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 할 것이 없이 없었다. 그는 착실한 사람이었고, 친절한 사람이었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급탕실의 여사원들은 그에 대해서 ‘좋은 사람 같아.’라고 말하곤 했다. 체콥은 그 말을 들으면서 아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 밖에 되진 않았다. 비록 같은 개발부서에 있긴 했지만 부서 자체가 큰 만큼 이야기할 기회도 많지 않았고 어울리는 모임도 아니었던 터라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그나마 올해에 자리를 변동하면서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된 터라 그를 관찰할 시간이 많아지긴 했지만 (결코 변태 같은 뜻이 아니라) 그와 이야기하는 시간은 손에 꼽았다. 이상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깝게 여기는데 체콥은 그가 멀어도 너무 멀어보였다. 차라리 아예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더 가깝다고 여겨질 만큼의 느낌이었다. 한번은 과장님이 나이에 맞지 않게 껄껄 웃으면서 ‘술루는 좀 그런게 있는 것 같아. 벽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 벽이 높긴 높은데 그렇게 단단하진 않아. 내 생각은 그래.’하고 말했다. 다가온 차장님은 눈썹을 뾰족하게 세우면서 ‘남 판단할 세에 결제나 해주시죠.’하고 파일 더미를 던졌다. 밥그릇 빼앗긴 과장을 보며 체콥은 딴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구나.’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체콥에게 술루는 그저 멀기만 한 타인이었고 타인의 모든 것을 신경 쓸 만큼 체콥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그 정도면 족했다.
이런 체콥에게 술루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정말 작은. 아주아주 작은 한 순간 때문이었다. 술루가 야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회사 5층에는 남자 휴게실이 있었는데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담배를 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유리 칸막이로 쳐져있는 곳은 테이블 4-5개가 들어갈 정도로 널따랬고 자판기 세대와 커다란 벽면 TV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남자 사원들은 그곳에서 자주 야구를 보곤 했는데 샌프란시스코와 LA다저스가 경기를 할 때면 층 전체가 떠들썩했다. 파이크 이사님은 이 사이에 꼭 끼어있는 커크 부장을 보면 ‘애같이 이게 뭔가?!’하고 꾸중을 하곤 했지만 결국 그의 꼬임에 넘어가 함께 야구 열전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샌프란시스코를 응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아버지와 아들 같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 말하고자 하는 중요인물인 술루 또한 그 안에 껴있었다. 술루는 앞에서 뜨거운 응원을 하는 커크와 달리 얌전히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늘 마시던 음료가 테이블 앞에 있었고 미동 없는 눈동자로 가만히 TV를 응시했다. 안타나 홈런을 날리면 커크가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를 했고 뜬금없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응원가를 부르며 술루에게 뜨거운 어깨동무를 시전했다. 그럴 때면 술루는 평소의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에는 머리에 넥타이를 두른 커크도, 옆에서 LA를 응원하다 몰매를 맞은 스코티도, 엄하게 뒤에서 경기를 보다가 커크에게 발이 밟혀 열을 내던 본즈도, 휴게실까지 찾아와서 제발 결제 좀 해달라는 스팍도 없었다. 야근의 시간이었고 몇몇의 사원들이 남아 자신의 불을 밝혔다. 그날엔 드물게 체콥도 있었다. 사실 체콥은 야근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일거리가 남았다면 차라리 집으로 들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 날에는 이 일을 집으로 들고 갔다가는 하나도 처리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피곤했다. 창문 저 끝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고 4/5의 어둠이 덮여 있었다.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빛을 보며 체콥은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술루를 보았다.
넓은 휴게실에는 술루 혼자였다. 그는 홀로 서서 TV를 보고 있었다. TV안에는 수 많은 관중들이 있었고 야구에 열중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오로지 TV의 불빛만이 술루를 비추고 있었다. 술루는 그가 즐거 입는 하늘색 와이셔츠의 소매를 접어 올리고 한손을 주머니에 넣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늘 끝까지 단정하게 조여 맸던 타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기에 체콥은 조금 당황했다. 우선은 술루가 담배를 피고 있다는 것도 놀랐다.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단 한번도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아 물론 사무실내에서는 금연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에게선 담배 냄새의 한 조각 자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앞에 대고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은 것은 절대 아니지만.
체콥은 멍청하게 서서 술루를 보았다. 안타를 쳤는지 술루가 담배를 입에 물고서 작은 소리로 박수를 쳤다.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체콥은 자신이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이 멋있어서 눈을 땔 수 없었다거나 이런건 아니지만, 아니 그런 면도 없잖아 있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눈을 땔 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건 완벽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술루가 체콥을 바라보았다. 체콥은 유리너머로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에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도망치는 것만큼 어색한게 없을 터였다. 체콥이 다람쥐마냥 수선을 떠는 동안 술루는 담배를 비벼 끄고 유리문을 열었다. 그리고 ‘담배 냄새나는데 괜찮아?’하고 물었다. 체콥이 네? 하고 묻자 그는 입꼬리로 웃어 보이면서 ‘너 담배 안 피우잖아.’하고 말했다. 과연 여사원들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02.
변태가 되어버렸다. 변태가 돼버렸어.
체콥은 책상에 앉아서 혼자 되뇌였다. 곱슬거리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우후라가 ‘머리 빠진다.’ 하고 놀렸다. 체콥은 머슥하게 일어나면서 ‘숱 많아서 괜찮아요.’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스코티가 분노하면서 ‘웃기지마! 너도 나이 먹으면 머리 빠질거야! 젊음은 한순간이라고!’하고 화를 냈다. 체콥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열을 내는 스코티를 보며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자 이에 만족한 스코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우후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멀지 않았다. 방금 전에 부장실로 들어갔으니까. 그전에는 스팍에게 가서 검토를 맡았었다. 그리고 그전전에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워드로 무언가 수정했고 결제표에 자신의 싸인을 그렸다. 체콥은 그 싸인을 보면서 필체가 유려하니 멋있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었다. 가늘고 두꺼운 선이 확실해서 무엇을 쓰더라도 멋질 것 같았다. ...아니 멋졌다. 체콥은 그가 글씨 쓰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전화를 받으면서 무언가를 쓰는 모습,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작성하고서 붙이는 모습, 그 뿐 아니라 출근하자마자 자켓을 벗어놓는 모습, 커피를 마시는 모습, 가끔씩 안경을 쓰고 글씨를 읽어 내리는 모습 (체콥은 이 모습이 제일 좋았다.) 쭈욱 늘어놓으라면 다 늘어놓을 수 있을 만큼 체콥은 술루에 대한 모습을 쭈욱 늘어놓을 수 있었다.
...변태가 되어버렸다. 변태가 되어버렸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체콥은 너머의 부장실을 보고 있었다. 버티칼 너머로 술루가 움직이는게 보였다. 이번 새로운 개발건에 관한 걸까. 잘 풀리고 있는걸까. 체콥은 꾸물거리며 뒤를 바라보다가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어제 여직원들과 식사를 하면서 (어쩐지 남자직원들보단 여직원들과 식사를 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아마 그건 여성스러운 체콥의 입맛 때문일 터였다.) 좋아한다거나 그런건 아닌데 자꾸 눈이 가고 그런건 뭘까요? 하고 넌지시 물었다. 딴엔 넌지시 물어본 것이었지만 체콥을 이뻐라 하는 여성동지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시며 ‘뭐야 누구야?’ ‘아이고 우리 체리보이 다 컸네.’ ‘어떤 여자에요? 저번에 인사하던 인사과의 크리스틴?’ ‘어머 그런거면 실망이에요. 얼굴만 보고’ 등등 수많은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거기다 대놓고서 ‘사실은 제가 얼마전부터 술루 팀장님이 자꾸 눈에 밟히는데 말이죠. 한번은 화장실 가시는 것도 따라갈뻔 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막 표현은 못하겠고 이게 좋아하는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하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체콥은 괜히 말했다고 꾸물거리면서 앞에 있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체콥”
“헉”
“....왜 그렇게 놀라는거야?”
방금 전 생각해오던 사람이 뒤에서 어깨를 치고 있었다. 체콥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아뇨’하고 얼버무렸다. 술루는 별 사람 다 보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부장님이 부르셔’하고 말하곤 자리에 앉았다. 체콥은 고개를 끄덕이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루의 까만 뒤통수를 잠시 응시하곤 한숨을 쉬었다.
‘그게 좋아하는거지 뭐. 행동 하나하나에 눈이 가는거. 보고 있으면 어찌할 바 몰라서 한숨 나오는거.’
수많은 수다들 중에서 나온 한마디가 떠올랐다. 그녀는 체콥의 등을 툭 치면서 ‘힘내라고!’ 깔깔 웃었다. 꽤나 신나 보이는 웃음에 체콥은 계속해서 스테이크를 썰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까. 결국 그딴걸로? 술루가 좋은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그에 대해서 별 감정 없었었다. 그냥 그가 담배를 피는 그 단편적인 기억 하나로 그게 좋아진건가? 하지만 담배는 우리 옆집의 뚱보 밥도 피우는데? 체콥은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을 탁탁 쌓아 올리며 빨리 오라며 손짓하는 커크를 향해 다가갔다.
03.
“여자가 있었데? 약혼녀?”
“듣기로는. 일본계 여자였다고 하던데?”
“어쩐지 없을 타입은 아니잖아.”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파혼이잖아. 왜 그랬을까. 능력도 좋고 사람도 괜찮은데.”
“연애, 제 3자는 모르잖아. 결혼까지 간 커플이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분명 문제가 있었겠지.”
“체콥, 넌 들은거 없어? 옆자리잖아.”
“네?... 아...아뇨. 처음 들어요. 그..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구요.”
“뭐 그렇긴 하겠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 내가 보기에 히카루씨 야망도 있어 보이고 친하게 지내면 지낼수록 득볼 타입 같아.”
“어우 속물.”
“어머 너 웃긴다. 네가 먼저 그 말 했었잖아. 히카루씨 꼬셔보고 싶다고.”
“야, 너 그런 말을 앞에서 해대면 어떻게 해.”
“허, 체콥씨가 뭘 그렇게 신경 쓰겠어. 그지 체콥씨?”
04.
회식 자리가 있었다. 일식집이었는데 부장님은 이 모든게 술루를 위한 선택이었다며 매우 흡족해 했다. 그러나 술루는 ‘네 그것 참 고마워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네요.’하고 자폐아같은 모노톤을 뽐내 직원들의 사기를 충천해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했다. 체콥의 경우는 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맛있는 식사는 좋았으니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앉게된 위치도 그랬다. 체콥은 흐뭇해하면서 옆을 힐끔힐끔 보았다. 술루는 익숙하게 젓가락질을 하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다른쪽 테이블에선 젓가락 하나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아마 미스터 스코티가 음식을 집다가 젓가락을 발사시켜 차장님의 이마에 명중시킨 모양이었다. 부장님은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음식이 아닌 왼쪽으로 비켜져 있었다. 체콥은 시선을 맞추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을 함께했다.
“야...야구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아? 응. 어렸을 때 야구 했었어.”
“정말요? 투수? 타자?”
“투타 다 했지. 투수도 했었지만 주 포지션은 좌익수였어.”
“언제까지 하셨어요?”
“하이스쿨 초반 때까지. 토미존에 문제가 생겨서 거기서 끝났어.”
체콥은 술루가 이렇게 저 혼자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술이 조금 들어가서 그런걸까. 야구 이야기하는 술루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체콥은 그의 곁에서 귀를 기울이고 한참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야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서 LA구장을 갔었는데 정말 천국 같았어. 선수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면 관중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거야. 구장 너머로 공이 날아가면 다들 뛸 듯이 기뻐했어.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대단하잖아? 공 하나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미칠 수 있다는거 말이야. 미들스쿨 때는 포수 포지션을 자주 맡았었는데 그것보단 외야수가 좋았어. 멀리서서 투수와 포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어. 타자가 친 공이 나를 향해 날아 올 때면 그 공을 붙잡는 것도 좋았고. 운동화에 착 달라붙는 잔디도 좋았고 밤이 되면 켜지는 라이터도 좋았고. 뭐 그것도 좀 큰경기때나 느낄 수 있는 것들이지 대부분은 흙바닥에서 경기를 했었지. 만약에 다치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야구를 했을지도 몰라. 메이저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마이너에서 열심히 뛰고 있었겠지. 물론 지금도 좋지만 그랬어도 좋을 것 같아. ....아, 미안. 나 혼자 너무 떠들었지?”
아뇨아뇨. 아니요 정말. 정말 재미있어요. 술루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체콥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와사비를 휘휘 저었다. 인정하자. 나는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한다. 왜그런진 몰라도 어쨌든 그렇다. 체콥은 이제 인정해봤자 늦은 이야기를 저 혼자 정리하고 있었다. 투수가 자신의 턴을 완벽하게 끝낸 모양인지 술루가 오. 작은 탄성을 질렀다.
05.
체콥은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체콥이 쑥맥처럼 보이긴 해도 어느 정도 여자관계는 있었고 인기도 좋아서 이래저래 고백을 받아본적도 많았다. 뭐가 아쉬워서 짝사랑을 하겠는가. 이전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룸메이트가,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가 체콥이었을 짝사랑에 대한 한풀이를 하곤 했다. 그때는 그 상대가 자신임을 올랐으니 영혼이 없는 대답을 대충대충 해줬던 기억이 났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기분이 좋았다가 가망이 없는 것 같아서 슬퍼지고...’ 체콥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거 병 아닌가. 정신병원 가야할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으나 착한 미소를 띄우며 ‘그것 참 힘들겠다.’하고 말했다. 그 시절에야 공감하지 못했으니 고 딴식으로 말했다지만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것 참 힘들겠다.’라고 말한다면 목을 조르고 싶었을 터였다.
체콥은 고뇌하고 있었다.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짝사랑을 인정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고 사건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 술루의 책상에 놓인 꽃이었다. 뜬금없이만 그랬다.
체콥은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타입이었고 텅 비어있는 책상들을 보는게 익숙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언제나 바라보기에 이젠 스탬플러와 포스트잇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외우고 있는 술루의 책상 위에 익숙치 않은 꽃이 있는게 아닌가. 예쁜 유리컵에 꽂혀 있는 프리지아는 이름만큼이나 예쁘고 고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걸려 있는 노란 쪽지 하나. ‘언제나 지켜보고 있어요.’ 체콥은 그 쪽지를 읽으며 사실 어젯밤에 자신이 몽유병으로 회사에 와서 꽃을 사다놓고 쪽지를 써논건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그런 퍼센트지보단 그를 진정 사모하는 다른 여인이 술루의 책상 위에 꽃과 쪽지를 두고 사라졌다는게 더 알맞았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스팍 차장님이 오시기까지 딱 10분이 남은 상태였다. 칸트같은 그가 부서로 들어오기 전에 이 꽃을 처리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슬퍼해야하는 것인가. 머리에서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우선 차장님이 들어와서 부서를 쭈욱 스캔할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술루의 책상 위에 꽃이 있다는 것은 알 테니 우선 그는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소지한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원들이 하나씩 도착하면서 어머 이게 왠 꽃이야 하고 말 할테고 이후 술루가 꽃을 보면서 ‘아 나를 사랑하는 여인하나가 이곳에.’하고 깨달을 것이다. 체콥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자신의 짝사랑을 위해서라면 이 정체모를 누군가를 빨리 제거해야함이 마땅했다. 그러나 체콥에겐 양심이 있었고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타인의 애정을 방해 한다는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하지마안....
체콥의 머리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술루의 책상을 앞에 두고서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다. 꽃으로 손을 뻗었다가 이내에 거두고 다시 뻗었다. 그리고 쪽지를 손에 넣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한손으로는 꽃을 쥐었다. 꽃을 뽑았다 다시 넣었다 뽑았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올림피어드 대회에 나갔을때도 이렇게 어렵진 않았다.
“미스터 파벨. 오늘도 일찍 왔군.”
“! ...아...안녕하세요. 차장님.”
체콥이 시계를 보았다. 칼같이 10분이 지난 뒤였다. 체콥의 등 뒤에는 한가득 뽑혀있는 꽃이 있었고 사랑이 담겨있는 쪽지가 있었다. 엉거주춤하지만 최대한 스팍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체콥은 자신의 몸을 이용했다.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는 척 하면서 물이 묻어있는 꽃더미를 자신의 가방에 쑤셔넣었다. 스팍은 ‘어디 몸이 아픈 건가?’하고 물었다. 체콥은 ‘파...팔이 좀.’하고 말하며 역시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았다. 스팍은 젊은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고 대수롭잖게 말하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의 자리는 맨 앞이었고 사원들을 쭈욱 훑을 수 있는 자리였다. 체콥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가방안에 한가득 담긴 프리지아와 손안에 구겨져있는 쪽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술루의 책상에서 포스트잇을 빌리는 척 하면서 (“아.이.런.포.스,트.잇.이.없.네.술.루.씨.껄.빌.려.야.겠.다.”) 소매로 물기를 슥슥 닦았다. 이제 놓인 것은 꽃은 뽑혀버리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꽃병과 그 안의 물이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고민하며 스팍을 바라보았다. 스팍은 아침 회의를 준비한다고 바빠 보였다. 나름 빠른 손놀림으로 꽃병을 잡았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후다닥 자리로 돌아왔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체콥은 간이 콩알 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보다 술루가 일찍 도착했다. 술루는 자리에 앉으면서 ‘오늘은 차가 덜 막히네. 평소도 이랬으면 좋겠어.’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꽃병 아니 물병을 보았다.
“...이게 뭐야? 나 마시라고 물 떠논거야?”
“아...그게.....그러니까.......네.”
“컵 주둥이가 이렇게 길어? 무슨 꽃병 같네.”
“.....아 그러니까.........네.”
“고마워 잘 마실게.”
술루는 웃으면서 자켓을 벗었고 이어서 물 한잔을 마셨다. ‘이거 차야? 왜 풀냄새가 나지?’ 체콥은 술루를 바라보면서 망연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체콥은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제대로 물 먹여 버렸다.
06.
- “체콥, 솔직히 난 네가 게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모든걸 떠나서 조언 하나 해주자면 말이야. 나는 네가 그에게 적극적인 대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당연하지. 그는 약혼녀랑 파혼까지 했었다며. 분명 세상물정 다 아는 남자일거야. 게다가 동양인이라고? 요즘은 동양인 남자들이 더해. 고지식한 척 하지만 분명 다 알고 있을 거야. 내가 남한에서 강사하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그 나라 남자애들은 손잡고 등교한다더라.”
- “너 기억하는게 좋을거야. 네가 4년 동안 널 짝사랑했고 너는 나를 무지막지하게 차버렸다고.”
“네가 날 덮치려고 했잖아!”
- “결국엔 너한테 두들겨 맞아서 갈비 4개가 나갔잖아. 됐어 이미 끝난 이야길 해봤자지. 어쨌든 명심해둬.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거야.”
“.....하지만 난 죄책감을 느낀다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를 좋아하는게 옳은걸까.”
- “그 꽃병 사건? 그건 좀 병신같긴 했어.”
체콥은 전화기를 불잡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침대 끝에 놓여져있는 자신의 서류 가방을 보았다. 그안에 바싹 말라붙은 프리지아를 생각했다. 한숨이 나왔다.
07.
체콥이 야구표를 구하는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이건 하버드에서 정의를 강의하는 교수의 수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몇배는 어렵게 느껴졌다. 결국엔 예매는커녕 외야 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체콥에 남은 것은 검은 손길이었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두 배로 비싼 값을 치루며 명당자리를 얻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야구표를 들면서 ‘표가 공짜로 생겨서요...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하고 말했을 때 술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와! 이거 LA이란 샌프란시스코 경기잖아?! 구하기 정말 힘들었을 텐데?!’하고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내에 술루는 표의 날짜를 확인하면서 ‘이런 어쩌지. 나 그날 회사에서 잔업하고 있을 것 같은데.’하고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미련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정말 중요한 일인 듯 포기하려는 기색이 만연하여 체콥은 마음이 급해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정말 순식간에 나온 대답에 술루와 체콥 모두 당황했다. 술루는 그런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했지만 체콥은 막무가내였고 바로 야근모드로 돌아섰다. 체콥에게는 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업무처리가 빠르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체콥의 연애사업에 또다른 획을 그을 만큼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척척 일을 빠르게 도와주는 체콥을 보며 술루는 감탄했다. 체콥은 뿌듯해하며 마하의 속도로 워드를 쳤다. 그리고 새벽 1-2시 정도 되었을까. 옆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체콥은 타자 소리를 늦추며 옆을 바라보았다. 술루가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가지런한 이마위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떨어져 내렸다. 체콥은 그것을 보며 자신의 코끝을 매만졌다. 그리고 우후라의 의자에 걸쳐있는 담요를 꺼내 그의 어깨위에 덮어주었다. 그 기척에 깬 것인지 술루가 깜짝 놀라며 ‘아 미안. 나 졸았나보다.’ 하고 말했다.
“피곤하시면 휴게실 가서 좀 주무세요.”
“아니야. 거의 다 끝냈어. 어서 끝내고 집에 가자. 미안해 나 때문에 고생이네.”
“아니에요. 새 프로젝트라 그런지 일이 많으시네요.”
“나만 일하는 것도 아닌데 뭐.”
술루는 눈을 비비고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리고 다시 서류의 세계로 몰입했다. 체콥은 서류뭉치를 잡고 있는 술루의 손가락을 보았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 손끝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인내에 정신 차려야 한다며 머리를 내저었다. 그리고 의도된 데이트를 위하여 열심히 타자기 위로 손가락을 놀렸다.
08.
체콥은 이젠 말라버리다 못해 서걱서걱 부셔지는 프리지아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그건 좀 병신같았어!’ 수화기 너머로 울리던 친구의 목소리가 머리를 뱅뱅 돌았다. 그게 좀 병신 같은 것이 아니다. 요즘 체콥은 술루 앞에서 완전히 병신 완전체였다. 짝사랑이 이런 거라면 정말 넌더리가 났다.
09.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 정말 많다.”
“네. 엄청나네요.”
“야구장 처음이야?”
“네. 처음이에요.”
“운 좋네. 처음 보는 경기가 자이언츠랑 다저스라니.”
술루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래서 체콥도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 보는 양복 차림이 아닌 술루는 캡모자에 편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체콥은 뭘 입고 나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술루처럼 편안한 복장을 입었다. 저 혼자 첫데이트라고 뽐내고 갔다가는 이상하게 기억될게 무서웠다. 선수들이 평화롭게 캐치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술루는 LA팀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커크와 야구를 함께 보는 탓에 샌프란시스코를 응원하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LA를 응원하는 모양이었다. 체콥이 이에 대해서 말하자 술루는 그냥 웃으며 ‘그런거지 뭐.’하고 대답했다.
경기가 시작하는 것은 길면서 짧게 느껴졌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영화 배우 누군가가 나와서 시구를 하고 사람들이 환호 했다. 다들 기분 좋아 보였다. 그건 옆의 술루 또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1이닝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투타는 막상 막하였다. 관중들은 더욱 더 환호했고 선수들도 빅매치에 혈기 띤 얼굴을 해보였다. 술루는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응원가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박수를 크게 치기도 했다. 휴게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의 얼굴이었다. 체콥은 야구장을 선택한 것은 정말 완벽한 계획이었다며 스스로에게 축복을 내렸다. 경기는 1대 1이었다. 이닝 교체타임이었고 볼보이들이 잔디를 정리하고 내야에 물을 뿌리며 먼지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선수들은 몸을 풀기도 하고 캐치볼을 하기도 했다. 술루는 잔뜩 흥분한 상태로 체콥을 보며 후반 경기에서 결판이 날거라고 말했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뭔가 어서 그에게 말해야 된다는 기분에 초조해졌다. 이곳저곳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체콥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 차려야해. 이 순간을 기다려왔잖아! 체콥은 입을 굳게 다물다가 결심한 듯이 술루의 오른손을 확 낚아챘다. 얼떨결에 손을 잡힌 술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체콥을 바라보았다.
“술루씨!”
“....어?”
“고...고백 할게 있어요!”
술루가 갑작스런 체콥의 태도에 놀라고 있을 동안 체콥은 챙겨온 백팩에서 말라비틀어진 꽃다발을 꺼냈다. 뒤에 앉아 있던 중년 부부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며 심도 깊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체콥은 술루에게 꽃을 내밀었다. 술루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하며 꽃을 받았다.
“이건 술루씨를 좋아하는 어떤 여인이 선물한 꽃이에요!”
“.....이게?”
“네! 그...그런데 제가 그걸 몰래 숨겼어요! 책상위에 있었는데 제가 그냥 숨겨버렸어요!”
“.....저... 혹시 그날 물....그거야? 그 꽃병 같이 생겼던 물컵 그거....”
체콥은 뜨끔했지만 여기서 멈추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생각에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맞아요! 하지만 사연이 있어요! 저는 이 꽃을 감춰야 했어요!”
“....왜?”
“제....제가.... 제가.......제....제가!!!”
체콥의 얼굴이 뻘겋게 익기 시작했고 러시안 보이의 얼굴에서 활화산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뒷 자석의 중년부부는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당황하는 것은 술루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체콥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쪽의 전광판에 익숙한 얼굴들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쓰여 있는 대범한 글자들도 보았다. 체콥은 입을 앙 다물고 시뻘겋게 변한 손등으로 술루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갑자기 얼굴을 부여 잡힌 술루는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서 쓱 끌려오고야 말았다.
입술 박치기.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키스타임에 적합한 장면은 아니었고 카메라 중개원들이 원하는 장면은 더더욱 아닐 것이었다. 한손에 메마른 꽃더미를 잡은 소년 같은 남자가 동양인 남자를 부여잡고 입술 박치기 하는 장면은 미국 방방곳곳의 TV전파를 타고서 흘러 나갔다. 한 40초 정도 되었을까. 입술의 말캉함과 야릇함은커녕 체콥의 앞니에 부딪힌 입술이 아파 죽을 것 같은 술루에게 체콥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젠 퍼석 꺾여버린 꽃을 내밀었다.
“미...미스터 술루! 당신을 좋아합니다!! 사귀어 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뒤에 있던 중년 부부가 벌떡 일어나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쳤고 관중들은 영문도 모르는 체 그저 조금은 기이해 보이는 러시아 청년과 동양인 청년의 고백 장면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호응에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한 술루가 고개를 푹 숙이며 꽃을 받아 들고선 ‘체콥. 우리 나중에 이야기 좀 하자.’ 하고 말했다. 뭐 그런 거였다. 단언하건데 비록 술루가 이 상황에 당황하고 갑자기 자신이 게이 커플의 일원으로 변해버린 것에 있어서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분명 대범하게 고백을 해온 체콥은 꽤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며, 누군가의 꽃송이를 훔치면서 까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술루에게 분명히 치료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음을. 그건 단언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