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은 사람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찌르는 것이다. 사람이 방어하고 있지 않은 그 단순한 공간을 예민하고 날카로운 칼로 찍어 누르면 승리한다. 술루는 단 한 번도 이 이야기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을 개입한적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기술이자 방법이었기에 구구절절하게 감상을 우겨넣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시끄럽게 혼잣말을 쫑알거리는 러시안 보이가, 그것에 대해 드물게 그에 대해 단 한마디만을 뱉었을 때 술루는 자신의 설명을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설명은 별 다를게 없었다. 그는 다만 펜싱에 대하여 궁금해 했고 술루는 대수롭잖게 스크린들 두들기며 ‘빈 공간을 찌르는거야.’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외로운 거네요.’하고 말했다. 술루는 손을 멈추고 ‘뭐?’하고 되물었었다. 소년은 언제 궁금했었냐는 듯이 시선을 돌리며 ‘참 외로운거라구요.’말했다. 그리고 술루가 그를 보고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02.
체콥은 조금 소란스럽다면 소란스러운 종류였다. 혼잣말하길 좋아했는데 그게 영어가 되었든 러시아어가 되었든 한번도 알아들은 적은 없었다. 늘 옆자리에다가 초콜렛을 쌓아두고 있었기에 술루는 그가 단 음식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한번은 럼이 들어간 초콜렛 하나를 주었는데 그가 정말 난감하단 얼굴로 ‘감사합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감사한 얼굴이 아닌데?’
‘아뇨. 진짜 감사하긴 한데요.’
술루는 그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호의는 무시한적 없었고 덕분에 초콜렛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쌓여갔을 뿐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술루는 그가 초콜렛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여사원들에게 ‘사실 그는 초콜렛을 좋아하지 않아요.’하고 대신 말해주었다. 그럴 때면 하나같이 그녀들은 왜 말을 안했냐며 놀란 얼굴을 했고 체콥은 수줍으면서 난감한 (분명 그녀들에게는 모성본능을 자극할만한) 얼굴을 하며 미안해서 말을 못했다고 말했다. 그녀들이 초콜렛을 들고서 사라질 때에 술루는 오지랖이란 것을 알면서도 ‘암만 남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렵더라고해도 너를 위해서든 그녀를 위해서든 말할 필요가 있는 거야.’하고 말했다. 그에 대하여 술루는 체콥이 조금 딱딱하게 나오거나 못마땅한 반응을 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체콥은 술루의 코앞으로 의자를 끌고 다가오며 그의 손을 꼬옥 잡고 ‘미스터 술루는 정말 절도 있고 멋있습니다. 그게 기사도란 건가요?’하고 말했다. 딱히 보지 않더라도 자기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일동 손을 멈췄을 것은 뻔했다.
뭐 체콥은 이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술루는 이에 대해 천재들은 원래 이정도로 독특한 면들이 있는건가. 하고 대수롭게 생각할 뿐 별다르게 여기진 않았다. 원래 모든 시작들이 그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듯이. 딱 그 정도였다.
03.
술루가 처음 사귄 여자는 활발하기보단 지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여자였다. 같은 생도였고 우후라 처럼 언어학을 전공했는데 범생이처럼 생긴 얼굴만큼이나 말수도 적었고 바라는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이 있으면 책을 읽거나 혹은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했다. 사귀고 있다는 표현은 허락되고 있었지만 와닿을 정도의 소통은 없었다. 그러나 술루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분명 연결되는 부분이 있고 이 부분은 딱히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숭고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술루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그와 지내는게 외롭다고 했다. 사실 충격 받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술루는 최대한 그것들을 이해하는 척 했다. ‘응, 그래 알고 있어. 미안해.’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뺨을 맞아 봤다.
04.
‘미스터 술루! 이거 같이 드시지 않을래요?’
‘미스터 술루! 이 부분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미스터 술루! 지금 휴게실가서 영화보기로 했는데 같이 안보실래요?’
‘미스터 술루, 함장님이 저를 개인적으로 부르셨는데 제가 뭐 잘 못한게 있는건 아니겠죠?’
‘미스터 술루! 도스도예프스키 읽어보셨어요? 톨스토이는요?’
‘미스터 술루, 펜싱 배우셨다면서요. 자세히 어떤 건가요? 그냥 칼싸움과는 절대 다르죠?’
‘외로운 거네요.’
‘그건 참 외롭다구요.’
05.
술루에게 야근은 지나치게 익숙했고 술루의 삶에서 그걸 빼놓는다면 아쉽다는 표현이 보통 아쉬운게 아닐 정도였다. 긴 항로인만큼 여러 사람들이 늦은 시간까지 조종실에 있었지만 어째선지 매번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러시안 보이도 자주 야근타임에 보이곤 했다. 거의 스크린에 얼굴을 박고 자는 체콥을 깨우며 술루는 ‘차라리 들어가서 자. 넌 야근 할 것도 별로 없잖아.’하고 말했다. 그리고 매번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는데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졸려요.’ 전에 듣기로 술루는 보통 저녁 9시면 잠이 들었고. (‘초등학생이야?’‘하지만 그 시간에 졸린걸요.’) 딱 9시만 지나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함장은 ‘9시 지나면 저 녀석 앞에 세우지마. 졸음운전 위험하다고.’하며 놀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체콥은 시종일관 코를 박으며 졸고 있었고 삑삑거리는 소리에 일어났다가 다시 코 박기에 열심이였다. 뭐라도 덮어주고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담요 따위는 없었다. 당연했다. 졸리면 가서 자면 되니까. 담요 따윈 필요 없는 것이다. 결국 술루는 포기하고 담요를 덮어주는 대신 좀더 편하게 엎어질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웅크려드는 소년을 보니 조금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06.
‘초신성이에요.’
‘나도 알아.’
‘어렸을땐 저게 정말 궁금했어요. 별이 죽는 순간은 역시 스케일이 다르구나 싶어서요.’
‘사람이 죽는 순간도 의미 있어.’
‘물론이죠! 하지만 어쨌든 별이니까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체콥은 잔뜩 격양되어있는 목소리로 말했고 술루는 그래. 하고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식사를 끝나고 이동하는 중에 술루는 두꺼운 창 너머의 별을 가리켰다. 저 혼자 재잘재잘 떠들다가 또다시 영문 모를 고향언어를 뱉어냈다. 정말 희한한 말이네. 술루는 특히나 그가 뱉는 말들이 더욱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쯤 러시아엔 눈이 올 거에요.’
‘거긴 365일 눈이 오잖아.’
‘모스크바 말이에요. 모스크바에도 봄은 있단 말이에요.’
‘모스크바가 고향이야?’
‘네. 붉은 광장에 눈이 쌓이면 엄청나요.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수부한 눈을 헤치고 지나가요. 아무렇지 않게요. 저도 어렸을 적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오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뭐 그렇겠지. 고향 이야기를 신나라 하는 체콥을 보며 술루는 그가 정말 매번 신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쉴새없이 그는 신나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구나. 겨울에 이어 모스크바의 봄을 찬양하는 소년을 보며 술루는 자신이 우주에 있는 동안 계절을 생각한 적이 없었음을 알았다.
07.
‘들어가서 자라고 하지?’
‘그래도 안 들어가더라고요.’
‘엄마 품에서 자려는 새끼오리인가.’
‘재미없습니다.’
맥코이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는 술루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툭 치곤 나가버렸다. 조종실은 조용했다. 머직이서 누군가 스크린을 두들기는 소리를 제외하면 모든게 조용했다. 아니 조용한건 아니었다. 9시 10분부터 꼬꾸라져 잠들기 시작한 러시아 소년의 숨소리가 있었다. 술루는 방에서 가져온 곤색 담요를 체콥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괜히 의식되어 주변을 보았지만 자신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담요를 덮어 주는게 좀 우스운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어미오리 같은가. 얼마 전부터 자신에게 붙은 별명을 되짚어 생각했다. 별로 유쾌하진 않다만, 불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술루는 조용히 자는 소년을 내버려두고 내일의 항로를 계산했다. 하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다. 머릿속은 간단한데 자꾸 깊숙한 어딘가가 허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은 충분히 먹었다. 야근을 생각해서 부러 든든히 먹기까지 했다. 배가 고픈건 아닐 터였다. 그럼 대체 뭐지. 역시 새벽 시간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잡생각이 끼쳐오자 차라리 이럴바엔 들어가서 잠이 자는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바로 실행에 옮긴 건 아니었다. 그럴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술루는 잡생각을 털어 놓으려는 듯 머리를 훅 흔들고선 다시 스크린에 집중했다. 1분, 3분, 6분, 7분. 고작 7분이었다. 뭐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리고 그때 넓은 스크린 너머로 유달리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초신성. 별의 죽음이었다. 술루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음 순간은 태어나는 순간보다 더 밝게 빛난다. 별들의 죽음은 그랬다. 술루는 집중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자신도 모르게 길고 긴 시간 동안 그것을 보고 있었다.
‘미스터 술루.’
시선을 돌렸다. 비스듬히 엎드려있는 체콥이 술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졸려보였고 조금은 나른해 보였다. 평소의 분위기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술루는 멍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체콥을 핀잔하려 했지만 이내에 들려온 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외로워 보입니다.’
체콥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엎드려서 술루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술루는 ‘아.’하고 작은 소리를 내면서 어떤 말이라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체콥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려 술루의 왼쪽 가슴께를 검지로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