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다는 것은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것이고. 사라진다는 것은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산 사람에게 죽은 누군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허락 되지 않은 것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에 행크는 이것들을 절실하게 느꼈다.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할머니는 오동나무 관에 누워계셨다. 행크는 그녀가 벌떡 일어나 엉망진창인 거실과 방을 치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고 긴긴 시간 동안 그곳에 누워 있었다.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그랬다. 행크는 그나마 그녀가 죽는 순간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지 못한 순간보다는 훨씬 나았다.
까무룩한 어둠속을 헤매는 동안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갔다. 행크는 이것이 주마등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제이크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행크도 주마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처녀였을 적에 절벽에 떨어진 적이 있었대. 그때 발목을 삐어서 밤이 올 때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거야. 소리도 질러보고 엉엉 울기도하고 기도도 해봤지만 이젠 죽었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래. 잠들면 그대로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몰려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에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그때 주마등을 봤다네? 자기가 어렸을 적부터 이 마을에 살던 기억들이 스스슥 지나가더라는 거야. 정말 무슨 책을 넘기듯이 스스슥 말이야. 아주 어릴 적에 할머니랑 지냈던 기억하고 (우리 엄마도 나랑 똑같이 아버지 없이 자랐거든) 친구들하고 뛰어 놀던 기억들 그리고 우리 아버지랑 만났던 기억들. 그런게 주마등이라고 하더라. 나도 죽기 전에 그런거 볼 수 있을까. 본다면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은데 말이야.’
제이크는 숲 풀 사이로 몸을 누이면서 그렇게 말했고 베니는 제이크의 허벅지를 퍽 치면서 ‘죽는 이야길 왜해?!’하고 성질을 냈다. 사실 그 이야기는 베니가 먼저 꺼내들었었다. 베니의 성질에 제이크는 쟤는 또 저가 먼저 이야기 꺼내고 화낸다며 혀를 찼다. 알렉스는 그들의 옆에 나란히 앉아 곧게 자란 풀들을 만지작거리며 어딘가를 보고 있었었다. 당시엔 행크는 그저 알렉스의 옆선이 보기 좋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어째서 알렉스가 그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렉스에겐 늘 어둠이 있었고 그 어둠은 죽음과 많이 닮아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그에게서 눈을 떼면 그는 어딘가의 어둠으로 뛰어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둠이 알렉스에게 뛰어 들었다.
“......음.....”
목이 마르다는 것을 느꼈다. 행크는 머릿속으로 그려지던 생각이 목마름과 싹 지워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젖어 있는데 목은 갈라질 듯이 말랐다. 저도 모르게 물을 달라고 중얼 거렸던 것 같다. 입에서 무언가 축축한게 떨어졌다. 행크는 정신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미지근한 물이 입가와 턱으로 흘러 내렸지만 그런 것을 신경쓸 세가 없었다. 목마름이 끝나자 귓가로 웅얼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소리 같았다. 소리는 점차 선명해졌고 머리는 점차 아파왔다. 눈알이 뻑뻑한지 눈을 뜨려니 아팠다. 그러나 행크는 눈을 떠야했다. 자신이 깨어나기 전의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깨닫자 뒤통수가 갈라질 듯이 아팠다.
“행크.”
눈이 부셨다. 행크는 은은하게 도는 주황빛이 촛불임을 알았다. 촛불이 이렇게 눈이 아팠던가. 행크는 눈을 비볐다. 최소한 손이 묶여있질 않은걸 보아선 최악은 아닌 모양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응시하자 모든게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안경이 없다. 떨어진 걸까. 주변을 더듬자 그 손을 누군가 잡아 왔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행크.”
또다시 누군가가 불렀다. 행크는 조금 더 선명한 정신으로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미리암?”
“맙소사. 괜찮니? 아주 머리가 곤죽이 되도록 때려놔서 놀랐어. 나름 살살 쳤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 쟤가 너한테 원한이 있었잖아. 그래서 혹시나 죽여서 데려오는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축 늘어진 널 보고 진짜 죽었는지 알았지 뭐야. 얌전하게 끌고 오라니까 무슨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 마냥 끌고 오고. 옷 갈아입히고 싶었지만 내버려두라고 해서 내버려뒀어. 옷은 준비 되어 있으니까 갈아입어.”
“미리암이야? 너 맞아?” “어쩌면 좋아.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 얼굴도 못 알아보고. 혹시나 안경 때문이야? 어휴 얘, 말도 마. 내가 행크는 안경 없으면 안 되니까 꼭 챙겨오라고까지 말했는데 그걸 놓고 왔다지 뭐야. 비가 너무 오는 통에 못 찾았데. 내가 보기엔 찾기는커녕 그냥 버리고 온 것 같아. 어쩌면 좋니. 넌 안경 없으면 눈뜬장님 아니니. 베니 말로는 시내에서 맞추면 된다고 하는데 시내가 동네 빵집도 아니고 4시간이나 차타고 나가야 하는데말이야. 그렇다고 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내가 못살아 정말.”
“미리암.” “안경은 그렇다치고 신발 한 짝까지 버리고 올건 뭐야? 베드로씨가 만드는 가죽신발은 어떻게 봐도 최고인데 그걸 또 던져두고 오다니. 내가 제이크 이 자식을 죽여 놓지 않으면 안 되겠어. 베니는 제이크가 그러면 말리기라도 해야지 그에 동조해서 신나가지고 말이야. 내가 사과할게 행크. 네가 발이 큰 편이여서 사이즈가 맞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너 잘 때 베니랑 제이크 신발도 신겨봤는데 들어가긴 커녕 앞부분 넣었는데 찢어질 것 같더라. ...어머, 이거 좀 야한 말 같지 않니? 어머어머어머” “....미리암.... 대체 너....”
어쨌든 미리암이 맞는 것은 확실했다. 부드럽게 곱실거리는 빨간 머리카락도 그랬고 하얀 얼굴에 깨를 뿌려놓듯이 흐드러진 주근깨들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 수다스러운 입과 볼록 튀어나온 배가 그랬다. 하지만 행크가 봤던 것은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그녀가 아니었다. 마지막의 그녀는 오늘... 아니, 어제.... 하여튼 의식을 잃어버리기 전에 봤었고 그녀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행크가 도적들의 어깨까지 쏘며 그녀를 구해내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사라져 버렸다. 눈에 선명하게 보일만큼 가까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그녀는 눈물은커녕 산뜻하게 웃고 있었고 입고 있는 상아색 임부복도 깨끗해 보였다. 행크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담요가 여러 개 겹쳐진 곳에서 누워 있었음을 깨달았다. 미리암은 행크를 부축하려 했지만 임산부에게까지 부축 받고 싶진 않았다. 행크는 그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괜찮다고 말하며 뒤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힘주어 등을 기댈 수가 없었다. 뒤를 만지자 쑥 꺼져 들어갔다. 천막이었다.
행크는 이성을 깨우려고 힘내며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릿하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분명히 보였다. 행크는 그녀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있을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베니와 제이크는 대체 무엇인지. 행크가 추측하기로 그녀는 ‘늑대들’에게 잡혀가며 이성을 상실했고 과거로 회귀한게 틀림없었다. 남자애들의 거친 놀이에 끼진 못했지만 그녀는 어릴적부터 베니, 제이크와 어울리곤 했었다. 비록 청교도적인 사고를 가진 부모님들이 남녀가 어린 시절부터 어울리면 안 된다며 떨어뜨려 놨지만 행크는 그녀가 몇 번씩 그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적 있었다. 커다란 떡갈나무 뒤에서 그녀가 빨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모습이 떠올랐다.
미리암 워커는 마을 교회 장로의 딸이었다. 그렇게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화통한 성격과 겸손한 모습이 인상적인 여자애였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녀와 행크가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행크는 대화보단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특히나 여자아이들에겐 숙맥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장하면서부터 몇몇 일 때문에 여자들과 대화하고 함께하는 일이 늘긴 했지만 그것을 즐겨하진 않았다. 하지만 행크는 다른 여자애들과 달리 미리암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녀의 얼굴을 한 아줌마 같은 여자였다. 수다스럽고 장난스럽고 친근했다.
본질적으로 행크가 미리암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그 사건’ 때문이었다. 베니가 사라지고 마을에선 성인식 자체를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성인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마을에선 종교의식만큼이나 성인식이 중요했다. 아니 성인식은 하나의 종교의식과 같았다. 그 누구도 ‘신앙이 약한 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을은 침묵했다. 그 가운데서 울고 있는 두 여자가 있었는데 하나가 베니의 모친 크리스틴이었고 하나는 다름 아닌 미리암이었다.
“사실 난 궁금해. 왜 그가 널 이곳으로 데려온걸까?” “당연히 내가 차기 마스터니까 그런거겠지. 아니, 미리암 중요한건 그게 아니잖아. 너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아. 그러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갈 방법을 모색하자고.” “그래 그게 문제야. 넌 어딜 봐도 차기 마스터잖아. 이제 10년, 아니 빠르면 5년 안에 넌 마스터가 될 거야. 그런데 어째서 널 데려온걸까?” “미리암, 조용히 하고 내가 묻는 말에 답해.” “응.”
미리암과 베니의 관계가 남다르다는 것은 공연히 퍼져있는 이야기였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척 하면서도 손끝이 닿고, 바람에 흐트러지는 미리암의 주름치마를 베니의 눈동자가 쫓고, 제이크와 이야기하는 베니의 미소를 미리암이 응시하고. 그 둘은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비록 제이크와 알렉스가 죽으며 베니는 산산히 부셔졌고 쉽사리 회복되지 못했지만 미리암은 그의 곁에 있었다. 티 나지 않게 그러나 위로하듯이. 마을 사람들은 그걸 모른척 해왔다.
마을에는 ‘처녀 잉태’에 대한 제도가 있었다. 정말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겉보기로는 확실히 ‘처녀 잉태’였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마을 처녀들은 나이가 차면 결혼한 상대를 점찍고 상대 청년과 마음이 맞으면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뒤 있는 잉태와 달리 그들은 먼저 아이를 가지게 된다.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확인하고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된다. 어떤 처녀가 임신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처녀 잉태’했다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성시 여겼다. 처녀 잉태를 통해 태어난 아이는 현명하고 아름답게 성장한다고 믿었다. 아이가 남자아이라면 그 의미는 두 배로 특별해졌다. 그러나 행크가 보기에 그 제도는 구시대적이었고 미신일 뿐이었다. 몇 번 아버지에게 이런 문화는 없어지는게 좋다고 했지만 그는 ‘우리에겐 이것들을 남겨야할 이유가 있단다. 우리 집단이 너무나도 작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다. 행크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처녀 잉태’를 했다는 것이었다. ‘처녀 잉태’는 사람들에게 축복받을 일이었으나 그녀는 축복받지 못했다. 그녀는 베니와 정식적인 약혼 관계도 밟지 못했으며, 그녀의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부풀어 오르는 배를 안고 집으로 숨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꽁꽁 숨겼다. 행크는 그녀를 가엽게 여겼다. 그녀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남겨졌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것이었다. 가끔씩 행크는 마을의 일을 들먹이며 장로를 찾아갔다. 그리고 미리암을 보았다. 그녀는 부분 배로 주춤거리며 차를 내왔다.
‘안녕 행크.’ ‘안녕 미리암.’
행크는 장로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초콜릿이나 사탕 묶음을 그녀에게 주었다. 미리암은 작고 하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으며 수줍게 웃었다. 행크는 그녀의 손을 보며 서글퍼졌다. 그녀를 보면 알렉스의 누나가 생각났고, 또 그녀가 생각나면 알렉스가 생각났다. 인생은 슬픔 투성이었다.
“그래, 우선 몸은 괜찮아?” “응. 멀쩡해. 아기도 괜찮아. 아까 전에 발로 툭툭 차기까지 했는걸” “그래. 다행이네. 그러면 본격적으로 말해보자. 여기서 마을까지 얼마나 먼지 알고 있어?” “응. 그렇게 멀진 않아. 말 타고 왔을 때 1시간 정도 걸렸거든. 나 아기 가지고 난 뒤에 말은 처음 타봤어. 진짜 오랜만에 타니까 기분이 너무 좋은거 있지. 비록 날씨는 안 좋았지만 그것도 운치 있고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우선 내가 동태를 살필 테니까 너는 여기 있어.”
행크는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것들로 엄살을 부리기엔 정당치 않았다. 행크가 천막 사이로 손을 넣으며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미리암이 그의 바지자락을 잡아 왔다. 천막의 높이 때문에 허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행크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나갈 필요 없어.” “뭐?” “부르면 되니까.” “....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막으로 하얀 손이 불쑥 들어왔다. 정말 기묘한 느낌이었다. 얼마나 기묘했냐하면, 정말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거짓으로 느껴진다는게 이런 거구나. 하고 절실하게 느낄 정도로 기묘했다.
베니가 행크를 보면서 ‘일어났냐?’하고 물었고 옆에 있던 청년이 ‘이야, 오랜만이다. 기분 진짜 이상하네.’ 하고 웃었다. 행크의 기억이 맞다면 앞의 얼굴 좋은 남자는 제이크였다. 16살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달리 이젠 완전한 성인 남자의 골격으로 행크 앞에 서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좀 더 금발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그의 어머니와 아주 똑같은 더티 블론드를 가지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빛나던 갈색 눈동자는 조금도 깊어져 어두운 빛을 내고 있었다. 6년 만에 보는 제이크의 존재는 행크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기 힘들게 하는 몽마 같았다. 행크가 아무말도 못하고 제이크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내가 너무 미남이라 놀랐나봐.’하고 말했다. 곁에 있던 베니는 요 몇 년간 보이지 않던 웃음을 지으며 ‘지랄하지마.’하고 대꾸했다. 성장한 청년들 사이에서 익숙한 소년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 죽은거야?” “제기랄.” “이 대답 언제 나오나 했지. 어서 내놔라.”
제이크가 환하게 웃으면서 베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베니는 주머니에 있던 지폐 몇 장을 제이크의 손에 던지듯이 주었다. 그리고선 ‘그 대답 너무 식상하지 않냐?’ 하고 투정을 부렸다. 행크는 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사라졌을 때 어쩌면 그들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었다. 그저 마을에 돌아오기 싫어서 돌아오지 않는거라고. 그렇게 상상하곤 했지만 시체 같은 베니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그렇고 그런 상상이었고 다른 의미론 그렇고 그런 현실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그런 행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저들끼리 장난을 치고 웃고 있었다.
행크는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빼들었다. 그리고 베니와 제이크를 향해 들었다. 미리암을 감싸듯이 뒤에 숨겼다. 행크의 갑작스런 행동에 제이크와 베니가 당황했다. 멍청하게 자신이 죽은거냐고 물어보던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할지 예상치 못한 듯 했다. 그것도 그 천하의 약골 행크 맥코이가. 베니는 ‘야, 미안한데 네가 뒤에 숨긴 여자 내 와이프거든? 지금 나 기분 나쁘거든?’하고 인상을 쓰며 말했고 제이크는 ‘어떻게 자기야, 쟤가 우리 죽일건가봐.’하고 장난스럽게 베니의 곁에 착 달라붙어서 말했다.
“바른대로 말해. 이거 대체 무슨 개수작이야? 너희가 정말 제이크와 베니라고 한들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을 속여 온 것 밖에 더 돼? 그것도 짐승 같은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말이야.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거야?” “.....와, 그래도 차기 마스터는 차기 마스터네. 그 단세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걸 보니까 말이야.” “너 정말 많이 컸다?”
마지막 말은 제이크였다. 그는 비죽이 웃음을 걸고 있었다. 행크는 빈틈없이 칼을 잡았다. 아버지만큼 잘 다루진 못하지만 어느 정도 사용 할 줄은 안다. 비록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들이 정말 베니와 제이크라고 하더라도 행크와 그녀에게 위협이 된다면 분명 적이었다. 그래 비록 그들이 행크가 그리워하던 두 사람이라고 해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두 사람이라고 해도. 더 이상 행크는 과거의 것들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현실이 중요했다. 그게 바로 앞으로 마을을 다스려야할 사람이 가진 덕목이었다.
“거기서 구경만 하고 있을래?”
제이크가 뒤로 고개를 내밀면서 말했다. 천막에 가려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비가 오는 모양인지 천막 밖에서는 퀴퀴한 냄새와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회색빛이 그들의 발치에서 어른 거렸다. 행크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뒤에서 행크의 보호를 받고 있던 미리암이 행크의 팔뚝을 살며시 잡아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행크, 넌 알아야해. 우리는 모두 힘든 선택을 했어. 결코 쉽지 않았어.’ 그녀에게선 젖은 풀 냄새가 났다. 행크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 자신에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 거리는 그녀는 행크가 알고 있던 가녀린 미리암이 아니었다.
천막이 열렸다. 남자가 들어서자 소란스러웠던 분위기는 다시 축축해졌다. 마치 거대한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행크는 그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행크는 그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
하얀 붕대가 칙칙한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광경 속에서도 스며드는 빨간 꽃 같은 흔적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행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뚫었을 자신의 총알을 기억했다. 동물모양의 헝겊 안에서 그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는 것또한 상상했다.
그는 행크가 상상한 그대로 자라 있었다. 남자다우면서도 애처로운 얼굴선도 그렇고 식어있는 듯 불타오르는 듯한 파란 눈동자도 그랬다. 6년 전보다 길쭉해져있는 손과 다리는 남자의 뼈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때에도 현명하고 사냥 기술 좋은 소년이었지ㅕ만 지금과는 또 다를 것이다. 이젠 정말 작정한다면 사람 하나쯤은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니란 법은 없다. 행크는 알렉스가 사슴을 잡던 그 순간을 기억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생각해본다면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살아가자고 말해야할 타이밍이었다. 행크는 그를 그리워했다. 그가 죽었다고 인지한 후에야 차차 깨달아갔던 감정의 소용돌이 끝에 모든 비극이 부셔진 것이다. 그는 살아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아주 건강하고 아름답게 건재했다. 하지만 행크는 그를 향해 단도를 들이밀었다. 그의 어깨가 약점이란 것을 파악하기가 무섭게 덤벼들었다. 머리는 차가웠지만 그뿐이었다. 행크는 그를 죽이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그의 목을 꺾어 버리겠노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너희 아버지가 진짜 작정했나보다. 널 이렇게 키우신거 보니까 말이야. 베니는 네가 달라졌다면서 조심해야 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게 행크 맥코이는 약골 중에 최고 약골이지 사냥총이나 단검을 들고 설치는 부류는 아니거든. 네가 뒤늦은 성인식때 혼자 사슴을 잡았다는 것을 들었을 땐 모두가 알렉스를 봤어. 그가 몰래 널 도와주러 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탓했지. 하지만 지금 보니까 알겠단 생각도 들어.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휘두른 칼끝이 그의 뺨에 스쳤다. 하얀 선이 얇게 갈라져 핏물을 머금는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당황스런 그의 얼굴이 가득 눈 안에 담겼다. 곧이어 행크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가볍진 않았지만 행크의 악력에 끌려오는 몸이 느껴졌다. 행크는 그 순간에 어쩌면 자신이 이날만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보다 작았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 행크는 알렉스의 위에 있었다. 행크는 자신이 그를 때리는 것에서 분노와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도까지 떨어뜨리며 그의 목을 휘어잡았을 때 알렉스는 자신의 뒤춤에서 행크와 비슷한 단도를 꺼내들었다. 알렉스의 목을 조이는 행크의 악력은 점차 거세지고 하얗던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알렉스의 발이 끝이 까딱이며 지지대를 찾기 위해 흔들렸다. 컥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겨워 했지만 손안에 있는 단도를 휘두르진 않았다. 그게 생명줄인 마냥 쥐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어떤 이야길 들어도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거야. 원래가 그렇잖아. 우리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 많은 시간이 들었거든. 결국은 이렇게 받아들였지만 사실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아. 사람은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잖아. 뭐 그게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위태한 생명이 손안에 있었다. 조금만 더 악력을 가한다면 끝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단계를 깨닫기도 전에 행크는 몇 시간 전에 느꼈던 통증을 느껴야 했다. 머리에서 댕댕 종이 울리는 것 같았고 앞이 까무룩 해졌다.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넌 인질이 아니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된다는 거야. 알렉스도 그렇게 말했고. 아, 네가 걔를 때려서 그런 말을 했다는건 아니고 원래부터 그러기로 했으니까. 너도 그놈을 알잖아?” “난 몰라.”
행크의 말에 제이크는 작게 웃었다. 상냥한 얼굴 옆으로 빗물이 튀었다. 그는 짜증도 없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닦았다. 멀리서 천막위에 고인 물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이런 생활에 퍽 익숙해 보였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미리암이 ‘멍청이들아. 숲에다가 버려야지 여기다 버리면 어떻게 해? 여긴 걸어 다니는 길이잖아!’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의 머리 위로 우비를 덮어주던 베니가 ‘우리 마누라가 하는 소리 안 들려?! 당장 숲에 가서 버려!’ 하고 맞장구쳤다. 마을 안에선 쥐 죽은 듯이 지내던 베니가 저렇게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리고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알렉스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엔 진실 하나 없이 속고 속이는 것들뿐이었다. 자신이 그리워했던 것들 또한 모두 거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검은 물처럼 밀려들었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이상하네. 베니나 나나 네가 알렉스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렇잖아. 넌 언제나 그녀석하고 함께 있었으니까.” “함께 있었던 것은 너희들이었잖아. 난 언제나 뒤에 있었고.” “너도 아니란 걸 알잖아.” “가도 좋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만 가보겠어.”
행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왜 그가 널 데리고 온 걸까?”
이미 들었던 이야기였다. 미리암이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던 것이었다. 자신은 그에 대해 뭐라고 했더라.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차기 마스터니까.’ 하지만 행크는 똑같은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꿰매놓은 뒤통수가 불에 댄 듯 아팠다. 거즈위로 물방울이 떨어진 것 같았다. 행크는 한 손으로 뒤통수의 거즈를 덮었다.
“왜 그가 널 데리고 온-” “나도 몰라. 어쨌든 걔가 한일 중에서 가장 후회할만한 일인 것은 틀림없지. 난 마을로 돌아가겠어.”
행크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걸어 나섰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미리암이 그랬다. 아주 멀지는 않았다고. 말을 타고 가면 좋겠지만 뭔가를 빌리고 싶진 않았다. 숲을 더듬어서 가다보면 어쨌든 뭔가가 나올거다. 단도도 있고 사냥총도 있으니 그리 위험할 것은 없었다. 저벅저벅 돌아갈 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느껴지는 기척에 뒤를 돌았다. 어느새 제이크의 곁에 서 있는 알렉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크가 어여쁘게 만들어준 상처를 얼굴에 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저 어깨도 행크의 작품이었다. 갑자기 우스워졌다. 분명 자신은 그를 그리워했었다.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선 그의 오두막에서 펑펑 울다 잠들기까지 했었다. 알렉스가 좋았다. 그를 동경했다. 그가 살아있길 바랐다. 그러나 막상 살아있는 그를 보자마자 자신은 주먹질을 하고 죽이려고 했다. 미리암이 베니의 사냥총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았더라면 정말 알렉스를 죽였을 수도 있을게다.
행크는 뒤돌았다. 그리고 뒤돌았을 때 다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분노는 사그라들었고 배신감도 삭혀들었다. 남은 것은 지친 몸과 겉돌고 있는 슬픔뿐이었다. 어떤 표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기분을 설명 할 수는 없을 터였다. 행크가 한발자국 걸었을 때 누군가가 앞에 섰다. 따뜻한 손이 행크의 손등을 붙잡았다.
“행크. 이대로 가면 안 돼. 너도 알잖아.”
미리암의 작은 어깨가 보였다. 그리고 동그랗게 튀어나온 배도 보였다. 먼곳에서 그녀와 행크를 바라보고 있는 베니가 있었다. 베니 뿐 아니었다. 유난스럽게 빗물을 치우던 사람들도 무기를 닦고 천막을 세우던 사람들도 모두 행크와 미리암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려오던 피로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행크, 너는 알잖아.”
행크는 그녀의 손을 내치지 못했다. 다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어서 ‘아니, 난 아무것도 몰라.’ 하고 말할 뿐이었다.
*
“대체 저 애를 왜 데려와야 했어?”
미리암 앞에 서 있는 작고 커다란 등을 보며 제이크가 물었다. 행크가 몇 번이가 들었던, 그리고 앞으로 들어야할 질문이었다. 질문의 열쇠는 알렉스가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해결은 행크가 감당해야하는 것이었다. 알렉스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숙여 흙바닥을 보았다.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흙바닥 아래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미끄럽고 징그러운 지렁이의 피부를 보던 알렉스는 발로 흙을 파내 지렁이의 위로 흙을 덮었다.
“그래야만 했어.”
행크의 등을 보고 싶었다. 알렉스는 그러지 못했다.
*
제이크는 조금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는 애였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런 점은 베니와 달랐다. 베니는 그 나이 때의 솔직하고 순진무구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아니었다. 제이크는 베니와 어울려 놀고 그와 신나게 장난을 치고 다녔지만 어딘지 베니에게 맞춰준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꿍꿍이가 있고 호박씨를 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그건 제이크의 성질이었다. 제이크는 본능처럼 베니를 보호했다. 우습게도 말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마을 교회에선 일 년에 3-4번의 성찬식을 하곤 했는데 그중 첫해에 드리는 성찬식 예배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 많은 아이들이 입교를 하는 시기였다. 성인식 전에 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그때면 포도주를 준비하는 제이크의 어머니와 빵을 준비하는 베니의 어머니가 매우 바빠졌다. 마을 여자들 모두가 그녀들을 도와서 빵과 포도주 담기에 바빴다. 포도주는 언제나 새것이여야 했고 (다른 성찬식에는 3-4년이 지난 포도주를 사용했지만 첫해의 성찬식만큼은 늘 새로 담근 포도주를 사용했다.) 빵 또한 갖구운 빵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빵을 준비하는 크리스틴 여사는 성찬식이 이뤄지는 주일 아침까지 신경을 곤두서고 있어야 했다. 문제는 그 당일에 발생되었다.
‘성찬식 때 말이야. 빵을 조금만 떼어주잖아. 대체 누구 코에 붙이라고 그렇게 조금 주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예수님이 자신의 살이라면서 떼 주시는데 그렇게 조금만 주시겠냐고. 이건 신성 모독이야. 우리 예수님은 좀생이가 아니야.’
베니가 아침부터 투덜거렸다. 주일 아침마다 볼 수 있는 하얀 와이셔츠와 2대8 가르마가 인상적이었다.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는 모든 애들이 자신이 빵을 잘하는 엄마 밑에 있으니 빵을 엄청 먹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은 빵이라곤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하는 빵거지라며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결국은 빵을 먹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제이크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그러면 빵 먹으러 갈래?’하고 물었다.
크리스틴 여사의 작업실로 몰래 들어간 두 사람은 쉽게 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갓 구운 빵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베니는 폭식하고 따뜻한 빵을 보자 환장한 듯이 눈을 반짝였고 제이크는 밖에서 대화하고 있는 어른들을 소리를 들었다. 문제는 간단하게 벌어졌다. 빵을 향해 몸을 낮춰 걸어가던 베니의 어깨에 접시가 쟁반이 걸린 것이다. 빵은 순식간에 요란한 소리와 엎어졌다. 물론 빵들은 바닥에 떨어지고 뒹굴었다. 그 천둥과도 같은 소리에 어른들이 들이 닥쳤다.
결론적으로 혼난 것은 베니가 아니라 제이크였다. 제이크는 빵과 엎어져 있는 베니를 가리키며 ‘제가 밀었어요. 화가 나서 밀어버렸어요.’하고 말했다. 그 말에 베니가 반박하기도 전에 제이크는 크리스틴 여사에게 짐승같은 욕설을 들어야 했다. 그녀의 눈에는 찔끔 눈물까지 나있었다. 베니는 어머니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성찬식을 위해 고생했는지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베니가 어머니의 팔뚝을 붙잡으며 사실을 말하려고 하자 제이크는 일부러 그의 말을 자르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제이크 하몬은 그런 애였다.
그날 밤에 베니는 훌쩍거리며 떡갈나무 아래에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행크는 그 훌쩍임을 모두 들어야 했다. 사내 녀석이 질질 짜기는 행크는 혀를 차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처럼 제이크가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행크는 대충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예상 할 수 있었다. 왜 그랬냐는 베니의 훌쩍임에 제이크는 명쾌하고 단순하게 말했다.
‘베니, 넌 내 형제나 마찬가지야.’
제이크가 분명 상냥한 구석이 있기 했지만 사실 모든 이들에게 그런건 아니었다. 예상외로 그는 맺고 끊는 것에도 분명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베니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에게는 제외되었다.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퍼주었고 보듬었다. 헬레나는 크리스틴이 베니에게 그러는 것처럼 제이크에게 모든 것을 기대고 있었다. 가끔은 그게 버겁게 보일 정도였다. 크리스틴이 베니를 완벽하게 아들로 대한 것과 달리 헬레나는 제이크를 아들 이면의 남편으로 대하는 면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질투도 많았고 그만큼 집착도 있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그 모든 것들을 견디고 그녀를 품었다. 이런 뒷이야기는 좋지 않지만 행크 또한 들은 적이 있었다. 마을 아녀자들은 조심한다고 했겠지만 소문이란건 결국 돌고 도는게 아닌가.
‘제이크랑 헬레나랑 그런 것 같지? 아무래도?’
행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이크는 그녀의 아들이었고 그녀는 제이크의 부모였음으로. 하지만 가끔 점차 소년의 티를 벗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행크는 발밑이 흔들리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 사정을 자세하게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없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성인이 된 제이크는 행크에게 알렉스와 또다른 감정을 불어 일으켰다. 그는 장난스럽고 유쾌하게 굴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행크는 제이크가 이 세계에서 알렉스 다음으로 모든 책임을 맡는 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살펴보면 보이는 것들이었다.
행크는 의미 없이 이곳에 머물렀다. 벌써 4일이란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4일이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의 아버지는 ‘관찰’이 공격과 수비의 일차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행크는 늘 모든 것을 관찰했고 그것들이 버릇처럼 남아 있었다. 주로 관찰하는 것은 제이크와 미리암, 베니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관찰했다. 이 작은 마을(행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에는 행크가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마을에서 실종되었던 몇몇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 행크는 어이가 없었다. 불신은 커져갔다.
아직까지 행크는 이 단체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것이 없었다. 제이크는 ‘네가 원한다면 난 이야기 해 줄거야. 네가 원한다면.’하고 말했다. 그러나 행크는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단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행크는 사람의 귀는 ‘듣다’와 ‘들리다’가 함께 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 또한 그의 아버지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원하는 것만 들을 수가 없다. 귀는 모든 것을 듣도록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생각하며 듣고 의심하며 들어야 한다. 듣는 것은 선택 할 수 없지만 생각하는 것은 선택 할 수 있다. 행크는 이곳에 떨어져 있는 순간 모든 것을 의심해야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야했다.
이 작은 마을에 커다란 지프차가 찾아왔을 때를 기억했다. 아마 행크가 마을에 머무른지 2일째 되던 날이었고 모두들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반해 알렉스는 여유로워보였다. 차에서 검은 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가 내렸다. 행크는 누군가 더 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뿐이었다. 미리암과 견줄 정도로 아담한 여자였는데 그보다는 훨씬 거칠어 보였다. 사실 행크는 그녀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행크가 자라온 마을에는 이런류의 여자가 없었다. 마을의 여자들이 삶을 살아오면서 거칠어지거나 억척스러워진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름 모를 그녀 같진 않았다. 그것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커다란 카메라가방을 매고 다니면서 계속해서 찍었다. 무엇이던지 찍었다. 그리고 무언가 들으면 재빠른 다람쥐마냥 노트와 필기구를 꺼냈다. 말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를 보다보면 행크는 자연스럽게 알렉스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알렉스를 찾았고 그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녀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어떻게 된건데?’하고 물으면 알렉스는 한참 못마땅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행크를 힐끔 보았다. 그 눈짓을 놓칠리 없는 그녀가 행크를 마주보았고 매서운 눈빛을 빛내며 다가왔다. 다람쥐 같은 여자가 마치 먹이를 찾은 하이에나처럼 여겨졌다. 행크가 자신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하는 동안 알렉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검지로 그녀를 가리키며 경고했다. 마치 아이를 혼내는 선생님 같았다.
‘왜? 그게 무슨 의미인데?’
그녀의 새까만 뒤통수가 큰소리로 물었다. 마치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굴었다. 알렉스는 잠시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다시 행크를 힐끔 보고선 그녀를 끌고 가버렸다. 그리고 그건 행크에게 매우 기분 나쁜 일이었다.
행크가 지낸 4일 동안 그녀는 두 번 찾아왔다. 그 두 번째가 오늘이었다. 그녀는 음식과 물을 가져왔는데 혼자 어떻게 가져온걸까 싶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짐을 옮기다가 미리암을 발견한 그녀가 정신없이 차안을 뒤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작은 봉투하나를 건넸다. 하얀색 베넷저고리에 미리암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아이같이 옷을 품에 안고서 방방 뛰었다. 곁에 있던 베니는 홀몸도 아닌데 이런다며 그녀를 진정시켰지만 아이 옷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마냥 훈훈하고 귀여운 장면이었지만 행크는 그 모습을 마냥 훈훈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이곳의 행크 맥코이는 이방인도 적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유령같군. 행크는 무감동하게 생각했다.
“이봐 행크, 사냥가자.” “너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인데.”
이것 또한 무감동했다. 아무런 높낮이 없는 말에 제이크는 하하 웃으면서 ‘그거야 예전의 너는 정말 어디다가 버려두고 오고 싶을 정도의 약골이었으니까.’ 하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어이없을 정도로 커서 짐을 나르던 사내들이 행크와 제이크쪽을 바라볼 정도였다. 행크는 커다란 목소리에 골이 울려 머리를 꾹꾹 눌렀다. 어떤 의미로 행크에게 제이크는 베니와 비슷하면서 또 알렉스와도 비슷한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이 슬펐고 그와 나누는 것들은 (비록 행크의 일방적인 태도였지만)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공간과 시간에서 제이크는 행크의 추억속의 인물과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얼굴이나 성격이 달라졌다는게 아니었다. 행크는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미화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천막에서 알렉스가 나왔다. 사냥총을 매고서 단단히 갖춰 입고 있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또다시 비가내릴 듯 우중충했다. 정말 지겹게도 내렸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뭘 어쩌라는 거야. 난 안가.” “미안하지만 부탁 아니야. 너 무조건 가야해.” “뭐?” “너도 알겠지만 우린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라고. 알렉스도 어깨를 다쳐서 제 실력 발휘하기 힘들 테고” “내 탓하지마. 그 당시엔 정당방위였어.” “누가 뭐라 했어? 난 진실을 말한 거야. 게다가 미리암이 얼마나 먹어대는지 알아? 다 아기가 먹는거라고 말하면서 성인남자 뺨치게 먹어댄단 말이야. (‘제이크! 다 들려!’) 쳇, 귀신같기는. 긴말 필요 없고 어서 잡아. 총은 못 쏘더라도 짐이라도 짊어질 생각하고 따라와.”
제이크가 행크의 사냥총을 건넸다. 빼앗긴 이후로 구경도 못했던 것이었다. 행크가 사냥총을 받으면서 어이없단 얼굴을 했다.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머물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완벽한 아군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에게 총을 건네다니 제정신인건가. 자신의 마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 생각했지만 생각을 이어가는 것은 길지 않았다.
알렉스가 중앙에 서자 남자들 몇몇이 다가왔다 7명 정도 되는 숫자였다. 알렉스가 사냥 갈 방향과 선발대와 후발대를 짰다. 행크는 이 사냥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주 짜는 사냥 방식이었다. 선발대가 사냥감을 발견하면 후발대는 또다시 둘로 나눠져 양쪽 방향으로 포위한다. 손짓을 하며 팀을 짜던 알렉스가 행크와 마주했다. 그리고 눈길을 피하며 ‘제이크와 맥코이는 후발대 A’하고 말했다. 뒤에 있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짐을 옮기다 말고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끝없이 알렉스의 뒷통수와 이야기 하는 내용을 녹음했다. 참다못한 알렉스가 버럭 성질을 내자 그녀는 되레 성질을 내며 다시 사진을 찍었다. 알렉스가 넌더리를 내면서 먼저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USA 투데이(USA Today) 기자야. 원래는 종군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작은 코너에서 기사 쓰고 있나봐 3년전부터 우리를 돕고 있어. 사실 돕는건 아니지 그쪽에서도 얻어갈게 있어서 저러는 거니까.”
“너희들한테 기사거리가 있어? 살던 마을을 등지고 나온거? 너랑 알렉스는 6년 동안 죽어 있다가 부활했고 실종되어 있던 청년들은 부활한 인간들과 남모를 꿍꿍이를 쌓아가며 살고 있던 것?” “행크, 물어보지 않은 건 너잖아.” “물어 볼일 없어. 들을 이유가 없으니까.” “너 이런거 보면 정말 하나도 안변했구나. 변했다는 말 취소해야겠어.” “너야 말로 변한거 하나 없지. 안 그래?”
행크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제이크를 보았다. 제이크는 행크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난 네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아.” “안다고? 네가 진실을 안다고?” “아니. 내가 아는건 진실이 아니라 이유야. 네가 여기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 말이야.”
행크는 미리암의 곁에 있는 베니를 힐끔 보았다. 이곳에서 4일을 보냈다. 그의 4일이란 시간 속에서 제이크는 큰 역할을 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들은 6년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행크의 눈에 제이크는 변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들이 변한다 하더라도 그 하나는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암만 정체 모를 진실로 이곳에 머물고 있는 행크라 할지라도 그것을 모르진 않았다. 행크는 제이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 다르긴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어, 미안하지만 난 여자가 좋거든. 암만 베니라고 해도 저 새끼 똥구멍은 관심 없다고. 그냥 저 새끼는 나한테 형제-” “형제나 마찬가지라고?”
제이크는 완전히 숲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베니를 힐끔 보았다. 또 무슨 말을 했는지 미리암에게 퍽퍽 얻어맞고 있었다. 그럼에도 좋다고 웃으면서 그녀의 배를 만지고 있었다.
“아니. 형제지.”
숲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뭇잎을 적시는 빗줄기의 소리가 들렸다. 철퍽철퍽 밟히는 질은 땅과 습기 찬 공기가 온몸을 훑어 내렸다. 두피로 떨어진 물방울이 미지근하게 식어 뺨으로 떨어졌다. 행크는 뺨의 물방울을 닦아냈다. 만약 자신이 아버지의 마을로 돌아갔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쯤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을지도 몰랐다. 빗줄기를 보면서 ‘지겹네’하고 중얼거렸겠지. 하지만 지금의 기분과는 별 차이 없을 터였다. 살아있는 알렉스는 뇌의 끝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양옆에는 베니와 제이크, 그리고 미리암이 있을터였다. 아버지에게 말했을까. 아니면 평생 말하지 않고 감춰뒀을까. 그 ‘늑대들’이 살아있는 알렉스였다고? 알고 보니 베니는 살아 았고 납치당한 미리암과 함께하고 있다고? 만약 그렇더라면 이곳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행크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살려두지 않을게 뻔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알기 때문에 이 중요한 사실을 감춰둘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행크는 마을 사람들과 곳곳을 관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알렉스 또한 관찰해왔다. 사실 그건 본능에 가까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행크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던 중인지 모두 잊었다. 그건 참 우스웠다. 그렇게 그를 죽일 듯이 미워하고 증오했으면서 그를 볼 때면 많은 것을 잊었다. 그를 증오한다는 자체도 잊었다.
행크는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물어 보아야 했다. 어째서 자신을 여기에 두는 것이며, 너희들은 왜 ‘늑대들’로서의 삶을 자청하며 마을을 공격했냐고. 남겨둔 어머니들과 누나들은 어쩌고 떠나왔냐고.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행복한 마을을 두고서 왜 괴롭게 살아가는 것이냐고 전부 물어보아야했다. 하지만 행크는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는 미리암의 억지에 머무르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제이크가 말했듯이 자신은 자의로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날에, 미리암의 만류에도 행크가 떠나려 하자 그녀는 갑자기 배를 움켜지면서 신음했다. 그리고 아기가 나올 것 같다고 소리쳤다. 당황한 행크는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그녀를 데리고 천막으로 이동했다. 정말 아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산파. 산파를 불러와야해.’하고 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비명이 뚝 그쳤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놀래 따라왔던 그녀의 남편은 천막 밖에 서 있었다. 모두가 그녀의 연극을 눈치 채고 있던 것이다. 행크 자신을 제외하고 말이다. 미리암이 볼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셀죽하게 웃었다. 산모를 때릴 수도 없고. 어이없단 얼굴을 하고 있는 행크를 향해 그녀는 손을 뻗었다.
‘행크, 알아야해. 그렇지 않으면 너도 알렉스도 모두 불쌍해진단 말이야.’
우리 모두가 불쌍해진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미리암을 보며 알렉스는 그녀가 정말 아이를 품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녀는 정말 누군가의 엄마같았다. 만약 이렇게 가버린다면 태어날 아이에게 ‘맥코이란 남자가 있었는데 엄마를 두고 떠난 아주 괘씸한 첫 남자였단다. 어쩌면 네 아빠가 그 사람일지도 몰라.’하고 말해버릴 거라고 하는 것도 정말 아줌마 같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더 이상 변명 할 필요는 없었다. 행크가 묻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듣는 것, 듣지 말아야하는 것’을 넘어선 것이었다. 행크는 자신이 좋아하고 아껴온 알렉스와 알렉스에 대한 기억이 변질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상관 없었다. 행크에게 알렉스는 그저 알렉스 그 자체였으며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가 뱉을 말로 인해 자신의 알렉스가 변해버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것을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그의 뒷모습만 봐도 슬퍼지는 자신이었음으로.
“잠깐.”
제이크가 행로를 막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흐릿한 앞으로 선발대가 멈춰 선 것이 보였다. 발자국소리는 없고 비 내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사냥감이 발견된게 틀림없었다. 앞에 있던 남자가 손짓했다. 후발대 A,B가 흩어지라는 것이었다. 행크와 제이크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멀리 애둘러서 스쳐지나가는 동안 형체를 발견했다. 수사슴이었다. 흐릿하게 보아도 테가 나는 커다란 뿔로 보아 보통 놈은 아니었다. 행크는 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행크뿐은 아니었다. ‘또 사슴이네’ 제이크가 중얼 거렸다.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이상한 감지를 느꼈는지 사슴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험난하게 앞발질을 했다. 행크는 사냥총을 부여잡았지만 조준하진 않았다. 이렇게 흐릿한 시야로 조준했다가는 멀쩡한 사람을 맞출게 뻔했다. 앞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선발대였다. 총이 빛나갔다. 총성에 놀란 사슴이 크게 울었다. 도망가는 사슴을 포위할 차례였다. 하지만 사슴은 도망가지 않았다.
“제기랄, 사슴이 아니라 범이잖아.”
사슴은 총이 날아온 곳을 향해 뿔을 세우고 달려갔다. 알렉스가 있는 선발대였다. 행크와 제이크가 놀라 벌떡 일어섰다. 도망이 아니다. 저건 분명히 공격이었다. 선발대 팀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사슴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했다. 알렉스가 눈앞에 있는 사슴을 빗맞출 리가 없었다. 역시 어깨 때문인가. 놀랜 제이크가 알렉스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때였다. 앞으로 달려가던 사슴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더니 제이크와 행크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행크는 처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희미한 덩어리를 보며 시야가 어둑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들고 있는 사냥총에 힘이 들어갔다. 제이크는 이미 조준한 채로 연발하고 있었다. 그는 총알이 사슴의 앞 다리에 박히는 것을 보며 환호했지만 사슴은 주춤거릴 뿐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반대편 후발대에선 행크와 제이크 때문에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다. 철컥철컥, 제이크의 총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행크는 정신이 아늑해졌다. 머릿속의 검은 물감이 물에 흐드러지듯이 여기저기 스며들더니 종국에는 새까맣게 변했다. 제이크가 행크에게 사냥총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행크는 그 손을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저 뒤에서 알렉스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행크는 그것들을 뒤로 했다.
뿔의 형체가 시체처럼 늘어져 보였다. 그건 행크가 처음으로 사슴을 죽였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온 몸의 온기가 발끝으로, 그리고 발끝에서 땅으로 스며드는 느낌. 눈앞의 사슴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목매단 시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휘청이는 느낌. 스스로가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 행크는 무릎을 꿇고 총을 장전했다. 기다란 총신의 끝에 사슴의 얼굴이 걸쳐졌다. 방아쇠를 당겼다.
커다란 총성에 맞춰 쓰러지는 육중한 몸을 보며 알렉스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파란 눈은 움직일 줄 모르고 사슴만을 보았다. 이내 그의 시야로 장신의 남자가 척척 걸어 들어왔다. 그는 사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다시 총을 들었다. 탕. 탕. 반동에 흔들리는 몸조차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뒤에 있던 사내가 알렉스의 등을 툭 졌다.
“어쨌거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지.”
어깨가 지독히 아팠다.
*
‘너희 사냥꾼이 아니라 나치였냐.’
사슴의 얼굴에는 세 개의 구멍이 있었다. 이 모든건 행크의 작품이었다. 행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모두가 그랬다. 행크가 사슴 앞에 서 있는 순간부터 그들이 사슴을 짊어지고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천막 앞에서 사슴을 내려 놓았을때 여기자가 구역질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알렉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은 사슴을 끌고 뒤로 사라졌다. 이어서 칼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행크의 어깨위로 피곤함이 내려앉았고 그가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꽤나 긴 시간 동안 눈을 마주했지만 종국에 알렉스가 시선을 돌리며 끝이 났다. 행크는 놀랍게도 그의 눈빛에 자신이 상처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저녁에는 사슴고기 스튜가 나왔다. 행크와 알렉스 둘 다 스튜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짙은 새벽이 돌아왔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다. (종일 사진을 찍어대던 여자는 돌아가고자 했지만 미리암이 붙잡는 바람에 한숨을 쉬면서도 가지 못하고 천막에서 밤을 보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근처에 보초 3명에 서 있었다. 행크는 천막 너머로 그것을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구를 차분하게 개고서 옷을 갈아입었다. 자신이 이곳에 왔을때 입은 옷이었다. 미리암이 비누로 벅벅 빨아줬지만 내내 내린 비 때문에 꿉꿉한 냄새가 났다. 행크는 사냥총을 챙겼다. 그리고 천막 뒤쪽으로 사분사분 걸어 나왔다. 뒤쪽에는 보초가 서 있지 않았다. 충분히 이상했지만 미숙한 단체를 떠올리니 대수롭잖아졌다.
행크는 나무사이로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모든게 복잡했고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앞으로 분명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행크는 자신의, 그리고 아버지의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알아야 할 것과 알지 말아야 할 것들 가운데 행크가 선택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중에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지금은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찾고 있을 터였다. 미리암은 이곳이 그렇게 먼곳이 아니라고 했다. 빠른 시일 내에 이곳을 찾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행크를 불안하게 했다. 그건 정말 역설적이었다.
행크는 알렉스를 미워했다. 제이크와 베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거짓은 장차 6년이라는 세월을 좀먹었다. 그것은 행크와 마을 사람들의 슬픔을 비웃는 짓이었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행크의 이면은 이미 그들을 용서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진실은 행크를 두렵게 했다.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제이크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변한거 하나 없었다. 제이크의 본질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본질 또한 마찬가지였다.
행크는 앞을 향해 걸었다.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얇은 가랑비였지만 지겹게 느껴졌다. 행크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차분하게 걸어 나갔다. 밤중에 숲을 향해 달려드는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행크는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결심 했을 때 나서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었다. 행크는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멈춰 섰다.
“이쪽으로 가면 절벽이야.”
그래서 보초가 없었군. 행크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기에 그것을 골랐을지도 몰랐다. 알렉스는 매우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쳐보였다. 행크는 알렉스와 단 둘이 대치하는 것이 매우 오랜만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어찌할 바 모르겠는 감정들만 드글했는데 지금은 온 몸이 차갑게 가라앉기만 했다. 아니, 물론 손끝의 떨림은 여전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돌이키기엔 너무나도 먼 곳까지 걸어 온 것이다.
입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확신과 불확신 가운데서 행크는 머뭇머뭇거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행크가 운을 떼기도 전에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어둠에 가려져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여기저기 흉한 기스가 나있었지만 다행이 깨진 부분은 없었다. 물기를 슥슥 닦아 쓰자 좀 더 선명한 어둠이 보였다. 그리고 선명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파란 눈동자와 물기에 젖어 축 늘어져 있는 금발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온전하게 눈동자를 마주한 것도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첫날 때는 모두가 알다시피 광기에 취한 행크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고 이후는 서로 눈길을 피하며 어색한 감정들만 꿀꺽꿀꺽 삼켰다. 사방에선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들렸고 행크는 멀쩡한 시야로 알렉스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떤 것을 감추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이 늦은 새벽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둘만이 존재하기 때문인지 어둠 때문인지 풀벌레 울음소리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이유 따윈 상관 없었다. 결국은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떠올리는 것이다.
“이 비오는 날에 오두막에 간 거야?” “아니, 사흘 전에 다녀 온거야.”
사흘 전이면 행크가 처음 왔던 그날이었다. 그의 안경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곳까지 단숨에 다녀온 것이 틀림없었다. 행크는 웃어야 할지 울상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는 그토록 멀어보였던 알렉스가 지금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그건 정말 우스웠다. 행크는 6년 동안 알렉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가 어떤 얼굴로 어떤 목소리로 그 긴 세월을 숨 쉬었는지 하나도 모른다. 그가 떠난 이유도 그가 배신한 이유도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 없는데도 지금 이 순간처럼 그가 가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15살, 그 늦은 밤의 기억 속. 오두막에서 책을 읽다 잠든 자신의 뺨에 조분히 키스해주던 그때의 기억보다, 훨씬 더. 어쩌면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가까이 그가 느껴졌다.
행크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어떤 이유로 배신했는지 어떤 감정으로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젠 이것 하나만큼은 알게 된 것이다.
“원한다면 가도 좋아. 가는 방향도 알려줄게.” “그런데?” “뭐?” “그게 끝이야?” “무슨 말을 원하는데?” “왜 나를 데려왔어?”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어깨에 심연이 달라 붙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음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조금 더 부드럽고 안정적인 것이었다. 행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늘 품고 있던 것이었다.
“난 그래야했어.”
행크는 생각했다. 자신이 알렉스와 같은 입장이었자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위해 마을을 등지고 나왔더라면, 자신은 알렉스를 그 곳에 놓고 나왔을까 아니면 그를 데려 왔을까. 행크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겐 할머니도 있었고 아버지도 있었고 또 차기 마스터라는 자리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알렉스였고, 그건 슬프게도 행크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베니와 제이크에게 그 둘만이 간직 할 수 있는 기억이 있듯이 행크와 알렉스의 사이에도 그 둘만이 추억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행크는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그것들을 전부 잊고 있었지만 알렉스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두막에서의 기억, 행크의 책 읽는 소리, 누나의 흔들의자가 움직이는 소리, 저 먼 곳에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는 소리, 짙은 여름이면 매미가 울고 비가 올때면 집안 곳곳으로 비가 세서 걸레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그 안에는 행크가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도 있었다. 행크는 모든 감정이 자신의 것인마냥 착각하고 있었겠지만 사실은 그런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알렉스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그래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알렉스는 행크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행크는 그 순간에 알렉스가 자신보다 작다는 것을 인지했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언제까지나 머리 꼭대기에 머물 줄 알았던 자신의 영웅이 이제는 머리 하나 크기로 작아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행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작게 욕을 지껄였다. 행크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은게 아닌가 싶어서 뜨끔했다.
“너 정말 욕 나오게 컸구나.” “억울하면 까치발을 들던가.”
행크가 퉁명스럽게 말했고 알렉스는 ‘그러지 뭐.’하고 대수롭잖게 말하면서 불쑥 까치발을 들었다. 그래도 몇 센치 행크보다 작긴 했지만 이제는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칠 수 있을 높이었다. 행크는 보다 더 가까워진 얼굴에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알렉스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차가운 손을 들어 행크의 얼굴을 잡고 자신의 고개를 갸우뚱 돌렸다.
서로의 입술에선 비 비린내가 났다. 그리고 따뜻했다. 알렉스의 입술이 따뜻한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오두막의 기억만큼은 잊은 듯싶어도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 기억 하나로 또다시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담아두고 품어두었었다. 결국 애정이란 그런 것이었다. 잊어버리고 또다시 기억되는 것. 마치 구원 같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 최소한 행크에게 알렉스 자체는 모든 애정이었으며 또다른 구원이었다.
혀끝으로 따뜻했던 혀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행크는 떨어지려는 알렉스의 목덜미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순간 알렉스는 그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목덜미를 조르며 칼로 찌르려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행크가 일생의 많은 부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알렉스 또한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하며 그에게 입술을 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행크가 자신을 찌른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행크가 이런 알렉스의 생각을 읽었더라면 ‘바보아냐?’하고 퉁명스럽게 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그러다가도 우물쭈물 거릴 것이었다. 어쨌거나 알렉스의 생각은 달랐다. 행크는 까치발을 내리려는 알렉스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꽉 잡았다. 그리고 간절하게 입술을 부딪혀왔다. 두 사람의 연결은 두 사람이 서로 했던 것 보다 훨씬 간절했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을 둔 사람들 같이 두 사람은 서로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솔직히 입술을 따뜻했으나 서로의 품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행크, 잘 들어봐.”
알렉스가 먼저 입술을 땠고 행크는 따뜻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입술을 따라 갔으나 알렉스는 웃으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검지를 올렸다. 두 사람은 비어 있었던 6년의 시간을 이 순간에 모조리 메꿔버린 사람들 같았다. 마치 한평생을 함께해온 사이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했다. 최소한 10대 때의 이들은 이렇게 서로를 끌어안지 않았다. 서로를 간질이며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서로의 마음 또한 확신하지 못해 바라보기만 했었다. 행크는 이 모든게 기이하게 여겨졌다. 혹시나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알렉스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를 좋아하게 된 14살, 그리고 그를 잃고 난 뒤 모든 것을 깨달은 17살 때의 몽정과도 같이 이 모든게 그저 우습기만 한 꿈이면 어쩌나 싶었다. 알렉스는 행크의 뒤통수를 잡으며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것은 매우 생생했다.
“난 내가 계속해서 여기 있으라는게 아니야. 어느 순간이 되면 넌 떠나야 할 거야. 그게 마을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곳을 영영 떠나 도시로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넌 알아야해. 사실 원하지 않으면 듣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넌 알아야해. 여태동안 모든 것들을 숨기며 살아왔지만 난 그것을 원하지 않아. 난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행크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꼬옥 감았다.
“알렉스, 난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어.”
비록 내가 너를 갈급하게 생각하고 너의 존재가 내게 증명이 되면서 증오가 된다 하더라도 내겐 너무 많은 것들이 있어. 행크는 모두 말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그에게서 손을 땠고 그리고 까치발을 내렸다.
“모든게 갑자기 들이 닥칠 거야.”
넌 정말 고통스러울 거고 상처받을 거야. 그래서 넌 모두가 미워질지도 모르고 네 손에 아무것도 남은 것 같지 않아서 증오가 더 두터워질지도 몰라. 알렉스 또한 모두 말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게 들이 닥칠거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마 알렉스도 행크도 모두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서로에게 하지 못하는 여운, 그리고 그 여운들 사이에 어른들이 말하는 ‘미쳐버려야 견딜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함을. 그러나 두 사람은 미쳐버리기엔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보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전부 이해할 수 없을 거란 것과 모든게 들이닥칠 거란 이야기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길진 않았다. 갑자기 알렉스가 행크의 어깨에 매여 있던 사냥총을 낚아채면서 행크의 뒤를 조준했다. 행크를 바라보았던 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이어서 숨넘어갈 듯한 숨소리와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수풀 사이로 튀어나오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아...알렉스. 큰일 났어. 미리암이.”
뒤는 충분히 예상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
참으로 짙은 새벽의 끝이었다. 빗줄기는 사납다가도 온유하게 내렸다. 행크와 알렉스가 그 밤과 추위를 던져놓고 미리암의 천막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차마 그 안으로 들어 설 수 없었다. 안에서는 비명이 들렸다. 베니는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듯 저만치 등 돌려 있었다. 행크는 그 등을 보면서 기억했다. 그랬다. 그들은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들도 아니었다. 그 중간에 서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것이 결국 그들이 아니던가. 그 중앙에서 미리암은 그 다음 세대를 낳고 있었다. 행크는 미리암의 비명을 들으며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면서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듯이 굴었다. 아이를 낳는 과정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기억도 이보다 더 처절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마을 여자들은 그녀들의 어머니의 보호아래서 아이들을 낳았고 그것이 고통스러울 지언정 마냥 괴롭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암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괴로웠다.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다고 산파도 없었다. 다만 산파의 역할을 하는 낯선 얼굴의 여기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높은 목소리로 힘내라고 격려했다.
“어떻게 된 거야.” “30분정도 됐을 거야. 어쩌면 그보다 오래 되었을 수도 있고. 루이즈 말로는 신음 소리에 일어나니까 미리암이 식은땀을 흘리고 난리가 났더래. 그래서 그때부터 물 끓이고 수건 준비하고.” “안에는 루이즈뿐이야?” “그럴 수밖에 없잖아. 사내새끼들뿐인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 “베니는.” “아까 전부터 저러고 있어. 미칠 것 같다고 중얼거리더니 들어가지도 못하고 저러고 있어.”
알렉스는 베니의 등을 보더니 척척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에 비해서 그에게 다가 가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웠고 그의 등에 손을 얹는 것 또한 너무나도 조심스러웠다. 행크는 그들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베니의 물기어린 옆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옆모습 또한 보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행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은 어딘지 이상했다. 그래, 처참하다면 처참하고 기묘하다면 기묘하고, 외롭다면 외롭고, 축복스러운 순간이라 한다면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치 검은 블랙홀이 중간에 뻥 뚫린 것처럼, 그리고 그 위에 이 작은 공동체들이 서 있는 것처럼 어딘지 서늘하고 애일 듯이 위태했다. 행크는 그들에게 한발자국 걸어갔다. 그러나 두발자국 움직이기 전에 제이크가 행크의 팔뚝을 잡았다.
“기다려.” “뭐?” “기다리라고.” “뭐를?” “그냥 지금을.”
그렇게 말하는 제이크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얼굴만큼은 베니와 다를게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속삭였다. 행크는 그것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행크는 알았다. 지금 이순간의 깨달음을 거론하는게 아니었다. 이렇게 축축하고 불쾌한 습기 속에 있으면서도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다들 자상한 얼굴로 원하지 않는다면 떠나라고 했지만 사실 그들은 온 몸으로 행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행크는 뺨을 스치는 차가운 빗물을 느꼈다.
미리암이 큰 목소리로 베니를 불렀다.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알렉스의 손을 치워내며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의 얼굴에 있는 초조함과 서러움을 모두가 읽었다. 이어서 미리암의 비명과 조금만 더 힘주라는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행크는 그가 미리암의 손을 꼬옥 잡고 덜덜 떨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정적이 왔다. 그리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끼리 작게 속닥이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지 모르겠다. 천막 틈 사이로 빨갛게 젖은 수건들이 연달아서 나오고 힘들게 끓인 물과 끓인 물에 넣었던 수건들이 오갔다. 이런 일에 영 어리숙한 사내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알렉스는 묵묵히 피와 양수가 묻은 수건을 빗물을 받아놓은 찬물로 씻었다. 천막에서는 속닥이는 소리가 끝없이 들렸다. 그리고 울음소리와 코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쉽게 잦아들었지만 그게 끝은 아닌 것 같았다. 천막의 속닥임이 선명하게 흘러나올 만큼 주변은 고요했다. 모두가 천막을 응시하고 있었다. 행크도 마찬가지였다.
너머에선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비구름이 얇게 흩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덩이가 천막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등에 떨어졌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순간이었다. 푸르고 붉은 빛이 사방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더 두껍고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행크는 손을 뻗어 손안에 빛덩이를 받아냈다. 그 위로 물이 차올랐다.
천막이 열렸다. 모두는 그 안에서 베니나 루이즈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미리암이 있었다. 그녀의 상아색 입부복은 양수와 핏물로 이곳저곳 더럽혀져 있었다. 그녀의 품안에는 작은 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아이는 그녀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그녀의 품에 어울렸다. 그녀의 창백한 뺨에 뿌려놓은 갈색 주근깨들도, 젖어 있는 붉은 머리카락도 더 이상 소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행크는 그녀를 보는 순간이 목이 조일 듯 숨이 막혀왔다. 그녀의 녹색 눈은 생기를 잃은 듯이 어둡게 빛났다. 그러나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손만은 조심스러웠다.
미리암의 뒤에서 루이즈와 베니가 서 있었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미리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빗줄기 사이로 몸을 맡겼다. 아이를 품에 꼬옥 안고 그녀는 맨발로 젖은 땅을 밟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흔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움직임이라기보단 춤에 가까웠다. 그녀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의 발이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을 듯 움직였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행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커다란 담요로 덮었다.
베니는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느리게 춤을 추었다. 두 사람다 눈을 감고 있었다. 베니의 검은 머리카락이 추욱 늘어졌다. 행크는 그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빗물 때문에 알 수 없었다.
행크가 눈을 깜빡였을 때 그들의 곁으로 제이크가 다가갔다. 제이크는 베니와 미리암을 어깨를 껴안았다. 미리암을 안고 있던 베니의 손이 제이크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들은 아이를 재우듯이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다. 새벽빛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두꺼운 빗줄기도 마찬가지였다.
행크는 세 사람을 향해 뻗는 아주 작고 통통한 손을 보았다. 미리암은 그 손을 잡아 입 맞추었다. 행크는 조금 더 가깝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아주 가깝진 못했다. 행크는 절벽의 끝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기의 얼굴 또한 보았다. 어느새 눈을 떴는지 아기는 커다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행크를 보았다. 새파랗고 투명한 눈동자였다. 행크는 그 눈동자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어버린 세대이니.
*
마을은 커다란 분지 지역에 있었다. 행크가 이것을 알게 된 것은 꽤 어린 시절이었다. 그림으로 보아선 대충 이해가 가지마는 이런 세숫대야같은 땅에 마을이 고여있다는게 믿을 수 없었다. 행크는 언젠가는 마을을 너머 분지 경계의 땅을 밟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행크는 자신의 꿈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꿈을 이룬지도 모르고 있었다.
15살의 여름, 행크는 미열로 뜨거운 몸을 끌어안고서 알렉스의 오두막을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의 누이만이 드물게 잠들어 있을뿐 아무도 없었다. 행크는 새근새근 잠이든 그녀의 곁에서 평소처럼 책을 읽었으나 이마에 맴도는 미열 때문에 쉽사리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얕은 숨을 뱉으면서 그녀의 곁에 누웠다. 뜨거운 볕 때문이다. 시원한 곳에서 자다 일어나면 괜찮아 질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미숙한 몸을 원망하긴 쉬웠으나 빨리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떴을때 알렉스가 곁에 있기를 바랐다. 아주 깊이 단잠을 잤다. 그래서 그의 바람처럼 알렉스가 홀로 그의 곁에 앉아 있었을때 행크는 믿지 못했다. 몇 번의 눈깜빡인 뒤에 행크는 그가 실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파란 눈동자에 비춰지는 자신을 보느라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 조차 인지 하지 못했다. 사실 행크는 모든게 그랬다. 알렉스의 관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배제 했다. 행크의 머리가 상자라면 오로지 알렉스만이 있었다.
알렉스가 행크를 일으켰다. 그의 팔을 잡아 당기면서도 혹여나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행크는 ‘그정도로 부러지는 팔은 아니야.’하고 말하려 했지만, 제이크가 던진 공을 받다가 다리를 접지른게 저번주임을 기억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도 약골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게 아니야. 목끝까지 투정이 올라왔다.
알렉스의 주변에는 그의 베니와 제이크가 없었다. 행크는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하늘을 보았다. 산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잠만 퍼질러 잤던가. 행크는 우물쭈물거렸다. 알렉스는 분명 자신을 마을까지 데려다 줄 것이었다. 여자아이도 아니고 거리가 어둡다고 에스코트 받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혼자 가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또 그렇게 말하자니 그와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게 되니 그건 그것대로 아쉬웠다. 행크가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며 땅만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알렉스는 척척 칼집을 허리에 매고 단도를 꽂았다. ‘어서 가자.’ 알렉스가 먼저 걸어갔고 행크는 그의 뒤를 쫒았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침대에서 자고 있겠지. 알렉스는 그녀를 안아다가 옮겼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알렉스의 뒤를 쫒으며 행크는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게 여겨졌다. 알렉스는 베니, 제이크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냥연습을 했을터였다. 자신은 그들을 보러 왔지만 그들의 사냥에 끼지도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채 알렉스의 오두막에서 숙면을 취해버렸다. 그리고 알렉스가 돌아오면 그를 따라 마을로 돌아갔다. 알렉스는 마을 입구근처도 밟지 않고서 자신이 들어가는 길을 바라본다. 그리고 행크가 문을 닫으면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다. 대화도 포옹도 없다. 하지만 행크는 자신과 알렉스의 관계속에 아무것도 없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옳았다.
척척 길을 가던 도중에 알렉스가 멈춰섰다. 그리고 행크를 돌아 보았다. ‘터널가볼래?’ 행크는 물음표를 띄었다. 터널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적 없다. 아니, 몇 번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게 진짜 있었더라면 아버지가 분명 말씀해주셨을 것이다. 그분은 행크에게 마을을 역사와 지리를 모두 설명하셨고 행크가 그것들에 대하여 무지함을 용서치 않으셨다.
‘터널은 없어.’ ‘아니, 저기에 있어.’
알렉스는 손끝으로 숲속을 가리켰다. 숲은 어둑했고 한발자국 내미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 생각될 만큼 적막했다. 행크가 뒷걸음 치자 알렉스는 손을 내밀었다. 행크는 알렉스의 손을 보았다. 아직은 성장단계를 거치고 있는 손이었으나 자잘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에 비해서 행크의 손은 보송보송한 어린아이의 손이었고 보다 더 가늘었다. 행크가 망설이자 알렉스는 ‘가보자.’하고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어둠으로 성큼 들어갔다.
길은 험했다. 아마 행크가 갔던 길중에선 가장 험했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험한 길을 다니곤 했지만 그때만큼 험한 길은 처음이었다. 온땅에 커다랗고 작은 돌들 투성이었고 한곳은 질척였다. 알렉스는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자신만 쫒아오라고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알렉스가 선택하는 행로는 다른 길보단 나아보였다는 것이었다. 알렉스는 굉장히 익숙하게 길을 걸었다. 그가 자주 이곳을 찾는 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행크의 팔목에 얕은 상처가 났다는 것을 제외하곤 (그러나 알렉스는 혀를 찼다. 분명 행크의 할머니를 생각했을 터였다.) 전부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것은 행크의 머릿속이었다. 행크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꽤 커다란 터널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정말 터널이 있었다. 터널 앞에는 끊겨진 레일이 있었다. 아마 이 안으로 바퀴달린 무언가들이 왔다갔다 했던 모양이었다.
‘이 밖으로 나가면 마을을 벗어나는거야. 완전히.’ ‘완전하게?’ ‘그래. 다른 세계가 나와. 물론 좀더 걸어가야하긴 하는데 어쨌거나 여기랑은 완전히 달라. 사람들도 다르고 사는것도 다르지.’ ‘넌 거기서 온거야?’ ‘정확히 말해선 그렇지만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진 않아. 그건 좀 더 복잡하거든.’
안으로 들어가보자는 알렉스의 말에 행크는 고개를 저었다. 터널 깊은 곳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고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렇게 위험하진 않다고 말해줬지만 행크는 굳건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길지 못했다. 알렉스가 성큼 들어가버리자 홀로 남은 행크는 동동 발을 굴리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바삐 들어섰다. 그나마 노을 빛이 인도하는 밖과 달리 터널 안은 완전한 어둠이었고 온몸의 감각이 일어서 모든 것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행크가 알렉스를 다시 한번 불렀다. 그리고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 오늘만 해도 두 번째였다. 행크는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터널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이내에 저 먼 곳에서 빛이 보였다. 그러나 알렉스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행크는 천천한 그의 걸음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때 나타나는 세상을 보았다. 커다란 언덕이 있었다. 아니 언덕이라기보단 산이라는 표현이 맞을 터였다. 한번도 본 적없는 높은 산이었다. 여태 숲을 보며 살아왔지만 이런 산은 보지 못했었다. 행크는 그제야 자신이 정말 분지에 살았음을 실감했다. 평평한 땅을 벗어나니 이런 땅과 하늘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알렉스는 붉은 노을을 입고 있는 초록빛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너머로 가서 꽤 오랜 시간동안 걸어가면 도시 하나가 나와. 나랑 누나는 그곳에서 살았어.’ ‘도시? 커다란 건물이 있고 밤이 되어도 눈이 아프다는 그곳 말이야?’ ‘그래. 어디서 들었어? 네 아버지가 알려준거야?’ ‘아니, 아버진 그런것들을 말하면 화내. 도시엔 악한 것들이 가득해서 그곳에 가면 타락한다고 말씀 하셨거든. 이전에 닥터 그린우드가 시내로 약을 사러 나가시면서 책 한권을 사오셨어. 그 마저도 아버지에게 걸리면 빼앗길게 뻔하니 몰래 보고 있는걸. 어쨌거나 거긴 이렇게 써 있었어. 불빛이 저절로 들어와 밤은 밝고 낮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고. 높은 건물이 있는데 그게 사람을 훨씬 넘는데. 넌 거기서 온거야? 너보다 훨씬 높은 건물에서 살았어?’ ‘그래. 5층짜리 낡은 아파트였는데 그곳에서 누나랑 살았어.’ ‘그랬는데 왜 여기를 왔어?’
그 순간에 알렉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말해 줄 것 같이 입을 달싹였으나 이내에 입을 꼬옥 다물고서 노을 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익어가는 산등성이의 모양이 마치 불에 타오르는 동물의 등허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동안 노을을 바라보던 알렉스가 새끼 손가락으로 행크의 손끝을 툭 건드렸다.
‘언젠가 도시로 가자.’ ‘...나랑?’ ‘싫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나랑 가서 뭐하려고?’
알렉스는 잠시 그 말에 귀를 긁적였다. ‘거리를 다니는거야. 엄청나게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일원인 것처럼 다니는거지. 그 누구도 이상하다는 시선을 주지 않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어린 눈을 주지 않을거야. 그렇게 다니는거야. 모든 것을 의식하지 않고서. 그리고 수 많은 빌딩들 가운데서 밤이 끝나는 순간을 기다릴거야.’ 알렉스는 끊이지 않고 말했다. 줄줄 잇는 말들에는 흥분된 고저도 없었고 꿈꾸는 소년들이 그러하듯 야망에 젖어 있는 모습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차분한 눈동자는 산너머를 보고 있었다. 단지 꿈이 아니었다. 행크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걸 왜 기다려. 밤인데 잠이나 자야지.’
행크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자신과 한다는 것이 밤이 끝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인가. 조금더 나은 말들이 나올 줄 알았다. 도시의 도서관을 간다거나 아니면 가장 높은 빌딩 끝에서 도시를 보여준다거나. 하지만 그가 하는 것이라곤 도시의 중앙에서 밤을 지새고 끝나길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무슨 수탉도 아니고. 알렉스는 행크가 투덜거리는 동안 무언가를 중얼 거렸으나 행크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것을 듣지 못한 것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으나 이후에는 궁금해졌다. 왜일까. 왜 자신과 그 밤의 끝을 기다리고 싶었을까.
“네놈 아버지야. 네가 그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버지야! 그래 그 야만적인 그 인간이라고!” “베니, 그만해. 저애가 나쁜게 아니잖아.”
알렉스를 잃고 보냈던 많은 새벽동안 계속해서 생각했었다.
“나쁜게 아니야? 아니지. 저 새끼도 결국엔 한 통속이잖아. 안그래? 결국은 이것만이 남았잖아. 결국은 이런것들 뿐인데도 자신은 모르겠다느니! 앞으로도 자신은 모를 생각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느니!!! 현실을 보라고 이 망할 자식아! 이게 진짜란 말이야!”
그러나 도무지 생각해도 알렉스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뭘 어쩌려고?! 뭐? 알고 싶지 않아? 궁금하지 않아? 그러면 모든게 사라져? 없어져? 네가 알고 있다는 그 거짓된 진실만으로 똘똘 뭉쳐서 너의 것들을 지키면 그 모든게 옳고 바른거야? 야 이 새끼야. 똑바로 봐봐. 여기가 바로 현실이야. 내 아내가 네 꼰대의 아이를 낳고, 모든 어린 여자애들이 처녀 잉태를 앞으로 내세워서 누군지도 모르는 늙은이들의 아이를 낳아. 뭐? 신의 지시? 사랑? 보호?” “베니. 그만. 그만해 이제. 제발 그만해.” “너 그거 알아? 미리암은 네 꼰대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1년 동안 내 아이를 가지고 있었노라고 사람들에게 질타를 당했어. 그 웃기지도 않은 제도를 앞세워놓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은 기회를 삼아서 미리암을 질타했어! 내 존재가 불편했으니까!!! 내가 저 애를 두고서 일찍이 나와야 했을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나마 내가 없으면 저 애가 사람들에게 덜 질타 받을거라며 생각하며 홀로 있어야할 그 애를 두고서 나와야 했을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넌 상상이나해?! 넌 아무것도 몰라. 넌 그저 네 아버지의 더러운 자리를 물려 받기 위해 환장했을 뿐이야. 그다음은 너야? 또 우리 또래 여자아이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 여자아이들을 강간해서 아이를 낳게 할거야? 그럴거냐고!!!” “그만해!!!”
마지막 외침은 알렉스였다. 행크에게 소리치던 베니도, 베니를 막아오던 제이크도,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행크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도 입을 다물고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대롱대롱 맺혀 있던 베니의 눈물이 뚝뚝 흘렀다. ‘제기랄.’ 베니가 울면서 웃었다.
아기는 참 작았다. 얼마나 작았냐하면 행크의 발보다 살짝 클 정도로 작았다. 천막으로 들어온 행크에게 미리암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울 것 같기도 했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정말 지쳐 보였다. 마치 많은 것을 포기해버린 사람같았다. 행크는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녀의 품에 누워 꼬물거리고 있었다. 미리암은 갈라진 목소리로 ‘한번 안아볼래?’하고 말했다. 행크는 화들짝 놀래며 거절했지만 품안의 아이를 내주는 가느다란 손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안아들었다. 따뜻하고 가볍고 잘못 만지면 죽을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아기는 두 손을 꼬옥 웅켜지고 있었다. 그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서 살짝 손을 펼쳐보았지만 작고 따뜻한 손바닥이 있을뿐 아무것도 없었다.
아기는 낯선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행크를 보고 있었다. 다른 아기들보다는 훨씬 숯이 많았고 땡그랗고 크게 눈을 뜨고 있었다. 깃털같은 금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행크는 파란눈을 마주했다.
‘이름은 뭐라고 지을거야?’ ‘고민중이야. 여자애니까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평범한건 싫고, 하지만 이름이 너무 독특하면 삶이 힘들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했어. 급할 건 없으니까.’
미리암은 목이 아픈지 계속해서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행크는 그런 미리암을 힐끔보다가 다시 아기를 보았다. 파란 눈. 새파란 눈. 이상하게 마을에는 파란눈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녹색눈이나 갈색눈이었는데 그마저도 서로의 눈색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푸른눈은 많이 없었다. 그래서 행크는 약골인 시절에도 자신의 눈만큼은 좋아할 수 있었다.
어렸을때 할머니가 이르시기를, 마을에서 내려오는 신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을을 세운 ‘미스터 센보’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우락부락한 사냥꾼은 아니었으나 심성이 선하고 신앙심이 깊은 인디언이었다고 했다. 그는 인디언과 백인 가운데서 태어난 혼혈이었지만 그를 데리고 도망친 모친으로인해 인디언 마을에서 살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던 인디언들도 그가 성장함에 따라 보여지는 모습과 백인들을 따라 믿기 시작한 신앙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센보를 내쫒았다. 센보는 이후 자신의 사람들을 모아 마을 하나를 세웠는데 그가 바로 행크의 마을이었단다. 미스터 센보는 공격적인 백인들로부터도, 또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을을 없애려는 인디안들로부터도 마을을 지켜냈다.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했던 그의 파란눈을 보며 사람들은 지도자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최후가 에스파냐 인들에게 처형당한 것인만큼 가끔 비극스러운 최후를 상징하기도 했는데 행크가 보기엔 그저 좋을대로 붙여놓는 이야기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스터를 보며 ‘파란눈을 가진 지도자’라고 말하며 그를 존경했다. 그에게서 파란눈은 행운과 지도자를 상징했다. 그런 이유로 행크는 물려받은 파란눈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같은 파란눈을 가진 알렉스에게 파란 눈은 불온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래서 그에게 온갖 나쁘고 불행한 것들을 다 가져다 붙였다. 베니가 그랬었다, 자신보다는 알렉스가 훨씬 더 현명하고 용감하니, 그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사실 진정 파란눈의 의미는 알렉스에게 해당되는 것일지 몰랐다.
‘행크.’
미리암이 멍하니 생각하는 행크의 손을 붙잡아 왔다. 행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익숙한 눈동자와 익숙한 얼굴 생김새, 아니 아직 자라지도 않은 아이에게서 성인의 얼굴을 읽는다니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게 뻔하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괜한 불안감에 치를 떨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이 미리암이 아버지와 진정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는게 더 맞지 않겠는가.
‘나도 알렉스도, 우리 모두도 이런 식으로 알려주고 싶진 않았어. 모두다 걱정했어. 너는 정말로 네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었으니까, 너의 전심이 모독당하기를 원하지 않았어. 하지만 행크-’ ‘미안하지만.’
미안하지만, 미안하지만, 행크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손안에 있는 아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하는걸까. 자신이 뱉은 말에 미리암이 상처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변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모르겠어.’ ‘행크.’ ‘난 아직도 모르겠어. 그리고 계속 모를 생각이야.’
미리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행크는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의 안에서는 이름모를 것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부정, 불안, 고통, 분노 그리고 의심. 어쩌면 마을을 없애고 싶어하는 이 무리의 공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무슨 의도가 되었든 이들은 마을을 떠나온 사람들이었고 마을에 대하여 불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마을의 정식 후계자이고 언젠가는 마을을 지도해야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마을을 저버리고 ‘늑대들’에게 소속되면 마을은 위험해 지는 것이다. 사라질 수도 있다. 행크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그의 가설들과 생각들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머리가 하는 일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화가났다. 화가 났으나 들고 있는 아기가 너무 무거워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눈을 한 아기가 자신을 보고 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저
‘난 모를 생각이야.’
이딴 것 뿐이었다.
행크가 얼어붙은 그녀에게서 아이를 내려놓았다. 역시 마을로 돌아가야했다. 자신에겐 알렉스도 소중했지만 마을이 있었다. 마을로 돌아가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들어야 했다. 그리고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속셈이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명확한 답을 들어야했다. 그 모든 것을 듣고난 후에 행크는 알렉스를 설득할 것이었다. 네가 알고 있는 미리암에 대한 것은 거짓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행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때 무언가 목덜미를 잡았다.
‘뭐? 너 다시 한번 말해봐. 뭐라고?’
베니의 분노는 행크에게 또다른 불안으로 다가왔다. 그는 소리 질렀다. 행크는 이 눈을 본적이 있었다. 그가 알렉스와 제이크를 잃고 돌아왔던 그때였다. 그때도 거짓이니 지금도 거짓임이 분명했다. 그는 천막 안에서 행크를 쥐고 흔들려 했지만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그를 천막밖으로 끌고 나왔다. 본격적인 그의 분노에 제이크가 뛰어와 그들을 말렸다. 행크는 베니에게 붙잡힌채로 알렉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대로 무너져 울고 싶기도 한 반면에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싶었다. 아버지를 모르면서 그 따위 말들은 하지도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행크가 선택한 것은 그저 뜨거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는 것 밖에 되진 않았다. 풍덩, 물이 고인 웅덩이에 행크의 발이 빠졌다. 신발 가득 올라오는 흙탕물을 느꼈다. 온 몸이 흙탕물에 빠진 것 같았다. 마치 돼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알렉스가 소리질렀다. 매서운 얼굴로 베니를 바라보곤 그의 손을 치워냈다. 자신의 뒤로 행크를 밀어 내며 베니와 대치했다. 사실 그건 좀 우스웠다. 더 이상 행크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베니보다도 제이크와 알렉스보다도 훨씬 커다란 키를 가지고 있었다. 사냥감의 배를 갈라내는 것을 보며 토악질을 하지도 않았고 능청스럽게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행크는 그들 앞에선 6년전처럼 돌아간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수사슴의 머리통을 갈겨대던 행크 맥코이가 맞던가. 아니, 그 사냥꾼 행크 맥코이가 만들어 진 것이다. 진짜 행크 맥코이는 이 앞의 작아져버린 남자애였다.
“진짜 이건 너무 지겹다.”
베니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의 녹색 눈동자가 추욱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있는 분노만큼은 여전하여 작은 흔들림만으로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알렉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 네가 약속했었어. 그 빌어먹을 성인식 이전부터 이 모든 것을 정말 시작할때즈음에 저 새끼를 데리고 오겠다고. 그건 제이크도 나도 모두 인정했어. 우리도 나름 저 새끼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괜찮은 새끼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봐. 이것보라고! 저 새끼는 너랑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새끼가 아니잖아!!!” “그만하고 들어가. 정상적으로 대화 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란 것은 너도 스스로도 알텐데, 벤 솔리먼.” “알렉스, 베니의 마음도 알아줘야 하잖아.”
제이크가 앞으로 한발자국 나오며 알렉스에게 속삭였다. 알렉스는 자신의 팔뚝을 잡아오는 제이크의 손을 천천히 떨쳐내었다. 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제이크는 알렉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너무 늦게 찾아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은 보다 더 빨리 왔어야했다. 고름이 지나치게 영글었고 피부는 썩어가고 있었다.
“알렉스 서머즈.”
벤 솔리먼이 알렉스를 불렀다. 그것은 알렉스가 그를 부를때와 같은 높낮이었다. 목소리마저 비슷하게 여겨졌다.
알렉스가 입술을 악물며 베니를 향해 튀어나갔다. 그들의 사이에 있던 제이크가 베니를 보호하며 알렉스를 붙잡았다. 주변에서 서성이던 남자들도 그들을 말리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저 행크 만이 이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만 죽을거라 생각해! 우리 모두 저새끼의 총과 칼에 죽을거야. 기억안나? 널 보자마자 죽이려고 들었어. 너 그렇게 죽을거야. 그렇게 죽을거야! 저 새끼는 널 죽일때 망설임도 없을거라고!”
베니가 마지막 말을 마치는 순간에 따가운 마찰음이 울렸다. 베니의 앞에는 제이크가 있었고 베니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몇번 말해야 알아듣겠냐. 그만 좀 해라.”
제이크가 조용히 말했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갈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베니는 분노와는 또다른 고통을 느꼈다. ‘야, 이 못된 새끼야. 다른 놈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너만은 내 곁에 있어야 하잖아.’ 덜덜 떨리는 입술을 보며 제이크의 눈가가 움찔했다. 그의 어깨를 떠밀며 천막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은채로 그저 주먹만 움켜지고 있을 뿐이었다. 제이크가 다시 한번 등을 떠밀자 그 손을 매섭게 치워내며 천막안으로 들어섰다. 베니의 머리를 감싸는 미리암의 하얀손이 언틋 보였다 사라졌다.
모두가 잠시 동안 자리에 서 있다 할 일 하라는 제이크의 울림에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알렉스.”
제이크가 알렉스의 근처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난 리더로서의 너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어. 이건 분명해. 넌 좋은 리더니까. 그랬기에 이 어려운 길을 따라나선거야. 재미있을 것 같아서, 즐거워서 따라나선게 아니야. 베니도 나도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도 너를 믿기 때문에 이곳에 모인거야. 하지만 이것 또한 알아둬야해.”
‘난 베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거야.’ 제이크가 알렉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 있는 행크를 힐끔 보았다.
“너도 같으니 무슨 소리 하는지 알거라 생각한다.”
상처입은 알렉스의 어깨를 툭 치며 제이크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행크에게 눈웃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렉스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그대로 굳어버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행크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투명인간 같았다. 처음이었다. 그가 마을에서 불편한 존재고 미움 받는 존재긴 했지만 그의 존재는 늘 뚜렷했다. 투명인간이라니, 이만큼 알렉스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있을까. 그러나 그는 정말 투명인간 같았고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알렉스가 행크를 보았다.
“돌아가. 그래. 돌아가.”
행크는 그가 돌아가길 원하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그렇게 물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말은 돌아가라는 단 마디 뿐이였다. 알렉스는 등을 돌렸다. 잠시 젖은 땅을 바라보더니 처벅처벅 걸어가버렸다. 행크는 알렉스의 등이 숲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주변 사내들이 어딜가냐고 물었지만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걸었다. 행크는 자신의 발을 보았다. 웅덩이를 밟고 있었다. 신발 안으로 잔뜩 물이 스며들고 있었으나 그것도 모른채로 서 있었다. 행크는 웅덩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아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