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코이에게는 비밀 상자가 있었다. 아마 커크가 듣는다면 계집애같이 그게 뭐냐고 비웃을 테지만 내용물을 보게 된다면 마냥 웃지만은 못할 것이었다. 그의 개인실 침대 밑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네모난 철제 상자는 어렸을 적 그의 엄마가 바느질 통으로 사용했던 쿠키박스였다. 머리를 땋은 여자애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젠 그림이 벗겨져 예쁘다는 느낌이 들기엔 어딘지 거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맥코이는 그 상자를 좋아했고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은 더욱 좋아했다. 그가 어렸을 적에 모았던 야구선수 카드와 첫 실습을 나갔을 때 사용했던 명찰이 있었다.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잊어버린 물건도 있는데, 이혼한 아내에게 받았던 지포 라이터가 없어졌다. 분명 이 상자 안에 넣어놨는데 사라진 것이다. 솔직히 끝이 그렇게 나버린 만큼 좋은 추억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었다. 끝퉁이가 녹슬어 버려 더 안타까운 라이터였는데 몇 년 전에 사라졌다. 미련 두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뭐 그런 것들이었다. 보고 있으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물건들. 가지고 있단 자체가 위로가 되는 무언가들. 그런데 그것들 중에서 정말 이상한 한 가지가 있었다. 아까 말했듯이 아마 커크가 이걸 본다면 그 대범한 눈썹을 찡그리며 ‘너 뭐하는 미친놈이야?’하고 말할게 뻔했다. 하지만 맥코이는 맹세컨대 절대로 커크에게 이 상자를 들키지 않을 것이고 또 들키게 된다면 상자를 끌어안고 블랙홀로 뛰어들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가 그렇게 결심했다면 들킬 일은 없는 것이었다.
02.
“내가 다시 너한테 계절 운운하며 투덜거리면 인간이 아니다.”
“에이, 왜 그래. 이런 것도 괜찮잖아.”
“괜찮기는 개뿔. 넌 네가 탈 차 기름도 확인안하고 뭐했냐!?”
“당연히 있는 줄 알았지. 거참, 괜찮아 괜찮아. 다 왔어. 안 멀어.”
“한번만 더 괜찮다는 말 써봐. 합법적으로 죽여줄 테니까.”
맥코이는 들고 있는 감색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커크는 그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맥코이는 뻐근해져오는 어깨를 두들기고 싶었지만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짐들 때문에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하늘은 창백하도록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게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아이오와의 하늘이 맑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런 하늘은 또 처음이었다. 끝없이 펼쳐있는 도로와 그 옆에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 메마른 풀들이 전부였다. 그래 이게 아이오와지. 별거 있겠어. 맥코이는 혀를 찼다. 어쩌겠는가 자신의 입이 방정이었다. 커크 앞에서 계절을 운운하면서 ‘우주에는 겨울도 여름도 가을도 봄도 없잖아. 여기서 수박을 먹겠어, 아니면 추수를 하겠어. 나같이 풍부한 감성을 가진 사람에게 우주는 견딜 수 없는 곳이란 말이야. 제기랄 커크. 듣고 있는거야?’ 이렇게 주절거리는게 아니었다. 당시 커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흘려듣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긴 항로 끝에 지구로 돌아왔다. 수많은 별들을 밟았지만 지구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땅을 밟으며 맥코이는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누가 부를 세에 후다닥 집으로 튀었다. 며칠간은 휴가니 실컷 지구 공기를 느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정확히 일요일 새벽이었다. 맥코이는 같이 술 마시자는 스코티의 애교어린 전화를 물리치며 잠이 들었다. 월요일 저녁까지 잠들겠다는 의욕이 물들어 있는 수면이었다. 그리고 한 번의 초인종이 그 수면을 박살냈다. 이 새벽에 어떤 미친놈이야. 맥코이는 짜증어린 얼굴로 스크린을 띄었다. 그리고 문밖에서 둥글둥글한 눈으로 대기하고 있는 캡틴을 보았다. 그래 캡틴. 그 캡틴이 말이지.
‘이게 전부 널 위한거야! 짜잔! 밖에 주차되어 있는 차는 지구력 2011년의 모델 람보르기니 되시겠습니다! 놀라지 말라고. 지구력 2011년이야. 지.구.려...ㄱ..... 방금 방범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이 미친놈아, 차 자랑을 새벽 3시. 그것도 남의 집 앞에서 해? 당장 집에 가서 잠이나 쳐 자. 난 한달 동안 네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고!’
‘문 좀 얼어보라니까 그러네.’
여전히 커크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맥코이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그러나 어차피 자신은 커크를 내쫒지 못할게 뻔했고 그에게 이끌려갈게 뻔했다. 그럴 바엔 어서 그놈의 차 구경 10분 만에 해주고 돌려 보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크린을 신경질적으로 누르며 문을 열었다. 벌컥 열리는 문틈으로 상큼한 얼굴이 보였다. 마치 10년의 잠은 몰아 잔듯한 상큼함이었다. 그에 비하여 맥코이는 매우 수척한 얼굴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잠뿐이었다. 맥코이는 물을 따라 마시며 외투를 입었다. 10분이다. 딱 10분. 10분만 보는 거다. 망할 람보르기니. 하지만 외투를 챙겨 입고 나가려는 본즈를 보며 커크는 되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가는거야?’ 그의 물음에 본즈는 귀찮다는 듯 ‘네 놈 똥차 보러’하고 말했다. 커크는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모양인지 하하 웃으며 그의 팔뚝을 잡았다.
‘그게 아니야. 설마 내가 새벽 3시부터 차 자랑을 하러 여기까지 오겠어? 그게 아니라-’
“그래, 그게 아니었지. 차라리 차 구경하는게 훨씬 나았어.”
“뭐라고 중얼거리는거야. 힘내. 이제 10분만 더 걸으면 나온다고.”
맥코이는 싫다고 했다. 절대 싫다고 했다. 거길 가는바에 다시 우주로 나가는게 낫다고 했다. 처음 커크는 ‘그래도’, ‘널 위해서인데!’, ‘다시 한 번 생각해봐,’하며 그를 설득시키려고 했지만 맥코이가 전혀 듣고 있지 않자 어깨를 추욱 내리며 ‘...알았어.’하고 뒤돌았다. 꼬리가 달렸더라면 아마 땅을 질질 끌며 다녔을 것이다. 맥코이는 터벅터벅 좁은 보폭으로 사라지는 커크의 등을 보며 이마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이건 정말 싫었다. 그런데 저것도 정말 싫었다. 묘한 데자뷰가 떠오를 법도 하것마는 맥코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알아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똑같은 방법에 몇 번이고 걸려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엔 이렇게 될게 뻔하니까.
‘좋아! 좋다고!’ 항복하듯이 두 손을 번쩍 든 맥코이를 향해 커크는 주인 만난 유기견처럼 펄쩍 뛰더니 ‘좋았어! 빨리 짐 챙겨! 빨리빨리! 한시가 급하단 말이야!’하고 소리 쳤다. 방금 전에 본 그 꼬리는 역시 환영이었군. 맥코이는 이렇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괴로워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딜 가냐는 커크에게 ‘씻어야 될 것 아냐!’하고 말하며 문을 쾅 닫았다. 문밖의 커크는 뭐가 그리 좋은지 후다닥 거리고 있었다. 맥코이가 면도까지 마치고 나왔을 때 커크가 가방 두 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맥코이가 함선으로 향할 때 마다 사용하는 캐리어였고 하나는 익히 알고 있는 감색 가방이었다. ‘...너 나 일 시키려고?’ 맥코이가 어이없단 얼굴로 바라보자 커크는 가면서 말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빨리 옷을 갈아입으라며 재촉했다.
그래도 커크가 자랑하는 그놈의 람보르기니는 꽤 볼만했고 재미있었다. 자동기능이 없이 오로지 수동으로 운전해야 한다는게 피곤했지만 커크는 그게 제일 마음에 드는 듯 했다. 어쨌거나 이 친구는 옛날 것들을 좋아했다. 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라탔을 때, 그리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맥코이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었고 어차피 포기할거 마음 편히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하지만 목적지를 들었을 때는 당장 문을 열라며 소리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오와였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할 거리를 차로, 그것도 기름을 넣어가며 수동으로 운전해야하는 차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목성에서 지구까지 10분도 안 걸리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오와까지 밤낮을 3-4일 동안 달려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건 아니라고 말하는 맥코이를 보며 커크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철컥 하고 문을 잠갔다.
지금이야 미국 횡단이 집앞을 드나드는 일만큼 쉬운 일이지만, 과거에는 이런 자동차로 어떻게 하나 싶었다. 스포츠카답게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클래식카는 클래식 카였다. 그런 차를 몰면서 커크는 인정사정없이 험하게 몰았고 결국 안전을 추구하는 닥터 맥코이에게 밀려 보조석으로 쫓겨났다.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더니 나만 운전하고 있잖아. 기름을 부어넣으며 맥코이는 질린 얼굴을 했다. 그래도 커크에게 양심의 한 조각이 있던 모양인지 그는 3일째 되던 날에 오늘은 하루 종일 자기가 운전하겠다며 맥코이를 밀어냈다. 맥코이는 딱히 거절하지 않고서 눈을 붙였다. 불편하긴 했지만 못잘 정도는 아니었다. 커크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어둔 새벽에 휩쓸려가는 배경들을 보며 맥코이는 이런 일들도 있군.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너무나도 쉽게 끝나버렸다.
“다 왔어! 맙소사! 진짜 있잖아?!”
“.....지붕은 있네.”
“무슨 감상이 그래?! 내가 자라온 집이라니까!”
기름이 떨어졌다. 차가 멈춰 섰을 때 설풋 잠에서 깬 맥코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커크는 기름이 떨어졌다며 넣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맥코이는 잠에 빠졌는데, 이내에 자신의 몸을 흔드는 커크에 의해 정신을 뚜렷이. 아주 뚜렷하게 차릴 수밖에 없었다. ‘기름이 떨어졌어. 완전히 없어.’ 진짜 망할 노릇이었다. 클래식 카인만큼 기름을 구하는게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여태동안은 커크가 챙겨 온 것들이었다. 커크는 충분히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고 변명했다. 맥코이는 그를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했다. 차는 포기해야했다. 커크는 깨끗하게 차를 포기했다. 그렇게 자랑을 하드니만 미련하나 없이 포기하는 모습에 맥코이는 할 말을 잊었다. 그 뒤로부터 두 사람은 그 많은 짐들을 끌고 계속 걸었다. 걷고 걷고 걸었다. 히치하이킹을 하자고 했지만 지나가는 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다행이 아이오와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지만 그 다행인 만큼 불행스럽게 이 땅은 사람이 적은 곳이었다.
몇 시간쯤 걷자 해가 떠오르고 새벽이 멀어져갔다. 하늘은 구름하나 없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태양은 미친 듯이 내리쬐고 있었다. 몇 시간을 걷다가 쉬고, 또다시 걷고, 또다시 쉬고. 그 동안에도 차한대, 아니 오토바이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이상하다. 경찰하나 없네. 내가 과속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딱지 떼더니만’ ‘그게 언제 이야긴데?’ ‘12살 때?’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먼 곳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걷고 걸으니 커크가 기억하는 밀밭이 나왔고 (솔직히 맥코이가 보기에 그 밀밭이 그 밀밭이었는데 커크는 이 밀밭 저 밀밭 모두 다 다르다며 설명을 했다. 함장이 아니라 농부가 되었어야 했다.)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커크의 말대로 10분 정도 걸으니 붉은 지붕의 집이 나왔다. 낡고 초라했다. 오로지 그 집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커크는 신이 나서 그 집으로 뛰어갔다. 맥코이는 한숨을 쉬며 잠시 멈춰 섰다. 하늘은 파랬고 그 아래에는 밀밭, 자신과 커크, 그리고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내왔다던 낡은 집 한 채가 있었다.
그저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부리고 종국에는 포기해버리는. 이것들을 무한 반복하는 인형같이 머물렀지만 사실 맥코이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오와라는 동그란 키워드에 슥슥 화살표가 날아갔다. ‘커크와 자신이 처음 만난 곳’ ‘파이크 함장’ ‘그가 얻어터졌다는 술집’ ‘이혼한 아내’ ‘위자료’ 쭉쭉쭉 이어가던 키워드들 사이들 속에서 유영하던 화살표가 멈춰섰다.
커크의 어린 시절.
먼 곳에서 커크가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맥코이는 다시 가방을 들며 집을 향해 달려가는 커크를 보았다. 굉장히 훈훈한 장면이었다. 그렇게 느껴야했다. 하지만 맥코이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그를 불렀다. 맥코이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03.
‘이전에 여기서 얻어 살았어. 나는 그 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 그대로의 사람은 아니었어. 성격을 또 얼마나 개 같은지. 한번은 내가 그 사람 차를 몰래 훔쳐 몰고 나갔다가 죽도록 맞았다니까. 진짜 아팠어.’
‘그러게, 너도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애를 때리는건 좀 그렇지. 차는 돌려줬고?’
‘아니, 절벽에 떨쳐 먹었어.’
‘.......’
‘어쨌거나 어린 시절은 여기서 보냈어. 여기 지붕에 올라가면 폭풍이 밀려오는게 보여. 그게 엄청나. 저기 하늘과 땅이 맞닿는 끝에서 시커먼 것들이 밀려오는데. 와 장난 아니야. 그게 좋아서 폭풍이 올 때마다 지붕에 올라가곤 했는데 넋놓고 보다가 휩쓸려 갈뻔 했지. 다행히 살긴 했지만. 폭풍이 올 때면 아래 땅굴로 들어가. 그 인간은 그 땅굴을 방공호라고 불렀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들어가서 대기 탈만한 곳이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집집마다 이런 땅굴을 가지고 있었어. 이런게 없으면 허리케인 같은 것에 휩쓸려 가니까 말이야. 지금은 있을지 모르겠네.’
이런 대화라거나
‘어! 본즈! 이리 와봐!’
‘무슨 일인데.’
‘여기 봐봐!’
‘이게 뭔데’
‘콤바인! 콤바인 몰라? 추수할 때 사용하는 차 말이야! 야 잘됐다. 이동차량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이거 타고서 마을로 들어가면 되겠네.’
‘미쳤어? 이거 시속 40키로도 안될 것 같은데? 게다가 기름은 있어?’
‘이건 기름 없어도 되는거야. 아주 옛날건 아닌데. 아마 그 양반이 또 개조한 거겠지. 클래식카 정말 좋아했거든. 옛날 차량들 모아서 최신식으로 개조시키는게 취미였어. 됐네 됐어. 빨리 짐 챙겨.’
이런 대화라거나.
짐을 풀어 놓을 시간도 없이 커크는 맥코이를 재촉했다. 그러나 맥코이는 꿋꿋하게 커크의 말을 씹으며 짐정리를 끝냈고 그 말도 안 되는 콤바인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살다살다 이런걸 타는군. 이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맥코이가 넋 놓고 말하자 커크가 웃었다. 커크는 시내의 반대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생각보다 콤바인은 빠른 편이었고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진 않았었다. 시대가 거꾸로 흐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갈색 피부의 아이들이 콤바인이 신기한지 둥글게 모여서 차를 구경했고 커크는 으쌰 내리고선 터벅터벅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기 고양들 마냥 동그란 눈으로 올망올망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맥코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커크가 커다란 테이블을 하나 끌고 왔다. 그리고 조악한 스탠드와 플라스틱 의자도 가지고 왔다. 척척 정리를 하더니만 테이블에 맥코이의 감색 가죽 가방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 맥코이가 커크를 보았다. 커크는 천연덕스럽게 맥코이의 가방을 뒤지며 이것저것 내놓기 시작했다.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말하려는 순간 아이를 안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맥코이는 욕을 삼키며 청진기를 귀에 꽂아 넣었다.
04.
‘나중에 나이 들면 은퇴하고 곳곳을 돌면서 어려운 사람들 무료진료해주고 그러는거지. 꼬맹이들 어디 아픈가 봐주고 감기 걸렸으면 약도 주고.’
‘임산부도 봐주고요?’
‘섬세한 손길로?’
‘뭐 그런거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1년전 앞으로 뭘 할거냐는 이야기 속에서 넌지시 던진 말이었다. 솔직히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라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최소한 맥코이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05.
스팍과 맥코이가 잘 알고 있듯이 커크는 어떤 부분에선 참으로 가벼운 사람이었다. 뭘 생각하는지 읽기 쉬웠고 돌발적이긴 했지만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행동하곤 했다. 물론 그 빠른 행동력에 다들 혀를 내두르며 가쁘게 쫒아가긴 했지만 누구처럼 어둔 꿍꿍이를 가지고 있거나 난해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커크의 모든 면에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 대해선 그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의 과거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함께한 시간은 상관없었다. 그 문은 닫혀 있었고 커크는 사람들에게 문의 틈 자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마법의 벽 같았다. 존재하지 않는 문이니 아예 보지도 말아라. 이런 식이었다. 그 문에 대해서 궁금증을 품고 있는 이들은 있었지만 억지로 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건 지금의 함장 커크지,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맥코이는 자신이 지금 아이오와, 커크가 살았다는 이 허름한 집에 왔다는 사실이 조금 믿기 어려웠다. 커크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읽기 어려웠다. 끌 고와서 인디언 아이들을 무료 검사 해줬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딱히 장소가 아이오와일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넌지시 커크에게 왜 이곳으로 온거야? 하고 물어도 커크는 ‘고향이니까 그렇지’하고 말할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막은 모를지라도 대충 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는 알고 있다. 아버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딱히 편견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맥코이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커크의 곁에 자신이 있음을 정확히 인지했다. 그건 매우 기쁘기도 했고 조금 슬프기도 했다.
몇 년째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집에는 사람냄새가 나지 않았다. 쓸만한 가구들은 없었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도마뱀까지 있었다. 맥코이는 벌레들을 내쫒았고 (물론 도마뱀도) 커크는 먹을 것들을 사왔다. 갖가지 이야기를 했다. 스팍을 까다가도 그의 실력을 인정했고 스코티는 엔터프라이즈호 때문에 장가가기 글렸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가 커크는 이혼남 맥코이에게 결혼에 대한 몇몇 가지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맥코이는 ‘결혼이란건 말이야.’하고 거들먹거렸고 커크는 비웃음을 걸치고 ‘그래서 이혼당했구나.’하고 말했다. 쓸데없이 둘이서 팝콘을 서로를 향해 던지다가 개미들을 끌어 모았다. 낮에는 인디안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봐주었고 약이 필요하면 커크가 그 콤바인을 몰고서 시내로 나가 약을 사왔다. 얼마나 이목을 집중시켰을까. 시내 나가선 옆에 붙어있으면 안되겠다고 맥코이는 생각했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아이오와는 밀밭과 옥수수밭을 제외하고는 정말 볼게 하나도 없었고 맥코이는 평화로움과 심심함을 한꺼번에 느꼈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지만 화창한 만큼 심심했다. 진료를 가지 않았던 4일째 되던 날엔 (사실상 약을 배달하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진료가 끝난 상황이었다.) 낮잠을 실컷 잤는데 일어나보니 내쫒았던 도마뱀이 배위에 있어 맥코이는 아이오와의 정체성이 점차 도마뱀왕국으로 변경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날에 커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밤에는 술을 가득 안고 들어왔다. 차라리 펍에 가서 마시는게 낫지 않겠냐는 맥코이의 말에 커크는 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쩐일인가 싶었더니 어제 밤, 맥코이가 자는 틈에 다녀왔다고 했다. 참 지랄도 가지각색이었다.
두 사람은 밤에 술을 마셨다. 아이스박스에 맥주를 가득 담고 나초를 안주삼아 마셨다. 낮잠을 충분히 잤기에 맥코이는 기분이 괜찮았고 커크는 커크였기 때문에 괜찮았다. 두 사람은 조금 과하게 술을 마셨다. 취하면 깔깔 웃는게 버릇인 커크는 맥코이가 하는 농담에 계속해서 깔깔 웃다가 벽에 머리를 찧였다. 아프다고 끙끙거리다가도 이 상황이 웃긴지 또 계속 웃었다. 맥코이는 뇌손상을 일으킨게 아닌가 싶었지만 커크는 커크니까. 라는 공식을 다시 완성시키며 나초를 씹었다. 그건 참 이상한 상황이었다. 물론 여러 해를 보내면서 커크와 술을 마신적도 있고 (많은 사람들과 또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농담 따먹기를 즐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둘이서 여행길에 나서서, 이렇게 낡은 집에서 (그것도 커크가 자라왔던) 술을 마시며 이야기 해본적은 없었다. 비록 한번 말하면 잊혀지는, 진지함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맞이했다. 오늘은 약을 전해주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가기로 한 날이었다. 콤바인을 타고 시내로 돌아가야 한다는게 좀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걸어가고 싶진 않았기에 맥코이는 알겠다고 했다. 술에 둥둥 뜬 상태로 선잠이 들며 맥코이는 지금 이 순간이 참 생소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 모든게 그랬다.
06.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그 소리에 맥코이는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창문에서 머직히 누워 있었다. 술이 덜깬 듯 머리가 아파왔다. 왔다갔다거리는 정신으로 창문을 바라보니 너머가 아직 어둑했다. 새벽인걸까. 맥코이는 눈을 비볐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소리가 이상했다. 점차 크게 들리는 바람소리에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세워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얼굴로 덮쳐드는 바람에 기겁했다. 태풍이었다. 저먼 곳에서 태풍이 밀려오는게 보였다. 망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변에 있던 담요를 챙겨들었다. 중부지역의 태풍은 보통 견딜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저번 커크가 말했던 땅굴로 당장 들어가야 했다. 작은 태풍이라면 이 집이 꿋꿋하게 견디겠지만 창문 너머로 바라본 구름들은 그게 아니다. 우주를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위협들을 만났지만, 사실 맥코이는 지구 안에 있는 자연재해들이 더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커크. ....커크!.... 커크!!! 이 놈이 또 어딜 간거야.”
맥코이는 집안을 뒤지면서 커크를 불렀으나 집안 어느 곳에도 없었다. 혹시나 자신 혼자 두고서 땅굴로 들어갔나 싶어 밖으로 나왔다. 새찬 바람이 맥코이를 괴롭혔다. 혹시나 술취한 채로 펍에 갔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은가. 암만 취객이라고 해도 태풍이 밀려오는데 떠밀려가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맥코이의 모든 추측은 틀려버렸다. ‘와!!!’ 아이 같은 탄성이 바람소리 사이에 스며들었고 그는 그것을 캐치했다.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야!! 너 죽고 싶어?! 당장 내려와!!”
“맥코이!! 저것 좀 봐! 엄청 커!! 어렸을 적부터 웬만한 태풍들은 다 봤는데 저렇게 큰건 처음 봐!!! 한동안 날씨가 좋았던 이유가 저것 때문인가봐!!”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었다. 맥코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려오라고 했고 커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태풍 크기가 끝내준다고 말했다. 약 5분 동안 두 사람은 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저놈 취했어. 아직 취한거야! 이젠 말짱하게 술이 깨버린 맥코이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태풍을 인지했고 자신이 끌어내리기 전엔 절대 그가 내려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맥코이는 커크가 타고 올라갔을 사다리를 타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살다 살다 진짜 별짓을 다하네. 치솟는 욕설을 삼키며 균형을 잡았다.
“본즈! 봐봐!! 진짜 다 삼켜버릴 것 같아!”
바람 때문에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맥코이는 최대한 몸을 숙이며 커크에게로 다가갔다. 커크는 파란 눈을 반짝이며 태풍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평한 함장의 뒤통수라도 가격하려던 찰나에 맥코이는 태풍을 보았다. 땅 아래서 바라보던 태풍과는 달랐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태풍은 더욱 더 공포스러웠다. 살을 애이는 공포였다. 하늘은 더 높고 또 더 넓게 보였다. 옆으로 퍼져가는 구름떼가 마치 검은 소떼들 같았다. 무겁고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저기에 빨려 들어갔다가는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예감 할 수 있었다. 이 광경에 맥코이는 할 말을 잃었다. 위대하다면 위대한 자연의 힘에 할말을 잃은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것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커크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커크는 어렸을 적부터 이런 것들을 봐왔다고 했었다. 지붕 위에서 태풍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더없이 좋았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정말 아이처럼 웃는 커크를 보며 맥코이는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망설인다면 정말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터였다. 맥코이는 술 냄새나는 함장을 끌고 내려왔다. 다행히 몸을 가눌 수 있는 모양인지 잘 끌려 왔다. 후다닥 아래로 내려왔을 때 콤바인이 옆으로 기울었다 큰 굉음에 덜컥 겁이 났다. 맥코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땅굴이 어디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커크가 말했다.
“콤바인 밑에.”
“....진짜 환장하겠군.”
07.
커크와 맥코이는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태풍은 코앞에 있었고 사방의 유리창들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을 때 커크가 맥코이를 끌고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곰팡이가 피어있는 카페트를 들추더니 작은 지하 공간을 보여줬다. 성인 남자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이런 태풍을 감당하기 위한 곳이 아닌 음식이나 물건을 넣는 곳이었다. 하지만 선택 사항이 없었다. 커크가 먼저 들어서고 맥코이가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유리창이겠지. 머리 위로 무언가 구르고 박살났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맥코이가 온갖 욕설로 중얼거리고 있을때 커크가 갑자기 큭큭 웃으면서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왔다.
“웃음이 나오냐!”
“아니, 그게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
“진짜 네가 너랑 이제 여행 오나봐라.”
커크가 여전히 얼굴을 기대고 웃었다. 맥코이는 손을 들어 뒤통술 갈겨주고 싶었지만 위의 뚜껑을 지지하고 있어야 했기에 때릴 손이 없었다. 이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당장에 없애버리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커크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였기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맥코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지금 그들이 갇혀있는 작은 창고에 대한 이야기였고, 또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그가 이 공간에 있는 것이 처음이 아니란 그런 이야기였다. 맥코이는 순식간에 할 말을 잊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커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커크에게서 술 냄새가 났고 그건 아마 맥코이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긴긴 시간 동안 맥코이와 커크는 그곳에 있었다.
태풍이 지나갔을 무렵, 맥코이는 문득 자신의 보물 상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커크에게 그런 상자 하나쯤을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