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오와에는 밀밭이 많았다. 어렸을 적에는 그곳에서 뛰어 놀았다. 내 키보다 훤칠한 밀들을 지나치다보면 밀밭이 끝나는 곳, 그 어딘가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잎사귀에 뺨이 베이는 것도 모르고 달렸다. 두서없는 뜀박질에 무릎이 아파오면 일부러 소리를 질렀다. 내가 여기 있으니 아직 가지 말라는 나름의 신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짐승의 소리 같아 되레 그 사람을 도망치게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뛰고 뛰다보면 먼 곳에서 삐죽히 튀어나온 누군가를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곧 이어 화가 났다. 달려가서 괜히 그 등을 찼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러 그를 때렸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삐죽한 밀짚모자와 째져 있는 눈매 그리고 일자로 닫힌 입이 정말 재수 없었다.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꺼져 이 허수아비야! 헷갈리게 왜 이런데 서 있는 거야?!’발길질을 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자신이 바라보던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오로지 그만의 세상이라는 것처럼. 한참 그를 때리다가 지치며 털썩 주변에 주저앉았다. 밀대가 내 엉덩이에 깔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천, 아니 수억의 밀알들이 흔들리는데 그중 몇 개를 엉덩이로 깔아뭉갰다 한들 어떨까.
스팽크씨의 밀밭을 지키는 허수아비의 이름은 ‘크로치’였는데 이는 Cross-patch(심술쟁이)의 줄임 표현이었다. 그 허수아비는 정말 밉살스럽게 생겼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정말 못되게 생겼구만’하고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다. 하지만 스팽크씨는 이 허수아비를 결코 바꾸는 일이 없었다. 다른 농사꾼들이 허수아비 대신에 참새를 쫏는 로봇을 가져다놓고 성능이 끝내준다며 자랑을 한다더라도 그는 결코 크로치를 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매달마다 크로치의 옷을 바꿔주었고 회오리바람이 부는 날이면 그를 창고에 넣어두었다. 어째서 그가 그렇게까지 낡은 허수아비에 지극정성인지 알지 못했다. 마을 아이들은 그런 그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이 노래 하나를 지었다. ‘미스터 스팽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에겐 심장이 없어요. 대신 밀짚으로 가득하지요. 심술스럽게 생긴 눈매와 입매는 정말 볼품없어요. 하지만 스팽크씨는 그를 사랑해. 그를 정말정말 사랑해.’ 아이들은 스팽크씨의 집 앞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을 내쫒거나 물을 끼얹는 일이 없었다. 대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이마큼의 사탕을 던져주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더욱 크게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 소리가 동네방네 울려 퍼졌다. 이후에는 엄마들이 설거지를 하거나 농사꾼들이 추수를 하면서도 ‘스팽크씨의 크로치’를 부르게 되어버렸다.
익숙해지면 정이 들고 정이 들다보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난 크로치가 싫었다. 그토록 익숙하면서도 그가 싫었다. 나보다 밀밭을 정신없이 뛰어다는 애는 없었고 또 나만큼이나 그를 많이 마주친 애는 없었다. 저 말이 맞는다면 난 이미 그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난 크로치가 싫었다. 자꾸 나를 찾아오는 누군가로 착각하게 하는 그가 싫었다. 그래서 한번 차는 발길질에도 더욱 힘이 들어가곤 했다.
저 먼 곳에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크로치는 그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팽크씨가 입혀놓은 푸른색 체크셔츠가 빳빳했다. 아마 어제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는 이상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 옷보다는 저 셔츠가 훨씬 나아보였다. 크로치의 외롭고 든든한 등을 보곤 노을을 보았다. 새빨간 태양이 밀밭을 태울 듯이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지구의 마지막 날처럼 여겨졌다. 크로치는 매일매일 이런 광경을 보고 있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모든 순간을 그는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크로치의 그 외로움이 싫었다. 그 든든함도 싫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들 모두가 싫었다. 누가 그런 것들을 좋아할 수 있을까. 그 누구에게도 나눠주지 않는 것들을. 그래서 난 크로치가 나를 기다리는 것 마냥 밀밭 중간에 있는게 견딜 수 없었다. 그래 인정하자. 그것이 나를 위한 기다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에 크로치가 기억나는 것은 그를 봤던 순간부터 그 몹쓸 허수아비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삐뚤어진 입술과 눈매도 그렇고 (특히 치솟은 눈썹하며) 밉살스러운 분위기도 똑 닮았다. 한번도 그에게 크로치에 대하여 이야기 한적 없었지만 그가 크로치를 본다면 ‘객관적으로 닮은 것 같군.’하고 대답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난 웃으며 ‘그래 짜샤. 이런걸 도플갱어라고하지.’하고 그의 가슴팍을 탁 칠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불쾌할 정도로 로맨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가 크로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가 밀밭에 서 있는 것을 상상했다. 크로치와 똑 닮은 몹쓸 벌칸인이 밀밭에 숨어 있고 나는 정신없이 뛰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를 찾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크로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발로 차고 때릴까. 다른게 있다면 묵묵하게 맞고 있던 크로치와 달리 그는 내 어깨를 무지막지하게 꼬집으며 ‘쓸데없는 미친 짓을 삼가는게 좋다.’ 라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도 좋겠지. 최소한 나와 노을을 봐준다면. 그 등을 볼 수 있다면.
“내가 그때.”
가끔은 아이오와가 그리웠다. 그 활량하면서도 자연에 뒤 덮힌 땅이 그리웠다. 어느 정도였냐면 가슴이 애릴 정도로. 함장으로 지내왔던 지금의 순간과 그 순간의 인연으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소중한 만큼 아이오와의 기억 또한 소중했다. 가끔은 본즈에게 ‘내가 아이오와에 살 때 말이야.’하고 말을 꺼내면 그는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며서 ‘커크, 자네의 문란한 첫 경험 이야기는 그만해. 정말 지겨워 죽겠군.’하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던게 아니라고 해도 그는 귀를 막고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스코티는 박자를 맞춰주긴 했지만 대부분 딴 이야기로 세어버렸다. 종국에 그는 ‘그러니까 이 함선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자네는 잘 알아야 해. 그녀는 특별하다고!!’하며 예찬론을 드러냈고 그와 나는 건배를 주고받으며 ‘엔터프라이즈호를 위하여!’하고 소리쳤다. 당연히 다음 날의 필름은 끊겨 있었다. 그나마 그는 내가 아이오와 이야기를 할 때면 정말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로 ‘아이오와는 그런 땅인가.’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럼 그렇지. 하는 싱거운 생각을 하며 ‘그래. 정말 지겹고 끝내주는 땅이야.’말했다. 그게 끝이었던 것 같다. 이러니 내 쪽팔린 기억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크로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리가.
“너를 구했던 이유를”
내가 어느 날엔 크로치의 등을 껴안으면서 울었던 일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리가.
“알아줬으면 해.”
지금 또한 네 등을 껴안고서 울고 싶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정말 우습게도 나는 나의 죽음의 순간에 크로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숨은 막혀 왔고 고통과 두려움이 닥쳐왔다. ‘이게 죽는거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착하게 살걸. 바람 좀 덜 필걸. 파이크 제독한테 좀 더 착한 아들 노릇할걸.’ 이런 생각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런 생각들을 하면 좀 덜 억울할지도 몰랐다. 두려움 다음에 닥친 것들은 크로치의 등이었고 그 등이 걸치고 있었던 파란 셔츠였다. 그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손을 겹쳐 왔을 때 진심으로 그 손을 붙잡고 싶어졌다. 유리 너머가 아니라 그 손을 마주 꼭 잡고 갈고리처럼 움켜잡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알았다.
결국 내가 죽음의 순간에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너의 등을 안고 싶다는 고백도, 너의 손을 움켜쥐고서 울고 싶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하게 노을을 보고 있는 크로치의 등을 안고 울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뿐이었다. 그가 이게 무엇인지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개같이 논리적인 머리와 입으로 ‘너는 지금 혼돈에 가득 차있고 어린 시절을 떠올림으로서 본능적인 평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하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대답한다면 초인적인 힘으로 이 유리창을 부수고 뾰족 귀를 뽑아 낼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 생각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더 이상 웃을 힘이 없었다. 참 아쉬웠다. 너의 등을 안을 수 없다는 것도. 손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도. 그러나 너를 대신해 크로치를 생각하고 그를 안고 있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함으로 조금 더 나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때의 슬픔이 이젠 죽기 전의 기쁨이 된다니.
눈앞이 가물가물해져왔다. 이젠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빛은 작은 점으로 변했고 못된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기억도 희미해졌다. 잠깐, 그가 울었던가. 그래 울었어.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가 내가 죽는다고 울었어. 그 못돼 처먹은 벌칸 새끼가. 완벽한 어둠이 닥쳐왔을 때 어디선가 희미한 노래 가락이 들렸다. 아쉬웠다. 이 노래를 불러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스터 스팽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에겐 심장이 없어요. 대신 밀짚으로 가득하지요. 심술스럽게 생긴 눈매와 입매는 정말 볼품없어요. 하지만 스팽크씨는 그를 사랑해. 그를 정말정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