. 곧 있으면 해가 떨어진다. 어서 가야했다. 머리는 계속해서 경고를 했지만 행크는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갈 수가 없었다.
“그 녀석 네가 사는 마을에서 태어났어.”
“그건 또 무슨 헛소리에요?”
“네가 살고 있는 그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알렉스 서머즈 말이야. 네가 놀던 그 마을, 네가 걸었던 그 길들. 어떻게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대충 상상이 가. 전통있는 마을이라면 꽤 예쁘게 가꿔져 있겠지.”
행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모순 덩어리였다. 알렉스는 그들이 13살이 되던 시점에 마을에 왔다. 알렉스는 자신이 도시에 살았었다고 말했다. 알렉스가 거짓말을 한걸까 아니면 이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결코 맞을 수 없는 퍼즐 조각을 들고서 멍청히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애가 태어나니까 곤란한거야. 이 아이는 크나큰 결함이 있어서 자신의 아들로 키울수가 없었어.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문제였지. 결국 그 애 부친은 아내와 아이를 도시로 보내버렸어.”
“잠깐만. 잠깐만요. 알렉스의 누나가 그애 모친이였단 말이에요? 누나가 아니고?”
“아니. 누나 맞아.”
“그럼 뭐에요. 알렉스는 누나와 도시에 살았다고 했어요. 걔 엄마도 함께 있었던 거에요?”
“아니. 아니. 아니.”
그녀가 담배를 비벼껐다.
“베레스 서머즈는 알렉스의 누나인 동시에 엄마야. 그녀가 알렉스를 낳았어. 그런데 아들인 동시에 동생이 된거야! 어메이징!”
그녀가 손을 번쩍 들었다가 박수를 짝 쳤다.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과 손끝에 매달린 찌그러진 담배는 결코 이 모든 것이 쉽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행크는 온 몸에서 힘이 빠짐을 느꼈다. 자신의 안에 쌓아 올렸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알렉스가 숨기고 있었던 수 많은 것들 중에, 미리암과 아이에 대한 것 일부분 이었다. 빙산의 일각. 결국 자신이 살아왔던 마을과 그 안에 있던 추억, 기억들은 표면적인 것 밖에 되지 못했다. 깊이는 없었다. 그런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3년전의 알렉스는 말이야. 정말 담담하게 이 모든 것들을 말하더라.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알았냐고 물으니 ‘알 수 밖에 없는 것들이잖아요.’ 하고 대답했어. 그 대답을 듣고 기가막혀서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 다음 대답이 더 가관인거 있지.”
‘그렇다고 죽을 순 없잖아요.’ 무덤덤하게 말하는 알렉스가 떠올랐다.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행크에겐 많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그런 얼굴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네가 있는 마을은 굉장히 순수하고 깨끗해 보여. 그리고 딱 그만큼 무섭지. 억지로 보호받는 순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그건 따질 수 없는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밖으로 나가봐. 차들이 다니고 높은 빌딩이 깔렸어. TV 뉴스에선 살인 사건과 총기 난사사건을 다루고 각 나라별로 서로의 영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대지. 그런데도 네가 살던 마을에는 이런 사건들 하나 없이 고요하고 순수하게 지켜져온거야. 마땅한 가게 없이 빵도 손으로 만들고 와인도 직접 다 담그지. 종교라는 하나의 목표가운데서 사람들은 경건함을 실천하면서 사는거야. 이상적이네. 말하고 나니까 정말 이상적이야. 아이들은 그렇게 가꿔진 세계 속에서 부모의 가르침과 마을의 순수를 이어받고 또다시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고. 이 과정에서 세상의 떼를 머금은 이물질이 들어와선 안되겠지. 그렇지? 그래서 그 간에 근친상간들이 이어지지. 하지만 너도 그 결과를 알잖아. 근친상간의 끝은 결국 죽음이야. 선천적인 약자들이 태어나는거야. 이것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은 외부의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끌여들이지. 하지만 어른은 안돼. 이미 떼가 묻었으니까. 그들은 아이들을 데려오는거야. 떼묻지 않은 아이들, 타인의 유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마을에 속해있는 순수한 무리들 말이야.”
“지금 누구 이야길 하고 있는거에요?”
“미리암 워커”
그녀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너.”
‘네 마을이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네 양부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어. 그건 정치적으로도 연결이 되어 있지. 내가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갔을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네가 살고 있는 그 마을은 그린벨트 지역이야. 하지만 따져보면 그린벨트로 설정할 필요가 없는 지역이지. 사람들은 그 곳의 땅을 노리지 않거든 이미 버려진 땅이니까. 그 땅을 그렇게까지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것은 전부 정치적인 결탁이었어. 너는 여태동안 도시사람들이 너희들의 존재를 모르고 관심조차 없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저 높으신 정치, 경제인들께서는 샅샅이 내려다 보고 있을거야. 네 아버지가 그 마을을 지키면서 그들에게 주는 이익이 꽤 짭짤하거든. 놀랍지? 자급자족하는 사회에가 자본주의 사회에 확고한 이익을 줄 수 있다는게?’ 그녀가 끝없이 말을 이었으나 행크는 듣고 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으나 행크의 귀에는 적막뿐이었다. 충격을 먹었나? 자신이? 그렇겠지.
“그러니까. 알렉스는 그애 누나의 아들인 동시에 동생이고, 나와 미리암은 타지에서 온 양자, 양녀라는 건가요.”
“그래. 그래서 그들은 타지인인 미리암이 아이를 낳길 바란거야. 여자아이로 태어나면 너와 혼인을 시키려고 했을거야. 너는 완벽하게 타인이지만 그녀가 낳는 아이는 마스터의 피를 이어 받고 있을테니까. 그리고 남자 아이로 태어났으면, 뭐 그냥 내버려 뒀겠지. 문제가 되면 없애버리면 되는 거고 말이야. 가장 무서운건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대부분 묵인하고 있다는거지.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거야.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다 알고 있을걸.”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마을이 얻는게 뭐에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너 차기 마스터잖아. 모르겠니?”
그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행크를 보았다. 행크는 자신의 몸에서 흙덩이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나가다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사라지는게 나을 것만 같았다.
“네가 알고 있는 마스터란 자리는 ‘리더’가 아니야. 그건 ‘신’이야. 결국 네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마을이라고. 뭐 부정해도 좋아. 그건 네 마음이니까. 너 미리암한테도 그랬잖아.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고. 모르는채로 살아가겠다고. 그건 네 마음이지. 그런데 얘야. 봐보렴. 네가 모든 것을 무시하고 막아서고 듣지 않은채로 살아간다고 생각해봐. 이후에 마스터가 되면 넌 죽고 싶어질거다. 왜냐하면 사실 너의 귀는 모든 것을 들었고 너의 머리는 모든 것을 이해했고, 넌 그때까지 알렉스를 잊지 못했을테니까.”
“당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비록 잘못된 방식이라 하더라도, 내가 마스터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그는 진정 올곧은 사람이고 앞으로의 마을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에요. 죄는 회계하면 되는거에요. 늦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아직은요.”
“그래. 그러면 가서 그렇게 말해보렴.”
‘하지만 한가지, 그가 알렉스에게 저지른 죄는 용서 받지 못할거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서 행크를 보았다. 이미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저 끝에서 노을이 한 봉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금성이 떠올랐다. 숨이 턱 막혀왔다. 행크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행크의 눈을 마주했다.
“그를 태어나게 한 죗값은 평생 치루지 못할거야.”
*
행크는 어둔 숲의 중앙에 서있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빛 한점 없는 곳에서 행크는 서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다가가면 알렉스를 만날 수 있었다. 결국 떠나지 못하고 되돌아 와버렸다. 그가 돌아가라고 말했음에도, 스스로 돌아가자고 결심했음에도 또다시 이곳으로 와버렸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서 있는 땅이 늪처럼 느껴졌다. 한발자국만 더 움직인다면 진흙안으로 깊숙이 몸이 빠져들고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차라리 그게 나았을 것이다.
바람이 불자 사방에서 전나무 향기가 났다. 밤중 습기까지 머금어 들었다. 눈 앞을 가득 매우는 남색빛 어둠과 풀벌레 울음소리와 전나무 향기.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사라져도 좋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자연의 일부로 스며들어간다면 아무런 괴로움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행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말했듯이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노릇 이었다. 행크에게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죽음이었고 죽음을 선택하면 다른 선택들을 전부 놓쳐야 했다. 그 선택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순 없었다.
행크는 어둔 땅만을 응시하다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행크와 알렉스는 바닥에 꽂힌 목각인형들처럼 서로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3년전에 녹화해놓은 인터뷰 메모리가 하나 있어. 지금보단 훨씬 앳된 알렉스가 카메라를 멀뚱히 보면서 묻는 말에 하나하나 다 대답해주지. 아직도 기억나는게 그때 억지로 우리집으로 끌고와서 인터뷰를 했었거든. 시원한 레몬에이드를 줬는데도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어. 결국 표면의 물방울이 카페트위로 다 떨어질때까지 가만해 내버려두더라. 내가 독이라도 탄 줄 알았나. 그때, 그래 그때 너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몇 번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지만 그때처럼 자세하진 않았지. 그앤 너에 대해서 모든 걸 이야기 했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 말이야. 모든 것을 꽁꽁 감춰놓고 생겨선 자신의 감정들을 톨씨하나 빼놓지 않고 이야기 한다는게 놀라웠어. 그리고 한편으로 딱했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거야. 상대인 너한테도 말이야.’
헤어지기 직전 어둑한 하늘을 보며 그녀가 말했던게 기억났다.
‘그앤 널 이야기 할때면 먼곳을 응시하듯이 눈동자가 까무룩 해졌어. 나 그런 얼굴 많이 봤어. 내가 이라크에 갔을때 말이야. 그곳에는 늘 어린 군인들이 있었어. 그 애들 늘 그런 얼굴을 했어. 어딘가를 보면서 말이야. 그 애들 죽을때까지 그런 얼굴이더라.’
그런거지. 결국에는. 그녀는 마지막 말을 삼키고 대신 이런 말을 뱉었었다. 행크는 알렉스의 눈을 보았다. 까무룩하게 잠겨 있는 걸까 아니면 매섭게 빛나고 있는 걸까. 중간에 가리워진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순 없었다. 그러나 행크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묶여져 있던 것같던 다리들을 움직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행크가 빠르게 다가가자마자 알렉스의 얼굴이 아이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손을 벌렸다. 포옹은 격렬했고 그 만큼 고통스러웠다. 알렉스는 행크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버린줄 알았어.”
“네가 가라고 했잖아.”
“정말 가버린 줄 알았어. 정말 가버린줄 알았다고!”
행크는 알렉스가 우는 것을 단 한번도 본적 없었다. 마스터에게 뺨을 맞았을때도, 어른들에게 은근한 협박과 욕설을 들었을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주했을 뿐이었다. 울먹이며 소리지르는 알렉스를 두고 행크는 정말 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신 받을 수 있었다. 기쁘고 슬펐다.
아주 어렸을적부터 그의 아버지는 행크를 품안에 두고 조곤히 속삭여 주었다. 신의 지시에 따라 천사들이 인간을 따라 다니는데, 그들은 인간을 돕고 보호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은 그들에게 경험이 됨으로 그대로 방치 한다고도 했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그 풍경과 그 나직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알렉스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
노인은 숨을 몰아쉬며 칼날을 닦고 노를 놓았다. 돛이 바람을 안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면서 노인은 배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고기의 사분지 일이나, 그것도 제일 맛있는 부분을 잃어버렸군.”
노인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꿈이라면, 아니 차라리 내가 고기를 잡지 않았었다면 좋으련만. 미안하다, 고기야. 결국은 모든 일을 그르치고 있구나.”
그는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는 고기를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물에 씻기고 불어서 고기의 색깔은 거울 뒷면의 탁한 은빛 같았다. 그래도 아직 그 줄무늬는 보였다.
“그렇게 멀리 나가지 말 걸 그랬다, 고기야.”
하고 그는 또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너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도 더 좋았을 텐데... 미안하다, 고기야.”
*
“전부? 그 전부가 어디까지 인데?”
베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사실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말할 타이밍이 언제나 어려웠고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망설여졌다. 그리고 이후, 그녀가 알렉스의 단순한 누이임을 떠나 모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행크는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설들을 머리에 늘어 놓았다.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으나 마냥 피할 수는 없었고 그것을 받아 들일준비를 해야했다. 행크는 알렉스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을 수용하긴 어렵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모든 이야기를 듣는다 할지라도 지금은 여기 있어야 했다.
행크는 자신의 어깨를 보란 듯이 퍽 치고 가는 베니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혀를 차는 알렉스에게 입을 열었다. 알렉스는 그것이 ‘베니랑 이야기 했어?’라던가 ‘어떻게 하면 베니의 기분이 나아질까?’정도의 질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물음이 놓여졌다.
‘베레스는 왜 데려오지 않았어?’
행크는 알렉스가 들고 있던 망치를 꽉 움켜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숨기고 싶어했다. 그것은 행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전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지만, 그가 말했듯이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한 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일터였다. 알렉스는 목덜미를 긁적이면서 입을 땠다. 그녀는 몸이 많이 약하고 이런 곳에선 버티지 못한다. 차라리 그곳에서 사람들의 보호를 받는게 나을 것이다. 비록 그게 진정한 성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먹을 것과 자고 쉬는 것을 보장 받을 수 있으니 그녀는 그곳에 있는 것이 옳다. 가끔 마을을 뛰쳐 나가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그녀를 찾는 것을 알고 있다. 얼마전에 제이크와 몇몇의 무리들이 그녀가 잘 돌아간 것을 확인 했다더라. 이하 등등. 평소라면 딱 끊어서 대답해줬어야할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하게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내게는 언제 알려줄 생각이었어?’
행크는 알렉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알렉스가 망치질을 멈췄다. 다 박히지 못한 말뚝이 툭 쓰러졌다. 알렉스는 눈치가 빨랐다. 하기사 그가 천성적으로 느리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의 인생을 훑어보면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을 터였다.
‘루이즈야?’
‘그녀가 전부다 말해줬어.’
‘전부? 그 전부가 어디까지 인데?’
알렉스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행크를 올려다 보았다. 공격적으로 느끼는 눈빛이었다. 행크는 어째서 그가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걸까 의문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 너, 네 누나, 그리고 나와 미리암.”
“알고싶지 않아 했잖아.”
“지금도 별로 믿겨지지 않아. 떨떠름하고 생각하면 힘겹지.”
“그런데? 왜 루이즈의 말을 듣고도 돌아왔어?”
“너 때문에.”
행크는 그 말을 던져 놓고 후회했다. 후회해봤자 소용 없었다. 몇백번을 후회한다 하더라도 몇백번 그 말은 되풀이 될 것이었다. 아버지를 신뢰한다. 마스터로서의 그도, 아버지로서의 그도. 그가 어떤 것을 껴안고 있다 할지라도 아직 그는 행크에게 아버지였다. 그를 갑자기 미워하고 증오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진실로 각인 된다면 행크는 지금 보다 견디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 넘고도 그는 행크에게 아버지였다. 열덩이리인 자신을 껴안고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었던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알렉스가 있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것은 이것이었다.
“나는 네가 고통스럽기 원하지 않았어. 넌 계속해서 밀어냈고 결국 미리암과 베니의 앞에 놓인 고통앞에서도 무시하겠다고 말했잖아. 그런 널 앞에두고 더욱 고통스럽게 할 순 없었어. 그래서 너에게 떠나라고 말했던 거고. 물론 내내 숲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후회했지만. 어쨌거나 네가 미치지 않아서 다행이네.”
“내가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누나처럼은 아니더라도 지금의 반응보단 훨씬 혼란스러워 할거라고 생각했지.”
행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직 누나에게 집착하고 있어. 그에겐 나름 사랑이겠지. 어쨌거나 누나는 괜찮아. 최소한 그곳에 있으면서 위협적인 일들은 당하지 않을거야. 나중에 이 전쟁이 끝나면 누나를 빼올거야.”
“어떻게 할건데? 포대 자루를 쓰고서 계속해서 마을을 침입할거야? 장로들은 모르더라도 아버지는 더 빨리 눈치 채실거야. 어쩌면 벌써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
“더이상 그곳으로 침입할 일은 없어. 모두를 데려왔으니까. 다른 이들도, 미리암도, 너도. 이젠 슬슬 끝을 낼때가 온거야. 루이즈도 대부분의 준비가 끝났다고 했어. 마을에 대한 이야기들이 폭로되면 정치적인 부분까지 영향력이 미칠거야. 그렇게 되면 잘못된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져내리겠지.”
“그걸 기다렸어?”
“그래. 막상 마을을 뛰쳐나온 3년간은 베니도 제이크도 어찌할바를 몰라했어. 어린 마음에 뛰쳐나오긴 했지만 나름 계획했던 것들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고 우린 너무 어렸으니까. 루이즈가 많은 도움을 줬지. 그녀를 만나고 모든게 정리 되었어.”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러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끝나진 않을거야. 충돌이 있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 하지만 분명히 있을거야. 그대로 쉽게 끝낼만한 위인이 아니잖아. 네 아버지.”
“너의 아버지기도 하지.”
“난 아니야.”
알렉스는 웃었다. 행크는 알렉스가 자신의 말에 화낼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짧고 둔탁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루이즈는 알렉스가 노장같다는 이야길 했었다. 행크는 그의 얼굴을 보며 어째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이 모든게 끝나면 도시로 갈거야.”
알렉스가 말했다.
“도시에 가서 이들과 함께 있을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도시에서 살거야. 더 이상 리더도 없고, 사냥도 없고, 더더욱 사냥감은 필요없지. 조안나가 마트에서 사오는 통조림이나 포장되어 있는 칠면조를 먹으면서 사는거야. 내가 잡을 필요 없이 말이지.”
“그리고 밤이 끝나는 것을 기다릴거야?”
행크가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알렉스의 표정이 사르르 녹으며 다시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보다는 훨씬 생기 있고 다정했다.
“그래. 너와 함께.”
행크는 웃고 있는 알렉스의 얼굴에서 그의 어린시절을 읽었다. 그와 자신이 도시, 아니 딱히 도시가 아니라도 여느 지역의 아이들처럼 조금 더 평범했더라면, 사냥총을 매고 다니는 대신 책가방을 매고 만나고, 이런 천막을 일상에서가 아니라 놀러갈때나 보며 신기해했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을까.
알렉스가 다시 말뚝과 망치를 잡는 동안 행크는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툼한 구름들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
“걱정했단다.”
미리암이 행크의 천막으로 찾아왔다. 그녀의 품에는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행크는 누워있다 벌떡 일어났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지 일주일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적이 단 1초도 없었다. 행크는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기도 했고 또 아버지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허겁지겁 일어나는 행크를 보면서 ‘왜 그렇게 놀라는데? 못들어 올데라도 왔어?’하고 말했다. 핼슥해 보였지만 전보다는 혈색이 좋아 보였다. 그건 아기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클 수 있는 걸까. 아기는 처음 보았을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베어있는 습관대로 그녀에게 차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절반이 남은 물통 뿐이었다. 행크는 이곳이 자신의 집이 아님을 다시 상기 하면서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꼼지락거리는 행크의 손을 미리암이 잡았다. 따뜻하다못해 뜨겁기까지 한 손이었다.
‘네가 모두 알았다고, 그렇게 들었어. 알렉스가 이야기 해줬어.’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행크는 ‘그래.’하고 낮게 말했다. 천막 틈으로 그림자 하나가 비췄다. 틀림없이 베니겠지. 행크가 조금이라도 거친말을 뱉는다면 그는 곧바로 쳐들어와 행크의 멱살을 잡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일은 없을 것이다. 행크가 미리암을 괴롭게 할 일은 없었다.
‘사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 얼굴은 보고 싶었는데, 사실 어떻게 말을 해야할진 몰라서. 결국 모두가 괴로운 거지만 또 결국 괴로워만 하며 살순 없잖아.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그녀는 참 강했다. 그녀가 저 아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강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 자체가 강한 것일까. 어쩌면 둘다 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경험하고 감당했던 것들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랬다. 딱히 말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행크를 용서하고 있었다. 아니 용서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미안해.’
‘.....’
‘미안해.’
용서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행크는 그녀에게 말해야했다. 이것이 비록 행크 스스로를 위한 사과라고 할지라도 그는 해야했다. 행크의 사과를 듣는 미리암의 표정이 울먹였다. 그녀는 아이를 꼬옥 끌어 안았다. 아이의 작고 오동통한 손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잡았다. 파란 눈동자가 그녀에게 울지 말라는 듯이 깜빡였다.
만약 아버지의 말이 정말이고, 신의 천사가 우리를 보고 있다면 행크는 묻고 싶어졌다. 이것들은 그녀가 감당 할 수 있는 슬픔이냐고. 그리고 진정 이 슬픔들이 그녀의 인생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들이냐고. 그러나 천사의 목소리도, 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들리는 것뿐이란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 뿐이었다.
“너를 찾아서 사방을 헤매였어. 베레스는 금방 찾았지만 널 찾지 못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넌 상상도 할 수 없을거다. 나는 지옥을 같다 온 것 같구나.”
그녀는 꽤 오래전부터 이들의 사실을 알아 온 듯 했다. 제이크의 말로는 그녀 또한 이 사실을 감당하기 힘들어 했다고 했다. 그녀 또한 마을 장로의 딸로서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처녀로서 언젠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그 아이를 또 훌륭한 성인으로 키울 꿈을 꾸며 살아왔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꿈들이 산산 조각 나는 것들을 보면서도 방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베니와 약속했다. 언젠가 그들과 함께 떠나가기를. 그러나 그녀에게 덮친 것은 지도자의 아이를 가져야 한단 상상치도 못한 사명이었다. 거부할 세도 없이 그것들을 받아 들여야했다. 질을 통해 주사되는 타인의 정액을 받아 들이며 그녀는 울었다. 마을의 늙은 산파들은 울고 있는 그녀에게 ‘이제 전부 잘 될거란다. 마스터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 너도 대접받고 살 수 있을거야.’하고 말했다.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들은 베니또한 죽고 싶었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행크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웃었다. ‘행크, 우리는 더 나은 미래따위 바라지 않아. 그저 당시보다는 올바르게 살길 바랐을 뿐이야.’ 제이크와 베니또한 알렉스의 과거와 마을의 진상을 알면서 얼마나 경악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알렉스를 따르기 까지 얼마나 많은 결심을 했을 것인가. 그들의 안에 있는 올바르게 살고자하는 선택은 그들을 사지로 몰았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던 것이다.
제이크의 곁을 돌고 있던 베니는 행크를 보지도 않고서 입을 열었다.
‘알렉스 녀석은 너를 믿고 있었어. 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와 함께 할거라고 믿었어. 사실 초반엔 우리도 그럴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했어. 넌 악착같이 차기 마스터가 되기 위해 노력했잖아? 그런데 쉽사리 우리와 함께 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지. 어쩌면 네가 알렉스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틀린 것 같네. 베니는 여전히 행크를 보지 않았다. 바닥의 돌을 굴리며 제이크의 등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우리 어머니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건 아니야. 그들에게는 평생을 무릎꿇고 사죄해도 충분치 않을거야. 하지만 우리는 그들까지 끌고 나올 순 없었어. 행크, 너라도 그랬을거야.’
제이크는 스스로 뱉은 마지막말을 확신받기 위해 ‘그렇지?’하고 물었다. 그러나 행크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랐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자신이 끌어 안고 있는 것들을 설명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그래. 알겠어.’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들에겐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들 안에 품고 있는 수많은 고통을 나눠야 했다. 기껏해야 그들은 20살 초반의 청년들이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창창했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떠 있었다. 간간히 구름떼가 지나가긴 했지만 환하게 비춰지는 별들을 가릴 수는 없었다. 행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곳에 온 뒤로 몇 번씩이나 하늘을 보곤 했다. 아니 행크 뿐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제이크가 행크를 따라 하늘을 보며 오늘따라 별이 많이 뜬 것 같다고 속삭였다. 베니는 제이크의 뒤에서 제이크의 어깨에 목을 기대며 하늘을 보았다. 어느새 통조림 콩을 불에 익힌 알렉스가 그들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마을에서 먹었던 먹음직스러운 음식에는 비할바 아니었지만 그것은 꽤나 맛있었고 그날 밤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네사람은 그렇게 맞대고 앉아서 별들의 시간을 나누었다.
천막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베니가 엉덩이를 털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나와 달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제이크가 ‘역시 애아빠는 힘들어.’하며 웃었고 행크와 알렉스는 따라 웃었다. 이윽고 아기가 더 크게 울자 제이크는 삭신이 쑤시다는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하며 베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온갖 웃긴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달래는데 힘썼다. 그게 이틀전이었다.
“주니어, 어디 다친곳은 없는거니? 지금은 괜찮다고 하지만-”
“아버지, 정말 괜찮아요.”
오늘은 해가 맑게 뜬 날이었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에서는 전과 달리 시원함이 아닌 쌀쌀함이 느껴졌다. 이제 곧 눈이 내리겠구나. 행크는 옷을 여미며 생각했다. 숲은 겨울이 다른 곳보다 빨리 찾아온다. 눈이 내리기전에 나무들이 동면 준비를 하고 숨어든다. 그리고 굶주린다. 이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더 각박해지고 날카로워진다. 바람의 세기를 제던 알렉스는 사내들에게 사냥을 가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사냥총을 어깨에 짊어졌다. 알렉스의 어깨는 빠르게 회복했고 이젠 더 이상 붕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틀에 한번씩 행크가 알렉스의 상처를 봐주었다. 자신이 만든 알렉스의 상처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알렉스에게 말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행크는 제이크와 함께 후발대에 있었다. 이번 목표는 멧돼지였다. 미리암이 돼지고기를 먹고 싶다고 한 모양인지 베니가 꼭 멧돼지를 잡아야 한다며 굳은 결의를 보였다. 20분쯤 걸어나갈 때 멧돼지 두 마리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알렉스를 포함한 선발대가 자리를 잡자 행크와 제이크가 왼쪽의 방향으로 틀어 꼭지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맷돼지가 뒤쪽으로 달아났고 사내들은 멧돼지를 쫒는 동시에 삼각형을 맞추기 위해 달려나갔다. 행크는 맷돼지가 이렇게 빠를거라곤 생각 못했다. 나무 틈으로 후다닥 달려나가는 모습에 혀를 찼다. 맷돼지가 행크쪽으로 틀었고 행크는 맷돼지를 따라 몸을 틀면서 무릎을 꿇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맷돼지의 머리통을 향해 조준했다. 총성과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육중한 맷돼지의 몸이 쓰러졌다.
행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잡았어!’하고 소리쳤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 곳에서 총성이 들렸지만 그 소리는 꽤 멀게만 들렸다. 행크는 자신이 무리의 틈을 벗어난 것을 알았다.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젠장. 행크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사냥총을 고쳐 맸다. 그 순간 뒤에서 나뭇가지를 밟은 소리가 들렸다. 행크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빼들었다.
‘행크 맥코이?’
행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시는 것처럼 다친 곳도 없고 잘 지냈어요. 아버지 말씀이 맞더라구요. 사냥 실력 키워놔서 나쁠건 없다고. 그렇게 길 잃어 방황하는 도중에도 맷돼지 잡을 실력이 있으니 좋던걸요. 덕분에 굶을일은 없었어요.”
“정말 태평하게 말하는구나.”
“죄송해요. 하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나는 네가 ‘늑대들’에게 잡혀간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더라면 아마 저는 이 자리에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에요.”
“농담이더라도 그런 소리 말아라.”
마스터는 단호하게 말하며 행크를 바라보았다. 행크는 그의 모습에 차분히 미소지으며 또다시 죄송하다는 말을 남길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방은 변한거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그게 당연했다. 행크가 집을 떠나온 시간은 한달도 안되는 시간이었다. 꼭 몇 년은 흐른듯한 착각이 들었다. 행크는 그 원인을 알고 있었다. 너무 많은게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스터는 초최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원체가 날렵한 몸이었지만 지금은 날렵하다기보단 말랐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행크는 그의 얼굴이 자신이 던지려 했던 모든 물음을 삼켰다. 어쨌거나 그는 행크의 아버지였다. 그를 완벽하게 미워할 수는 없었다.
행크의 앞에 등장한 것은 프레디였다. 어린 시절의 뚱보 프레디. 지금 그를 뚱보 프레디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툼한 체격에 커다란 키를 가지긴 했지만 뚱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냥꾼에 가장 적합한 체격으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와 똑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마스터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마스터가 그에게 죽으라고 하면 곧바로 목을 매달거라고 수근거렸다. 만약 행크가 마스터가 된다면 프레디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행크의 오른팔이 될 터였다. 그게 아주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사실 좀 거북한 일이었다. 프레디의 아버지와 현 마스터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프레디의 얼굴을 마주하자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흘러갔다. 어떻게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도망가야하나. 하지만 도망갔다가는 그대로 아버지에게 일러 바칠 것이다. 더 의심을 살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지만 행크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프레디의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다. 행크는 그의 얼굴을 보자 모든 생각을 멈췄다. 행크 맥코이. 또다른 행크 맥코이였다. 그는 행크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에게 달려 들었고 애달픈 얼굴로 아들을 안았다. ‘죽은 줄 알았다. 죽은 줄 알았어.’ 자신이 뱉으면 그토록 화를 내면서도 그는 애달픈 목소리로 죽은 줄 알았다고 말했다. 행크는 알렉스가 생각났다. 가버린줄 알았다고 울며 자신을 안던 알렉스가 떠올랐다.
“한동안 사냥은 금지다. 집에서 쉬도록 해라.”
“아버지.”
“그만, 더 이상 듣지 않겠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주니어, 너는 앞으로 이 마을을 이끌 마스터가 될거다. 용기도 좋고 야망도 좋아. 하지만 넌 너를 좀 더 보살필 필요가 있다. 너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생각해.”
그는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을 지켰다. 그리고 행크의 얼굴을 끌어 안았다.
“아픈 모습을 보는 것은 너의 어린 시절만으로도 족하단다.”
그의 따뜻한 포옹에 행크는 할말을 잊었다. 방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등을 보았다. 행크는 몸을 옮겨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천막의 바닥보다 훨씬 폭신하고 따뜻했으나 결코 편하지 않았다. 아니 분명 편했다. 이 편안함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터다. 알렉스가 생각났다. 베니와 제이크 그리고 미리암도 생각났다. 그들은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베니는 행크가 도망간게 뻔하다며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알렉스는 무슨 생각을 할까. 또 전처럼 밤 늦도록 숲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을 하니 마음이 불편해 미칠것만 같았다.
밤이 되면 빠져나가자고 생각했다. 짐승들 때문에 위험하더라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편이 안전했다. 그전까지는 조금이라더 자둬야 한다. 행크는 어른 거리는 알렉스의 모습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홀로 서있는 그 모습이 불연득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나 두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창문으로 환한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
‘찾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나가고 행크는 베레스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쉬고 있는 집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서 여자들이 무리지어 앉아 바구니를 만들고 있었다. 행크는 그녀들을 피해 가며 노크를 했다. 행크의 행동을 주시하던 여자들은 그녀가 자고 있다고 알려줬으나 행크는 그녀의 얼굴만 확인하면 된다고 웃으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녀들의 말처럼 베레스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밖에서 쑥덕이는 소리들이 들려왔으나 행크는 그것들을 듣지 않았다. 그저 눈 앞에 있는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알렉스의 누이로만 인식되던 그녀가 이젠 그를 품었던 어머니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소녀같았다. 풍성한 금발 머리카락이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흔들렸다. 행크는 그녀를 마냥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쓰다듬는 순간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드디어 찾았군. 어디서 찾았나? 남쪽 산 너머의 호수? 그도 아님 북쪽 평지?’
‘터널 방향입니다.’
밖에서 속닥이는 소리에 설풋 잠에서 깨었다.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한기에 몸을 움츠리는데 ‘터널’이란 단어가 들렸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소리의 근원지인 문 너머를 보았다. 틀림없이 아버지와 프레디의 목소리였다. ‘늑대들’의 본거지를 찾은 것이 틀림 없었다. 행크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런 결과는 예상치 못했다. 어떻게 이리 빨리 그들을 찾을 수 있던 걸까. 아니다, 아니야. 늑대들이 나타난지 꽤 시간이 지났다. 오히려 시간이 오래걸렸다는 것이 맞을게다. 더불어 마스터는 행크가 ‘늑대들’에게 잡혀갔다고 생각했을테니 여태 지켜왔던 방어적인 자세를 버리고 공격적인 태도로 변화했을터.
‘오늘 밤 9시에 소집명령을 내리도록.’
‘오늘 밤이요?’
‘늦춰져봤자 좋을거 하나 없어.’
그의 마지막 말 뒤에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행크는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했으나 결국 그대로 꼬꾸라져 자는 척 하기로 했다. 문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발소리는 침묵을 지키더니 행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손이 행크의 어깨를 두들겼다.
‘주니어, 집에서 쉬라고 했을텐데.’
행크는 잠에서 갓 깨어난척 연기하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저 그녀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왔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마스터는 아들을 복잡한 얼굴로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행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밖으로 나왔다. 닫히는 문과 문 틈 사이, 아직도 잠든 그녀를 보며 행크는 알렉스의 말을 기억했다. 아직도 그가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이야기. 알렉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문 밖에는 프레디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위협적인 등치와 매서운 눈매였다. 그 뚱보 프레디가 이렇게 클 줄이야. 자신이 약골인 시절은 싹 까먹은채 행크는 세월을 탓했다. 그의 곁을 지나쳤다.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행크는 하늘을 보았다. 깜빡 잠든세에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듯 했다. 분지의 밤은 빠르다. 행크는 어둠이 내리는 순간 집을 떠나자고 결심했다. 이 사실을 알렉스에게 알려야했다. 촉박한 시간이지만 분명 대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행크는 익숙하게 단도를 허리에 매고 사냥총을 어깨에 맸다. 필요없는 짐들은 최대한 배제 시켰다. 그리고 큰 바늘이 12로 온 것을 확인하고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 사람들은 적었다. 몇몇의 사내들만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행크는 부엌을 향했다. 뒷마당엔 아무도 없었다. 그대로 뛰쳐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뛰었다. 뒤에서 누군가 쫒아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뒤돌아 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버지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삐죽 튀어나온 가지 때문에 팔 한쪽이 심하게 긁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이 이상 뛴다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또한 신경쓰지 않았다. 어렸을적에 아버지가 읽어주었던 페디이피데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아타네의 마라톤에서 스파르타까지 200km를 이틀만에 돌주한 남자의 전설이었다. 그의 최후가 어떠했던가. 전령을 전하고 심장이 터져 죽었다고 했던가. 아니면 그대로 꼬꾸라져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던가. 어쨌든 그의 최후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그에게 만큼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행크는 주저하지 않고 일어섰다. 무릎이 욱씬거렸지만 그것에 칭얼거릴 시간은 없었다. 어둔 터널을 통과하고 가파른 경사를 뛰어 내려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대로 뛰어가면 1시간 안에는 도착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뛰어가는데 밝은 불빛 하나가 행크의 눈 앞에 걸렸다. 작은 후레쉬 빛이었다. 이지역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오로지 알렉스를 포함한 이들뿐이다. 설마 벌써 아버지가 오신걸까. 벌써 이곳으로 도달하신걸까. 하지만 불빛은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한곳에서 머물뿐 움직이지 않았다. 알렉스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행크는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불빛의 근처에 왔을때 속도를 멈추고 숨소리를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나무 뒤에 숨어서 불빛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불빛의 정체는 아버지도, 알렉스도 아니었다. 행크는 불빛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행크 맥코이? 맙소사. 행크!”
제이크가 외치며 자신에게 다가갔다. 분홍색의 아기 포대를 들고 있던 미리암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베니도 있었다. 미리암은 경악스런 얼굴로 행크를 바라보았다. 뺨부터 무릎, 팔뚝까지 베인 상처가 가득했다. 대체 어떻게 된거냐는 제이크의 물음에 행크는 숨을 몰아쉬며 어째서 이곳에 있는거냐고 물었다.
“아기가 열이 심해. 루이즈가 이곳으로 와서 시내의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루이즈의 차를 기다리는 중이야.”
그러고보니 이곳은 루이즈가 자빠진 행크를 발견했던 곳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그나마 넓은 길이 있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행크는 미리암의 품에서 애벌레처럼 움츠려든 아기를 보았다. 아이들에게 열은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그들이 여기에 있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행크는 겨우 다스린 숨을 삼키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터널을 넘어왔었어.”
“....뭐? 마스터?”
“어제 저녁 아버지를 봤어. 사냥을 갔다가 길을 잃었을때 그가 나를 발견했어.”
“마을 사람들은 터널을 넘지 않아. 그건 그들에게 금기나 마찬가지라고. 실제 그 터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베니. 그는 모두 알고 있어. 다만 그는 모르는 척했을 뿐이야. 젠장. 예상해야했어. 행크가 없어진지 근 한달이 다되어 가는데 그가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행크, 지금 그가 이 주변에 있는거야?”
“그들이 너희들을 찾아냈어. 아니 ‘늑대들’의 기지를 찾아냈어.”
행크의 말에 미리암의 눈빛이 흔들렸다. 행크는 자신의 말에 베니와 제이크가 열을 내며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침착했다. 행크는 그들의 침묵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불신을 느꼈다. 행크가 제이크의 어깨를 잡았다. ‘믿어야해. 거짓말이 아니야. 너희들을 속이려는게 아니라고!’ 행크의 울부짖음에 제이크는 놀란 얼굴을 하며 ‘아니야. 행크. 그게 아니야.’하고 대답했다.
“우리 근거지는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사방이 전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빛도 세어나가지 않아. 더불어 움푹 패인 평지여서 위에서 내려다 본다 하더라도 쉽게 찾지 못해. 그들이 터널을 넘었다 하더라도 이건 좀 이상해.”
“일 여년이 넘도록 찾지 못한 땅을 근 한달만에 찾았다는건 말이 안... 제기랄.”
베니가 그렇게 말하며 곁에 있던 미리암을 뒤로 숨겼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행크는 뒤돌지 못했다. 자신의 등을 지긋하게 누르는 금속이 느껴졌다. 잘 알고 있다. 이런 느낌.
“이럴 줄 알았지.”
행크는 오로지 베니, 미리암, 제이크 세사람의 표정을 보며 이 사태를 읽어냈다. 아니 읽어낼 것들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저 터널을 넘었고 그들을 발견했다는 자체만으로 이 모든 것이 발각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프레디의 대화 속엔 정확한 지역도, 어떻게 하라는 지시사항도 없었다. 그저 소집명령을 내릴뿐이었다. 그것을 미리 잡아냈어야 했다. 하지만 행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변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속일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통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머리 손하고 뒤로 돌아.”
행크는 시키는대로 행동했다. 뒤로 돌자 프레디를 포함한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다행히 그들 중엔 아버지가 없었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네명 모두 끌고 마을로 돌아간다.”
“이놈들의 기지는 찾지 않는겁니까?”
“어차피 제대로 알려줄 녀석들도 아니야. 시간낭비다. 다른 수색대 팀들이 근처를 조사하고 있으니 찾아내는 것은 금방이다.”
프레디는 그렇게 말하며 행크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총구로 행크의 머리를 쿡 찔렀다.
“사는게 참 쉽질 않지?”
*
아기의 열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베니는 아이와 여자만큼은 보내줘도 되지 않냐고 했지만 그들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세사람은 사냥총을 빼앗겼다. 그들은 맨몸이었고 두 손을 머리에 올린채로 그들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허리를 찌르는 총구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이 앞에 드리워졌으나 그들은 망설임 없이 스며들었다.
“뚱보 프레디, 너 정말 정말 탄탄대로로 성격이 업그레이드 되었구나. 말도 못하게 더러워졌어.”
“내가 말했지. 저새끼는 저 아빠 닮아서 성격은 아예 예고된 미래였다고. 네놈은 결혼도 못할거야. 저런 성격에 어떤 여자가 시집을 오겠냐?”
“결혼? 꿈에도 생각 못했네. 쟤 인생에 그런 설계가 있단 말이야?”
갑작스럽게 제이크와 베니가 만담을 하기 시작했다. 익살스럽기 그지 없었다. 행크는 이들의 대화가 매우 익숙하게 여겨졌다. 그들의 소년시절이 떠올랐다. 베니와 제이크는 늘 붙어 다녔고 함께 있는 한 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둘에게 걸린다면 남자고 여자고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행크도 몇 번이나 걸려들었다. 아마 그들의 포위망에 걸려들지 않은 또래는 알렉스 정도가 아닐까. 간만에 보는 두 사람의 만담에 행크는 웃고 말았다.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툭툭 내뱉는 말들은 아이고 성인이고 할 것 없이 열받게 만들기엔 그지 없었다.
“그런 수법쓰기엔 너무 나이 들지 않았나들. 닥치고 걷기나해.”
프레디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베니가 혀를 찼다.
그들은 사박사박 걸었다. 뒤에서 베니가 미리암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가 칭얼칭얼 울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미리암도 함께 울었다. 미리암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행크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이상 열이 오르면 죽을 수도 있다. 행크는 프레디를 불렀다. ‘올슨. 농담이 아니야. 이대로 방치하다간 아기가 죽을거야.’ 그러나 프레디는 이번에도 아무런 말도 없었다. 행크는 조급한 마음에 뒤를 돌아 보았다. 미리암이 아이를 껴안고 울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수색대가 벌써 알렉스의 근거지를 찾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지금쯤 알렉스는 뭘하고 있을까. 아버지와 대면한건 아니겠지. 그것은 원하지 않는다. 언젠가 그들이 부딪혀야 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렇게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속의 가장 막내인 존은 저녁밥을 먹지 않으면 힘이 안난다고 했다. 저녁은 먹었겠지. 먹어야 할거다. 지금부터 싸움이 펼쳐질지 모르니까. 마을에서 나온지 가장 오래된 발토는 알렉스를 도와 그들의 보금자리를 지켜낼거다. 그의 사냥 실력은 알렉스와 견줄 정도로 엄청나니까. 씻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조엘은 썩은내를 풍기면서 사람들과 싸울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스컹크일까. 행크의 머릿속에 몇십명의 사람들이 스쳐지나갔다. 그중에는 대화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행크는 모두를 알고 있었다.
마을에서 살 동안엔 이름도 몰랐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의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전우와도 같아 보였다. 행크가 모르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위해 그들은 뛰쳐나왔다. 행크는 그들이 그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행크는 자신의 허리춤에 숨겨져 있는 단도를 기억했다. 그리고 프레디의 넓은 등을 보았다. 그를 위협하기엔 모자르지만 그래도 반격할 여지는 충분할거다. 행크는 몸을 살짝 틀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자신의 종아리를 퍽 쳤다. 행크는 그것이 자신을 연행하는 무리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자신의 종아리를 친 것은 돌맹이로 추측되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뒤를 힐끔 돌자 베니와 제이크가 자신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이내에 앞을 보라는 호통에 몸을 돌렸지만 그 신호를 읽어내는 것은 충분했다.
뚱보 프레디의 집에는 애플파이가 많다네.
살을 디룩디룩 찌게하는 맛난 애플 파이가 가득하다네.
뚱보 프레디는 애플파이를 하루 20개나 먹는다네.
디룩디룩 살을 찌우며 먹는다네.
갑자기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박자와 음정을 딱딱 맞췄다 가사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담이 익숙한 만큼 행크에게 이 노래 또한 익숙했다. 작사 작곡, 제이크와 베니. 부르는 이, 제이크와 베니. 소년 시절의 두 사람은 프레디를 극도로 싫어했다. 프레디는 이르기를 좋아하는 녀석이었고 자주 알렉스를 험담했기에 두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재간둥이인 두 사람이 폭력으로 프레디를 놀렸을리 없었다. 이 노래의 탄생까지 지켜봐온 행크는 이 험난한 상황에서 향수까지 느끼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프레디는 배탈이 났다네.
20개의 애플파이를 먹고 배탈이 났다네.
디룩디룩 살이 찐 프레디는 배탈이 났다네.
제이크와 베니가 부르는 이 노래는 정말 프레디가 겪었던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프레디가 애플파이 20개를 전부 먹었다가 닥터 그린우드에게 진료를 간적이 있었다. 그는 ‘대체대체 위장이 얼마만하기에 이렇게 처먹은거야?!’하고 경악했고 프레디의 입안에 손을 집어넣어 억지로 토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로 프레디는 보는 사람마다 그만 좀 먹으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어른들은 정말 걱정 어리게 한 말이겠지만 아이들은 그게 아니었다. 제이크와 베니가 이것을 놓칠리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프레디를 볼때마다 말한다네.
프레디! 그만 좀 먹으렴,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단다!
프레디! 그만 좀 먹으렴, 그러다가 돼지가 되버린단다!
“닥쳐!”
프레디가 멈춰서면서 뒤돌았다. 그의 어깨에 있는 사냥총들이 철렁거리며 팔로 미끄러졌다. ‘행크!’ 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크는 프레디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치며 사냥총 끈을 휘어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두 개의 사냥총을 제이크에게 던졌다. 베니는 곁에서 주먹을 뻗는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행크는 그 빠른 순간 동안 익숙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보며 지난 세월이 얼마나 그들을 강인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물론 여태 봐온 그들은 충분히 강해졌고 자신들과 타인들까지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가까이 있던 미리암을 감싸는 제이크와 그 앞에서 자연스럽게 사냥총을 들고 있는 베니의 모습은 서글플 정도로 익숙해보였다. 행크는 프레디를 향해 총구를 내밀었다. 꽤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등을 맞고 중심을 잃었던 남자는 빠른 속도로 자신의 사냥총을 잡고 베니를 조준하고 있었다.
“정말 난 예전부터 너희들이 짜증났어.”
“원래 비만 아동들이 짜증이 좀 많은 편이지.”
“똑같이 생긴 것들끼리 온 동네를 뒤집고 다니면서 귀찮게 하고 말이지.”
“그것 참 미안하네. 조금만 덜 좋아할걸 그랬나봐. 네가 좀 많이 좋아야지.”
“아버지도 늘 그러셨어. 너희 둘 부친도 딱 저짝이였다고. 온동네를 뒤집고 다니고 마스터의 말을 어기면서 저 좋을대로 했다고. 그래서 결국 그렇게 죽은 거겠지. 너희들도 다르지 않아. 곧 그렇게 죽을거다. 딱 네 아버지처럼 말이야.”
“허허. 미안하지만 우린 아버지 얼굴이 기억이 안나서.”
“그러게 말이야. 난 내가 알까고 태어난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있던 모양이네.”
세사람의 대화가 살벌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경악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행크도 그 모든 것들을 침착하게 들었다. 알고 있었던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가늠은 하고 있었다. 둘이 태어난 시기, 두 사람의 어머니가 다른 이유없이 살벌한 관계였던 것, 그리고 베니를 향해 ‘형제 같은 사이’가 아니 ‘형제 사이’라고 설명했던 제이크. 결국은 모두가 같았다. 모두가 스스로의 안에 상처가 있었고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니와 제이크는 서로를 감싸며 그것들을 치료했다. 제이크의 말대로 그들은 정말 형제였다.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정 형제였다.
프레디가 던지는 말끝마다 제이크와 베니는 꼬투리를 잡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종국에 베니가 또다시 프레디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을때, 그는 주체하지 못했다. 그가 베니를 조준했다. 첫발은 빗나갔지만 이어서 다시 조준했다. 행크는 예감했다. 아버지는 자신과 미리암을 포함한 아기는 생포하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니와 제이크는 아니다. 반항시엔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음이 분명했다. 이 순간 프레디가 두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를 탓할 사람은 없었다. 물론 제이크와 베니의 어머니들은 발작을 하겠지만 아무도 그녀들을 동정하지 않을것이었다. 제이크와 베니는 반역자였다. 반역자의 죽음은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다.
프레디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다른 이의 주먹을 피하던 베니를 지나쳐 미리암을 향해 갔다. 미리암은 맨 끝에 서 있었고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행크는 총알이 그녀를 향하는 순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느리게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뜨면 그녀의 가슴에서 피가 튀어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감지도 못하고 안된다고 소리만 질렀다. 순간 행크의 눈 앞으로 무언가 스쳐갔다.
베니를 맞추지 못한 프레디가 다시 조준했다. 행크는 들고 있던 총신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거 얼굴을 후려맞고는 행크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칼을 꺼내려 했다. 이성을 잃었다. 이미 그는 이성을 잃었다. 까딱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 행크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찾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의 배를 찔렀다. 손에서 퍼지는 꿀럭한 액체가 느껴졌다. 프레디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변했지만 그는 다시 칼을 고쳐 잡으려 했다. 행크는 잡고 있는 칼을 가슴쪽으로 찔러 올렸다. 프레디의 입이 뻐금거렸다. 행크는 그의 입안에 있는 검은 구멍을 보았다.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하는 고통이 그 안에 자리 잡아 있었다. 그리고 이내 죽음으로 교체 되었다. 프레디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행크는 무거운 몸을 붙들고 있다가 이내에 떨어뜨렸다. 육중한 몸이 쿵 떨어졌다.
행크가 느릿하게 뒤를 돌자 총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경악이 가득했다. 한 사람은 벌벌 손까지 떨고 있었다. 행크는 그들을 비웃었다. 저들의 나이까진 약 40마리의 동물을 죽인다. 그중에는 프레디보다 커다란 몸의 사냥감도 있을터였다. 짐승을 죽일때는 망설임 없으면서 사람하나 죽었다고 손까지 벌벌 떤다.
행크는 곁에 떨어진 사냥총을 들었다. 그들이 움직이면 쏜다고 소리 질렀으나 행크는 여의치 않았다. 행크가 멈춘 것은 그들의 고함때문이 아닌 베니의 중얼 거림 때문이었다.
“제이크. 제이크. 제이크.”
베니의 목소리는 가느다랬다. 어찌할바를 몰라 낑낑거리는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행크는 또다시 예감했다. 언제나 기분 나쁜 예감은 이르게 찾아왔다.
“제이크. 이 망할 자식아.”
미리암의 무릎을 베고 제이크가 누워 있었다. 미리암은 두 손으로 제이크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피를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두 손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베니는 제이크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를 불렀다. 제이크의 갈색 눈동자가 저 끝까지 잠겨 있었다. 그는 뻐끔뻐끔 거리며 말을 꺼내기 위해 힘썼다.
“미...미친....이...이거...지...진짜...죽,,죽을 것 같아...”
“안 닥쳐?! 총성을 들었으니 루이즈가 올거야. 루이즈가 오면 널 병원에 데려갈거고 넌 네가 진짜 싫어하는 의사들하고 하하호호 수술하다가 나오면 되는거야. 그리고 나를 걱정 시킨죄로 100대만 쳐맞아라. 그러니까 지금은 입 쳐닫고 기다려. 씨발! 눈 감지마!!!”
“야, 야... 베니야.”
제이크가 가물가물 잠기는 눈으로 베니를 보았다. 점차 말하기가 힘들어 지고 숨이 늘어졌다. 행크는 그 모든 것들 지켜보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물기가 터져나올 듯 울먹이는 베니와 곁에서 이미 눈물을 터뜨린 미리암과 그리고 그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제이크는 헐떡이는 숨을 참아낼 듯 말 듯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저번에....”
베니가 제이크의 차가운 얼굴을 부여 잡았다. ‘말하지마. 말하지마.’ 이내에 베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는 제이크의 말들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들었다. 이 마지막을 놓칠 수가 없어 끝까지 부여잡고 있었다.
“어...얼굴...때려서...미안했다.”
제이크가 힘겹게 웃었다. 그는 미리암에게 무언가 할말이 있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몸이 멈췄다. 감지 못한 눈안에서 빛이 꺼져들었다. 베니가 그의 몸을 흔들었다. 욕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울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고 또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가지 말라고 애원할 뿐이었다.
행크는 온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결국은 여기까지 도래한 것이다. 행크는 총을 들었다. 움찔거리던 두 사람이 다시 행크와 베니를 향해 조준했다. 이미 시작했다. 행크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그가 방아쇠에 손을 걸었을때 누군가 행크의 이름을 불렀다.
수많은 발자국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였다. 행크는 눈을 감았다. 견딜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
“알고 있었단다. 1년정도 되었지. 계속해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찾고 있었지만 쉽진 않았어. 지금쯤 나를 제외한 수색대가 계속해서 그들을 찾고 있을거다. 그리고 찾게되면 전부 끝이 날거야.”
“......”
“주니어, 뒤늦은 반항이라고 생각하마. 물론 네 손에 피를 묻힌건 사람들 앞에서 사죄하고 또 벌을 받아야 할거야. 프레디는 우리 마을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비록 그가 객관적으로 어리석은 부분이 없잖아 있다지만 그는 충분히 너의 오른팔이 될 수 있었어. ...그래, 이렇게 말하면 끝이 없겠구나. 어쨌든 다 잊어줄테니, 그만해라.”
지쳤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아버지.”
지쳤다.
“제게 해주셨던 탈무드 이야기 기억하세요?”
아버지의 지시로 장정들은 프레드의 시신을 챙겼다. 울고 있는 미리암과 반항하는 베니까지 몰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엔 제이크만이 남았다.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 이야기요.”
베니는 그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며 짐승같이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제이크는 외로워보였다. 아마 베니도 그것을 견딜 수 없었겠지. 행크는 홀로 누워있던 제이크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제게 가르쳐주신 올바르다는게 대체 뭐에요?”
“주니어.”
“처녀가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해요. 아이가 아버지한테 버려져요. 또 딸은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죠. 한 남자는 두 여자에게 씨를 뿌리고 마을은 권력과 광기에 휘어잡혀요. 존속의 번식? 물려받는 마을의 전통? 이게 무슨 소용이죠? 아무도 행복하지 않아요.”
“너는 모른다. 이 마을을 벗어나면 사람들의 사리사욕에 붙잡힐 뿐이야. 이 마을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깨끗하다. 비록 누군가들은 희생해야하지만 그건 이 마을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야. 네가 보기엔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 할지라도 네가 이 마을을 다스릴때즈음엔 알게 될거다.”
“결국 그거에요?”
“그만해라.”
“결국 그따위 변명이에요?! 소수의 희생이 다수를 행복하게 만든다고요?! 네! 그러시겠죠! 종국엔 모두가 죽어나가고 고통에 빠져야 후회하실 건가요!? 당신은-!”
행크의 뺨이 뜨거워졌다. 행크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맞은적이 있나 생각해봤다. 몇 번 자신의 잘못으로 혼났을때 벌을 서긴 했지만 이런식으로 맞은적은 없었다. 그래서 서러워졌느냐.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지쳤던 마음도, 감당 할수 없다 여겨졌던 것들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버진 신이 아니에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문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두 사내가 성지를 지키듯이 서 있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뒤를 돌아 행크를 보았다. 깨끗한 파란 눈, 정돈된 금발머리카락. 행크는 그를 보며 참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다정한 입매에서 스며나오는 말들은 그보다 더 다정했다. 어떤 누가 우리 아버지만큼 다정하고 선량할까 싶었다. 그는 행크에게 자랑거리였다.
“사랑한다. 아들아.”
그래, 행크는 또다시 인정해야했다. 이 모든 본질, 이 모든 잘못된 이야기들의 중심에 그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마을 장로들과 이어받은 잘못된 관습들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그 안엔 행크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부가 아니었다. 행크는 자신의 출생도 모른채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금도 그랬다. 자신이 도시에 있던 아이일지. 아니면 저 먼곳 다른 사냥꾼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일지. 사창가에서 태어난 아이일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행크가 알고 있는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만큼은 너무 극명해서 행크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저도 사랑해요.”
*
‘도시로 가는거? 그거 알렉스의 꿈이었어. 걘 늘 가고 싶어했거든. 저번에 루이즈를 만나러 간답시고 시카고로 갔었어. 다녀와선 혼자서 중얼거리길 역시 도시로 가야겠어. 이러는거야. 사실 난 시골이 맞아. 이런 곳이 좋아. 도시는 너무 복잡하잖아?’
‘가본적도 없으면서.’
‘안가봐도 뻔한거지.’
제이크의 말에 베니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두 사람은 토끼 스프를 만드는 중이었다. 미리암은 알렉스가 만들어준 나무 의자에 앉아 바구니를 만들고 있었다.
‘난 이 모든게 끝나면 도시로 갈거야. 도시에서 애기 학교도 보낼거고 좋은 음식도 먹일거야. 이제 시골은 지겨워. 그리고 내가 가면 너도 가야해. 알겠어?’
‘싫어. 난 시골이 좋단 말이야.’
‘대부가 근처에 살아야지 어딜 가겠다는거야. 네가 우리 애기 학교 가는 날에 풍선도 사주고 또 놀러도 데리고 다니고 그래야지. 이놈의 사냥은 다 때려치우고 도시가서 사는거야. 이놈의 시골. 토끼도 사슴도 지겨워 죽겠다.’
‘나는 찬성. 우리가 중앙에 살고 오른쪽 집은 행크랑 알렉스네, 그리고 왼쪽은 제이크네.’
미리암이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행크는 머리도 좋으니까 금방 배울거야. 나중에 대학같은데도 들어가지 않을까? 그나저나 대학은 어떻게 들어가는건가 몰라. 닥터 그린우드가 대학나온 유일한 사람이잖아. 저번에 어떻게 가는거냐고 물어봤더니 들어가기 어렵다고 그러더라? 뭐, 그래봤자 얼마나 어렵겠어. 행크 정도는 거뜬하게 들어갈거야.’
‘우리 부인님께서는 어찌 너를 사랑하시는지 모르겠다. 멀대같은 자식이 뭐가 좋다고,’
‘잘생겼잖아. 행크 잘생겼다고.’
‘지금 나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이나와?’
‘나중에 네가 제이크랑 바람나면 난 행크랑 같이 살려고. 미리 침 발라 놓는거야.’
‘우웩. 미안한데 그건 내쪽에서 사양이다. 이렇게 쓸모없는 애를 데리고 어떻게 사냐? 난 그냥 시골에서 혼자 살란다. 그런데 여기는 싫고 저 아래로 내려갈거야. 그래서 옥수수농사랑 감자 농사 지을거다. 여긴 너무 습해서 그런 작물은 농사가 어렵거든. 행크는 넌 어쩌고 싶냐? 너도 도시로 가고 싶어?’
제이크가 웃으며 묻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크도 대답하고 싶었다. 나도 도시로 갈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알렉스랑 밤이 끝나는 순간을 보기로 했어. 도시의 한 가운데서 말이야. 그러나 행크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게 안타까웠다. 멀리서 알렉스가 접시를 들고 오는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웃음 지었다. 마주 웃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허락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도 이런 꿈을 꿨었다. 제이크와 베니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던 꿈. 알렉스와 오두막에 함께 있던 꿈.
사실 그런 꿈들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행크가 괴로운 순간에 추억이 방울방울 달린 꿈들이 그를 찾아왔다. 꿈에서 깨면 남은 것은 자신 뿐이라 더 서글퍼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행크는 바닥에 앉은채로 선잠에 빠졌다. 프레디와 싸우다가 삐었던 다리가 심하게 욱신거렸다. 숲속에서 잃어버린 모양인지 안경도 당최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었고 아버지에게 맞았던 뺨도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거울을 본다면 분명 엉망진창일 것이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베니와 미리암은 어디 갔을까. 분명 그들고 갇혀 있을것이었다.
아버지 성격에 이 모든 것을 두고보고만은 있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의 보금자리가 발각되는 대로 그는 그곳을 칠 것이다. 알렉스는 살려둘까. 아니. 아니겠지. 모두 개죽음을 당할게다. 알렉스가 준비했던 것은 육체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그 전쟁에서 알렉스가 승리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알렉스는 루이즈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일터다. 육체전으로 갈 수 없으니 언론을 이용하고자 한거겠지. 하지만 상황이 역전 되었다. 물론 루이즈도 차차 모든 것을 완성하고 정리하는 단계였지만 그것은 지금의 전쟁과는 다르다. 이 전쟁은 오늘 밤에 모두 끝이 난다.
행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 변화 시키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노력했다. 약골인 몸으로 운동도 했고 공부도 했다. 무언가 변화 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남은 것은 굳게 잠겨진 문과 외로운 방 뿐이다.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알렉스를 찾아야했다. 그의 무리들을 찾아야 했다. 도망치라고 해야했다. 그들이 너희들을 찾고 있으니 멀리 도망치라고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야했다. 행크는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보았다. 행크의 방에 있는 창문은 지나치게 높고 좁았다. 빠져 나갈 수는 있겠지만 유리창과 덧대진 합판이 문제였다. 문 밖에는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다. 아마 베니와 미리암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 일터다.
결국 행크는 창문을 선택했다. 조금 소란 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다. 두 사람을 뚫고 갈 순 없으니 창문이라도 뚫어야했다. 행크가 방안에서 두꺼운 책을 찾았다. 그리고 유리창을 향해 내리 찍으려던 순간이었다.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말소리가 울리더니 무언가 부셔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종국엔 총성이 울렸다. 집안뿐 아니였다. 창밖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깨지는 소리도 요란하게 났다. 행크가 창밖으로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문고리가 철컥철컥 돌아갔다. 행크는 문밖의 있는 사람을 보며 정말 이것이 꿈이길 바랐다.
“어...어떻게”
“루이즈가 제이크의 시신을 발견했어. 어서 나와.”
“알렉스. 잠깐만. 잠깐만!”
“행크! 지금 이럴 시간 없어! 곧 있으면 수색대가 돌아올거야! 수색대까지 돌아온다면 우리들은 견디기 힘들거라고!”
“알렉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해. 어서 돌아가야한다고! 아버지가 아직 마을에 있어. 널 보면 죽일거야. 망설임도 없을거란 말이야!”
알렉스의 팔을 잡았다. 이미 피로 물들어 있는 알렉스의 옷을 보며 행크는 제이크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다급하게 외치는 행크를 보며 알렉스가 힘들게 미소지어 보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행크, 잘 들어. 숲으로 돌아가는건 위험해. 수색대가 지금 코앞에 있어. 숲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다 때죽음이야. 그들은 이미 이곳 지리를 꿰고 있어. 그에 반해 우리 팀은 마을 내부에 대해서는 아직 어설퍼. 기껏 알아봤자 발토나 베니 정도지. 우리는 이 마을 안에서 모든걸 끝장 내야해.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 우린 모두 그것을 감수하면서 돌아왔어.”
‘정말 끝내주는 귀향이지.’ 알렉스는 농담까지 해보였다. 그러나 행크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저 알렉스의 손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쓰러진 사내들의 품에서 사냥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행크에게 내밀었다.
“창고로 갈거야. 알고 있지 4번째 식량창고. 가장 튼튼하게 지어진 곳이라 막아두면 침입하기 힘들거야. 그곳에서 미리암과 아기, 그리고 누나를 지켜야해. 모든게 정리 될 즈음에 그쪽으로 갈게. 미리암이 경찰을 부른다고 했으니 곧 그들이 올거야. 물론 수색대들보다는 한참 늦겠지만 그정도 까진 끌 수 있어.”
행크는 사냥총을 잡았다. 알렉스는 그를 끌었다. 현관 밖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알렉스는 빠르게 조준했지만 이내에 총을 거둬들였다. 베니였다. 아까전보다 훨씬 상처가 많아 보였다.
“빠져 나왔군. 발토는?”
“4번 창고에.”
“미리암은?”
“미리암도 4번 창고에 있어. 내가 확인했어. 그런데 베레스는 찾을 수가 없었어. 존이 찾으러 다니고 있는데-”
“제기랄. 알겠어.”
“행크는?”
“4번 창고에서 미리암과 아기를 지킬거야.”
베니가 행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다급한 얼굴이 힘겨운 미소가 떠올랐다. 알렉스와 똑같았다. 그는 행크의 어깨를 두들기며 ‘믿음직한걸. 그래 행크 정도는 돼 줘야지.’하고 말했다. 알렉스의 재촉에 세사람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뒤섞여 있었고 벌써부터 시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 총을 쏘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피를 뒤집어 쓰고 상처난 얼굴들. 모두가 익숙했다. 마을에 있는 사람도, 알렉스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행크에게 익숙했던 사람들이었다.
공격하는 무리에 알렉스는 익숙하게 방아쇠를 눌렀다. 베니도 엄호하며 사격을 시작했다. 4번 창고는 마을의 외진 곳에 있었다. 행크가 태어나던 해에 지어진 곳이었는데 마을 식량 창고들 중에 가장 탄탄했다. 7년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거친 폭풍우도 이겨낼 정도였다. 알렉스는 행크를 밀어 넣었다. 안에는 이미 미리암이 아이를 붙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도 전보다 훨씬 상해 있었다.
알렉스는 문 앞에서 발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발토는 수색대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베니는 미리암 앞으로 가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아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여전히 아이의 뺨이 뜨거웠지만 닥터 그린우드가 해열제를 먹인 모양인지 전보다는 나아보였다. 알렉스는 발토에게 존을 도와 베레스를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알렉스를 보았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알렉스도 따라 말했다. ‘신의 가호가.’ 발토는 사냥총을 들고 혼란스러운 틈으로 사라졌다. 알렉스가 나직히 베니를 불렀다.
베니와 미리암의 뺨은 눈물로 가득했다. 흐느끼는 미리암을 몇 번이고 껴안으며 베니는 ‘괜찮아. 괜찮을거야. 전부 끝내고 우리 돌아가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자. 너랑, 나랑 그리고 우리 아기랑.’ 끝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미리암의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행크도 숨이 멎을것만 같았다. 다시 알렉스가 베니를 불렀다. 베니가 그녀로부터 떨어지려 했지만 미리암이 베니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베니는 그녀의 손을 꼬옥 쥐어주고는 행크를 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었으나 행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베니가 문밖으로 나갔다. 미리암에게 등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저 만치 달려가는 베니를 보며 미리암은 크게 흐느꼈다. 행크는 알렉스를 보았다. 알렉스가 문을 닫으려 했다.
“알렉스! 잠깐만! 잠깐만!”
행크가 문을 붙잡았다. 그리고 알렉스를 마주 보았다.
“나도 같이 가겠어. 베니에게 미리암을 지키라고 하면 되잖아. 너도 알잖아. 더 이상 나 그때의 약골이 아니란걸 너도 알잖아.”
“행크, 네가 약하기 때문에 여기 두는게 아니야. 우린 미리암을 지켜야해. 그리고 미리암의 아기또한 마찬가지고. 베니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희생해왔어. 그리고 제이크는 그런 베니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고. 너는 여기 있어야해. 그녀를 지켜야해. 그리고 너도 살아 남아야해.”
“우리 모두 살기 위해서였잖아. 우리 모두 살기 위해서였잖아!”
행크가 알렉스를 붙잡았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녀를 지키고 아이를 지켜야하는 것도 안다. 그러나 행크는 알렉스를 죽음에 몰아 넣을 수 없었다. 행크는 많은 것들을 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알렉스를 위한 것이었다. 변명 따윈 필요 없었다. 결국 그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과 그와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아니 행크.”
알렉스가 행크의 부어 있는 뺨에 손을 얹었다. 알렉스의 손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그리고 피 냄새가 났다.
“지키기 위해서였어.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지.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고 행크에게 입맞췄다. 뺨을 붙잡는 손은 차가웠으나 입술만큼은 따뜻했다. 입을 맞추는 짧은 순간이 끝나고 행크는 알렉스의 푸른 눈을 보았다. 안녕. 그렇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행크도 그렇게 인사 할 수 밖에 없었다. 안녕. 알렉스가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틈으로 자신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행크는 억지로 문을 열어보려 했으나 굳게 닫힌 문을 열리지 않았다. 총성이 울리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행크는 주먹이 부셔져라 문을 두들기며 알렉스를 불렀다. 그러나 굉음들에 행크의 목소리는 묻혀만 갔다.
그저 멍하니 서서 닫힌 문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뒤에서는 미리암이 울고 있었다. 행크는 눈을 꼭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눈을 떴을때는 알렉스에게 건내받은 사냥총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미리암의 곁에 섰다. 끊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절대 죽지 않을 것이었다. 미리암도, 아기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강해져야해.’
‘그럴 필요가 있어?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굉음들 사이에서 어린 목소리들이 속닥였다.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행크는 귀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물음에 담담하게 대답했던 알렉스의 대답을 따라 했다.
문이 열리기까지 행크는 그 말을 반복했다.
“지키기 위해서지.”
*
세상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그 뒤 망가진 그곳에서 많은 것이 강해진다.
*
미리암의 아기는 아직도 이름이 없었다. 모두들 최고의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고심했지만 결국 아무도 지어주지 못했다. 베니도 그랬고, 제이크도 그랬고, 알렉스도 그랬다. 모두들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채로 떠났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미리암의 부탁에 행크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이름을 정해주었다. 미리암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좋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녀와 행크는 서로의 상처를 들쑤시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밖으로 뱉지 않았다.
행크와 미리암은 도시로 나갔다. 그들은 작은 빌라를 얻었다. 이 모든 것을 루이즈가 도와주었다. 그뿐 아니라 루이즈는 아기에 대한 것이나 두 사람의 생활적인 모든 것들을 도와주었다. 행크에게 변호사를 선임해준 것도 그녀였고, 법정에서 내내 함께 해준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미리암에게 아기의 이름을 전해 들었을때 어설프게 미소지으며 ‘그래. 좋은 뜻이지.’하고 대답했다.
“꼭 올 필요 없었잖아. 경찰 측에서도 계속 찾아주겠다고 했고.”
“와보고 싶었어요.”
“내가 보기에 이건 미친짓이야. 상처만 후벼 파는거라고.”
행크는 창고의 문이 열리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 앞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러나 총을 들고 있는 그는 아니었다. 마을을 휩쓸 듯이 걸어다니는 경찰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장해 있었다. 행크는 미래가 현재로 휩쓸려 들어 온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비극적이었다. 창고 밖은 피투성이었고 시체 투성이었다. 익숙한 얼굴들, 낯익은 사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루이즈가 창고로 뛰어 왔다. 미리암은 루이즈를 보자마자 그녀를 끌어 안았다. 무장한 경찰 둘이 아버지와 몇몇의 사람들의 수갑을 채웠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눈을 마주했으나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행크는 먼치에서 베니의 시신을 발견했다. 너털 걸음으로 그 앞에 섰다. 참혹하게 난도질 되어 있는 시신은 전혀 베니 같지 않았다. 어느새 따라 온건지 미리암과 루이즈가 베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루이즈는 미리암이 앞을 볼 수 없도록 그녀를 깊이 껴안았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의 몸에 하얀 천을 둘렀다.
행크는 알렉스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베니의 근처에서 그의 것으로 판단되는 신발을 찾았을 뿐이었다. 경찰들이 주변을 찾았지만 알렉스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이들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그가 세상에 없었던 사람같이 굴었다.
그 좁은 창고에 앉아 모든 것을 들었다. 찢어지는 비명, 총소리, 울음소리 행크는 모든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알렉스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이것을 내내 전쟁이라고 칭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 전쟁이 맞았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것이 전쟁일까. 경찰들이 등장하고 살아 남은 이들을 제압하는 동안에 행크는 알렉스를 위해 기도했다. 그가 살아 남기를 기도하기보단, 그의 죽음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웠기를. 그것은 아마 미리암의 기도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가 들어 올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야. 여기서 부턴 걸어가야해.”
결국 알렉스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경찰들은 그를 계속 찾아 주겠다고 했으나 쉽사리 찾지 못했다. 찾지 못한 것은 그의 누이인 베레스도 마찬가지였다. 행크는 그녀가 살아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밤낮을 찾아 다녀도 그녀의 발자국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루이즈의 도움으로 실종 신고를 넣었으나 그녀를 찾을 거란 희망은 없었다.
그 와중에 루이즈는 기사를 올렸다. 다른 언론들이 이들의 싸움을 단순한 세력 싸움으로 나타내기 전에 그녀는 정확한 진실이 알려지길 바랐다. 그녀의 기사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한 주를 벗어나 나라가 열띤 반응을 보였다. 도시 사람들도, 시골 사람들도 만나기만 하면 이들의 이야기를 했다. 여러 사람들이 생존자인 행크와 미리암을 취재하길 바랐으나 루이즈는 그들이 곁에 오지 못하도록 완벽히 막아냈다.
사실 미리암과 행크는 유일한 생존자가 맞았다. 알렉스의 무리들 가운데 살아 남은 이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행크의 생각이 맞았고 알렉스의 생각이 맞았다. 승산없는 싸움이었고 그저 개죽음만 남길 전쟁이었다. 제이크도, 베니도, 발토도, 존도, 프랭클린도 모두 죽었다. 알렉스마저 사라졌다. 뉴스에선 두사람을 유일한 생존자라며 떠들었고 살아남은 마스터에 대한 재판 결과를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그 재판 보도 가운데는 행크의 사진도 있었다.
행크는 증인으로 자리에 섰다. 성경책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전에 죄수복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가득 수척해진 얼굴엔 애틋함까지 스며 있었다. 그가 행크를 향해 중얼 거렸다. 먼거리 였으나 행크는 들을 수 있었다.
‘아들아, 사랑한다.’
행크에겐 분노도 증오도 없었다. 슬픔 뿐이었다. 행크는 자리에 앉으라는 재판사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버지를 가만 보기만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저도요 아버지. 정말로요.’ 그런 대답 뿐이었다.
마스터는 그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 했으나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행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출입금지 지역입니다.”
“관계인이에요. 이쪽은 증인이구요.”
빌라로 들어오던 날에 행크는 창문밖으로 내리는 어둠을 보았다. 이삿짐이라 할 것도 없었지만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보니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 미리암은 지쳤는지 아이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부엌에는 지켜먹은 배달 음식이 놓여 있었다. (미리암이 시켜준 음식이었다.) 행크는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높은 건물들이 가득한 곳으로 나갔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거리를 걷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행크는 자신이 너무 춥게 입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도시 가운데의 자리에 도착했다. 기다란 횡단 보도 사이에 놓여 있는 지대였다. 그곳에서 건물들을 바라보니 정말 도시의 한 중앙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행크는 밤새도록 그곳에 있었다.
“행크, 너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마.”
“걱정마요. 이곳에서 몇십년을 살았는걸요.”
루이즈의 걱정어린 소리에 행크는 웃으며 손을 들었다. 마을에는 경찰들이 가득했다. 그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몇몇의 아녀자들이 있었지만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행크는 피에 젖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베니가 누워 있던 곳이었다. 행크는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행크는 몸을 옮겼다.
예전, 행크가 아주 어렸을 적에 개 한 마리를 키웠었다. 아버지는 그 개를 블루라고 불렀다. 꽤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블루는 애교가 많았고 말도 잘 들었다. 그러나 행크가 키우기 전부터 나이가 많았던지라 금세 지치곤 했다. 한번은 블루가 밥도 먹지 않고 골골 거렸다. 행크는 억지로 먹이려 했지만 블루는 입조차 열지 않았다. 행크는 ‘네 마음대로해!’하고 성질을 버럭내면서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날 밤에는 참 많은 비가 내렸다. 행크는 새벽같이 일어나 블루가 괜찮은지 보려고 했다. 그러나 블루는 없었다. 행크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블루를 찾았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닥터 그린우드는 엉엉 우는 행크를 붙잡고서 이렇게 말했다.
‘원래 개들은 죽기 전에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도록 사라진단다. 그게 개들의 죽음이야. 그걸 탓해선 안돼.’
그 기억을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알렉스와 개라. 참 잘 어울린다 싶었다. 그러나 죽음까지 따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행크는 종국에 입을 일그러뜨렸다. 모두가 행크에게 말했다. 알렉스가 살아 있을거라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틀렸다. 행크는 그런 기대 따위 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살아 있을거란 기대 따위, 슬프게도 단 한번도 한 적 없었다.
행크는 자신이 익숙한 길에 왔음을 알았다. 물론 이 숲 자체가 익숙하지만 이 길은 행크에게 더욱 특별한 곳이었다. 나무틈 사이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무의 흔들림에 따라 바닥에 비치는 빛들또한 반짝반짝 흔들렸다. 행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앞의 머루 나무를 해치고 들어섰다.
“바보같기는.”
알렉스가 누워 있었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서 상처를 가득 입고서 누워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고 몸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차가운 온도 때문인지 뺨은 창백했고 몸은 얼어 있었다. 행크는 알렉스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덤치고는 너무 로맨틱하네.”
행크가 중얼 거렸다. 금방이라도 알렉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원래 죽음이란게 그런거잖아.’하고 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미동도 않은채 누워 있었다. 행크는 알렉스의 곁에 따라 누웠다. 그처럼 몸을 웅크리고 태아처럼 누웠다. 이렇게 잠든다면 나중에 그와 쌍둥이로 태어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왕이면 샴 쌍둥이가 좋겠지.
그의 가지런한 코와 창백한 뺨과 얼어있는 파란 입술을 보았다. 행크는 그에게 어떤 말이라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자꾸만 그 말들이 입안으로 삼켜들어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행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긴긴 시간 동안 그의 곁에 있었다. 루이즈와 경찰들이 찾아올때까지, 행크는 알렉스의 곁에서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