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창고 열쇠가 없어져?” “그래.” “그걸 근 2주 동안이나 몰랐단 말이야?” “그래. 3번 창고는 거의 쓸 일이 없으니까.” “그게 505호에 있는 것 같아?” “암만 찾아도 없으니까 거기 떨어뜨린게 아닐까 싶어서.” “그럼 밤에 손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 “사실... 좀 민망해서.” “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거야?”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 거야! 그냥 키나 빨리 내놔!”
메리가 신경질을 내면서 카밀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번에 쥐를 찾다가 키를 떨어뜨린 것 같다며 마스터키를 달라는 것이다. 메리의 수줍은 볼이 매우 의심스럽지만 카밀로는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냥 줄 수는 없어.” “뭐야? 너 지금 나한테 뇌물이라도 받겠다는 거야?” “...날 어떻게 보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이 쓰시는 방의 열쇠를 함부로 줄 수가 없다는 거야.” “와, 너 많이 컸다? 내가 뭐라도 훔칠 것 같아?” “메리. 흥분하지 말고 들어봐. 나는 널 믿지만 만일의 일이 있어. 네가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더라도 이전에 없어진 물건이 있어서 너에게 피해가 가면 어떻게 해?”
메리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지?’하고 속삭였다. 카밀로는 ‘오, 하나님.’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사악한 저를 용서하세요.’하고 기도 올렸다.
“나랑 같이 가자. 곁에 있어줄게."
*
날씨가 썩 괜찮았다. 다름없이 사내는 자리를 비웠다. 메리와 카밀로는 505호의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어쩐지 죽음의 뱃사공을 기다려야할 것 같았다. 그만큼 그들에게 505호는 지옥의 문이었다. 메리는 어쩐지 몰라도 카밀로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있으니 더욱 깊이 지옥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옳은 걸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밤마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마리아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덕적이던 비도덕적이던 지금 앞에 있는 일은 매우 떨리는 일이었다. 카밀로는 잔뜩 긴장한 메리를 옆에 두고 키를 넣고 돌렸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자 메리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자 커튼이 쳐져 있는지 어둡기만한 공간이 그들의 눈에 들어섰다.
이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곳이었다.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탁하고, 여전히 고요한 공간이었다. 다른 방과 별다를 것이 없는데도 퍽 다른 공간같이 느껴졌다. 메리는 숨을 흡 들이쉬더니 자신이 예전에 돌아봤던 공간을 돌아보겠답시고 슥 사라졌다. 그제야 카밀로도 정신을 차리고 다이어리가 있을 테이블을 찾았다. 그곳은 동화속의 그림과도 같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카밀로는 조심스럽게 다이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전과 같은 실수가 없도록 영수증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받쳤다. 더 많아진 영수증이 있었고 또 글씨가 많아진 다이어리가 있었다. 카밀로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카밀로는 당황했다. 독일어로 된 것도 있었고 알아보질 못한 언어들도 있었다. (아랍어일까? 아니면 히브리어?) 덕분에 카밀로는 눈알만 땡굴땡굴 굴릴 뿐이었다. 그나마 휘갈긴 필기가 쓰여 있는 영수증은 카밀로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여 있었다. 카밀로는 그것들을 가만히 읽었다. 주변에는 메리가 사그락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밀로는 커튼으로 겨우 스며드는 빛들을 통해 서 있었다. 그저 읽기만 했다. 짧고 간단한 단어들 사이로 남자가 떨어뜨린 감각과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의 얼굴위로 보이지 않는 애절함이 절제된 문장들이 되어 표면위에 떠올랐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카밀로! 찾았어!”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밀로는 급하게 다이어리를 덮었다. 덕분에 영수증들이 흩날리며 떨어졌다. 저번과 같은 실수에 카밀로는 허겁지겁 영수증들을 치웠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테이블위에 올려두고 엉성한 발걸음으로 메리를 향했다. 메리는 창고 열쇠를 들고서 카밀로를 향해 흔들고 있었다. 거봐. ‘내가 여기 있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의기양양했다. 카밀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녀의 손을 잡고 룸 밖으로 나와 열쇠를 걸어 잠갔다. 메리는 다급해 보이는 카밀로의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카밀로는 ‘공기가 답답해서.’하고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한 뒤에 지을 수 있는 가장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메리의 등을 떠밀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었다.
*
놀랍게도 카밀로는 편지의 서두를 써냈다. 그리고 놀랍지 않게도 그것은 사내가 꾸깃한 영수증에 적었단 단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사실 그 단어는 그다지 감성적이지도 가슴이 아프다거나 애절하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카밀로는 그 단어를 쓰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사랑의 표현을 쓰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것이 착각이던 착각이 아니던 상관없었다. 그저 카밀로는 자신이 써 내리고 있는 마리아를 향한 편지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면 족했다.
모든 내용이 꽉 찼을 무렵. 카밀로는 새벽빛 가운데 있었다. 어둔 새벽빛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창밖을 보니 비어있는 거리가 활량이 비춰지고 있었다. 카밀로는 잠옷위에 외투를 챙겨 입었다. 두 블럭 옆에 우체통이 있으니 바로 넣고 올 심산이었다. 미리 사놓은 비싼 우표들을 덕지덕지 붙였다. 우표 값만 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별로 아깝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이름을 써내고 카밀로는 문을 나섰다. 호텔의 복도는 조용했다.
우체통에 넣기 전에 카밀로는 하얀 편지봉투를 가만히 마주하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그녀에게 희망과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내부에 잠자고 있는 죄책감은 숨길 수 없었으나 카밀로는 아무렇지 않은척했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카밀로는 추위에 덜덜 떨며 돌아왔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걸인 몇몇이 지나갔다. 호텔의 근처로 다가왔을 때 카밀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쥐 한 마리의 자지러지는 비명을 들으니 정신이 바짝 서는 것이 느껴졌다. 카밀로는 건물 사이의 골목을 바라보았다. 회색과 푸른빛조차 스며들지 않은 곳에서 사내가 서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내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나올법하게 완벽했다. 그리고 완벽한 만큼 부족했다. 사내의 잘 닦인 구두 아래는 쥐 한 마리가 있었다. 작고 연약한 쥐는 사내의 발에 깔려 찍찍 처절하게 울며 발버둥 쳤다. 그는 그저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고요한 만큼 쥐의 울음은 더 크게 울렸다. 남자가 압력을 더 해갈 수록 쥐는 크게 발버둥 쳤다. 카밀로는 그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종국에 쥐의 비명이 사라졌다. 살갗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크지 않았다. 사내가 발을 치우자 내장이 터진 쥐의 잔해가 있었다. 징그럽고 역했다.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카밀로는 사내와 얼굴을 마주했다. 어깨가 흠칫 떨렸다. 사내가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런 공포는 심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느릿한 걸음으로 자신을 스쳐갔을 뿐이었다.
사내가 걸어가는 뒤로 빨간 발자국이 남았다.
*
솔직히 카밀로는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그가 비록 나이대에 비해 의젓하고 성실한 사내였다지만 그는 겨우 20대 초반의 어린 남자일 뿐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아내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감성적인 사내였고 또 드센 호텔의 여직원들에게 눌려 사는 귀엽고도 불쌍한 남자애였다. 겨우 쥐 한마리 죽이는 모습이었지만 카밀로는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도둑질(매우 표현하기 힘든 도둑질이라지만)을 했다니 대범해도 이리 대범할 수가 없었다. 카밀로는 자신이 보았던 이야기를 다른 누구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끙끙거릴 뿐이었다. 자신의 주머니에서 영수증 더미를 발견했을 때는 거의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그때 정신없이 영수증을 주워 다이어리에 끼워 놓는다는게 버릇처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모양이었다. 빨래를 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질 때 꾸깃하게 꺼내지는 영수증과 그 뒤에 쓰여 있는 문구들을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역시 알겠지? 당연히 알거야. 아니지, 그렇게 수많은 영수증 더미가 있었는데 그중 몇 개 없어졌다고 알아챌까? ...당연히 알아챌 거야. 카밀로의 머릿속에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눈앞에서 쥐를 죽인 것은 ‘너도 걸리면 이렇게 밟아주마.’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너무 비약 같은데. 몇 개의 이야기와 몇 개의 가설을 꺼내던 카밀로는 정신이 아득히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사내에게 가서 고백해야할 것 같았다. 차라리 말하고 매맞는게 낫지 모른척하다 걸리면 그거야말로 아주 폭풍 같은 고통이 뒤따를게 틀림없었다.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이야기 같았다. 사내의 귀중품을 훔친 것도 아니고 자그마한 아이디어를 빌린게 전부였다. 하지만 또다시 생각해보면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매우 별거인 이야기였다. 사내가 조용하고 고요하고 우울한 만큼 이 이야기는 심각해졌다. 카밀로는 잘 정돈해둔 영수증더미를 보다가 한숨을 내리 쉬었다. 역시 본인의 성격에 이런 짓은 무리다. 누구를 향한지도 모르는 505호 남자의 감성은 자신이 훔칠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게 비록 마리아를 향한 배려라고 한들. 카밀로의 빛좋은 변명일 뿐이었다.
카밀로는 호텔 제복을 입고 단정한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홀로 내려갔다. 오래된 대리석바닥이 아침햇살을 머금고 반짝이고 있었다. 나른하게 빛나는 대리석바닥을 바라보던 카밀로는 내려오던 걸음을 멈췄다. 쟝 클리옹이 있었다. 쟝은 매우 추리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서 카밀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불뚝 튀어나오는 뱃살과 희멀건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예전의 주인이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카밀로가 새벽에 보았던 걸인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카밀로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시작하며 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쟝은 잠시 잠깐 자신의 앞에 서있는 밀빛 피부의 사내를 보다가 작고 연약한 목소리로 ‘잠시 시간 좀 내주겠나?’하고 말했다. 그의 입속에서 매우 쓴 냄새가 났다. 카밀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텅빈 식당에 앉았다. 주방너머에서는 밀라오씨가 정신없이 요리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요리 때문에 쟝과 카밀로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기 위해 요리에 열중을 하던가.) 30분 뒤엔 손님들이 아침을 하기 위해 내려올 것이었다. 카밀로는 시계를 힐끔 보고 쟝을 보았다. 힘을 잃은 쟝의 피부가 오래된 비단 커튼의 주름처럼 쳐져있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대단해. 호텔이 변함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걸 보니. 네가 멕시칸임에도 불구하고 널 카운터에 내놓은 것은 널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어. 손님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카운터에 유색인종을 내놓는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란걸 넌 알지 모르겠군.”
카밀로는 그 말이 비꼬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잘 파악해야했다. 카밀로의 기억으로 그는 타인에게 칭찬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닐뿐더러 남 비꼬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밀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 있었다. 쟝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403호의 까다로운 남자 이외엔 별 이상이 없다고 들었어. 시시건건 시비라지? 그 사내는?”
카밀로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이 싸가지 없다고 연발하는 403호의 남자는 변함없이 시비를 걸며 호텔의 시설을 걸고 넘어섰다. 정작 정말 까다롭게 보이는 304호의 이태리 여자는 군소리 없이 호텔을 사용하고 있었다. 쟝의 말대로 그를 제외하곤 호텔은 편안히 굴러가고 있었다. 더글라스가 없어도. 쟝이 없어도 잘 굴러가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런 놈들이 하나쯤 있었어.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호텔을 운영하실 때도 그런 놈들이 하나씩 들어와 아버지를 골탕 먹이곤 했지. 정말 짜증났어. 우리 아버지는 그저 미안하다고 말했고 엄마도 옆에서 죄송하다고 고갤 숙였지. 어린 나는 엄마의 치마폭에서 그놈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정말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온 세상에 불평밖에 없는 놈들 같았어.”
갑자기 쟝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떠놓은 따뜻한 차가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호텔은 정말 잘되는 편이었어. 손님도 많았고 유명했지. 너도 알겠지만 유명 인사들은 꼭 우리 호텔을 거쳐 가곤 했어. 그렇게 크지도 멋지지도 않은 곳이었지만 모두가 좋아했지. 방마다 그려진 나무 그림은 엄마가 직접 그려 넣은 그림이었어. 햅번은 그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더군. 사실 난 그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 ...쓸데없는 이야기지.”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정말 쓸데없군.’하고 숨을 삼켰다. 정적이 흘렀다. 메마른 겨울 빛들이 슬금슬금 땅을 기어와 쟝의 어깨를 매만졌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소리도 없이 그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생기를 잃은 그의 뺨에 뜨거운 눈물은 방울방울 맺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카밀로는 그의 앞에 냅킨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냅킨을 붙잡을 뿐 눈물을 닦지 않았다. 아마 눈을 닦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다.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었다. 카밀로는 딸을 잃은 그의 슬픔에 대해서 상상하려고 했다. 유일한 가족이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것에 대하여 상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을 상상하고 공감하려고해도 잘 공감되지 않았다. 대상을 바꿔 마리아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조차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리아가 자신을 배신할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밀로는 그제야 쟝이 불쌍해졌다.
쟝은 손님들이 들어오기 3분전에 자리를 뜨고 사라졌다. ‘잠시 호텔을 부탁하네. 곧 돌아올 거야.’하고 말하는 그의 뒷모습은 지쳐보였다. 카밀로는 이미 식어버린 그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슬픈 것은 쟝 클리옹이 여전히 그의 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
필립이 메리에게 차였다. 마이클은 차일거 뻔한게 왜 고백을 하냐며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유부남 카밀로는 그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이클과 카밀로 그리고 필립은 일과를 끝내고 쉬고 있었다. 마이클은 쿠키를 사왔다며 꺼내왔고 그 순간에 필립은 아무렇지 않게 ‘나 차였어.’하고 말했다. 마이클이 반갑다는 듯이 ‘오오-’하고 탄성을 자아냈다. 마이클의 부채질에도 불구하고 필립은 한숨을 내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마이클 답지 않았다. 마이클은 얌전하다고 표현하기엔 황소 같은 남자애였다. 욱하는 성질도 있었고 터프했다. 그러나 편견은 없어서 유색인종에 대한 거부감도 덜했고 (카밀로에겐 참 고마운 일이었다.)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도 있었다. 필립이 차였단 말에 카밀로는 메리가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했다.
“걔가 그러더라. 자신은 나보단 카밀로같은 타입이 좋다고.”
카밀로가 쿠키를 집어먹으며 ‘그건 거짓말이야.’하고 말했다. 필립이 ‘유부남이라 이거지?’하고 비꼬았으나 카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사실을 말한 거야. 메리는 505호의 남자를 좋아하잖아.’하고 말했다.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기에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가 아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음침하지. 기분 나쁘지. 허우대만 멀쩡한 것뿐인데.” “넌 어떤 여자가 좋은데.” “예쁜 여자.” “거봐.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똑같다니까.”
마이클의 똑떨어지게 대답하는 예쁜 여자란 말에 필립은 ‘여자든 남자든 똑같은가 봐요~’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카밀로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필립, 너도 잘생겼어.’하고 말해줬다. 그러자 필립이 ‘505호의 그 놈보다?’하고 말했다. 카밀로는 다 먹은 쿠키 봉지를 버리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뒤에서 필립이 배신자라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밀로가 가까이 있는 쓰레기통을 마다하고 멀리 있는 쓰레기통까지 다녀온 뒤에 세 사람은 수더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텔에 대한 이야기나 손님에 대한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사실 공통소재가 그것밖에 없었다. 마이클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유부남인 카밀로와 메리밖에 없는 순애보 필립이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마이클은 고자들이 이 방안에 있다며 투정을 부렸다. 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카밀로는 조금 엄숙한 얼굴을 했다. 카밀로는 쟝의 눈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어갈 이야기일 것이었다. 505호 사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카밀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이어리에 대한 이야기도 또 쥐를 밟아 죽이던 모습에 대하여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수증이 떠올랐다. 사실 그 영수증은 언제나 떠올리고 있었다. 다만 어찌할 바를 몰랐을 뿐이었다.
필립과 마이클이 투탁이며 대화를 할 동안에 카밀로는 테이블에 있던 책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수증 몇 장을 꺼냈다. 영수증을 뒤집자 짧은 문장들이 있었다. 이 문장들은 마리아들을 향한 편지들에 이미 실려 갔다. 자신의 이름을 달고서 사내의 문장들이 실려 간 것이다. 또다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지긋지긋했다. 누군가의 소설을 표절한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카밀로는 한숨을 푹 쉬다가 영수증을 곱게 접어 곁에 있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선 사내를 향해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밤에 갔다가 칼 맞아 죽는거 아닐까. 내일 아침에 가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아니야. 요즘은 새벽이 늦게 와서 밤이나 새벽이나 어두운건 마찬가지야. 그러면 칼 맞아 죽는건 마찬가지란 이야기인데. 카밀로에게 고민이 찾아왔다. 사실 처음 맞이하는 고민도 아니었다. 매번 찾아오는 고민이었다. 사내가 찾아오질 않는 것을 보니 분명 영수증의 존재를 모르는 거야. 아니, 알면서 떠보는 것일지도 몰라. 아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뒤에서 필립이 부르는 것도 모르고 카밀로는 주머니속의 영수증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종국에는 외투를 입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용감했던 성경속의 여인처럼 카밀로는 다짐했다. 그녀를 향한 위로도 좋지만 자신의 성격상 이것들을 모른 척 가지고 있을 순 없었다. 대신 카밀로는 사내에게 죽임 당할 것을 걱정하여 마이클과 필립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리고 문밖을 나섰다. 멍한 얼굴의 두 사람을 보며 카밀로는 문을 닫았다.
“내가 10분 뒤에도 안 오면 505호로 찾아와줘. 그리고 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3번째 서랍에 있는 봉투를 멕시코에 전해주고”
그의 애절한 글귀들을 훔치는 것은 비극에 가까웠지만 지금 이순간은 매우 희극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카밀로는 505호의 앞에선 자신의 모습을 다시 다듬고 문을 두들겼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았다. 고요했다. 카밀로는 다시 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또다시 고요했다. ...없나? 마지막으로 문을 두들겼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사내가 돌아오지 않은 걸까. 시간은 그렇게 늦거나 이른 시간도 아니다. 보통 때면 사내가 돌아왔을 때였다. 카밀로는 맥 빠진 기분이 되었다. 용기 내어 왔는데 막상 대상이 없으니 뚱한 기분이 되었다. 다행이란 생각 반, 아쉽다는 생각 반이었다. 카밀로는 뒤를 돌아 돌아가려했다.
“스파이도 아니고.”
카밀로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몸을 돌리자마자 떡하니 있는 사내의 가슴팍이 어둠속에서 겨우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색 코트와 쪽색 스웨터는 그와 더없이 어울렸지만 어둠과도 더없이 어울렸다.
“그렇다고 킬러도 아니지.”
그는 얼어버린 카밀로에게 툭툭 말을 던졌다. 그의 차갑고 눅눅한 눈동자가 카밀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구두를 신은 앞발로 슬리퍼를 신은 카밀로의 발을 짓눌렀다. 발가락을 깔아뭉개는 고통에 카밀로의 입술이 삐뚤어졌다.
“그저 이 먼지덩어리 같은 호텔에 있는 먼지조각 뿐인 것 같은데.”
카밀로는 그의 발아래 깔려죽었던 쥐 한 마리를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 말을 멈추자 더 거세게 카밀로의 발을 밟았다. 힘준 것 같지 않으면서도 내리누르는 힘은 매우 거대해 끙끙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카밀로는 고통에 가라앉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우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사내에게 영수증 몇 장을 내밀었다. 사내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것을 차갑게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발을 때지 않고서 ‘이걸로 뭘 했지?’하고 물었다. 카밀로는 고통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발가락과 발톱사이에서 피가 나는 듯 뜨끈한 감각이 발에 흘렀다. 그는 살짝 발을 땠으나 완벽히 발을 땐 것은 아니었다. 카밀로는 여전히 끙끙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눈에서 살짝 고통스런 눈물이 비쳤다. 발하나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 보니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구나! 카밀로는 그 심각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아내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카밀로의 변명에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어쨌든 아내에게 보낼 편지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서...”
뭐라고 더 말할까. 앞에 있는 사내는 드물게 인상을 썼다. 카밀로는 그가 인상을 쓰고 자신을 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유령 같은 사내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으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이 순간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밀로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그토록 죽을까 두려워하다가도 그의 반응하나하나에 집중하느라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하고 툭 말을 뱉었다. 믿지 않으면 어쩔 텐가. 카밀로는 이젠 뻔뻔하다싶은 생각으로 ‘진짜에요.’하고 말했다. 사내는 열받은 것같기도 했고 어찌해야할 줄 몰라 하는 얼굴 같기도 했다. 아마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얼굴이었다. 카밀로 역시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짧은 정적 후에 그는 ‘하.’하고 어이없단 얼굴로 웃어버렸다.
“네 여자한테 보낼 사랑문구가 생각나지 않아 그깟 종잇조각을 훔쳐가려고 내 방을 들락날락거렸다고?”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리고 매우 차가웠다. 자신이 써 내린 문장들을 ‘그깟 종잇조각’이러고 표현하는 것은자학적이게도 느껴졌다. 사내는 자신이 들고 있던 종잇조각을 찍찍 찢어냈다. 서두름도 없었고 분노도 없었다. 그저 냉정하고 차분하게 종이를 찢었다. 그가 찢어 내린 종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 났나보군. 이딴 쓰레기들을 네 연서에 실어 보낸 것을 보니 말이야.”
그리고 그는 카밀로의 피가 묻은 밑창으로 종잇조각들을 짓눌러 밟고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차분하게 닫히는 문을 보던 카밀로는 한참 떨어진 종이들을 보다가 쪼그려 앉아 그것을 주워 담았다. 카밀로는 미쉘을 향한 그의 저주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저주는 카밀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카밀로는 이미 그 저주에 걸려 있었다.
*
403호의 남자가 자살했다. 필립이 그토록 욕하던 싸가지 없는 남자였다. 천장에 줄을 메달아 죽은 남자의 시체에서는 오물이 떨어졌다. 납빛 얼굴과 보라색 혀가 징그러웠다. 그 와중에서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이 애처로웠다. 필립과 마이클이 시신을 내렸고 내가 하얀 시트에 시체를 돌돌 말았다. 손님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노부부는 금새 사실을 알아차렸다. 304호의 이태리 여자는 대놓고 시신을 운반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담배 끝에서 흩어지는 연기가 마치 죽어버린 남자의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잇기도 전에 연기는 훅 사라졌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시체를 바라보자 기력이 빠졌다. 딱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호텔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뚝 떨어질 것이다. 자살한 남자가 목메었던 방에서 자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없는 손님들이 뚝 떨어지게 생겼다. 카밀로는 발을 쩔뚝이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403호를 치우는 여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다름없는 아침이건만 사람하나가 죽었다는 사실로 호텔은 폐가처럼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슥슥 어디선가 나타날 것 같았다. 카밀로는 눈을 비비며 정신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거듭 속삭였다. 한쪽 발로 몸을 지지하니 사흘 전 남자에게 밟힌 발이 찡하니 아파왔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끼익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를 고쳤다!) 카밀로는 늙은 거북이처럼 끼익거리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가장 밝고 상냥한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한 가지가 떠올랐다. 카운터 옆에 있는 달력을 확인하고 장부를 확인했다. 그랬다. 오늘은 411호의 노부부가 체크아웃 하는 날이었다. 505호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호텔을 먹여 살리는 장기 투숙자였던 그들이 호텔을 나가는 것이다. 그들이 체크아웃하기로 한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지금은 8시니 아직 한참 남았지만 카밀로의 예상이 맞는다면 아침잠이 없는 누부부는 일찍이 나올 준비를 했을 것이다. 오늘의 자살소동 때문에 불쾌감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그저 평소처럼 부지런을 떨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카밀로의 마음은 퍽 불편했다.
느리게 열리는 문 사이로 노부부가 보였다. 카밀로는 정말 거북이같은 엘리베이터의 틈으로 생각했던 것과 다른 어설픈 인사를 건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카밀로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노신사가 카운터로 다가왔을 때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주었다. 열쇠는 따뜻했다. 노신사는 정말 잘 지냈다며 카밀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오늘의 불미스러운 일이 호텔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노부인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젊은 사람이 말이야.’하고 혀를 쯧쯧 찼다. 그러더니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핸드백에서 봉투 한장을 꺼냈다. 그리고 카밀로에게 내밀었다. 카밀로가 당황하자 그녀는 억척스러운 손길로 ‘양도 얼마 없어. 그냥 여태동안 해준게 너무 예뻐서 그런 거야. 젊은 사람이 타지에서 고생도 많을 텐데. 돈도 중요하지만 출산 때면 고향 돌아가. 가족만한게 없다니까.’ 하고 웃었다. 카밀로는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필립이 그들의 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들은 호텔 밖으로 나섰다. 카밀로는 카운터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마중하려 했으나 노신사는 그러지 말라며 막아섰다. 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을 무렵 카밀로는 자신의 손안에 있는 열쇠의 무게를 깨달았다. 그것은 여전히 따듯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나고. 기묘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카밀로는 뒤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도 모른 채로 멍청히 서 있었다. 옆으로 그가 지나갈 때엔 한기가 느껴졌다. 카밀로는 스쳐지나가는 검은 코트를 깨닫고 ‘안녕하세요.’하는 똑 부러지는 인사를 했다. 멍했던 얼굴과 달리 경쾌한 어투였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필립이 노부부를 택시에 태우고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불쾌한 얼굴로 ‘저 양반은 언제 나간다냐?’하고 물었다. 카밀로는 선뜻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내는 체크아웃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대체 사내는 뭘 하기에 이토록 긴 시간 여기서 머무는 걸까.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
재정의 위기였다. 직원들 월급은 물론 세금으로 낼 돈도 없었다. 카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쟝은 소식이 없었다. 사실 쟝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실상 직원들은 제대로된 월급을 받지 못한지 오래되었고, 호텔의 음식 재료들은 밀라오씨가 제일 싼값을 위해 이리저리 뛰면서 만들어냈다. (그의 노고는 대단했다.) 더 이상 그것을 감당 할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 <La Foret>은 푸르른 숲이 아니었다.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있는 처량한 곳이었다.
*
쟝이 돌아왔다. 그는 더욱 수척해보였다. 그가 장부를 봤을 때 카밀로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호텔은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쟝은 직원들을 식당에 모아놓고 이 사실을 말했다. 아침이 엄습하기 전의 새벽은 차갑고 어두웠다. 다행히 쟝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어떻게든 퇴직금은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 중 그 퇴직금에 대하여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쟝이 자리를 비우자 곁에 있던 마이클과 필립은 기다렸다는 듯이 ‘결국은 이렇게 되네.’하고 말했다. 카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쟝은 호텔을 팔기로 결심했다. 이전부터 호텔 부지에 새 건물을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호텔은 무너지고 이 위로 고층 건물이 자리 잡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호텔 라 포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일할 곳을 알아봐야겠지.” “다른 일자리도 괜찮지만 호텔에서 일한게 전부인데. 결국은 호텔 아니겠냐. 그러고 보니 맨해튼 중심 부지에 고급 호텔이 생긴다는데.” “그런데서 우릴 써주겠냐." “우리가 뭐 어때서.”
마이클의 말에 필립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곁의 여자 직원들도 우리랑 별 다를 것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카밀로는 304호의 이탈리아 여자와 505호의 남자를 생각했다. 둘만이 이 호텔에 남아있는 손님이었다. 두 사람에게 호텔의 소식을 전해야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삼일 안으로 호텔을 비워주셔야 한다고. 304호의 여자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고개를 까딱일 것이다. 그렇다면 505호의 남자는 어떨까. 그도 역시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걸까. 그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전치에서 밀라오씨가 카밀로를 불렀다. 카밀로는 비척비척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카밀로를 끌고 주방 뒷골목으로 불렀다. 505호의 사내가 쥐를 죽이던 곳이라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할 수도 없어 카밀로는 순순히 그가 이끄는 데로 갔다. 그는 흰 앞치마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그가 후- 바람을 불자 흰 연기가 흩어졌다.
“호텔 사정이야 익히 알고 있었고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어떻게 하실거에요?” “사실 말이다. 이번에 새로 생긴다는 호텔에서 주방장을 구한다기에 살짝 찔러봤는데 덜컥 함께 하자 그러지 뭐냐.” “아, 정말요?” “그래.” "잘됐네요. 아저씨, 음식 솜씨는 끝내주잖아요.” “모질게 착한 녀석. 넌 어떻게 할거냐.” “다른 자리 알아봐야겠죠.” “고향엔 안 갈거냐? 네 마누라가 그렇게 돌아오라고 성화라면서. 어머니도 돌아오라고 그러고. 암만 그래도 거기서 먹고 살길 없을까.” "아기도 곧 태어날 테고. 어머니 건강도 안 좋으시니 여기서 벌어놔야죠. 그래야 아기 학교도 보내고 대학도 보내고.”
카밀로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자 그는 거친 손으로 카밀로의 등을 퍽 치면서 ‘그럴 줄 알았다.’하고 말했다. 그 말투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와 카밀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담배만 빨고 있던 그가 카밀로에게 살짝 다가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만 괜찮다면, 그 호텔에 널 추천하고 싶은데. 어떠냐.” “네? 거기 고급 호텔이라면서요. 저 같은 멕시칸을 써주겠어요. 여기나 그렇지 다른 데는 안 그래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지금처럼 카운터 보는 거나 벨보이는 무리겠지만, 날 도와서 주방 일을 하는 정도면 괜찮을 거다. 어떠냐.” “전 주방일 하나도 못하는데요.” “배우면 다 하는 거야. 빼지 말고 한번 생각해봐.”
밀라오는 그렇게 말한뒤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고 들어가 버렸다. 카밀로는 그가 남긴 담배 연기 속에 있다가 옷을 훌훌 털어냈다. 담배 냄새를 묻이고 손님 앞에 있어서는 안 된다. 505호의 사내가 호텔을 떠나기 전에 상황을 말해야 했다. 이태리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카밀로는 밀라오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라오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힘써서 자신의 일을 알아봐주는 것도 고마웠고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툭 말을 꺼내주는 것 또한 고마웠다. 좋은 기회였다. 주방일은 하나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마리아와 어머니, 그리고 뱃속의 아이의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카밀로가 다시 옷을 털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문이 끼익 열리고 밀라오씨의 얼굴이 비췄다.
“너네 어머니한테 전화 온 모양인데? 어서 받아라. 국제통화 요금 만만찮은거 알지?”
그의 장난스런 말에 카밀로는 허겁지겁 카운터로 뛰어가 엎어져있는 전화기를 받았다. 어색한 영어 대신 친숙한 모국어로 인사를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카밀로가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물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고향에서 살적에 카밀로는 까만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웠다. 사실 키웠다는 표현은 아닐지 모르겠다. 길에서 살아가는 어린 녀석을 도와준 것뿐이었다. 밥도 주고 놀아줬었다. 비오는 날이면 몰래 집안으로 들였다가 옴팡지게 혼난 적도 있었다.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카밀로는 엉엉 서럽게 울었다. 집안이 떠내려갈 정도로 울어재꼈고 어머니는 울지 말라고 카밀로를 타박하면서도 안아주었다. 죽음이란 참으로 사람을 서럽게 만들었다. 더러운 길 고양이 한 마리가 죽었을 뿐인데도 카밀로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었다. 가슴은 타는 듯 했고 목은 자꾸 말라왔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카밀로는 울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사람들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카밀로는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이 야속해졌다.
얼굴을 본적도 없는 아이가 죽었다고 했을 때 카밀로는 어떤 말을 뱉어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주변은 시끄러웠다. 그녀는 계속해서 울었고 카밀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카밀로는 믿고 싶지 않았으나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홀을 가로질러 505호의 사내가 지나갔다. 그를 붙잡고 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카밀로의 입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스쳐지나갔다. 카밀로는 그가 야속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려 했다. 그러나 겨우겨우 참아냈다. 곁에 있던 필립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카밀로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며 창의 기다란 커튼을 슥슥 치워냈다. 하늘이 뿌옇게 흐려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눈이 내렸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쟝이 땅을 팔겠다는 동의서를 작성하러 간 동안에 카밀로와 직원들은 호텔의 장례식을 준비해야했다. 카밀로는 304호의 이태리 여자에게 갔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그녀에게 호텔의 사정을 알렸다. 카밀로가 예상한대로 그녀는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카밀로가 어색한 기류에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쉽네. 좋은 곳인데.’
그리고 슥 방문을 닫았다. 그 말을 들으니 카밀로는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참아냈다. 꾹 참았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방의 시트를 치워내고 물건들을 포장했다. 이 물건들은 호텔의 이름을 달고 경매장으로 갈 것이다. 비록 비싼 값에 팔리진 못하겠지만 몇몇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쥐어지거나, 골동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지 못한 물건들을 사라지겠지. 엘리자베스는 물건을 포장하며 훌쩍 거렸고 메리는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들은 호텔을 사랑하고 있었다. 언제나 투덜거리며 언제쯤 이 낡은 호텔을 떠나는 것이냐고 한탄했지만 내심 호텔에 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들뿐 아니었다. 마이클과 필립은 그녀들이 박스에 담은 물건들을 날랐다. 트럭위에 날라 사라지는 물건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석식은 오늘까지만 제공되었다. 밀라오씨는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그는 사적인 돈을 들여 정성스런 음식을 차렸다. 304호의 이태리 여자뿐 아니라 모든 직원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물론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녀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가 살았던 나폴리의 이름을 딴 파스타와 피자는 아주 맛있었다. 304호의 여자는 한참 음식을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우리는 그녀가 혹여나 직원과 손님이 함께하는 이 비정상적인 자리를 불쾌하게 여기는게 아닐까 했지만 착오였다. 그녀는 근처의 술집에서 포도주 네 병을 사왔다. 카밀로는 역시 이태리 사람은 뭘 안다며 클클 웃었다. 마지막 만찬에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 자리에는 쟝과 505호의 남자만이 없었다.
304호의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했다. 카밀로는 ‘이태리로 가시나요?’하고 물었다. 그녀는 특유의맹하고 건조한 얼굴을 하며 ‘이태리엔 돌아갈 곳이 없어.’하고 말했다. 그리고 카밀로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주고 호텔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 호텔이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난 뒤에 직원들은 잠자리로 돌아갔다. 메리는 두껍게 옷을 챙겨 입고 가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 필립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메리에게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됐다고 말했지만 그는 ‘너 뉴욕의 밤이 얼마나 험한지는 알고 그러냐.’하고 그녀를 훈계했다. 결국 그녀는 필립을 대롱대롱 달고서 밖을 나섰다. 곁에 있던 엘리자베스는 나가는 둘을 보다가 ‘메리는 505호의 남자를 보내야하고, 필립은 메리를 보내야하네.’하고 중얼 거렸다. 미란다는 콧방귀를 뀌면서 ‘흥, 메리는 훨씬 낫지 뭘 그래. 본인이 원하면 필립을 붙잡을 수 있잖아?’하고 말했다. 참견이긴 했지만 카밀로는 그녀가 필립을 붙잡길 바랐다. 필립은 괜찮은 사내였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갔을 때 카밀로는 호텔의 일부분을 소등했다. 그리고 마지막 손님을 기다렸다. 505호의남자는 평소보다 들어오는 시간이 늦었다. 어쩐지 그 혼자가 이 호텔의 손님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호텔은 적막했고 서늘했다. 주변이 조용하자 자꾸 마리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유산한 뒤엔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그녀의 몸은 괜찮을까. 아이는 잘 묻어 줬을까. 묻을만한 땅은 있었을까. 어쩌면 시신은 그냥 버려버렸을지도 모른다. 예전 옆집의 몰리나도 유산을 했었다. (그녀는 게릴라군의 아이를 가졌었다.) 그녀는 아이를 묻어주길 바랐지만 의사는 태아의 시신을 버렸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워졌다. 카밀로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창밖에 소복소복 내리는 눈. 곧 있으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록펠러 센터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설 것이고 아이들은 그 앞에서 소원을 빌 것이었다. 훈훈하고 따뜻한 광경이 생각나자 마음이 그나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참아내고 싶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밀로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마지막 손님이 있었다. 그의 까만 코트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그는 카펫이 깔린 입구에서 어깨에 있는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카밀로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호텔 관련으로 말씀 드릴게 있다면서 주섬주섬 숙박 기록서와 펜을 꺼냈다. 체크아웃에 대한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그를 보니 카밀로는 한 가지가 더 생각났다. 카운터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어 낡은 봉투를 꺼냈다. 카밀로는 그것을 쥐고서 한손으로 기록서를 펼쳤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호텔이 닫게 되었어요. 다른 손님들은 모두 퇴실하셨고 미스터만 남아계시네요.”
카밀로는 살짝 농담조로 말했으나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카밀로를 보고 있었다.
“어, 그래서 삼일 내로 방을 비워주셔야 해요. 호텔을 거둬내고 새 건물을 짓는다고 했거든요. 언제 퇴실하실 건지 알려주시겠어요?”
카밀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전화소리가 크게 들렸다. 봉투를 붙잡고 있는 카밀로의 손이 떨렸다. 받지 않아도 저 전화가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 누구의 전화인지 알 것 같았다. 너무나도 받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남자를 앞에 두고는 더욱이 그랬다. 전화를 받자마자 눈물이 뚝뚝 흐를 것만 같았다. 사내는 전화를 받지 않고 뭐하냐는 얼굴로 카밀로를 보고 있었다. 카밀로는 그저 입술을 딱딱하게 굳히고서 가만히 있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곧 전화가 끊길 것 같다는 공포 속에서 카밀로는 방황했다. 사내는 꾸준히 전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째 인지 모르는 벨소리가 울렸을 때 카밀로는 그 소리가 매우 연약하게 들렸다. 그 이후로 전화가 뚝 끊길 것 같아 급하게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카밀로를 보고 있었다.
카밀로가 말을 하기도전에 수화기 너머로 애써 숨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너무 그리워하기에 선뜻 전화할 수 없었다. ‘보고 싶어요.’ 작고 부셔질 듯한 목소리가 들리자 카밀로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종일 참아냈던 눈물이 후두둑후두둑 정신없이 떨어졌다. 부들거리는 입술을 열지 않기 위해 참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만이 반복 되었다. 카밀로는 그 몸을 하고 시내까지 나온 거냐고 그녀를 타박할 수도, 몸조심 하라는 부탁도, 덧붙여 나도 보고 싶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내는 조금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남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호텔 내부의 온기로 그의 어깨가 더 축축이 젖어가는 것을 보며 카밀로는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 앞에서 바보처럼 울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돼는 일이었다. 그러나 카밀로는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카밀로의 입술에서 작은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카밀로는 수화기를 아기를 받치듯이 붙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로 ‘나도 보고 싶어.’ 라고 말했다. 여전히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얼굴은 아이가 울듯이 구겨져 있었다. 그녀와 카밀로는 계속해서 서로 보고 싶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3분이 지나자 전화가 끊겼다. 카밀로는 여전히 수화기를 붙잡고 울고 있었고. 사내는 이끼가 돋은 돌멩이처럼 카밀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날 밤 카밀로는 카운터에서 몇 시간이나 눈물을 흘렸다. 차가운 신호음이 그들을 덮치고 시계의 똑딱이는 소리가 울렸다. 사내는 한참을 카밀로의 앞에 서있다 기록서에 날짜와 싸인을 썼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카밀로는 몇 시간이나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게 마치 그녀와 자신의 아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보듬었다.
잔인하게도 시간은 지나갔다. 카밀로는 퉁퉁 부운 눈으로 호텔의 모든 것들을 치워내야했다. 사내는 호텔이 닫히는 마지막 날까지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사내의 방을 제외한 모든 방을 치웠다. 많은 가구들이 사라졌다. 밀라오씨는 아끼던 냄비들을 정리하며 그것들을 쓰다듬었다. 카밀로는 그 모습을 보다가 밀라오씨가 제안했던 것을 떠올렸다. 비록 아이는 잃었지만 삶은 지속되었다. 어머니와 아내를 먹여살려야했고 카밀로도 먹고 살아야 했다. 일은 계속해야했다. 그러나 카밀로의 마음에 망설임이 있었다. 마리아가 힘들어 하는데 굳이 고집하며 이곳에 있어야할까. 카밀로도 그녀가 보고 싶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의 안에 수많은 고뇌가 스며들었다. 어떤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밤이 왔지만 메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호텔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어 했다. 카밀로와 필립은 밖에서 와인 몇 병을 사왔다. 마이클과 엘리자베스는 밀라오씨를 도와 간단한음식을 만들었다. 저번의 만찬같이 특별하진 않았지만 그들에겐 충분히 특별했다. 그들은 옹기종이 모여 처음부터 끝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밀로가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리게 생긴 녀석이 유부남이란 것을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며 깔깔 웃었다. 마이클은 자기도 그랬다며 팔짝 뛰었고 최고 연장자인 밀라오씨는 자길 앞에 두고 그런 소릴 지껄인다며 꿀밤을 놓아주었다.
“호텔이 사라진다니 믿겨지질 않아요.”
메리가 밀라오씨를 향해 말했다. 호텔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밀라오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이곳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은 더글라스를 욕하기도 하고 또 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뚝 멈추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모두가 불쌍해. 모두가 불쌍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러 간다며 자리를 떴다. 카밀로는 비워진 병을 치우면서 ‘자자. 그래야 내일 일하지.’하고 말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자리에 누웠을 때, 침대에 누워있던 필립이 입을 열었다.
“메리한테 다시 고백했어.” “정말? 차인지 얼마 됐다고?” “데려다주는 밤에 그냥 막나가는 식으로 다시 고백했지. 그런데 걔가 갑자기 우는거야.” “뭐? 때린 거야?” “미쳤냐! 그냥 갑자기 울었다고.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냐.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지 말라고 버럭버럭 거리니까 걔가 되레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왜 다시 고백 하냐고. 나참 기가 막혀서”
필립은 그때를 생각하듯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차인 것도 서러운데 왜 고백 하냐고 구박받으니까 짜증나더라. 그래도 걔가 우는게 싫어서 미안하고 했더니 걔가 나한테 폭삭 안기는거 있지?” “억지로 끌어안은 거야?” “안겼다고! 안겼단 말이야! 여튼간에 두 번째 고백에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데. 좀 비겁해도 봐달라면서 저 혼자 가버리더라. ...이거 좋은 의미겠지?” “너희들 오늘은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투닥거리더니.” "그건 걔가 그러길 바라니까 그런 거지. 뭐 어쨌거나 나쁜 느낌은 아니야.”
필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불속으로 파묻혔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다가 잠에 빠진듯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카밀로는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사내에게 전해줘야 할 봉투를 오늘도 전해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내일 마지막 인사를 하며 건네 줘야하게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은 호텔뿐 아니라 사내와도 마지막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
손님이 찾아왔다. 카밀로는 그 말에 기겁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옷을 차려 입었다. 쌀쌀한 날씨 덕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새벽이었지만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몇 분 뒷면 푸르스름한 빛이 떠오를 것이었다. 호텔의 마지막 날 찾아온 손님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돌아가 달라고 말해야겠지. 사실 선택권이 없었다. 그것 하나였으니. 카밀로가 홀로 왔을 때 이미 손님은 카밀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둑한 홀에는 스탠드 하나가 유일한 빛이었다. 손님에게 다가갔을 때 카밀로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휠체어 위에 앉아 있는 손님은 따뜻한 남색 담요를 덮고서 카밀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봐도 함께온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혼자였다. 혼자서 이 늦은 시간에 온 것일까. 이런 사람을 어떻게 돌아가라고 하지. 카밀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 죄송합니다.”
카밀로가 갈라지는 목을 다듬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사내는 카밀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어둠에 가려져 있었지만 푸른색 눈동자는 푸근하고 선량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무릎위로 얹어져 있던 손을 보자 카밀로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저희 호텔은 오늘로 폐장하게 되었습니다.”
카밀로의 말에 사내는 ‘아. 그런가요.’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어투에는 어떤 실망감이나 당황스러움도 없어서 카밀로는 되레 당황했다. 혹여나 다른 이유로 찾아온 건가. 혹시나 이 호텔에 새 부지를 만든다는 사람인가. 어쩌면 쟝의 변호사일지도 모른다. 카밀로가 다물었던 입을 열어 ‘혹시 다른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하고 물어보자 그는 살포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곳에 잘생긴 손님 하나 있죠?”
그는 자신에 대한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황하는 카밀로를 보고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알 수없는 사람 같았다. 카밀로는 그의 휠체어를 밀려 녹슨 엘리베이터를 탔다. 끼익끼익거리는 소리가 부끄러웠지만 그는 음악을 듣듯이 눈을 감고 그 소리를 감상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5층에 내렸을 때 그는 호텔이 멋있다고 말했다. 겨우 푸르스름한 새벽빛들이 호텔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밀로는 그의 말에 호텔 복도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지겹도록 본 풍경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어쩐지 달라보였다. 카밀로는 ‘네. 그러네요.’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멋진 호텔이 닫는다는 게 아쉽다며 한탄했고 카밀로는 본인이 가장 아쉽다는 말을 꺼내며 맞장구를 쳤다. 별말 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밀로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카밀로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어째서 이 남자가 그를 찾아온 것일까.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꼬리를 물고 오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어쩌면 505호 사내의 비서일수도 있고, 적일수도 있고, 친구일수도 있고. 그에게 ‘아는 사람’이란게 존재한다는 것은 신기했다. 505호의 앞에 서자 그는 번호를 보고 살짝 웃었다. 카밀로가 ‘일어나셨을지 모르겠네요.’하고 말하자 그는 ‘일어나고도 남았지요. 지금쯤이면 옷도 다 차려입고 나갈 준비 중 일거에요.’하고 말했다. 마치 그를 몇 십 년이나 지켜봐온 사람처럼 굴었다. 카밀로가 노크를 하려고 하자 그는 자기가 노크하겠다며 불쑥 손을 내밀어 쿵쿵 문을 두들겼다. 노크라기 보단 문을 박살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호텔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카밀로가 당황했다. 아무도 없는 호텔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카밀로가 사내에게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남자의 말처럼 505호의 사내는 말쑥하게 옷을 다 차려입은 상태였다. 그는 카밀로를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카밀로는 문에 가려진 상대를 가리키면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이도 기다릴 수 없었는지 문을 살짝 재끼면서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카밀로는 확답해서 말할 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아주 무섭게 변했다. 마치 휠체어에 앉은 남자를 단번에 목 졸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살벌한 얼굴이었다. 워낙에 어두침침하고 무서운 사람이긴 했지만 이렇게 무서운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기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자신이 좀 더 용감했더라면 휠체어에 앉은 남자를 끌어내고 함께 도망갔을 터였다. 딱딱하게 굳어진 505호의 사내와 휠체어의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으려니 그가 빙긋 웃는 얼굴로 ‘이만 가봐도 되요. 나중에 필요하면 전화로 부를게요.’하고 말했다. 카밀로는 자신이 뜨는 순간 505호의 사내가 그를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여기 있을게요.’하고 말할 배짱도 없어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카밀로가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푸른빛이 유일하게 그들을 감싸고 있는 빛이었다. 카밀로는 그것을 바라보다 코너로 몸을 숨겼다.
시끄러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털털 몸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다시 올라가봐야 하는거 아닐까 고민이 되었다. 마지막 날에 송장을 치우긴 싫었다.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종이가 손아귀에 잡혔다. 카밀로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전해줄 것이 있었다. 그가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영수증더미였다. 카밀로는 쩔뚝이는 발을 끌고 숙소로 돌아와 퍼즐 맞추듯이 영수증을 맞췄다. 테이프로 칭칭 감아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못 볼만한 것은 아니었다. 카밀로는 그것들을 그대로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지고 있어서도 안될것 같았다. 그가 받아줄지 아니면 다시 찢어버릴지는 모르겠지만 전해주고 싶었다. 카밀로는 이것을 지금전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손님이 간 뒤에도 전해줄 수 있지만, 그사이에 일이 벌어지면 말짱 황이니 중재를 하면서 건네주면 되겠거니 하는 꼼수였다.
그런 카밀로의 꼼수를 알아챈 것인지 위에서 쿵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휠체어 넘어지는 소리다. 카밀로는 후다닥후다닥 계단 위를 올라갔다. 내려갈 때는 몰랐는데 올라가는 길은 매우 멀게 느껴졌다. 호텔의 마지막 날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카밀로는 뱅글뱅글 계단을 올라갔다. 이번에는 커다란 노성이었다. 505호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가 이렇게 커다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게 여겼다. 덧붙이는 작은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의 커다란 음성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짓뭉개져 들리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멀게만 느껴지는 5층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소리가 멈춰져 있었다. 그 짧은 단세에 모든게 끝난 건가. 카밀로는 적막 속에서 황망히 걸음을 멈췄다. 그때 자그마한 숨소리가 들렸다. 새의 휘파람소리 같기도 했고 창밖으로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카밀로는 그 소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왔던 소리인 만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카밀로는 천천히 코너를 돌아 먼 치에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푸른 빛 속에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휠체어는 뒤집어져 밀려 있었고. 그 위에 있던 사내는 벽에 밀려 앉아 있었다. 그리고 505호의 사내는. 그의 쭉 뻗은 무릎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카밀로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사내의 메마른 등이 간헐적으로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자그마한 울음소리가 흩어져 나오고 있었다. 505호의 사내가 울고 있었다. 다른 사내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서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카밀로는 그 모습이 얼마 전의 자신 같다고 느껴졌다. 수화기를 붙잡고 울고 있던 자신의 모습과 똑같았다.
남자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굽어져 있는 505호 사내의 등은 새파란 새벽빛을 머금고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추워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알아들을 수 있는 속삭임이었다. 보고 싶었다네. 정말 보고 싶었어. 그 목소리에 사내의 등이 더욱 떨려 왔다. 그리고 그는 남자의 다리를 꼬옥 붙잡았다.
카밀로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손안에 쥐고 있었던 봉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그에게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이런 종잇조각에 애절한 말들을 적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밀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