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가 사냥하는 것을 본적 있었다. 그는 낮은 자세로 사냥감을 바라보았다. 방아쇠를 감아올린 하얀 손가락이 선명히 보였다. 베니와 제이크는 숨을 죽이고 그와 사냥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먼 곳에 있는 사냥감은 주변을 돌아보다가도 안심하곤 머루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가 방아쇠를 누르는 것은 정말 한 순간이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잔인하지도 않았다. 사냥감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는 침착했다. 풀썩 쓰러지는 사슴 한 마리에 소년들은 손을 벌떡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행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쓰러진 사슴을 바라볼 뿐이었다. 베니는 익숙한 손길로 사슴의 뿔을 잘랐다. 피가 나왔다.
당시 행크는 그들의 사냥을 따라간 것도 처음이었고, 사냥감 손질을 지켜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뿔의 단면에서 피가 질질 흘렀고 흙 위로 떨어졌다. 행크는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사슴과 눈이 마주쳤다. 뒤로 자빠졌다. 사슴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요란하게 자빠지는 행크를 보며 제이크가 낄낄 웃었다.
‘이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 비인간적이잖아!’ ‘사냥에 무슨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걸 따져?’
두 번째 뿔을 자르며 베니가 말했다. 알렉스는 베니가 건넨 뿔을 자루에 담고 있었다. 사슴은 헐떡였다. 뿔에서 피가 흐르는 것과 같이 목에서도 피가 줄줄 흘렀다. 강 물줄기처럼 털을 가로질러 여러 갈래로 흐르는 핏줄기를 보았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종국에 점심에 먹었던 감자와 옥수수를 게워내자 베니는 알렉스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거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괜히 데리고 왔다고. 이러다가 위장까지 토해내면 맥코이 여사한테 무슨 소리 들으려고 이래?’ 알렉스는 그런 투정에 닥치고 뿔이나 자르라고 담담히 말했다. 허리에 매달아 놨던 가죽 물통을 행크에게 건넸다. 행크는 기침을 하며 물통을 받았다. 시원한 물줄기가 입으로 흘러들었다. 입안은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속은 미식거렸다.
제이크가 주머니에서 꺼낸 천으로 사슴의 머리를 가렸다. 행크는 그 행동이 무엇인지 알았다. 사냥을 할 때는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한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거라고. 그건 유일무이한 독생자의 희생과도 흡사했다. 소년들은 잠시 침묵했다. 알렉스가 짧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사슴의 턱 아래를 칼로 찔러 넣었다. 행크는 또다시 구역질을 시작했다. 베니와 제이크는 다신 데려오지 않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사슴의 다리를 묶고 나무에 매달았다. 그리고 어깨에 짊었다. 행크는 비틀거리며 소년들을 따랐다. 숲속에서 굴러다니면 막대기 하나를 주워서 지지하며 걸었다. 행크가 죽어가든 말든 제이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베니는 그에 맞춰 휘파람을 불었다.
‘몇 번째 사냥이었어?’
곁에있는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 정도로 많은 거냐고 묻는 행크에게 알렉스는 ‘앞으로 더 많아지겠지.’하고 대답했다. 그의 심드렁한 대답에 행크는 어떤 대답을 꺼내야할지 몰랐다. 망설여졌다. 이 상황이 훈훈하다면 사냥에 참여시켜줘서 고맙다고 해야겠지만 행크는 다 죽어가는 시점이었다. 만약 억지라도 그런 인사를 했다간 앞의 두 심술쟁이들에게 ‘허! 두 번 감사했다간 네 목을 따버리겠어!’라는 말을 듣게 될 터였다.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아? 뭐, 어쨌든 이건-’ ‘죽이는 거니까?’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뭐 그렇지.' ‘당연히 죄책감 느껴지지. 네 말대로 어쨌든 죽이는 거니까.’ ‘그런데 왜 사냥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물론 우리 마을 청년들에게 사냥은 기본적인 임무긴 하지만 넌 늘 사냥에 참여하잖아. 대외적으로나 아니면 개별적으로나.’ ‘하나의 상징이야.’ ‘어떤 상징인데?’ ‘강하다는거.’
행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이 이상의 대화가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행크가 묻는 대답에 모두 답할 것이었다. 그러나 행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겉면을 훑어 내리는 질문밖에 던지지 못할 것이다. 결코 그 내부에 있는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지지 못할 것이다. 행크는 침묵하며 걸었다. 어느새 숲 너머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짙은 노을을 앞에 두고 네 사람은 걸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마을이 나올 것이고 어른들은 소년들이 건네는 사슴을 받으며 즐거워 할 것이다. 가죽을 뜯어낸 사슴고기를 받은 여자들은 스튜를 만들겠지. 그러나 행크는 오늘 저녁으로 나올 사슴 스튜를 먹지 못할 것 같았다. 한 스푼 한 스푼 뜰 때마다 스푼위로 사슴의 검은 눈동자가 탁구공처럼 떠오를 것 같았다. 알렉스는 어떨까. 그는 자신이 죽인 사슴을 맛있게 먹을까. 행크는 알렉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알렉스의 옆 테로 노을이 번졌다. 피를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알렉스가 행크의 이름을 불렀다. 행크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사냥을 배워봐.’
행크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자신은 사냥의 고수가 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대답했다. 행크는 웃자고 한 소리였지만 알렉스는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강해져야해.’ 하고 말했다. 행크는 민망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럴 필요가 있어?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하고 말했다. 반복되는 이야기였다. 대체 강해야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이 좁고 작은 마을에서 강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사실 어떤 누군가는 강해야한다. 마스터가 가지고 있어야할 지도력, 사냥실력, 마스터뿐 아니다. 마을의 사내들이 가지고 있는 힘. 마을을 지키는 능력. 그러나 알렉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들이 아니다. 알렉스는 마을의 치안에는 관심 없다. 그는 언제나 마을에서도 겉돌고 있었다. 어른들이 무언가를 시키면 군소리 없이 행동하고, 엄격한 규칙들도 따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알렉스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알렉스는 행크를 내려다보았다. 파랗다 못해 시려 보이기까지 하는 눈동자가 행크의 얼굴 앞에 있었다. 행크는 어깨를 움츠리고 알렉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지키기 위해서지.’ ‘내가? 마을을?’ ‘바보냐. 너 자신을 위해 말이야.’ ‘그럼 너도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는 거야?’
그 말에 알렉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행크는 마을 입구에 도달할 때까지 알렉스에게 대답을 얻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유일한 순간이었다. 알렉스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들은 머직하게 떨어져있는 관계였고 알렉스는 쉽사리 행크에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행크는 또래들과 이야기하는 알렉스를 바라보다가 들킬까 싶으면 무릎위의 책으로 시선을 돌렸었다. 시선뿐이었다. 알렉스와 행크 사이에 있는 것은 그게 유일했었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행크는 사냥 당시의 순간이 더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베니와 제이크는 사슴을 마을 어른들에게 떠넘겼다. 그들은 어른들보다 자신들이 낫다며 곧 있을 성인식도 문제 없을 거라 으스댔다. 어른들은 겸손할 줄 알라며 쏘아붙였지만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여실했다. 행크는 속으로 사슴은 알렉스가 잡은 거잖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알렉스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끝이었다.
*
행크가 나타날 때면 마을 사람들은 그의 어린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기 좋아했다. 16살이 될 때까지 행크의 키는 4피트(ft) 9인치(inch)를 못 미쳤고, 몸무게도 그 나이 계집애들보다 훨씬 가벼웠다. 몸도 약골인터라 찬바람만 쐬면 풀썩 쓰러져 2주내내 침대에서 끙끙거리기 일 수였다. 이런 행크에게 친구란 책뿐이었다. 처음 탈무드로 시작된 독서는 폭넓은 신학으로 이어졌다. 그는 툭 찌르면 성경 말씀을 줄줄 외울 정도로 수백 번 성경을 읽었다. 비록 약골에 작은 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런 행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마을은 종교로 똘똘 뭉친 사람들로 가득했고 종교보다 중요한 것들은 없었다. 하지만 암만 똑똑해봤자 외롭고 약골인건 똑같지 않으냐고 행크는 투정부렸다. 마을 아이들은 자신과 놀기를 꺼려했다. 줄곧 이야기했듯이 첫 번째로 자신은 계집애들보다 못한 약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은 마스터의 아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행크의 아버지를 마스터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지금의 촌장과 비슷했는데 그것보단 훨씬 폭이 넓었다. 그는 젊고 현명했다. 그보다 나이 많은 사내들도 그를 마스터라 부르며 존경했다. 그건 좀 이상했다. 암만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은 200명이 넘었다. 그 사람들 중 젊고 어린 아버지를 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이하게여긴 행크는 할머니에게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질투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다. 설거지를 하던 그녀는 ‘네 아버지가 지나치게 현명하기 때문이지.’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행크는 그냥 그렇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이 사는 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좋은 사람들만 모여사니 좋은 마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해선 이야기 할게 참 많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옅은 금발은 겨울날의 황금 잔디 같았고, 파란 눈동자는 동화 속에 나오는 바다와도 같았다. 그는 큰 키와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또 사냥을 잘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잘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상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모르겠지만 행크에겐 그랬다. 행크가 아플 때면 그는 숲속에서 머루를 따왔다. 그리고 염소젖과 그것을 갈아 주스를 만들어 주었다. 새콤달콤한 주스를 먹을 때면 행크는 자신의 병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낮에는 보통 할머니가 간호해주었지만 밤이 되면 아버지가 곁에 앉아 탈무드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행크처럼 탈무드 이야기를 전부 외우고 있었다. 부분적인 단어만 말하더라도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행크는 그가 해주는 이야기 중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쓰다듬어 주는 것이 좋았다. 그의 자상함이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다. 행크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다.
행크는 그의 아버지를 하나도 닮지 못했다. 외모나 체격도 그랬고 운동신경도 그랬다. 비위도 좋지 않아 사냥 따라다니는 것도 무리였다. 한번은 그가 행크에게 총 쏘는 법을 알려주려 했지만, 행크는 반동을 이기지 못해 여러 번 나자빠졌다. 몇 백번 도전했지만 몇 백번 실패했다. 행크는 엉엉 울면서 그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우는 행크를 껴안아 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자신은 똑똑한 아들을 아주 사랑하고 그를 아끼고 있으며 결코 행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그날에 행크는 작은 토끼 한 마리 잡아오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훌륭하고 멋진 아버지를 가진 덕택에 생겨나는 행크의 자격지심을 그는 하나하나 치료해주었다. 그렇다고 모든 콤플렉스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행크는 아주 많이 좋아졌다.
그의 자존심을 치료한 것에는 아버지의 위로도 있었지만, 성장하며 변한 큰 키도 한몫했다. 4피트 9인치(약 150cm)를 못 넘기던 키가 16살을 지나며 19살 때까지 6피트 3인치(약 190cm)로 훌쩍 자라났다. 마을사람들은 물론 행크 본인까지 놀랐다. 밤마다 무릎을 부여잡고 울며 성장통에 끙끙거려야했지만 이후 얻은 것에 비하면 충분히 견딜 가치 있는 것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커질수록 행크는 마을이 작게만 느껴졌다. 그 생각은 좀 더 커졌다. 어디론가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그치질 않았다. 그가 아버지 앞에서 ‘나가고 싶어요. 떠나고 싶어요.’하고 말했을 때, 나무를 깎던 마스터는 ‘어디로?’하고 물었다. 행크는 입을 턱 다물었다. 어디로 간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에게 마을은 작았고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 그는 깎던 나무칼을 내려놓았다.
‘도착지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 없단다.’
그것은 그의 지론과도 같았다. 마을의 책임을 맡고 있는 아버지는 모든 것이 분명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마을의 위치뿐 아니라 집 한 채가 놓여 있어야하는 위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 그 관계 속에 존재하는 평화와 미움모두 분명해야 마을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다. 행크는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게 싫었다거나 반항하고 싶었단 뜻은 아니었다. 그저 이해하기 너무 어려울 뿐이었다. 그러나 행크는 그것들을 모두 이해하는 척 했고 때론 앵무새처럼 아버지의 말을 따라 하기도 했다. ‘모든게 분명해야해. 그것들이 가치를 찾아주니까.’ 언젠가 행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을 다스리길 원했다. 명예욕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바라는 만큼의 재목이 되길 바랄뿐이었다. 언젠가 이 마을의 마스터가 될 거라는 아버지의 입버릇대로 행크는 모든게 이뤄지길 바랐다. 그렇기 위해선 모든게 분명해야했다.
이 정도에서쯤에서 나와야할 이야기 두 개가 있다.
그중 하나는 행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행크는 어머니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때로 할머니를 붙들고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정말 가물가물하다는 얼굴로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단다.’하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을 낳은 병원은 매우 작은 곳이었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응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가끔 행크는 그녀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립진 않았다. 자신에겐 할머니와 아버지가 있으니 상관없었다.
사실 이것보다는 두 번째 이야기가 더 중요했다. 이 이야기는 행크에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때로 행크에게 추억과도 같았으며 생살을 찔러오는 고통 같기도 했다.
알렉스는 행크가 13살 때 마을에 왔다. 그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마을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다시 아버지가 되어 아들을 낳는 곳이었다. 가끔 옆 마을 처녀와 결혼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어린 소년이 누나의 손을 잡고 마을을 찾아오는 일은 전무했다. 알렉스는 하얀 얼굴과 금발머리에 잔뜩 더러운 흙과 상처들을 달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누나는 마치 연필로 그려낸 것처럼 선명했고 거품 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깨끗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곁에 가까이 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녀는 시체 같았다.
알렉스의 집은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곳이었다. 숲의 입구에서 가까웠는데 그곳은 바람이 많이 불었고 해가 가려 어두웠으며, 가끔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기도 했다. 알렉스의 누나는 테라스에 놓인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늘 그랬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서 어둠을 응시했다. 그곳에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이란 듯이, 늘 그곳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어떤 표정 또한 짓지 않았다. 그것은 알렉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무어라 말해도 그녀는 알렉스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알렉스를 싫어하는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저주라고 했지만 행크는 저주가 아닌 장애라는 것을 알았다.
알렉스와 그의 누이는 말없이 마을에 정착했다. 그들은 조용히 지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궁금해 했다. 그 궁금증엔 미움 담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들어온 이후 마을에 홍역이 돌았다. 심한 증상에 3살짜리아이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 홍역이란 당연히 치러야할 일들이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죽음에 사람들은 좋지 않은 징후라며 수다스럽게 이야깃거리를 만들곤 했다. 마을은 작았고 사람들에겐 활력소가 필요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 상관없었지만 대부분 나쁜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당시 행크는 알렉스에게 별 관심 없었다. 물론 마을에 새로 들어온 아이가 궁금하고 신기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행크에겐 친구가 없었고 그는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책을 읽거나 때론 이야기를 써내기도 했다. 그것도 재미없으면 아버지가 일러준 안전한 숲길로 산책을 가기도 했다. 저녁 즈음 할머니의 집안일을 도와드리다보면 아버지가 사냥을 마치시고 돌아오셨다. 저녁을 먹으며 사냥 이야기를 들었고 잘 때는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듯이 탈무드 이야기를 들었다. 알렉스의 존재는 행크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행크가 알렉스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15살 되던 해였다. 행크는 심하게 앓았다.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자주 아팠다. 그의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머루를 따왔다. 평소라면 잘 받아먹었겠지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늘 병을 달고 살았었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커다란 서글픔이 덮쳐왔다.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았다. 햇살이 들어오는 오후, 창밖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며 멈춘 듯한 시간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행크는 엉엉 울었다. 아버지는 같이 울어주었다. 행크는 그의 눈물에 더 슬퍼졌다. 그러나 더 큰 슬픔은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앓게 된지 5일이 넘어가던 때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행크는 한결 몸이 가볍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기분 또한 익숙했다. 죽지 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우스워서 조금 웃기까지 했다. 할머니를 불렀지만 그녀는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행크는 몸을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소파에 앉아서 창문 너머의 빛을 보았다. 똑딱똑딱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행크는 자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향했다.
오후 3시가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정오의 태양과 달리 빛은 좀 더 기울어져 있었고 주홍빛을 띄고 있었다. 마을은 조용했다. 행크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숲으로 들어섰다. 늘 걷곤 했었던 곳을 걸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 이곳저곳에 발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행크는 발자국을 피해서 걸었다. 그리고 끝에 도달했다. 진정한 끝은 아니었다. 행크와 아버지가 정해놓은 끝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냥꾼들이나 사냥을 연습하는 아이들이 깊은 숲으로 들어가곤 했지만 그것은 무장을 한 경우였다. 당시 행크에게 사냥총은커녕 칼 한 자루도 없었다. 그러나 행크는 들어섰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잎사귀들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오고 땅에 빛덩어리가 뭉쳐 있었다. 행크는 그것들을 밟으면서 걸어갔다. 그러나 종국엔 후회했다.
어둠이 덮쳐 오는게 느껴졌다.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행크의 마을은 분지 지역이었고 해가 빨리 지곤 했다. 행크가 그걸 모를리 없었다. 5시만 되어도 어둑해지는 곳이었다. 행크는 어깨를 스치는 숲의 한기에 숨을 죽였다. 그리고 돌아왔던 길로 다시 가려 걸음을 돌렸다. 어른들이 나무에 칠해놓은 노란 페인트를 따라서 걸었다. 페인트가 노을에 붉게 빛났다. 행크는 조급한 마음이 들어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행크는 자신이 더욱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어둠이 발뒤꿈치를 물었다. 행크는 잔뜩 겁을 먹었다. 언제나 정해진 경로, 정해진 위치, 정해진 자리에 있었다. 행크는 ‘분명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이러다가 짐승을 만나게 된다면 어찌해야하나 싶었다. 길을 잃었을 땐 가만히 서서 구조를 기다리거나 사람의 발자국을 찾거나 혹은 나무 나이테로 방향을 짐작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 앞에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노을의 빛이 쑤욱 산 너머로 스며들었다. 저 멀리 금성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행크는 망연하게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총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곳에서 산새들이 푸다닥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행크는 그쪽을 향해 뛰었다. 이곳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을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을 찾기만 한다면 마을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행크는 숨이 차도록 뛰었다. 넝쿨에 살갗이 살짝 찢어졌지만 그것을 신경 쓸 세가 없었다. 다시 총성이 울리길 바랐으나 총성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이쯤에서 울렸던 것 같은데. 행크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몸을 숙였다. 앞에 있는 머루나무만 지나가면 무언가 있을 것 같았다. 행크는 나무를 헤치고 쑤욱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에 귀를 울리는 총소리와 뺨을 스치는 따끔함을 느꼈다. 이후 느껴진 따끔함은 화끈함으로 바뀌었다. 행크는 경직한 체였다. 뺨을 만질 생각도 못했다.
‘......맥코이?’
알렉스는 행크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행크는 놀란 알렉스의 얼굴보단 검은 구멍의 존재가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 구멍 속에 자신의 머리가 우겨넣어질 것이란 생각. 그 두려움은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느껴졌다. 행크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얼음처럼 서있자 알렉스는 사냥총을 어깨에 메고 행크에게 다가왔다. 행크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자빠졌다. 요란스럽게 자빠지는 작은 몸에 알렉스는 빠르게 팔뚝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찢어져있는 뺨을 보았다. 총알이 얼굴에 박히는 것 보단 낫겠지만 상처가 꽤 커보였다. 알렉스는 30초전에 자신이 마스터의 아들을 죽일 뻔 했다는 사실에 숨을 몰아 마셨다. 문제의 아드님께서 얼떨떨한 얼굴로 있는 동안 알렉스는 가죽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행크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굳어있는 행크의 손을 들어 올려 스스로 지혈 할 수 있도록 했다.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멀쩡한 사람 살인자로 만들지 말고.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행크의 손을 이끌었다. 그는 행크를 작은 짐짝처럼 대했다.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그는 행크를 질질 끌었다. 커다란 손에 잡힌 얇은 손목이 타는 것 같았다. 알렉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가끔씩 지나갈 때. 행크가 알렉스를 본 것은 이게 전부였다. 말을 섞는 것은커녕 그의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을의 어린 이방인이었다.
행크는 알렉스에게 터덜터덜 끌려가면서 그의 한쪽 손에 들려있는 토끼 세 마리를 보았다. 자신과 동갑이라 들었었다. 이 마을의 소년들 대부분은 사냥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냥감을 놓치기 일쑤였다. 특히 행크 나이대의 소년들은 더욱 그랬다. 소년들은 14살 때 처음 사냥을 배웠다. 행크와 사냥의 관계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알렉스는 행크를 작은 오두막으로 인도했다. 오두막의 테라스에서 한 여자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끼익끼익. 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인사했지만 그녀는 알렉스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눈만 깜빡였다. 알렉스는 그녀의 하얀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행크는 얼굴을 부여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서랍을 뒤지던 알렉스가 약과 거즈를 꺼내왔다. 그는 어깨에 걸린 사냥총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손길에 행크는 얼굴에서 손을 때어냈다. 그러자 주룩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행크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액체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알렉스는 상처를 자세히 보더니 혀를 차곤 행크의 뺨에 무언가를 뿌렸다. 살이 에이는 화끈함에 행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꼬리에 눈물이 걸렸다. 알렉스는 빠른 손길로 거즈를 오려 붙였다. 그리곤 행크의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많이 찢어졌어. 바늘로 꿰매야할 거야. 내 상처라면 내가 꿰맸겠지만, 미래의 마스터 얼굴에 함부로 바늘을 가져다댔다간 개죽음 당할 수도 있으니까.’
알렉스는 행크의 손을 이끌었다. 좁은 테라스의 그녀는 아직도 흔들의자에 몸을 싣고 있었다. 알렉스는 금방 다녀오겠다며 다시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여전히 그녀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알렉스는 망설임 없이 척척 앞으로 걸어갔다. 행크는 자신보다 머리하나 큰 소년의 금발머리를 보았다. 지저분하게 엉켜있었지만 어둠속에서도 반짝반짝 예쁘게 빛났다. 하지만 소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일부분을 보면서도 행크는 마음이 복잡해져왔다. 기분 전환 좀 해보겠다며 나왔지만 정작 뺨이 찢어진 채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은 정말 구재불능이었다. 행크는 알고 있었다. 이건 알렉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사냥구역에 있었다. 만약 행크가 알렉스였더라도 사냥터에서 움직이는 미확인물체를 쏴버렸을 것이다. 그나마 총알에 머리통에 날아가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행크가 조금이라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면 총알은 뺨을 스치는게 아니라 얼굴을 뚫어버렸을 테니까. 그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미안해.’ ‘뭐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사과야?’
알렉스가 뒤를 흘깃 보았다. 그러나 이내에 다시 시선을 돌리고 걷는데 집중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라니?’ ‘네 아버지가 길길이 화를 내면서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고 날 때리는 것 말이야. 정작 네가 사냥터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한 것인데 말이야.’ ‘우리 아버진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버진 자애롭고 동시에 이성적인 분이셔. 오히려 날 혼내실 분이지 널 혼내진 않으실 거야.’ ‘그런 믿음 참 좋네.’
보이진 않았지만 행크는 예측할 수 있었다. 알렉스가 말하는 것들에는 진심이 없었다. 행크는 ‘정말 좋은 분이야.’하고 중얼 거렸지만 알렉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행크는 이 침묵이 어려웠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아이들은 알렉스에 대하여 떠들곤 했다. 남매가 병을 몰고 왔다는 것 외에도, 그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씩 달아서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은 애들도 좋아했다. 얼굴도 목소리도 잘 모르는 소년과 그의 누이가 이방인 중 이방인이 되는 것은 매우 쉬웠다.
하지만 예외도 있지. 행크는 화끈 거리는 뺨을 잡고 터벅터벅 걷다가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마을 아이들 간에 큰 싸움이 있었다. 알렉스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 싸움에 정작 본인은 없었다. 대신 베니와 제이크가 그 안에 있었다.
제이크는 마을에서 빵 만들기를 담당으로 하고 있는 크리스틴 여사의 아들이었고 베니는 포도주를 만드는 헬렌 여사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 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손에서 길러지고 있었다. 두 어머니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녀들의 아들들은 의형제를 맺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았다. 언제부터였냐 하면 행크가 그들이 친하다는 것을 자각하기 전부터 친했다.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기도 했지만 하루가 지나가면 화해했다. 한명이 혼나고 있으면 나머지 한명이 달려와 ‘이유는 모르겠지만 혼내지 마세요! 얘가 좀 멍청하긴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잖아요!’하고 두둔했다. 그들은 말썽꾸러기들이었지만 그 점은 딱 사내아이들 같았기 때문에 더욱 사랑 받는 이유가 되었다. 비록 헬렌의 포도주 항아리를 깨부쉈을 때 밤낮으로 엉엉 울며 혼나긴 했지만 말이다.
보통 한 사람 중 하나가 싸움을 일으키면 나머지 한 사람이 지원군이 되어 돕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마을의 골목대장 뚱보 프레디가 입을 놀렸다. 그는 알렉스가 사실 도시에서 왔는데 그의 누나가 창녀였으며 지나친 성폭행에 정신이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알렉스 또한 그 누나의 그 동생이니 정신이상자가 틀림없으며 언젠간 마을 사람들에게 큰 해가 될 거라고 했다.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베니가 나섰다. 그는 알렉스는 그렇게 이상한 놈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그냥 인간일 뿐이라고 했다. 이에 제이크가 두둔했다.
뚱보 프레디는 알렉스를 욕하는데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이내에 제이크와 베니를 이방인과 친하게 지내는 반역자들이라고 욕했다. 제이크는 의외의 차분한 얼굴을 보며주면서 ‘정신 차려, 뚱돼지야. 네가 욕해야할건 알렉스와 우리가 아니야. 죄 없는 사람을 욕하는 기름진 네 디룩디룩한 정신머리지.’ 하고 말했다. 그 다음은 주먹질이었다. 뚱보 프레디가 제이크를 때렸고 베니는 우아악 소리를 지르며 프레디를 덮쳤다.
이후에 어른들이 왜 싸웠느냐고 물었을 때 프레디는 ‘쟤들이 이방인에 대해서 두둔했어요!’하고 고자질 했다. 어른들은 조금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행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른들 또한 이방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아이들에게 ‘사람을 이유 없이 욕하거나 싫어해선 안 된다.’고 말하던 ‘어른들’이었다. 어른들은 부러 상황을 피하면서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단다.’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넙죽 넘어갈 베니와 제이크가 아니었다.
‘왜요? 뚱보-가 아니라 프레디가 알렉스를 욕했잖아요. 얘는 알렉스의 누나가 창녀래요.’ ‘그녀는 창녀가 아니에요. 더불어 알렉스도 미친놈이 아니고요. 그 애는 그냥 다른 곳에서 왔을 뿐이에요. 알렉스는 착한 애라고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고요. 원수도 사랑하는데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잖아요?’
어른들은 말이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마스터는 ‘그래 너희 말이 맞다.’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그래도 친구를 때리지 말거라. 베니, 그리고 제이크 너희들이 형제처럼 지내는 것처럼 프레디도 너희들과 형제나 마찬가지야. 가족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단다.’하고 말했다. 제이크와 베니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못해 쌍코피가 수레바퀴 자국처럼 나있는 프레디에게 악수를 청했다.
사건은 그게 끝이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베니와 제이크는 각각 그들의 엄마들에게 알렉스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혼났다. 그 꾸지람에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엄마에게 쳐 맞았다며 마을 광장에서 광고 아닌 광고를 했다. (광장은 원형이었고 행크의 집은 광장의 남쪽,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그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었다.) 행크는 그날 밤에 또다시 제이크와 베니가 헬렌과 크리스틴의 회초리를 피해 다녔을 것을 확신했다. 안 봐도 훤했다.
터덜터덜 끌려가던 행크는 알렉스에게 불숙 베니와 제이크를 아냐고 물었다. 알렉스는 가만히 침묵했다. 행크는 자신의 말이 아주 맛있게 씹혔구나 생각했지만 이내에 알렉스가 대답했다. ‘이 마을에서 그나마 말짱한 애들이지’ 행크는 그 말이 자신을 욕하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살펴 넘기고서 ‘친해?’하고 물었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질문들을 하는 건지, 이럴 필요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침묵은 싫었다. 언제나 침묵은 행크의 콤플렉스를 되돌아보게끔 만들었다.
‘친한건 몰라. 그 애들이 나랑 친해서 득 될 건 없으니까. 그냥 좋은 애들이야.’ ‘너에 대한 소문을 아는 거야?’ ‘모르는게 멍청이지.’
눈 감고 다녀도 그 시선을 알거야. 알렉스는 그렇게 말했다. 행크는 자신이 소문의 주범이 아닌데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잡다하지도 그렇다고 잡다하지 않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을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알렉스는 작은 나무문을 열었다. 산책로의 시작이었다. 그 입구에는 놀랍게도 마스터가 있었다. 마스터뿐 아니었다. 자신을 찾고 있었음이 역력한 마을 장정들도 서 있었다. 행크는 이렇게 금방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덜 속상하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마스터는 처음 행크의 얼굴에 있는 새빨간 거즈를 보았고, 두 번째로 알렉스의 무미건조한 얼굴을 보았다.
행크의 손목을 잡고 있는 알렉스의 손이 축축해졌다. 알렉스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마스터가 행크의 앞에 섰다. 그리고 거즈를 살짝 때어냈다. 왈칵 피가 흘렀다. 그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급히 행크의 할머니를 불렀다. 행크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는 도중에 ‘아버지! 이건 제 잘못이에요!’하고 외쳤다. 그러나 마스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행크가 할머니에게 이끌려 두발자국 물러난 순간, 커다란 마찰음이 들렸다. 마치 거인의 박수소리 같았다. 그러나 그것보단 잔인했고 또 그것보단 무서웠다. 행크는 한 번도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잘못을 했을 땐 혼내시는 분이었지만 뺨을 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행크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건 마을 사람들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숨죽이고 알렉스와 마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휘청거리던 중심을 겨우 잡았다. 그의 뺨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입안이 터진 듯 빨간 무언가가 입가에 맺혀 있었다. 마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손을 휘두르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렉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건 알렉스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스는 가만히 앞의 마스터를 올려다보았다.
‘가도 좋습니까?’ ‘가도 좋다.’
알렉스는 행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도망가듯 뛰어가지도 않았다. 행크는 숲속으로 사라지는 알렉스의 등을 보았다. 이상했다. 그에게 끌려 마을로 올 때엔, 그렇게 넓고 든든해보이던 등이 그 순간에는 너무 작고 초라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어둠으로 스며들었을 때 행크는 어쩌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길지 않았다. 여전히 무서운 얼굴을 한 아버지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행크는 알렉스처럼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알렉스에게 손찌검을 했을 때와 같은 얼굴로 자신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들었을 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귀 아픈 소리도, 아픔도 없었다. 대신 어깨를 껴안으며 어서 치료하러 가자는 아버지가 있었다. 단지 눈만 깜빡였을 뿐인데도 그는 행크가 알고 있는 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지만 행크의 떨리는 심장은 멈추질 못했다.
행크는 알렉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결코 말하지 못했다. 분명 자신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알렉스와 마을 간에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행크는 이걸 파헤치지 못했다. 솔직히 파헤치기 싫었다. 행크는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상냥한 아버지와 평화로운 마을이 좋았다. 마을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게 마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더라도 행크에게 마을은 소중했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해왔다. 알렉스가 뺨 맞던 모습과 그의 등이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자꾸 생각났다.
다음 이야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행크는 제이크와 베니를 찾아갔다. 행크의 예상대로 그들은 마을 중심부에 크게 심겨져있는 떡갈나무 아래에 있었다. 투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소리가 작아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행크는 그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날의 일은 마을 사람들에겐 좋은 이야기 거리였다. 뺨이 찢어져 나타난 마스터의 아들과 그 곁에 있는 이방인 아이. 행크는 자신이 사냥터에 준비 없이 침범한 것이며 그 아이에겐 정당 방위였다고 설명했지만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행크는 궁금했다. 비록 사람이란게 선척적인 악(惡)함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건 좀 이상했다. 알렉스는 모든 면에서 예외적이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물러서있던 행크가 한 발 자국 앞설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행크의 기척을 느낀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행크를 훑어보았다. 베니가 제이크의 손길을 이끌며 ‘가자.’하고 작게 말했다. 행크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알렉스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미 가보지 않았냐는 베니의 비꼼에 행크는 그들이 알렉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음을 눈치 챘다.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솔직히 말했다. 행크는 망설이지 않고 알렉스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이크와 베니는 그 말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이크가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면서 행크를 바라보았다.
‘하기야, 네가 나쁜건 아니니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알렉스의 집을 가는 동안 행크는 조금 불안해졌다. 제이크과 베니가 자신을 골탕 먹일 속셈으로 숲에 버려두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착실하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행크는 걱정을 멈추기로 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때에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몇 십 분을 걷듯 뛰듯 바삐 향했다.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알렉스의 집이었다. 행크는 작게 탄성했다. 아름다운 그녀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꼭 몇 백 년 동안 그 자리에 붙어 있는 사람 같았다. 제이크가 그녀를 향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지만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민망할 상황이련만 제이크는 아무렇지 않아했다. 이 상황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베니는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주변을 뒤지더니 ‘없네. 어디 나갔나봐.’하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계단에 걸터앉아 알렉스를 기다렸다. 끼익끼익 흔들 의자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올랐다.
‘알렉스는 좋은 놈이야.’
베니가 노란 꽃잎을 뜯으면서 말했다. 그 아래에 꽃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제이크는 ‘베니’하고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난 너보다 알렉스 같은 애들이 마스터의 후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베니, 그만해.’ ‘왜?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렇긴 해도 얘한테 말한다고 해결 될 일도 아니잖아.’
베니보단 제이크의 말이 더 비수가 되어 다가왔다. 행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타인에게 듣는 이야기는 다르다. 행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행크를 바라보다가 베니는 콧방귀를 뀌곤 다른 꽃을 꺾었다.
‘꽃 꺾지 마. 누나가 싫어해.’
알렉스가 사냥총을 어깨에 메고서 나타났다. 오소리 한 마리가 손에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오동통하고 빛깔이 좋은 놈이었다. 제이크와 베니는 후다닥 달려 나가 알렉스가 잡아온 사냥감을 이리저리 들춰보았다. 오소리는 매우 빨라서 잡기 어려운 동물이었다. 전문 사냥꾼들도 잡기 힘들어하는 오소리를 당당하게 잡아온 알렉스를 보며 둘은 감탄했다. ‘역시 사냥은 네가 최고다. 이정도면 성인식도 문제없겠네.’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알렉스는 그런 건 껌이라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베니가 재수 없다며 알렉스의 발을 툭툭 찼다. 그냥 소년들 같았다. 정말 그냥 소년들 같았다. 베니와 제이크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뛰어노는 개구쟁이인 것처럼 알렉스도 그나 이때 애들처럼 보였다. 그날과 달랐다.
이내에 알렉스가 행크를 보았다. 말하진 않지만 뭐 하러 여기 왔냐는 표정이었다. 행크는 가느다란 손으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알렉스에게 다갔다.
‘미안해.’ 그 이상도 없었고 그 이하도 없었다. 쌈박하기 그지없는 사과였다. 알렉스는 행크의 눈을 마주보았다. 뭐라고 할까나. 사과 따위 필요 없으니 마을로 꺼지라고 할까. 아니면 알겠으니 다신 여기 찾아오지 말라고 할까. 어쩌면 아버지가 이 애한테 그랬던 것처럼 뺨을 후려갈길지도 몰랐다. 행크의 머릿속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알렉스가 한 행동은 행크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행크의 머리 위로 손을 턱하니 올렸다. ‘너 키 좀 커야겠다.’ 행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스는 행크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여긴 오지 마. 네 자상한 아버지가 싫어할테니까.’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크에게 행크를 마을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제이크가 행크의 팔꿈치를 툭 치며 가자고 했다. 그러나 쉽사리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알렉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행크에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비록 알렉스는 대수롭잖게 여긴 듯 했지만 야박하게 굴진 않았다. 모든게 잘 해결 되었다. 더 이상 행크는 밤마다 자신의 잘못과 당시의 사건을 떠올리며 괴로워 할 필요가 없었다.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나 행크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여기 있고 싶어.’
행크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냈다.
‘아니,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지.’ ‘제이크와 베니도 여기 있잖아.’ ‘우리가 너랑 같냐?’ ‘다를건 뭐야?’
잠시 말문이 막힌 베니는 ‘....키가 다르지. 덩치도 다르고. 먹는 양도 다르려나. 하여튼 안 돼.’하고 말했다. 어이없는 말에 행크가 반박하려 했지만 알렉스가 다시 한 번 흐름을 끊어 놓았다. ‘돌아가.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행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거절감에 수치가 밀려왔지만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진 않았다. 행크는 뒤돌았다. 터덜터덜 가는 길에 제이크가 따라오는게 느껴졌다. 행크는 길을 외웠으니 함께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뭐 그렇다면야. 제이크가 그렇게 말하며 멈춰 섰다. 행크는 뒤돌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뜻일까. 그리고 자신은 왜 그곳에 있고 싶었을까. 쉽사리 잠들 줄 알았던 밤이었으나 또 다른 고민들이 자리를 메웠다.
그리고 행크는 어떻게 했느냐면 또다시 알렉스의 집을 찾아갔다. 하루가 아니라 이틀, 이틀이 아니라 나흘, 나흘이 아니라 한참동안 그랬다. 행크는 계속해서 알렉스를 찾아갔다. 이 이야기는 조금 길고 지루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건 행크를 닮은 이야기였다. 지루하면서 어이없고 서러우면서도 강단 있고 그러면서도 곧고 단정한 이야기였다.
제이크와 베니는 행크의 행로를 탐탁치 않아했다. 그 두 사람은 알렉스를 포함한 세 명의 세계를 유지하길 바랐다. 그것이 행크로 인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실 행크는 그것들을 깨드릴 생각까진 없었다. 마을 단짝으로 유명한 두 사람이 어쩌다가 알렉스와 친해지게 된 건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할 만큼 의지하게 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파헤칠 생각까진 없었다. 행크는 자신이 ‘집이 아닌 어딘가’ 혹은 ‘마을이 아닌 어딘가’에 머물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딱히 알렉스의 집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행크는 그곳을 선택했다.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행크는 여전히 베니와 제이크에게서 따돌림 당하곤 했지만 알렉스는 행크를 내치지 않았다. 행크의 자리가 생겨났다. 그들은 새로운 퍼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행크가 편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곁에 있어도 이상한 존재는 아니게 된 것이었다.
고집스럽게 그곳을 찾았지만 그들이 사냥을 간다고 할 때면 행크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알렉스의 누나 곁에서 책을 읽었다. 한번은 소리 내어 책을 읽었는데 알렉스는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시끄럽나?’ 행크가 물었고 알렉스는 ‘아니.’하고 대답했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던 날, 행크는 책을 들고 왔고 그녀를 위한 것처럼 글을 읽었다. 말썽꾼들이 알렉스를 찾지 않았기에 더 고요한 날이었다. 알렉스는 행크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냈다. 소독약과 거즈를 제외하고 알렉스에게 처음 받은 무언가였다. 다음 날에 행크는 사냥을 따라나섰다. 몇 번 아버지를 따라 가긴 했지만 또래들끼리 사냥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알렉스는 사냥감을 잡았다. 행크는 속을 게워냈다. 제이크와 베니는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행크를 타박했다. 알렉스만이 물을 건네주었다.
겨울이 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바람이 세게 물었고 한번은 떡갈나무가 기울었다. 사람들은 겨울이 두렵다며 입을 모았다. 그리고 첫눈이 내렸다. 분지의 눈은 다른 곳보다 훨씬 희귀했고 그것은 결국 진정한 겨울이 찾아왔단 뜻이었다. 그리고 성인식의 시작이었다. 행크를 포함한 15살들은 16살을 맞이했다. 겨우 일 년이고, 겨우 1살이었지만 그들이 감당해야하는 것은 ‘겨우’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엔 ‘성인식’이 있었다. 행크는 성인식에 관하여 각 나라마다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풍습대로 이행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형식이야 어쨌거나 의미가 같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행크는 성인식에 참여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정한 16살이 아니었다. 행크는 사냥을 하기엔 너무 약골이었다.
마을의 성인식은 사냥 그 자체였다. 16살을 맞이한 소년들은 위험한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곳은 마을의 장정들 또한 자주 출입하지 않는 곳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곳에 범이 살고 있다고 했다. 듣기로 아주 추웠던 겨울에 범 한 마리가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헤친 적이 있다고 했다. 몇 번이나 총을 갈겨도 범은 쓰러지지 않았고 결국 사람들은 범을 놓치고 말았다고 했다. 그 숲에는 이런 범들이 있다고 했다. 소년들은 그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목표물은 토끼 한 마리, 족제비 한 마리, 그리고 다 같이 잡아야 하는 수사슴 한 마리. 따뜻한 봄이라면 쉽사리 사냥감을 찾겠지만 겨울바람이 부는 숲은 고요했고 사냥감을 찾기 어려웠다. 그만큼 지혜와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목표물을 채우면 성인식을 통과하는 것이었고 실패하면 다음해에 또다시 도전해야했다.
재단일을 하는 폴 할아버지는 자신이 19살에 성인식을 통과했고 그게 가장 늦은 나이대였다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 그는 웃었지만 행크는 도무지 웃을 수 없었다. 행크는 성인식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자신의 또래들은 모두 어른이 되겠다며 사냥총을 붙드는데 자신은 도전하지도 못하고 내년으로 식을 미뤄야했다. 아버지는 행크가 그해에 도전하는 것을 금하셨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도전했다가는 개죽음뿐이라며 냉정하게 말하셨다. 행크는 그에 반항하지 못했다. 죽은 동물에 사체에 구역질 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행크는 한편에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알렉스였다. 그는 또래들이 다 같이 잡아도 어렵다는 사슴을 혼자서 잡는 천성 사냥꾼이었다. 날렵했고 지혜로웠다. 그라면 가장 먼저 사냥감을 채우고 사슴을 잡을 것이었다. 또래들의 도움 없이 말이다. 그건 비단 행크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제이크와 베니도 자신들의 사냥총을 챙기며 행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니까 베니랑 나는 알렉스만 따라가면 된다니까. 알렉스가 다 해줄거야. 사냥감도 잡아주고 밥도 해주고 집도 지어주고 애도 낳아줄거야. 그렇지, 자기야?’
알렉스는 제이크의 엉덩이를 뻥 차버렸다. 그렇게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지만 성인식을 장난으로 대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사냥총 혹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냥총을 챙겼다. 그것들을 닦고 빛냈다. 몇 번이나 총구를 확인하고 총알을 세었다. 두툼하게 입을 옷과 장갑, 가죽신발을 챙겼다. 그들은 푸른 새벽을 기다렸다. 기대와 두려움으로 충만했다. 행크는 (자신의 부끄러운 성인식과 관계없이) 이 모든게 서글프게 야만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행크 또한 새벽을 기다렸다.
숲의 입구로 사람들이 모였다. 행크도 정신없이 껴입고 그곳으로 나섰다. 소년들이 어색하게 사냥총을 매고서 모여 있었고 그 반대편에 부모들과 구경꾼들이 있었다. 행크는 구경꾼들 사이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이내 제이크, 베니 그리고 알렉스를 찾아냈다. 사냥총을 붙들고 있는 알렉스는 또래들과 달리 매우 익숙해 보였다. 행크는 손을 흔들었지만 앞에 있는 장신의 사내 덕에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이내에 마스터가 소년들 앞에 섰다.
‘사냥의 의미는 강함입니다. 여러분은 강해져야합니다. 하지만 그저 강하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죠. 어째서 강해져야 하는가. 그게 바로 성인식의 의미입니다.’
행크는 기시감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알렉스를 보았다. 앞의 남자 때문에 알렉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마스터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년들이 한명씩 문으로 들어갈 때마다 악수를 청했다. ‘행운을 비네.’ 그의 인사에 소년들은 어깨를 폈다. 알렉스가 그의 앞에 섰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알렉스는 그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마주 잡았다.
‘행운을 비네.’
소년들이 모두 숲속으로 사라졌고 구경꾼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인들 몇몇이 남았다. 그 틈에 제이크와 베니의 어머니도 보였다. 그들은 자식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의 안위와 미래를 위해 신을 찾았다. 행크는 머직한 곳에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세사람의 안위를 지켜 주세요. 그들이 성인식을 잘 치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비록 서로에게 의미는 다르겠지만 행크에겐 이미 세 사람 모두가 중요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이라는게 우스웠다. 하지만 기도를 멈추진 않았다.
어머니들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몇몇은 떠났고 몇몇은 계속 남았다. 그들은 기도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행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후에 눈발이 잠시 스쳤으나 길진 않았다. 여인들의 어깨로 내리 앉는 눈을 보며 행크는 잠시 감상에 잠겨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둠은 긴 시간 속에서 더듬더듬 땅들을 짚어가며 찾아왔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이내 마스터와 몇몇의 사내들이 다시 문을 찾았다. 소년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자녀들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지나친 기다림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냥 도중에 사고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긴 시간동안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장정들이 집에서 사냥총을 챙겨오고 마스터의 손길 또한 바빠졌다. 여인들은 초조함에 입을 막고 있었다. 그때였다. 남자들이 입구 쪽으로 들어가려 할 때 누군가가 비죽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았다.
*
옛날 이스라엘에 랍비와 그의 제자가 있었다. 제자는 존경하는 랍비에게 물었다.
‘경건한 자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도록 강권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말에 스승이 말했다.
‘그들은 항시 착한 일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지 않느냐’
제자는 평온하게 대답하는 랍비에게 대들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러나 악한 자가 사람들에게 악한 짓을 하도록 유혹하는 쪽이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또 사람들에게 악한 짓을 하도록 꾀어들여 패거리를 늘리고자 합니다. 우리들보다 훨씬 열정적입니다.’
제자는 화를 내듯이 대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랍비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나쁜짓을 하는 자들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한다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 자신의 곁에 서게하지.’
랍비는 제자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걷는 자들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
마을에 도적들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식량을 빼앗아가고 창고에 불을 질렀다. 포로를 잡아갔다. 출몰은 이어졌다. 그들은 예고하지 않고 마을로 덤벼들었다. 장로들은 마을이 생긴 이례로 이런 적 없었다며 근심어린 얼굴을 했다. 마을은 도적들에 대하여 대책 의원회를 세우고 방어를 견고히 했지만 그들은 미꾸라지처럼 마을을 침범했다. 긴 시간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가 마을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 다시 쳐들어 왔다. 이날도 그런 날들 중에 하나였다.
행크는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처음 말 우는 소리가 들렸을 때 그는 맥킨시씨의 말이 또다시 난리를 치는거라 생각했다. 그말은 말썽이 정말 많았다. 그러나 두 번째로 말 우는 소리가 들렸을 때 행크는 급히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익히 아는 도적떼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도적들에게 ‘늑대들’이라는 명칭을 지어줬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갈색의 헝겊 주머니를 머리에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헝겊의 주둥이 부분은 무언가를 넣었는지 툭 튀어나와보였는데 그것이 마치 늑대 주둥이처럼 보였다.
마을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행크는 근처에 있던 집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나무 캐비닛에서 사냥총을 꺼내들었다. 총알을 확인하고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적들 중 누군가 총을 쏘았다.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행크의 귀는 멍했다. 눈에 열이 오르는게 느껴졌지만 행크는 참아내며 뒷마당 쪽으로 뛰어다녔다. 도적들은 총 9명이었다. 그들은 흑마와 황마를 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위협적으로 보이는 사냥총을 들고 있었다. 행크는 집과 집 가운데의 골목에 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코프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도적 중 하나가 누군가의 머리를 쥐어 잡은 채로 무리로 모여들었다. 행크는 그를 알아보았다. 미리암 워커였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지만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둥글게 튀어나온 그녀의 배가 위태롭게만 보였다. 말에서 내린 다른 도적이 그녀의 얼굴을 내려쳤다. 휘청거릴 정도의 위협이었지만 머리칼을 휘어 잡혀 있기 때문에 엎어지진 않았다. 행크는 초조해졌다. 마스터와 마을 어른들은 사냥을 나갔다. 그들이 사냥 간 곳은 숲 너머였고 이곳에서 꽤나 먼 곳이었다. 마을에는 몇몇의 남자와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뿐이었다. 행크는 총구 정확히 겨눴다. 미리암의 손을 묶고 있는 사내의 등을 조준했다. 저 사람 하나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다음은... 나중에 생각하자. 행크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총알이 튀어나왔다. 행크 쪽에서 12시 방향이었다. 총알은 미리암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도적의 말에 퍼부어졌다. 말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풀썩 쓰러졌다. 행크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그의 총알은 남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총알이 그의 어깨에 박혔다. 그가 고통스러워하며 말처럼 쓰러졌다. 행크는 혀를 차며 외쳤다.
‘미리암! 뛰어!!!’
그녀는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행크는 급한 마음에 튀어나가 그녀의 목덜미를 끌어오고 싶었지만 자신이 저곳에 갔다가는 둘 다 개죽음을 당할게 뻔했다. 미리암은 어찌할 바 모르며 뒷걸음질 쳤다. 다시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다. 빗겨나간 것 같았지만 다른 방향이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쓰러진 말에 깔려있던 사내가 겨우 빠져나왔다.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져있던 사내는 도망치려던 그녀의 목을 휘어잡고 총신으로 머리를 쳤다. 미리암이 풀썩 쓰러지려던 것을 다른 이가 잡아 말 등에 엎어놨다. 사방으로 총이 튀었다. 도적들도 망설이지 않고 총을 쐈다. 행크가 숨어 있던 벽면에 총알이 박혔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다시 총구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말에 올라타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총을 들고 그들을 향해 쏘았으나 말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식량 한보따리와 미리암을 훔치고 사라졌다. 행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은 아수라장이었다.
“9명이었어요. 사망자는 하나고 미리암 워커가 실종 당했습니다. 2번 식량창고와 4번 외양간에 화재가 있었어요. 아마 2번 창고의 식량들을 쓸어 담고 불을 지른 것 같습니다.” “사망자는 누구지?” “블랙씨요.” “데이빗 말하는건가? 이런 망할 새끼들. 몸도 못 가누는 노인네를 죽이다니.” “...다른 사항은?” “상대측의 말 한 마리가 죽었고 한명이 어깨 측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주니어가 쐈네.”
맥킨시씨가 말했다. 그 말에 마스터가 고갤 돌려 행크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보다 높아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하고 소곤거렸다. 행크는 웃을만한 상황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작게 미소 짓고 말았다. 회관 밖에선 크리스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하여 오열하고 있었다. 마을 여자들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수많은 말을 던졌지만, 행크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떠한 말들도 그녀를 위로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마을 장로들은 이 사안에 대하여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적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침략했다.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약탈은 심해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평화롭게 끝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임을 알았다. 마을에서 첫 희생자가 나왔을 때 마스터는 상대방을 사살해도 좋다는 명을 내렸다. 각각의 가정마다 평소보다 많은 총과 총알을 소지했다. 마을 여자들도 총 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마을에는 여자들이 많았고 특히나 임산부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젊은 남자들은 손에 꼽게 적었다.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사냥을 나가지 않을 순 없었다. 마을은 사냥을 위주로 돌아가는 동네였다. 사냥감을 잡아야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가죽을 팔 수 있었다. 전보다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사냥을 나갔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육식 짐승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인원을 더 줄일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장로들은 이렇고 저런 방안들을 내놓기도 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릴 지르기도 했다. 행크는 그 가운데 가만히 서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밖에서 흐느끼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행크는 이 와중에도 소담하게 들어오는 빛을 보았다. 창가로 떨어지는 빛들이 옹기종기 모여 먼지들을 비췄다. 우주의 별들처럼 반짝였다. 그 세계만큼은 평화로워 보여 행크는 먼지 틈으로 몸을 던지고 싶어졌다.
“마을의 경계선을 좀 더 견고히 해야 합니다. 벽돌을 쌓고 그 위에 유리를 깨 진흙으로 고정합시다. 그들의 말이 뛰어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성인키의 두배 되는 철조망도 뛰어넘는 놈들이요. 벽돌을 세우고 그 위에 유리를 박아 넣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소? 게다가 그런 공사를 하려면 인력들이 많이 필요한데 마을에는 임산부와 대여섯살 아이들이 대부분이란 말이요. 대체 그렇게 긴 공사를 누가 한단 말이요?”
행크가 어렸을 적 보았던 숲의 정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을은 숲과 마을의 경계선에 날이 선 철조망들을 세우고 쉽게 오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곳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사냥꾼들과 장로들뿐이었다. 행크가 안전하다며 거닐었던 숲속은 이미 풀들과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나 사람이 걸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이 행크를 안타깝게 했다. 안 그래도 작게 느껴졌던 마을은 좀 더 작게 느껴졌고 마을 밖의 세상은 지옥처럼 느껴졌다. 지옥의 한가운데 떠있는 섬과 같은 마을이 아름답게만 여겨질리 만무했다. 이곳은 위태로웠다. 행크가 마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과거의 추억뿐이었다. 위험한 것은 깊은 숲속 짐승들뿐이었고 슬픈 것은 자신의 약한 몸뚱이였던 그 시절. 자신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거지같은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크는 그때가 그리웠다. 꿈속에서까지 나오는 기억들이었다.
행크의 꿈속에는 자신을 떼어놓고 노는 아이들이 나왔다. 얄밉긴 했지만 웃고 떠들며 노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이제 그 아이들의 절반은 죽거나 실종되어 버렸다. 혹은 가정을 이루고 임신했지만 과부가 되어버렸다. 꿈속에서 그들은 이런 것들을 상상하지 못한 채로 뛰어 놀았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즐겁게 뛰어 놀았고 눈이 오면 눈을 뭉쳐 굴리며 놀았다. 축제와도 같았다. 꿈에서 깨고 나면 찢어질 듯한 슬픔이 행크를 내리 눌렀다. 가끔 꿈에선 베니와 제이크, 그리고 알렉스가 나왔다. 알렉스의 모습은 자주 볼 수 없었다. 꿈속에서 조차 그는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행크가 성인식을 치루던 날 새벽에 알렉스가 꿈속에서 나왔다. 그는 햇빛이 스며드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그의 누나와 앉아 있었는데 불쑥 튀어나온 행크를 보고는 다시 총을 닦기 시작했다. 행크는 그의 곁에 앉아서 그가 총을 닦는 것을 보았다. 알렉스는 16살 때의 모습 그대로였고 행크는 알렉스보다 훨씬 커진 그때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꿈이란 것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누이는 여전히 끼익끼익 소리를 내면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행크는 손을 더듬어 책을 찾았다. 그리고 책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곁에 있었다. 행크는 책을 읽었다.
‘너는 살기 위해서 그리고 물고기를 많이 팔아 음식을 사려고 물고기를 죽이는 건 아니야. 너는 긍지를 살리기 위해서 물고기를 죽였어. 왜냐고? 너는 어부니까. 너는 물고기가 살아 있을 적에도 사랑했고, 그 후에도 그것들을 사랑했지. 네가 그것들을 사랑한다면 죽이는게 죄가 되지 않아. 아니면 죄보다 더 한 것일까.’
그것은 사냥꾼 알렉스를 위한 구절이었다. 그랬었다. 행크는 떠올렸다. 자신은 알렉스를 위해 그런 구절을 읽었었다. 어째서인지 왜 그를 위해 그 구절을 읽어야 했는지도 모르면서 마냥 그가 그것을 듣기를 원했다. 행크는 이제는 묵직하게 변해 버린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똑같은 부분을 읽었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지도 변형해서 읽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알렉스가 총 닦는 것을 멈추고 그것에 대한 의미를 물어보기를, 아니면 영원히 물어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읽었다. 그 또한 이유를 몰랐다. 그저 읽을 뿐이었다. 흔들의자가 끼익 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알렉스가 총을 닦는 것도, 행크가 똑같은 구절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상태로 행크의 꿈이 끝났다.
행크는 그날 성인식을 통과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성인으로의 보고를 받았다. 이는 즉 그가 차기 마스터가 되기에 자격을 갖췄다는 것을 상징했다. 비록 다른 아이들보다 늦은 성인식이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것은 마스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행크가 이토록 훌륭히 성인식을 끝낼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행크는 잘 해냈다. 증거로 그의 앞에 수사슴 한 마리가 있었다. 위엄 넘치는 수사슴의 뿔이 행크의 왕관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누구도 따질 수 없었다. 그것은 행크의 것이었다.
알렉스가 사라진 뒤로 행크는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어리고 연약했던 소년이 아니었다. 신체적인 변화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촉매제처럼 작용하긴 했지만 그건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의 생각이 커지고 세계가 커졌다. 그에게 마을은 중요했지만 마을 너머도 중요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이 여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수긍했다. 마을 밖은 행크의 ‘도착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 그것들의 행크의 변화를 막은 것은 아니었다. 행크는 더 이상 사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천성이 무언가를 죽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총을 닦는 것보단 안경을 닦는 것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단 서재에 꽂혀있는 책을 당기는 것이 훨씬 익숙했으나 사냥의 필요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사냥감을 보고 속을 게워내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행크는 잘 감당해냈다. 말했듯이 그것은 정말 의외의 변화였다. 그러나 행크를 변화하게한 원인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행크와 사람들을 향해 다가온 단 한명의 사람은 벤 솔리먼였다. 그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모두들 그를 보고 경악했지만 그들보다 몇 배로 경악한 두 사람이 있었다. 그의 모친 크리스틴과 제이크의 모친 헬레나였다. 크리스틴이 아들을 껴안았고 덜덜 떠는 손으로 입을 감춘 헬레나가 ‘베...베니, 우리 제이크는? 제이크는 어디있니?’하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겨울 나뭇가지 같이 힘없고 갈라져 있었다. 행크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벼랑위에 서 있는 기분으로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베니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울었다. 모친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소년의 긴긴 울음이 마을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사냥터로 돌입을 멈췄던 남자들이 마스터의 손짓을 따라 사냥터로 향했다.
베니는 숨이 멈출 것 같이 울었다. 메말라 눈물이 나오지 않자 그는 끊임없이 꺽꺽 거렸다. 행크는 그가 슬픔에 병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레나는 소년을 붙들고서 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제발 말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도 베니의 입이 열릴 줄 모르자 종국엔 눈물을 흘리며 화를 냈다. 크리스틴이 그러지 말라고 그녀를 밀쳤다.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 질렀다. 마을 사람들이 격양된 두 여자를 멈추기 위해 애썼다. 자녀들을 사냥터에 보낸 부모들 중에는 실신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대로 주저앉아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행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베니의 곁에 있었다. 크리스틴과 헬레나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갈 때쯤 베니가 작게 속삭였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베니의 중얼거림이 길어졌고 그의 작은 목소리가 이내 주변을 고요하게 했다. 그의 사과가 어떤 상황을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모두는 그것을 알아들었다. 헬레나는 주저앉았다. 제이크의 이름을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은 다시 큰 울음을 터뜨리는 베니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수없이 그의 눈물을 닦아내고 아들의 이마와 머리에 키스를 퍼부었다. 엄마가 너를 지켜줄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아들만은 엄마가 지켜줄게. 크리스틴의 하얀 앞치마가 피로 젖어가는 모습을 행크는 망연히 보았다. 알렉스는? 작은 중얼거림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을을 떠났던 사내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들 중에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먼 곳에서 계속되는 총성을 들었고 짐승같은 비명소리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없어진 아이는 제이크와 알렉스뿐이었다. 모두가 있었지만 그 둘만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제 이 모든 사건을 말 할 수 있는 것은 베니 뿐이었다. 마스터가 베니를 붙잡고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베니는 여전히 훌쩍였고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었다.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그에게 마스터는 강경하게 물었다. 그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짐승이 달려 들었어요. 느...늑대 같았는데 그것보단 훨씬 컸어요. 한 번도 본적 없었던 종류였어요. 알렉스가 막으려고 총을 쐈지만 머리에 총을 맞아도 죽지 않았어요. 피를 흘리며 달려들었어요. 짐승이 제이크를 물어 머리를 뜯어냈고 그 다음은 계속해서 총을 쏘는 알렉스를 향해 달려들었어요. 아...아..알렉...알렉스는 계속해서 머리를 쏘고, 쏘는 총알마다 명중했지만 짐승을 쓰러지지 않았어요. 그 다음은 몰라요. 알렉스가 뛰라고 재촉했고 저는 총을 계속 쏘는 알렉스를 뒤로 도망쳤어요. 알렉스는 총을 쏘며 저를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에....순간에.....’
총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요.
“주니어.” “네.” “네 의견은 어떻지?” “‘늑대들’은 가장자리 담을 넘어오는게 아닙니다. 사흘 전에 여자들이 철조망에 촘촘히 방울을 달아놨어요. 오늘 놈들이 왔을 때 방울 소리는 없었습니다.” “그깟 방울소리가 얼마나 잘 들리겠나?” “오늘은 자체적으로 습기가 많은 날이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쉽게 놓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북쪽 경계선에 있던 프레디는 이 소릴 들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이 소릴 듣지 못했어요. 그들은 담을 넘어온게 아닙니다. 그들만의 장소가 있는게 틀림없습니다.”
“나치들처럼 땅이라도 파고 들어온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말을 끌고 올 정도로 큰 구멍이어야겠군.”
장로들이 웃었다. 그러나 행크는 웃지 않았다. 그는 침착한 얼굴을 하고는 창밖을 보았다. 아직까지도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방관하고 있다간 그 구멍에 시체들이 쌓일 겁니다.”
행크의 말에 장로들이 웃음소리를 뚝 그쳤다. 마스터는 가만한 얼굴로 이 상황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행크는 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총을 쏠 때는 끓어오르던 것들이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가끔 이런 순간이 있었다. 갑자기 온 몸 피가 흘러나가는 기분. 이건 마치 어린 시절의 모습이 갑옷처럼 입혀지는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회피하고 그것을 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시 약해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있었다. 그것은 즐겁지 않았다. 행크가 시선을 내리깔고 가만히 있자 마스터는 그의 등을 툭 쳤다. 그리곤 ‘잠시 나가서 쉬어. 곧 부를게.’하고 말했다. 인자한 얼굴이었다. 젊은 시절 때보단 훨씬 주름지고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아름다움은 퇴색하지 않았다. 행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섰다. 해가 반짝이고 있었지만 너머에는 먹구름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행크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그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
충격적인 성인식이 있은 이후로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해갔다. 그들은 베니에게 전해들은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조금 더 위협적인 사냥총을 구비했고 아이들에게 이른 훈련을 시켰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가득해 보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끼친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내에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고 있었다. 행크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최소한 마찬가지인 것처럼 행동했다. 행크는 가끔 베니를 붙잡고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알렉스와 도망갈 때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 그가 뭐라고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어? 그의 시체를 확인한게 아니잖아.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제이크가 정말 목이 뜯기는걸 본거야? 그가 살아 있을 가망성은 없는거야? 하지만 행크는 그 수많은 질문 중에 단 하나의 질문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지나치는 베니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베니는 초췌한 얼굴로 행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런 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인식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도 전통이지만 더 이상 아이들을 희생되게 할 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장로들과 마스터는 강경했다. 성인식 전통을 없앨 순 없다. 이것은 우리 마을을 지키게 했던 하나의 원천이다. 대신 방식을 바꾸겠다. 마스터는 아이들이 사냥을 나갈 때 그 수에 맞는 성인들도 함께 나가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9개월 전의 성인식에는 행크도 어른이란 꼬리표를 달고 따라나섰다. 또래보다 뒤늦게 성인식을 치른 탓에 행크가 아우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일취월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어느 정도 행크의 능력(특히 지적인 부분에서의)을 인정했기에 그를 얕보는 아이들은 없었다. 문제는 행크가 아니었다. 문제는 벤 솔리먼이었다. 베니는 어른의 자격으로 아이들을 돕기 위해 따라나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때까지 성인식을 치루지 못했다. 그의 나이 21세였고 그나이때까지 성인식을 치루지 못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5년이란 시간동안 베니는 많이 달라져 버렸다. 제이크와 알렉스를 잃고 난 뒤의 그는 우울했고 사람들과 섞이지 않았다. 왕년의 장난꾸러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울했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고 그가 치료될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시간은 멈춰져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우울한 가면을 쓰고 돌아다녔다. 더 이상 마을에서 그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모친 크리스틴은 그런 아들을 계속해서 싸고돌았다. 그녀가 맹세했던 것처럼 그녀는 철저하게 베니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성인식을 거절해왔고 그의 모친 또한 성인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쨌거나 마을의 성인남자가 되기 위해선 성인식을 거쳐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는 상대방을 태울 듯이 쏘아보면서 ‘우리 아들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없앨거에요. 그애를 성인식에 나가게 하려거든 차라리 날 죽여요!’하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고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에 갑자기 베니가 성인식을 치루겠다며 집밖으로 나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성인식을 치르려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에 사냥총을 매고서 서 있었다. 어둡게 그늘진 얼굴로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행크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베니는 행크를 힐끔 보고선 저만치 가버렸다. 차라리 땅꼬마 행크라며 자신을 놀리던 베니가 훨씬 나았다. 크리스틴은 성인식을 나가겠다는 아들의 변화해 급구 말리며 나가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사는 자체라고, 엄마 곁에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며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녀는 베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베니는 자신이 제이크와 알렉스의 성인식 또한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행크는 베니와 남자아이 셋이 있는 팀에 묶였다. 그들이 토끼를 잡을때 조언을 주고 주변을 살폈다. 5년 동안 총을 잡지 않은 사람 치고 베니는 쉽게 사냥감을 잡아냈다. 그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행크는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랬기에 시선을 덜 주었고 곁눈질로만 그를 살폈다. 아이들 중 하나가 수사슴을 발견했다. 행크는 무리들을 끌고서 조심스럽게 사슴을 향해 걸어갔다.
행크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지목하며 조언해주었다. 그리고 베니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없었다. 행크는 그가 걸어왔던 숲을 뒤지며 베니를 찾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베니는 없었다. 사라져버렸다. 마치 그때처럼 말이다. 그날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찾기 위해 위험한 숲의 밤을 감수했다. 그러나 알렉스와 제이크의 시신을 찾지 못했던 것처럼 베니에 대한 것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괴물이 그때 놓쳤던 베니를 잡기 위해 다시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친구들을 버리고 왔단 자체를 견디지 못한 베니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크리스틴 앞에서 할 수 없었다. 마을은 슬픔 투성이었다. 행크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마을이 베니를 잃은 그날에 행크는 알렉스의 오두막을 찾았다. 사실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행크는 마을의 규칙을 어겨가면서 몇 번이나 그의 오두막을 찾았다. 이미 오두막은 비어있었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알렉스의 누이는 없었다. 알렉스가 죽음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 마스터는 그녀를 위한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거처는 마을 안에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들을 위해 마을 여자들이 음식과 청소를 하도록 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을 꺼림찍해 했지만 마스터의 명령이기에 마지못해 그녀를 도왔다. 가끔 행크는 그녀를 만나러 작은 집에 갔다. 그녀에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녀는 알렉스가 죽은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여전히 무표정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준 흔들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치 시체와도 같았다. 행크는 시간나는 틈틈이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행크의 잦은 출입에 사람들은 그녀와 차기 마스터 사이에 염문설을 만들어 냈다. 행크는 오해라고 했지만 그것을 쉽사리 믿는 사람은 없었고 종국에 행크의 할머니는 다신 그 집에 들락날락 거릴 생각은 말라며 화를 냈다. 마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곧 긍정이었기에 행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집을 찾지 못하게 된 것만큼 행크가 오두막을 찾는 시간을 잦아졌다. 행크는 그곳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괜히 청소를 하기도 했다. 워낙 낡은 집이여서 청소를 한다고 깨끗해지진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람 사는 티를 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내에 귀찮아져서 내버려 두고 책을 읽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면 위안이 찾아왔다.
그러나 베니가 사라진 그날에는 큰소리로 작은 소리로 어떤 소리로 책을 읽어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베니의 어두운 얼굴과 그의 새까만 총구가 어른거렸다. 자기 탓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행크는 그를 잃어버린 것에 관해 자신의 잘못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았지만 마음은 잘 조절되지 않았다. 행크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곳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반쯤 가려진 하늘을 보았다.
“주니어, 비가 오는 구나.” “그러네요.”
사실 행크는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젖을 떼지 못한 어린 동물 같았고 바람에도 툭 쓸려갈 듯 연약해 보였다. 그러했기에 그는 타인들에게 쉬워 보이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외면적인 부분일뿐 그 누구도 행크 맥코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사춘기를 지나가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다른 청년들과 다른 소년기를 보냈고 그 소년기가 작용하는 것도 달랐다. 행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생각하는 것이 꺼려졌다. 오로지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의 얼굴과 할머니, 그리고 알렉스의 얼굴뿐이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렴.” “아까전의 상황에 대한 대답이세요?”
마스터는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아들에게는 더욱 더 자비로웠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론 더욱 그랬다. 행크는 한동안 여자의 손길 없이 자라야했다. 마스터는 그것에 신경 쓰는 것 같았지만 행크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프다는 것 외에는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행크는 조금 놀랐다. 그 자체에 놀라기보단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그에 대해 혈육을 넘어선 마스터 자체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놀랐다.
그는 식탁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행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창문 근처에 올려놓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가 시들어 있었다. 주변은 비내리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행크는 아버지와 자신이 죽어있는 집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알렉스의 오두막도 이렇진 않았다. 정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이었지만 그 집은 살아 있었다.
“네가 11살땐가 할게다. 아마”
사실 행크에게 무엇인가를 깨닫는 순간은 ‘유레카!’를 외치며 목욕탕을 뛰어넘는 통쾌함은 아니었다. 차라리 휙하니 던진 돌에 예쁘게 날아가던 나비 한 마리가 깔려 죽는 것과 비슷했다. 돌을 던진 것도, 파르르 나비가 날개를 떨며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모두 행크의 책임이었다.
행크가 알렉스에 대하여 무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적었다. 매우 한정 적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다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그들의 세계는 좁았다. 행크는 그에 대하여 정리하고자하면 가슴이 턱하니 막혀왔고 뇌기능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그의 죽음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그를 훨씬 우상처럼 만들었다. 행크의 기억 속에 알렉스는 종류만 다를 뿐이지 거의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배덕하다고 느껴본적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나 행크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깨달았다. 그녀가 죽었을 때 뼛속 깊이 슬픔이 스며들었으나 알렉스가 사라졌을 때완 달랐다. 그녀의 죽음이 그녀를 신으로 만들지 못했다. 행크는 울면서 웃었다. 자신의 깨달음은 이따위구나,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도 슬플 수 있는 법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밤이었는데, 아니 이것보단 더 많이 내렸어. 빗줄기와 빗줄기 사이가 없다고 생각될 만큼 내렸었지. 그때 네가 굉장히 아팠단다. 정말 많이 아팠었어. 먹은 것도 게워내고 토하다가 코피도 많이 흘렸지. 네가 당황해서 우는데 나랑 네 할머니는 어찌할 줄을 몰라서 괜찮다고 아플 땐 코피도 흘리고 그러는 거라고 달랬었다. 새벽 즈음엔 도무지 열이 내려가질 않았단다. 넌 계속 울었고 닥터 그린우드는 이렇게 열이 올라가단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되는건 둘째 치고 목숨이 위험하다며 날 겁줬었어. 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너를 안고 집밖으로 나갔단다. 그리고 계속해서 비를 맞았어.”
몇 시간동안이나 그랬단다. 그는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며 행크를 바라보았다. 어둑한 곳에서도 그는 빛을 잃지 않았다. 육안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
“난 이 마을의 대표이기 전에 너의 부모야. 자식이 옳은 길로 가길,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뤄내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마음 아니겠니.”
행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작게 끄덕였다. 마음이 따듯해졌으나 그뿐이었다. 행크의 표정이 쉽사리 좋아지지 않자 그는 ‘그래. 그렇겠지.’하고 중얼 거렸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빗소리를 들었다. 침묵 가운데 소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도움이었다. 행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총이라도 미리 닦아놓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마스터는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행크는 어렸을 때부터 이 풍경에 익숙했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행크의 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심각한 얼굴로 일어섰다. 문밖에는 잔뜩 젖어있는 세라가 있었다.
“...그...그녀가 없어졌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그녀가 파랗게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행크는 망설이지 않고 장총을 들었다. 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침착하게 ‘세라, 종을 쳐라.’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세라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늑대들 짓일까요?” “단정하긴 이르다. 그쪽에서도 부상을 입었으니 바로 침입하진 않을 거야. 저번처럼 단순하게 길을 잃은 것일 수도 있어.”
그는 외투를 둘러 입었다. 비 내리는 숲은 춥고 어두웠다. 행크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자신의 외투를 낚아채면서 밖으로 나섰다. 뎅뎅 커다란 종소리가 빗줄기를 타고 터져나갔다. 곧 이어 단단하게 장비를 마친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마스터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상으로 올랐다. 후드를 둘러쓴 탓에 그림자 져진 그의 얼굴이 어둡게 빛났다. 행크는 그 아래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스 서머즈가 사라졌다. 저번처럼 10명씩 조를 짜서 사방의 형태로 흩어지기로 한다.” “저번처럼 길을 잃은 겁니까?”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제 딴엔 속삭이듯이 ‘그 미친년 때문에 비오는 날까지 고생이군.’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속삭임을 못들을 마스터가 아니었다. 그는 절도 있게 단상에서 내려와 소리의 주범 앞에 섰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40명 넘는 장정들이 서 있는데도 비오는 소리만이 툭툭 울렸다.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죄....죄송합니다.’ 작은 소리에 마스터는 이번에도 아무런 말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단상으로 올라섰다. 5분 동안의 침묵에 사람들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하여 마스터가 얼마나 민감하고 중요하게 반응하는지 깨달았다. 그 사실 하나로 총을 잡은 장정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점차 깊은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숲의 밤은 짐승들의 세계다. 게다가 이렇게 비가 올 경우엔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 가녀린 여자의 경우는 정도가 나빴다.
마스터는 길을 지시했다. 행크는 북쪽으로 향했다. 그곳의 알렉스의 오두막이 있던 곳이었다. 행크는 그녀가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지 않았다. 아마 잊어버렸을 것이다. 행크는 사람들에게 그곳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가꿔놓은 자리가 있었다. 책들, 컵, 말려놓은 차 이파리. 이것들을 들켰다가는 또다시 소문에 시달려야 할 것이었다. 행크는 사람들을 뒤따라가는 척 하다가 옆으로 살짝 빠졌다. 그리고 알렉스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행크는 그녀가 이젠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는 사라지곤 했다. 그녀를 보살피던 세라는 오늘처럼 기겁하며 달려오곤 했고 마스터는 장정들을 소집했다. 그때 그녀를 찾은 것은 행크였다. 그녀는 진흙이 묻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서 흔들의자를 타고 있었다. 흔들의자의 갈라진 틈으로 모가 나있었고 그 모에 그녀의 손가락이 찔렸다. 아플 만도 할 텐데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끼익끼익 흔들리고 있었다. 잔뜩 젖어 있는 머리카락도 덜덜 떨리고 있는 하얀 몸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행크는 그녀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 의자에 있었다. 이 모습을 마주했을 때 행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설명 할 순 없지만 그랬다. 그래서 그녀의 몸이 흔들리는 동안에 그 자리에 서서 실컷 울었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다.
행크는 자신이 말 할 수 없는 것들, 느낄 수 없는 것들, 알지 못하는 것들로 이뤄진 그 자체의 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알렉스에 대해 느끼는 것들과 알렉스의 누나에 대하여 느끼는 것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제이크와 베니에 대한 것들조차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무언가는 느끼고 있었지만 나사 하나가 결핍된 듯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 나에게 알렉스는 소중했어. 나도 모르는 세에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답을 내려도 체한 것 마냥 속이 더부룩했다. 죽어버린 사람을 놓고서 대체 어쩌란 말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타버린 잿더미를 놓고서 그 위를 구르며 괴로워하기도 하란 건가. 행크는 답답하게 끓어오르는 속을 타인처럼 대하며 괴로워했지만 여전히 얻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행크는 포기했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정답이란 여러 순간을 두고서 찾아오는 법이었다.
정신없이 걷자 오두막이 나왔다. 손질하지 않은 덕택에 풀들이 무성히 자랐다. 조만간 제초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행크는 작은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덩그러니 낡은 의자가 있었지만 그녀는 없었다. 행크의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제야 손을 적히는 빗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내부에 있을지도 몰랐다. 낡아빠진 계단을 오르려는 때였다. 무언가 행크의 머리를 쳤다. 고통은 길지 않았다. 까무룩해지는 시야를 느꼈다.
*
“이제부터 하는 얘기를 잘 들어요”하고 조단은 말했다. 아주 서둘러서 이야기해야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땀도 몹시 흘러내렸지만, 이것만은, 말해서 그녀가 잘 알아듣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봐, 토끼. 당신은 가야 해. 하지만 난 당신의 곁을 떠나는 건 아냐, 둘 중 하나가 있는한 둘 다 거기 있는 것이 되는거야. 알았어?” “싫어요. 난 당신 곁에 남겠어요” “안돼. 토끼.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나 혼자서만 해야하는 거야. 당신이 있으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야. 당신이 떠나주면, 그러면 나도 가는거야. 왜그런지 모르겠나?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거야.” “당신 곁에 남겠어요. 난.” “안된다니까. 토끼. 내 말을 잘 들어봐. 이것만큼은 남과 같이 할 수 없는거야.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 혼자 하지 않으면 안돼. 하지만 당신이 가 준다면 나도 당신과 함께 가는 것이 되는거야. 나도 간다는 건 그렇기 때문이야. 응, 이젠 가겠지? 당신은 착하고 친절하니까.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당신은 가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