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은 그가 가지고 있는 호텔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그의 호텔이 이젠 낡고 군데군데 녹슬어 있었지만 쟝은 그것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의 호텔은 여전히 멋있고 품위가 있었으며 전통과 역사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코를 클리옹과 멜 클리옹은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찾아왔다. 친근하고 익숙했던 파리와 달리 뉴욕은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냉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프랑스인 특유의 성질과 감각으로 그들은 삶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어 그들의 목표인 호텔을 지었다. 당시 아들 쟝 클리옹의 나이, 4세였다. 짙은 회색빛의 건물은 외젠 다비의 소설을 생각나게 할 만큼 하는 거칠고 밋밋한 디자인이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클리옹 부부는 이 건물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그들이 둥그런 식탁에 앉아 호텔의 이름을 생각할 때, 4살짜리 아들은 베란다 너머를 보며 ‘Foret! Foret!’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마담 클리옹은 아들의 도전적인 행동에 깜짝 놀라 후다닥 뛰어가 매달린 작은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특유의 높은 콧소리로 아들을 혼내기 시작했다. 코를 클리옹은 그새에 울먹거리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면 안 돼. 너무 위험하단다.’ 하고 나직이 말했다. 쟝은 아버지의 다리를 잡으며 통통한 두 손으로 베란다 너머를 가리켰다. 코를의 면바지에 아이의 눈물이 스며들었다. 마담은 아들을 혼내는 법이 없는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아내의 투덜거림을 못들은 체하며 코를은 아들을 안아들었고 아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바깥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숲이 있다고 했지. 센트럴 파크는 이쪽에서 반대편인데. 코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디에 있는걸까? 우리 아들이 찾은 장소는?’하고 물었다. 아이는 한손으로는 눈물을 닦고 한손으로는 도로 건너, 새로 짓고 있는 건물(아마 은행이라고 알려진)을 가리켰다. 그곳엔 밋밋하기 짝이 없는 건물과 주변에 널려있는 페인트들, 그리고 인부들만이 가득했다. 물음표를 띄운 코를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어디?’하고 대답하기 전. 그의 아들이 다시 한 번 ‘Foret!'하고 외쳤다. 한동안 아이의 하얀 손끝만을 바라보던 코를은 그제야 아이의 외침이 향해있던 곳을 깨달았다. 건너편, 짓고 있는 건물의 밑에 수없이 놓여 있는 녹색 페인트들. 그것은 마치 외로운 뉴욕에 놓여있는 작은 숲과도 같이 보였다.
HÔTEL LA FORÊT
ERIC AND CHARLES's SHORT STORY 2012. 10
카밀로는 멕시코에서 온 20살의 청년이었다. 멕시코의 대지를 떠오르게 하는 피부와 새까만 눈동자가 아름다운 청년이었으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 동부쪽,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20살 때까지 그곳에서 삶을 지켰다. 그가 살던 마을은 매우 많은 나비들이 계절을 보내던 곳이었는데, 어느 시기가 되면 수만 마리의 나비들이 마을로 날아오곤 했다. 그리고 카밀로는 수만 마리의 나비 떼가 날아오던 어느 봄, 마리아를 만났다. 마리아는 옆 마을의 처녀로 카밀로보다 2살 어렸다. 그녀는 또래보다 여윈 몸을 가졌고 그녀의 자매들보다 예쁜 얼굴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착한 성품과 칭찬받을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카밀로가 마리아에게 커다란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전부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카밀로와 마리아가 결혼한 것은 그가 20살이 갓 되던 해였다. 비록 서양의 어느 나라처럼 근사하고 아름다운 식을 올리진 못했으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꽤나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역시나 카밀로가 20살이 갓 되던 해에, 그들은 이별을 했다. 카밀로가 돈을 번다는 명목으로 멕시코를 떠나던 때에, 마리아는 임신한지 2주째 되던 때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카밀로도, 카밀로의 어머니인 자밀라도, 그리고 본인 마리아 또한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울지 말라는 카밀로의 말에 마리아는 눈물을 참아냈다. 그러나 그를 실은 버스가 떠나자마자 그녀의 때탄 소매가 젖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카밀로가 이곳에 온지 벌써 7달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영어 실력이 제법 늘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래저래 돈을 벌수 있게 되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씩 돈을 받았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으나, 전화 내용이 3분을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국제통화는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비싼데다가, 어머니는 머다란 시내까지 나와 전화를 하셔야했으니, 어쩔 수 없이 비정할 정도로 짧은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카밀로가 전화를 기다리고, 전화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3분 중 1분이라는 시간 때문이었다. 1분 동안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수줍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느다란 음성에서 들리는 떨림과, 앳되고 달콤한 목소리는 온종일 돈을 벌기 위해 쏘다녔던 피로를 날려버렸다. 카밀로는 2개월 전에 들었던 기쁜 소식을 거들먹거리며 몸은 괜찮냐고 물었다. 그리고 덧붙어 아이는 건강하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보일리가 없는 끄덕임으로 대답을 하곤 했는데, 비록 보이진 않아도 그 모습이 선하게 보여 카밀로는 웃어버렸다. 짧게 남은 시간동안 카밀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건강하라는 말과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붙이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어린 부부의 애정 어린 마지막 인사를 기다려주지 않은 채로 전화는 끊겨버리곤했다. 언제나 카밀로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함에 아쉬워했다. 그것은 반복되는 아쉬움이었다.
그래서 생각 했던 것이 편지였다. 잡화점에서 사온 하얀 편지지와 역시나 하얀 봉투를 매만지며 어떤 말을 써 내릴까 고민했다. 보고 싶다고 말할까, 아니면 가끔은 견딜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린다고 말할까.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다. 난 건강하다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카밀로의 머릿속에 몇 번이고 단어들이 뒹굴며 문장을 만들어내려고 힘썼으나,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축 늘어진 손바닥 한 쌍뿐이었다. 어떠한 말도 쓸 수 없었다. 가슴속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편지 위로 단순한 몇 글자도 써 내릴 수 없었다. 보고 싶다는 그 한마디도 쓸 수가 없었다.
*
뉴욕 외각에 있는 <La Foret>은 프랑스인 쟝 클리옹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렇게 커다랗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건물이었지만 제법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으로 많은 유명인들이 다녀간 곳이었다. 오드리 햅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한 세기를 주름잡던 여배우들의 사랑을 받은 호텔이었을 뿐 아니라, 영화감독들의 촬영장소가 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으레 시간이 그러하듯이 바람에 쓸려가는 먼지처럼 명성과 유명세는 흩어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사장인 쟝 클리옹과 그의 밑에 있는 몇 명의 직원들. 그리고 아주 적은 손님들 뿐이었다. 그러나 쟝은 이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예상하기로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호텔을 지키다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명백하게 예상하자면 그가 죽자마자 그의 유일한 딸 미쉘이 유언을 어기고 호텔을 팔아버릴 것이었다. 이것은 카밀로가 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래살길 바라는 유일한 이유였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호텔에는 아주 적은 손님들만 머물고 있었다. 304호의 이태리 여자, 411호의 인상 좋은 노부부, 오늘 들어온 403호의 (필립의 말을 빌리자면) 싸가지 없는 남자, 그리고 최근 직원들 사이에서 끝없이 거론되고 있는 손님, 505호의 그 남자. 이렇게 다섯뿐이었다.
505호의 남자가 계속돼서 거론되는 이유는 그의 화려한 외모와 미스터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남자의 이야기는 여종업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청소를 맡고 있는 메리가 남자의 수려한 외모를 칭찬하자 함께 일하는 미란다가 손뼉을 치면서 동조했다. 그리고 또래의 엘리자베스까지 합세하여 남자의 추측되는 성격과 직업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그가 윌 스트리트의 유명 사업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니면 고위 공무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 종업원들은 달랐다. 음침한 분위기로 보아 마피아 간부거나 아니면 잠입하는 형사일거라고 수군거렸다. 남자 종업원들의 질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들은 그렇더라도 너무 멋있을 거라며 입을 모아 꺅꺅 거렸다. 그럴수록 그들의 질투는 커져갈 뿐이었다.
남자의 이야기가 더 잦아 진 것은 지난주에 있던 작은 소동 때문이었다. 몇 달 전부터 정부의 절약정책으로 호텔은 11시 이후에 소등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의 건의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되고 있었으나 (이렇게 적은 손님인데도 건의가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순찰하는 경찰들에게 기록되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다만 다행이도 중앙로비는 불을 켤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새벽 1시에는 소등을 해야 했다. 그래도 전체를 소등해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날 야간당번은 메리와 카밀로였다. 카밀로는 손님들이 맡긴 금품을 확인하고 금고를 걸어 잠그고 있었다. 메리는 데스크 청소를 마치고 여직원 휴게실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맨해튼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렇게 당번일 때마다 호텔에서 자고 가곤했다. 호텔에서 숙식을 하는 카밀로는 필립이 쿨쿨 자고 있을 숙소를 생각했다. 그때였다. 도어를 잠그려고 하는 순간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불쑥 문을 재꼈다. 덩치의 남자들이 강도라는 것은 어딜 봐서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총 한 발을 천장으로 쏘았다. 그리고 복면을 쓴 얼굴을 들이밀면서 카밀로의 머리를 채로 잡으며 협박하기 시작했다. 메리는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면서 카운터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내에 거구의 사내에게 여린 어깨를 붙잡혔다. 그들은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 총구를 들이밀면서 금고에 있는 돈들을 꺼내라고 협박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 메리는 금고의 번호를 알지 못했다. 금고 번호를 아는 것은 호텔의 주인, 쟝과 전체 회계를 맡고 있는 미스터 조셉 더글라스. 그리고 카밀로뿐이었다. (카밀로가 쟝을 좋아하지 않은 것에 반해, 쟝은 카밀로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믿고 있었다.) 카밀로는 자신의 코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뜨뜻한 촉감을 느끼면서 고민했다. 바보같이 울기만 하는 메리는 당장이라도 총을 맞고 쓰러질 것 같았다. 거구의 도둑들은 매우 성격이 급해보였고 사나워보였다. 메리를 붙잡고 있던 남자가 다시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카밀로는 더 이상 고민 할 수 없었다. 비록 이 호텔에서 쫓겨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는 목에서 턱 막히는 소리를 쥐어짜내며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집중하는 사내들에게 자신이 암호를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니 놓아줘라. 라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사내들은 서로 눈짓을 하다가 거칠게 카밀로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몸을 던지듯이 카운터로 밀어 넣었다. 얼굴이 엉망이 된 메리가 남자의 굵은 팔뚝에 붙잡혀 엉엉 울고 있었다.
카밀로는 코 밑의 피를 훔치면서 금고가 감춰진 나무문을 재끼고 차가운 금고에 손을 대었다. 찰칵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들렸다. 이 안에는 손님들의 소중한 물건이 담겨 있었다. 카밀로는 손님들이 품에서 내어놓았던 물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던 노부부의 얼굴 또한 떠올랐다.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지켜낸 것들을 나쁘고 부도덕한 인간들이 훔쳐간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빈약하고 나약했다. 마지막 번호를 남겨놓자 카밀로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얻어맞은 코끝이 얼얼했다. 마지막 번호를 맞추자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카밀로는 바닥에 내쳐졌다. 사내들이 금고 앞으로 앞 다투어 나와 자신들의 품안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엎어져서 보고 있으려니 카밀로는 곧장 서러워졌다. 살려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으나 살아야 해서 서러워졌다. 뒤에서 카밀로의 어깨를 잡는 따뜻한 손이 있었다. 메리의 흔들리는 두 손을 느끼며 카밀로는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로비로 어둠이 떨어졌다.
“그때 내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단 말이야. 얼마나 무서워. 사방은 어둡지. 믿을거라고는 카밀로밖에 없는데. 그래서 더 불안하지.”
“저기 나 옆에 있거든.”
“그런데 어둔 곳곳에서 비명소리랑 신음소리가 들리는거 있지! 어리둥절해서 카밀로 옷깃만 꼬옥 잡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툭 켜지더라고.”
카밀로와 그녀의 주변에는 쓰러진 장정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엎어져 있는 바닥에는 피가 묻어나온 청동 컵이 있었다. 쟝이 프랑스에 다녀오면서 샀던 전시용 세트였다. 술이 차있어야 할 컵에 핏자국이 묻어나오니 어리둥절하기보단 공포가 앞섰다. 그녀가 피에 질겁해 카밀로의 품안으로 덤벼들었다. 카밀로는 당황한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손끝으로 그녀의 어깨를 겨우 토닥였다. 카밀로가 겨우 그녀를 일으키고 자신의 흔들리는 다리를 지지했을 때 곁으로 지나가는 구둣발 소리를 들었다. 505호의 남자였다.
카밀로는 그 순간에 사내의 얼음같은 얼굴을 보았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고 막 가죽장갑을 벗으며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사내는 카밀로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낡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끼익끼익하는 소리가 한참동안 울리더니 종국에 별로 상쾌하지도 않은 벨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 받을 정도로 느릿하게 열리는 문에 남자는 인상하나 찡그리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가뿐히 몸을 실어 넣고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때부터 그가 그의 침실로 도착하는 때까지 엘리베이터는 시끄럽게 끼익 거렸다. 그러나 카밀로는 그것을 신경 쓸 세가 없었다. 그저 카밀로가 예측하는 것이라곤, 그가 저 입구 옆의 스위치를 껐다 켰을 거란 예상하나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손님이 그 컵을 던져서 개자식들을 맞췄다고?”
“청동 식기세트는 입구 쪽에 전시되어 있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컵에다가 그릇에다가 스프 그릇까지.”
“한순간에 세 놈의 머리를 탁탁탁! 맞췄다고? 그것도 불끈 상태에서? 그게 말이 되냐?”
“누가 알아? 전직 사격선수인지.”
“마피아라니까.”
“또 그 소리.”
메리와 필립이 투닥거리고 있는 것을 보며 카밀로는 사내의 얼굴을 생각했다. 손님도 없고 더불어 돈도 없는 La Foret에 기묘한 남자 손님이 찾아온 것은 어쩐지 우연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치부하기엔 세상일이 알 수 없다지만, 역시나 같은 의미로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이상한 기분이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마치 얼음 같은) 얼굴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불현듯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그것은 매우 괜한 것이었다. 카밀로는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궁금증을 접어 내렸다. 다만 사내의 외향과 무뚝뚝함에 반한 여자들의 황홀경의 목소리만이 듣고 있을 분이었다. 메리는 박수를 깔짝깔짝 치면서 뺨에 홍조를 만들었다. 곁에 있는 필립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숙소에 내버려두었던 편지가 생각났다. 그러자 더 이상 505호 남자 손님은 생각나지 않았다.
*
쟝이 호텔을 쑥대밭으로 만들듯이 굴었다. 물론 이것은 그만큼 그가 요란을 떨었다는 의미지 실제 호텔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단 뜻은 아니었다. 쟝 만큼이나 호텔을 아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쟝은 직원들이 마대자루라도 되길 원하는지 호텔의 청결성에 대해 크게 외쳤다. 그가 지나는 길에 먼지 한 톨이라도 있다면 청소당번의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작살나게 혼나곤 했다. (메리와 미란다,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세 명의 키퍼로 호텔 전체가 깨끗하길 바라냐며 성질을 부렸다.) 그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어느 직원하나 그의 앞에서 큰소리 칠 수 없었다. 그는 사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분명 도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직원들을 세뇌라도 시킬 모양인지 호텔의 아름다움을 여과 없이 드러내야한다고 종일 중얼거렸다. 참을성 많은 카밀로도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가 사랑해마지않는 딸 미쉘이 입국하는 날이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자칭 미녀 삼총사들의 손은 부르터서 엉망이었다. 특히 메리의 손이 심했다. 손등까지 습진이 생겨 아가씨의 손이라고 보기에 흉할 정도까지 되었다. 메리는 사모하는 505호의 사내가 지나갈 때면 자신의 두 손을 허리 뒤로 숨기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무신경하게 지나가는 사내를 뒤로 그녀는 힐끔힐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밀로는 별로 좋지 못한 타이밍이란 것은 알지만 언제 또 쟝이 쳐들어와 자신들을 족칠지 몰랐기에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연고를 내밀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미는 연고에 깜짝 놀라다가 이내 수줍은 얼굴을 짓고는 ‘네가 유부남이라니 유감이다.’하고 말했다. 사실 카밀로는 그 말이 ‘네가 505호의 남자가 아니니 유감이다.’로 들렸다. 그렇다한들 카밀로는 그저 그녀가 애처롭기만 할뿐이었다.
이틀이면 쟝이 그토록 기다리는 미쉘 클리옹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는 파리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중이었고 졸업하는 해에 약혼자인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를 소개 시켜주러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쟝은 딸이 제멋대로 약혼자를 정해버린 것에 서운해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서운함을 잊었다. 호텔은 새 호텔처럼 번쩍거렸고 사방에 꽃향기가 흘렀다. 그녀가 좋아하는 빨간 장미가 철모르고서 활짝활짝 피어 있었다. 마지막 소등하기 전에 카밀로는 카운터에 있는 장미에 물을 갈아주었다. 그리고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필립은 샤워를 마치고 라디오를 켜놓은 채로 침대에 뒹굴 거리고 있었다. 카밀로는 옷을 갈아입고 재빠르게 씻었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피곤했다. 머리를 털고 나오는 카밀로를 향해 필립이 ‘야, 네가 메리한테 연고 줬다며?’하고 말했다. 침대에 엎어져 말하는 불손한 태도였지만 카밀로는 숨이 안 막히는게 용하다 싶기만 했다.
카밀로의 긍정에 그는 고개를 파딱 들더니 ‘그거 흑심 있는 거야?’하고 물었다. 필립이 메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딱히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필립은 그것을 숨기거나 가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카밀로는 침대에 앉으면서 ‘나 유부남이거든.’하고 말했다. 그 말에 카밀로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몸 떨어져있으면 이렇고 저렇게 되는 거라며 결코 듣기 좋지 않은 말들을 중얼거렸다. 카밀로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탁자위에 놓여있는 빈 편지지를 끌어왔을 뿐이었다. 펜을 들어 ‘사랑하는 마리아에게’하고 적어 내렸다. 간만에 적는 모국의 말에 손끝이 저려왔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갈 동안 더 이상 아무런 글자도 쓰지 못했다. 카밀로는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곁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
쥐가 나왔단다. 카밀로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쥐라고?’하고 몇 번씩이나 중얼거렸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울상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곱실거리는 검은 머리가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햇볕에 반짝였다. 카밀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사실 쥐가 있는 것은 큰일이 아니다. 이곳은 뉴욕이었고 뉴욕의 하수구에는 수만 마리의 쥐가 살고 있었다. 가끔씩 이곳으로 쥐가 들락거리는 것은 알고 있었다. 주방에 있는 밀라오씨가 여러 개의 쥐덫을 사오던 것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문제는 쥐가 있다는 자체가 아니라 쥐가 발견된 날이 오늘이란 거였다. 시계는 1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쟝이 그녀를 데리러 온다고 케네디 공항으로 간지 3시간이 넘었으니 이제 곧 돌아올 터였다. 식당에는 이미 그녀를 위한 개인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고 음식들을 따뜻하게 데워진 채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에서는 꽃향기가 진동했다. 영문을 모르는 411호의 노부인은 ‘장미향기가 너무 좋네.’하고 호호 웃으며 노신사와 외출을 나섰다. 혹여나 식사하는 도중이나 그들의 방에 쥐가 나오는 일은 없겠지. 카밀로는 걱정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알았다고 등을 떠밀며 그녀를 위치로 보냈다.
직접 쥐가 5층 복도를 지나간 것을 봤다는 엘리자베스는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쥐가 발견되면 온 직원들도 그렇지만 특히나 청소담당의 그녀들이 크게 혼날 테니 걱정될만했다. 카밀로는 벌써 2주째 떠나있는 총지배인 더글라스를 원망했다. 하기야 있다고 한들 별 도움이 되진 않았을 테니 원망할 것도 없었다. 카운터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지배인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음이 퍽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쟝이 더글라스가 없는 한 달만 힘내라며 직접 위임한 일이기에 싫다고 내팽겨 칠 수도 없었다. 카밀로는 어쩔 수 없이 주방으로 찾아가 밀라오에게 쥐덫 몇 개만 줄수 있겠냐고 물었다. 밀라오는 이를 갈면서 뉴욕의 쥐들을 멸종시키고 싶다고 외쳤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태리 억양에 카밀로는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을 빠져나왔다.
1층 홀 구석에 쥐덫 하나를 놓으며 카밀로는 생각했다. 주방장이 식당과 주방에는 쥐덫을 놓았다고 하니 그곳은 제외하고, 미쉘과 그녀의 약혼자가 머물 5층 홀과 복도 구석에 쥐덫을 놓아야했다.(엘이 쥐를 봤다는 층이기도 했기에 더욱 난감했다.) 카밀로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3층에 멈춰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3층에서 잡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으로 몸을 향할 때 카밀로는 남자와 마주쳤다. 505호의 남자. 직원으로서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남자와 마주친 카밀로는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서 ‘에...엘리베이터 멈췄나요?’ 따위의 질문을 던져버렸다. 손님이 직원에게 물어야할 질문을 직원이 손님에게 물은 것이다. 만약 쟝이 이곳에 있었다면 아주 쌩 난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카밀로는 자신의 머리를 쿵쿵 때리고 싶었다. 사내는 짧게 카밀로를 응시하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1층 홀을 가로질렀다. 사내의 검은 코트에서는 메마른 향기가 났다. 카밀로는 손등으로 자신의 벌건 뺨을 훔치다가 다시 층을 오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카밀로의 옆으로 띠링, 벨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소리에 등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붉은 화살표가 1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낡은 금속 문이 열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엘리베이터 수리공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을 안고서 카밀로는 5층으로 올라섰다. 5층에선 아까 보았던 엘리자베스가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곁에는 메리도 있었다. 카밀로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황하기만하지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5층으로 돌아와 다시 청소를 하는데, 쥐 한 마리가 지나갔다. 잡으려고 어수선히 움직이는데 그놈이 문틈으로 쑤욱 들어가 버렸다. 어떤 방으로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수리공을 부르는게 훨씬 나을 판이었다. 아니,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지. 차라리 쥐를 잡아버릴 기회가 생긴 것이니 훠얼씬 나은 것이었다. 카밀로는 스스로 긍정적인 생각들을 끌어내며 쥐가 나온 장소를 물었다. 그녀들은 선뜻 장소를 가리키지 못했다. 퍽 정신없었는지 카오스가 그려진 눈동자가 그대로 보였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은 쥐를 참 무서워한다. 마리아도 그토록 척박한 땅에 살았으면서도 쥐는 퍽 싫어했었다. 카밀로는 한숨을 쉬면서 복도 끝에 있던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택의 폭을 줄이며 쥐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미쉘의 방에 들어가진 않았는지 확인해야했다. 카밀로가 카운터에서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었다. 방은 상쾌하고 깨끗했다. 몇 번이나 손이 오갔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엘리자베스와 메리는 침대 밑과 테이블 밑, 화장실을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다행히 쥐는 없었다.
그 사이에 카밀로는 비어있는 방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방이 많지 않아서 확인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 명이서 왁자지껄 방을 확인하고 5개의 방을 남겨두었을 때 카밀로는 벽에 부딪혔다. 남자의 방이었다. 눈앞에 떡하니 놓여있는 505라는 팻말을 보며 카밀로는 살짝 뒷걸음질 쳤다. 505호의 남자는 결코 직원들이 자신의 방에 드나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키퍼의 청소도 거절했고 자신이 이 호텔에서 거주하는 동안 그 누구도 505호에 들어오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 본인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남자가 어떻게 방을 사용하는지, 청소는 하는지 아니면 먼지를 쌓아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이클은 아마 남자가 방안 가득히 돈을 쌓아뒀을 거라며 킬킬거렸다. 장단을 맞춘 필립은 시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그러나 여자들은 저질이라며 짜증을 부릴 뿐이었다. 어쨌거나 손님의 프라이버시였다. 손님이 거절을 한 이상 공간에 침입할 수는 없었다. 암만 호텔의 소유인 공간이더라도 손님이 있는 동안은 그곳의 주인은 손님, 505호의 남자였다. 그러나 카밀로의 생각과 그녀들의 생각은 퍽 다른 것 같았다.
카밀로의 뒤에서 버티고 있던 그녀들은 뒷걸음치는 카밀로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들도 알고 있을 505호 접근금지법에 대해 이야기하던 카밀로는 그녀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암만 그래도 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신사분이 돌아오셨는데 쥐가 있으면 그대로 체크아웃을 하고 나가버릴지도 몰라!”
“아니, 내가 보기엔 그냥 쥐를 밟아 죽여서 치울것-”
“메리 말이 맞아! 그분은 우리 호텔 큰 힘을 주고 있는 장기 투숙자잖아! 그런 분들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놓칠 수는 없는 거잖아? 분명 큰 타격을 미칠 거야. 그렇지 카밀로?”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절대로 안에는-”
“카밀로, 우리 호텔 장부는 네가 정리하니까 잘 알고 있을거 아냐. 그분마저 나가버리면 우리 호텔 정말 휘청한다? 그러면 너나 나나 갈 곳 있니? 너 고향에 예쁜 마누라 두고 와놓고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것은 아니지?”
최고의 협박,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카밀로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녀들의 속셈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남자의 방이 퍽이나 궁금할 게다. 그 근사하고 멋진 남자는 대체 이 방에 무엇을 숨기고 있기에 청소와 정리도 마다하고 꽁꽁 감추는 걸까. 이 남자의 방엔 무엇이 있을까. 사내 녀석들의 말처럼 시체 한구라도 떨궈져 있는 걸까. 아니면 돈다발이 널려 있는 걸까. 멋진 남자의 미스터리한 공간을 파헤치고 싶어 하는 여자들에게 밀쳐져 카밀로는 문에 바싹 붙었다. 그녀들은 카밀로와 그가 들고 있는 열쇠 꾸러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금 외출하는걸 봤어. 너희들도 봤을거 아냐. 그 사이에 쥐가 들어갔을 리가-”
“우리 기억 못한다니까. 그 쥐가 ‘음 데드 섹시한 이 남자 방에는 들어가선 안 되겠어.’ 이러고 있겠니? 그 방에 쥐가 없을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너 쥐가 얼마나 빠른지 모르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쥐의 역사를 읊을 판이었다. 카밀로가 열쇠를 바라보며 우물쭈물 거리고 있자 메리는 그의 열쇠를 확 빼앗았다. 그리고 과감하게 키를 꽂아 돌렸다. 달칵하는 소리가 울렸다. 카밀로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들이 켄타로스처럼 느껴졌다. 기센 여자들에게 떠밀려 남자의 공간에 발을 들이민 카밀로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남자의 공간은 추웠다.
불도 안 땐 걸까. 메리가 중얼거렸다. 메리의 말이 사실인듯 난로는 켜진 흔적이 없었고 소형 벽난로 또한 불씨하나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둡고 컴컴한 공간 사이로 커튼 사이의 빛이 겨우 스며들었다. 남자의 방은 다른 방과 다를 것 없었다. 조금 춥다는 것을 제외하고선 똑같았다. 침대와 테이블의 위치도, 바닥의 색깔도, 커튼의 색깔도 모두 같았다. 사내들이 말하던 보석이나 돈다발도 그리고 시체도 없었다. 다만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이 먼지가 그대로 쌓여있었을 뿐이었다. 마치 사람이 없는 공간 같았다. 정말 이 남자가 이곳에서 잠을 자고 생활한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이곳은 사람의 흔적과 온기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도 그것을 느끼는 건지 ‘사람 사는 곳 같질 않네.’하고 중얼 거렸다. 카밀로가 익숙할 대로 익숙한 방을 두리번거리는 그녀들을 부르며 어서 침대 밑을 확인하라고 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허둥지둥 거리며 침대 밑과 화장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카밀로 또한 테이블 아래를 바라보며 쥐를 찾았다. 좁은 공간에서 들썩 거리려니 퍽하고 테이블 밑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카밀로는 끙끙거리며 머리를 벅벅 비볐다. 진동 때문에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다.
다행히 테이블이 너머에 있어서 그녀들은 카밀로의 둔한 행동을 보지 못했다. 카밀로는 눈치를 보면서 떨어진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그리고 카밀로는 낡은 수첩하나를 보았다. 수첩이라고 하기엔 조금 고가로 보이는 물건이었고 크기도 컸다. 다이어리라는 표현이 어울릴법했다. 다이어리라는 어감은 사내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다이어리의 색감이나 질감은 그와 어울렸지만 그가 펜을 들고 글을 써 내리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다이어리가 떨어지면서 흩어져 나온 영수증더미가 있었다. 카밀로는 떨어진 하얀 영수증들을 주우며 다이어리에 끼워 넣으려 했다. 차곡차곡 끼워 넣을 때에 그는 영수증 뒷면의 까만 글씨를 보았다. 휘갈기듯 쓰여 있는 글씨들이 있었다. 카밀로는 숨죽여 그것들을 읽었다. 그 순간만큼은 숨이 멈춰져 있는 것 같았다. 카밀로의 손끝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방 밖에서 으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카밀로는 깜짝 놀라 등을 움츠리다가 손안에 있는 영수증을 다이어리에 허겁지겁 꽂아 넣었다. 그리고 부산스럽게 책상위에 다이어리를 올려놓고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쥐가 없다는 것을 점검했는지 엘리자베스와 메리가 이미 문밖에 서 있었다. 그리고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밀로가 마지막으로 505호의 문을 닫고 잠그며 고개를 들었다. 계단 옆의 난간에 마이클이 넘어져 있었다. 부딪힌 엉덩이가 어지간히 아픈지 끙끙거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마이클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으, 뭐가 쌩 지나가서 깜짝 놀라 넘어졌어.”
“혹시 쥐였어?!”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왜? 쥐가 있었어?”
카밀로가 그 말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 틈새로 쥐가 아래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5층에 있지 않다는 것이 다행일까, 아니면 1층에 있을지도 모른다는게 저주일까. 카밀로가 한숨을 쉬며 허겁지겁 내려가려고 할 때 아래서 쨍쨍히 울리는 미란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쟝이 도착했어!’ 더 이상은 쥐를 잡겠답시고 뛰어다닐 수도 없었다. 전보다 더큰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기니 마이클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잡아왔다.
“맞다. 카밀로. 엘리베이터 멈췄는데 어떻게 하지?”
*
미쉘은 들어왔던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청아한 푸른 눈동자도 그랬고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과 뽀얀 뺨이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표독스러운 눈초리만큼은 아름답지 못했다.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도도함은 주변의 사람들을 짓누를 정도로 무거웠다. 그녀의 곁에는 건장한 청년이 있었다. 그녀만큼이나 청년은 멋진 외모를 가진 사내였지만 그녀 못지않은 사치스러움이 있는 남자였다. 어딜 봐도 부자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남녀가 허름한 호텔의 중앙에 있으니 퍽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붉은 장미들을 쓰윽 훑어보더니 카밀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여기에 멕시칸을 두다니 미쳤어요?’
그녀의 표독스러운 말에 카밀로의 어깨가 굳었다. 비단 카밀로 뿐 아니었다. 그의 곁에 있던 동료들과 쟝 또한 마찬가지였다. 쟝은 앙칼진 딸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카밀로는 이곳에 꼭 필요한 인재라며 말을 더듬더듬 이었다. 언제나 방자한 쟝이 저렇게 설설 기는 것을 처음 본 직원들은 역시나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카밀로의 피부색에 대하여 칭얼거렸고 그녀의 곁에 있던 사내는 그저 카밀로를 보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들이 식당으로 사라졌을 때 카밀로는 목구멍이 촉촉이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카밀로의 왼쪽에 있던 조지는 ‘이쁘긴한데 완전 미친년이다.’하고 소곤소곤 말을 뱉었고 오른쪽에 있던 필립은 장단을 맞춰 ‘미친년도 보통 미친년이 아니네.’ 하고 말했다. 카밀로는 조용히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로, 쥐새끼는 가장 중요한때에 등장했다. 호텔이 휘청거리는 마당에도 딸이 온다며 성대하게 차린 식탁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일색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깨작거리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서서 그들이 필요한 음식을 더 가져다주거나 빈 그릇을 치웠다. 뛰어다닌다고 다들 배가고플게 뻔했다. 카밀로는 미쉘의 약혼자 앞에 있는 빈 그릇을 치우며 조심히 자리를 옮겼다. 그때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미쉘은 앉아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쟝과 약혼자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카밀로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는 작은 생물을 봤다. 그건 틀림없는 쥐였다. 그때 카밀로는 앞으로의 모든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이 톨씨 하나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이었다. 전 직원이 쟝에게 작살나듯 잔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관리를 했기에 쥐가 나오냐는 이야기부터 깨끗하기 만한 홀과 복도를 더럽다고 하며 욕을 덧붙였다. 어쨌거나 쥐가 튀어나왔기에 뭐라고 반항 할 수가 없어 카밀로와 동료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쉘은 성질을 버럭 내며 쥐가 있는 이곳에 못 있겠다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제 약혼자를 데리고서 다른 호텔로 가버렸다. 쟝이 그녀를 잡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쟝의 화풀이는 자연스럽게 직원들에게 돌아왔다. 몇 시간이나 내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카밀로는 총 책임이란 이유로 더 많은 잔소리를 들었다. 어린 카밀로가 감당하기엔 벅찼지만,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제법 시간이 지나있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터라 배에서 꼬르륵 난리가 났다. 곁에 있던 필립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주방 가서 빵이라도 좀 훔쳐와야겠다고 살그머니 방을 나섰다. 걸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카밀로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씻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으니 그래도 피곤이 풀리는듯했다. 어떻게든 하루가 지나고 어떻게든 내일이 온다. 그 불변의 진리가 카밀로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며 카밀로는 정신없이 이불로 파고들었다. 밖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엘리자베스와 미란다가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들도 쌓인게 어지간히 많은듯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메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무사히 도착했을까.) 모두들 고향을 떠나 타지로 온 젊은이들이었다. 사실 젊다는 말보단 어리다는 말이 어울릴지 몰랐다. 어린 나이에 등과 어깨에 짐을 짊고서 살아가는 그들은 모두 겉으로 웃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터였다. 카밀로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기에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스탠드를 끄고 자기 전에 테이블 위로 시선이 갔다. 어제 역시 쓰지 못한 편지지가 살짝 구겨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손자국이 가득했다. 정작 쓰인 것은 하나 없는데 종이가 구겨져 있으니 우스웠다. 카밀로는 편지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펜 또한 쥐었다. 전화를 하지 못한지 꽤 지났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어머니는 건강하신 걸까. 그녀는 이곳의 주소를 모르니 먼저 편지 또한 보내지 못할 터였다. 오매불망 자신의 연락만을 기다릴 마리아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카밀로는 펜을 굴리다가 종이를 바스락거리며 들어올렸다. 종이의 작은 마찰소리에 무언가 떠올랐다. 오늘 낮에 남자의 다이어리였다. 그 안에 착착 정리되어 넣어져있던 영수증들과 영수증 뒷면에 쓰여 있던 글귀들. 카밀로는 자신이 읽었던 글귀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망설임을 멈추고 종이위에 가만히 적어 내렸다.
‘네가 곁에 없단 이유만으로, 수만 번 숨을 멈춘다.’
*
카밀로는 편지를 붙였다. 서두로 시작된 카밀로의 연서는 끊임없이 써 내렸다. 늦은 밤이 더욱 깊어지는 것도 모른 채로 카밀로는 마리아를 향한 사랑을 고백했다. 말로서 하지 못하던 마음이 글이 되어 춤을 추었다. 우표를 붙이고 해외 우편으로 창구에 넣는 순간, 카밀로는 잉크가 스며든 자신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았다. 어쩐지 조금 죄책감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상대가 505호의 남자인 만큼 죄책감은 커졌다. 그리고 죄책감만큼 이기적인 궁금증이 떠올랐다. 누구일까. 그 얼음 같고 석고상 같은 남자의 숨을 멈추게 하는 사람은.
*
한 달이 다 넘어가는데도 더글라스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카밀로는 쟝을 붙잡고 어째서 그가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쟝은 씩씩거리는 얼굴로 ‘그 미련한 놈이 날짜를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돌아오면 잘라버리겠어.’하고 말했다. 그의 분노에 카밀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착잡해진 얼굴로 ‘일이 더 많아지겠네.’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실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편지를 붙인지 벌써 2-3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쟝의 딸 미쉘이 프랑스에서 돌아온지 2-3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쟝은 그녀가 머물고 있는 뉴욕 시가의 중앙 호텔에 들락날락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호텔이 5성급에다가 하룻밤을 묵는데 수백 달러가 든다며 혀를 내둘렀다. 소녀스런 판타지가 묻어났으며 미쉘을 향한 경멸 또한 숨기지 않았다. 구두쇠였던 쟝은 딸을 위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비싼 호텔비용을 내주는가하면 그녀가 바라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그녀를 위해 꽃과 옷을 사주었다. 그뿐 아니라 미래의 사위가 될 거라는 남자에게 정장을 맞춰주고 고급 시계를 사주기도 했다. 사실 그건 좀 미련해보였다.
그것 외에도 2-3주 안에는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마리아에게 편지를 보낸 다음날, 카밀로는 어쩐지 505호의 남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매우 예민해보였고 날카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랬기에 그의 영역에 침범한 세 사람의 흔적을 금방이라도 알아챌 것 같았다. 그날 엘리자베스의 말처럼 그는 호텔에서 몇 안 되는 장기투숙자에 속했고, 그가 내는 투숙비는 호텔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 침범했다는 것을 매우 기분 나쁘게 여기고, 동시에 이곳에서 떠나겠다며 체크아웃을 하게 된다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줄지어 일어날게 뻔했다. 그래서 카밀로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505호의 사내가 카운터로 내려오기 전에 그를 찾아갔다. 때는 아침 9시였고, 사내가 외출하기 전이었다. (사내는 대부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외출을 하곤 했다. 물론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카밀로의 노크에 문을 연 그는 매우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카밀로는 그가 이렇게 나른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기묘한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있었기에 감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제 호텔내부에서 쥐가 발견됐습니다. 그래서 손님의 방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쥐?’
‘아, 네. 혹여나 거취하시는 룸에 쥐가 들어갔나 싶어서-’
‘그래서 쥐는 잡았나?’
‘아...아뇨. 도망가서 못 잡았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카밀로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피곤한 눈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카밀로는 더욱 궁금해졌다. 저 남자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자일까? 아니면 어머니? 어쩌면 숨통을 막히게 하는 숙적일지도 모른다. 카밀로는 닫힌 문 앞에 서서 긴 시간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들이 매우 부질없음을 알았다. 또다시 죄책감이 몰려왔다.
한동안 카밀로는 비어있는 편지지를 바라보지 않았다. 헤밍웨이마냥 밤낮으로 편지지를 끌어안고 끙끙거리던 모습이 사라지자 필립은 역시 사랑이 식은 거라며 비아냥거렸다. 카밀로는 성격상 꺼지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랑은 식지 않았다. 다만 어찌해야할지 몰랐을 뿐이었다. 자신이 보낸 편지가 잘 도착했을지 가늠가질 않았다. 그녀가 쭈글한 편지지를 붙잡고 웃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도 상상가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 편지를 받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밀로가 아내에 대한 허심탄회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여자아이들 입담에 오르기 좋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쟝의 딸, 미쉘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전히 그녀는 아름답고 사치스러웠으며, 아버지의 사랑에 빠져 살았다. 어연일인지 쥐새끼 사건 이후로 아버지의 호텔에 한발자국도 들이지 않았던 그녀가 약혼자도 없이 호텔에 들렀다. 그녀는 너구리 털로 만든 매우 인상적인 숄을 하고 나타났다. 덕분에 호텔은 매우 바빠졌으나 카밀로는 주방의 한 구석에서 그릇을 닦아야했다. 미쉘이 카밀로를 보기 싫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엘리자베스와 메리는 그녀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에 대하여 신나게 욕을 뱉어냈다. 살벌하게 욕을 뱉는 그녀들 옆에서 카밀로는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오후쯤 더 이상 닦을 그릇이 없을 때 주방장은 카밀로에게 쉬라며 눈짓을 보냈고 카밀로는 몰래 중앙홀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제 막 들어서는 505호의 남자를 마주했다. 카밀로는 자신이 주방의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머쓱하게 물 묻은 손을 닦아냈다. 그리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이제 오십니까.’하고 말했다. 부잣집 도련님을 맞이하는 가정부가 된 기분이었다. 카밀로는 남자가 이태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살짝 곁눈질을 하고 스쳐 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쥐는 잡았나.’
그 목소리가 들렸을 때 카밀로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는 이전처럼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밤바다처럼 서늘하고 고요해보여서 가슴 언저리가 선덕해졌다. 그는 본인이 입고 있는 스웨터 재질의 터틀넥을 편하게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터틀넥에 감싸져 겨우겨우 몸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현하자면 말구유속에 연약한 아기 예수처럼) 카밀로는 작은 목소리로 ‘아니요.’하고 말했다. 쥐는 2주째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쟝이 주장했듯이 멀리멀리 호텔을 떠나버렸을 수도 있었다. 카밀로의 말에 사내는 살짝 눈을 깔아 남색 바닥타일을 응시하더니 저 혼자 홀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카밀로는 물에 젖은 솜뭉치 같은 사내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무엇이 그를 저렇게 지치게 하는 걸까. 또다시 쓸데없는 궁금증이 솟아 올라올 때쯤, 누군가 카밀로의 어깨를 툭 쳤다. 정신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야? 저 남자?’
카밀로가 기억하기로 미쉘은 호기심과 사랑에 빠진 앙큼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카밀로의 이런 표현에 메리는 메스꺼운 얼굴을 했다. 자신의 왕자님을 가로채려는 마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쉘은 오고 싶지 않아했던 호텔을 하루에 한번씩 들렸다. 그리고 피부색이 있다며 무시했던 카밀로에게 친근하게 붙어 505호의 남자의 이름과 나이, 나가는 시간과 들어오는 시간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손님의 프라이버시라며 카밀로는 침묵했다. 그러나 결국 앙칼진 그녀에게 거침없는 할큄을 당한 뒤, 카밀로는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이름을 말해야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남자의 이름은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약혼자가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505호의 사내에게 연심을 품는 미쉘을 소녀 삼총사는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말할 것도 없이 메리는 그 중에 최고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들은 점심식사마다 엉덩이가 가벼운 미쉘 클리옹에 대해 정신없이 욕을 퍼부었고 언젠가 당할 날이 있을 거라며 자신의 희망사항을 이야기했다. 사내들은 어쨌거나 돈 많아 보이는 남자가 인기가 좋은 법이라며 담배를 비볐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넌 유부남이니까 이런건 좀 편하겠다.’하고 말했다. 물론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결혼했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만, 20살 때 결혼해야했으며 어린 신부를 두고서 타국까지 와야 했던 카밀로의 심정을 그들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카밀로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괴로운 인생을 살았던 만큼, 그들도 그들 나름의 괴로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쉘을 향한 쟝의 아가페사랑. 505호의 남자를 향한 미쉘의 음흉한 연심.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는 메리의 분노. 그런 메리를 더욱 못마땅하게 보는 필립의 외사랑. 당최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는 쥐 한 마리. 밀라오씨의 봉골레 파스타. 악화되는 뉴욕 증시. 보고 싶은 어머니, 뱃속에 있는 귀여운 아기. 그리고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오늘까지 시간이 흐르는 데는 우스울 정도로 빨랐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미쉘은 1층 홀에서 왔다 갔다 하며 505호의 남자를 기다렸다. 사내는 다른 때보다 훨씬 늦게 호텔로 왔고. 그녀는 사내를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뜻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방관할 뿐이었다. 그녀의 어색한 행동에 대하여 마이클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복합적인 의미였다. 늦은 밤에 그녀의 약혼자가 삐까뻔쩍한 스포츠카를 몰고 와 그녀를 태우고 갔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그의 뺨에 키스를 했다. 쟝은 그런 연인을 먼 치에서 배웅했다. 호텔의 소등시간이 돌아왔다. 카밀로는 소등을 하면서 제발 더글라스가 돌아와 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길 바랐다. 지배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당번인 엘리자베스는 카밀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411호의 노부부에게 라디오가 고장 났다는 인터폰이 왔다. 카밀로는 411호까지 올라가 (여전히 엘리베이터는 고장 난 채로 있었다.) 라디오를 고치려 했지만 결국 고치지 못했다. 노부부는 화내지 않고 젊은 사람이 고생한다며 팁과 땅콩이 담긴 캔을 주었다. 카밀로는 그것을 안고 홀로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금고 점검을 하고 카운터 정리를 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하여 몸을 돌렸을 때 전화가 울렸다. 내부전화가 아닌 외부 전화였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하다니. 대체 누구지? 카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예상치도 못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작고 여린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기보단 서글프고 애처로웠다. 돌아오면 안 되냐는 그녀의 울음 섞인 부탁은 인사도 없이 그저 눈물 섞인 호소로 시작되었다. 편지를 받았는데 너무 기쁘고 슬펐다. 당신이 옆에 없으니까 견디기가 힘들다. 어머니는 잘해주시지만 당신이 없으니 싫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울고 싶다. 숨쉬기가 싫다. 횡설수설한 그녀의 울음에 카밀로는 전화기를 붙잡고 같이 울었다. 고향도 늦은 밤일 터였다. 그 늦은 밤에 아이를 가진 몸으로 시내까지 뛰어나온 그녀가 너무 그리웠다. 그녀의 품과 사랑이 그리웠다. 그러나 카밀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카밀로와 그녀는 전화가 유지되는 3분 동안 끄윽끄윽 소리를 내며 울었다. 세상에서 가장 짧고, 긴 3분 이었다.
카밀로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필립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옷도 벗지 않은 채 비어있는 편지지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다는 말을 쓸까. 나도 네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을 할까. 411호의 노부부 같은 좋은 손님도 있지만 못된 손님들도 있어서 힘들다고 할까. 미국은 아직 유색인종을 받아들이지 못해 무시 받고 있다는 이야길 할까. 투정어린 마음과 샘솟는 눈물들이 편지지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카밀로는 한글자도 쓰지 못했다. 이전과 같았다. 카밀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505호의 사내가 영수증에 써놨던 그 간결하고 애절한 그리움을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밀로는 그저 편지지를 부여잡고 끄윽끄윽 울어댈 뿐이었다.
*
미쉘이 그를 쫒아 다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사실 쫒았다는 표현보다는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 맞겠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그녀의 성격과 매치 되지 않는 행동들을 보이며 그를 응시했다. 짝사랑이란 여자의 마음을 미치게 하는 듯 했다. 카밀로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사랑은 생각보다 길었지만 동시에 카밀로가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쉘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다. 콧대 높던 아가씨는 자신과 이런 기다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인지 진눈깨비가 내리는 어느 날에 중앙홀로 들어서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505호의 사내는 검은 외투에 진눈깨비의 잔 흔적들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차갑게 젖어 있는 모습은 묘하게 애처롭기도 하고 섬뜩하게 우울하기도 했다. 그는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홀을 걸었다. (곁에 있던 필립은 또 마대자루를 들고 와야 한다며 조용히 성질을 내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기다리고 있던 미쉘은 드디어 그에게 다가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마치 심장소리 같았다. 카밀로는 장부를 정리하는척하며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나 온 신경이 그들의 향해 있음은 딱히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었다.
미쉘은 그의 젖은 코트 자락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그는 그런 미쉘을 멈춰서 한참 내려다보았다. 나름 자신 있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4분, 10분, 15분 동안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진땀 빼며 말하는 그녀를 그저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아마 그게 한계였을 것이다. 종국에 그녀는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며 옅은 신경질을 부렸다. 대충 ‘말할 줄 몰라요?’ ‘벙어리에요?’ 이정도가 아니었을까. 카밀로는 열리지 않는 사내의 섬세한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는 그의 쪽빛 눈동자도 바라보았다. 분명 그는 매우 매력적으로 생긴 사람이었지만, 매력적이란 단어를 감당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사실 그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같질 않았다. 카밀로는 미쉘이 마치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신경질적으로 울고 있는 고양이 새끼 같다고 생각했다.
종국에 사내는 미쉘을 향해 나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우울하게 그 내용은 카밀로를 향해 들리진 않았지만 꽤나 충격적인 단어였는지 그녀는 잔뜩 굳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505호의 남자는 검은 물처럼 흐르는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미쉘은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올 때까지 한참을 거기 서있었다. 카밀로는 그가 그녀에게 저주를 걸고 사라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미쉘이 그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모르겠다. 그저 그녀는 생각보다 가벼워보였고, 그러했기에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도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예상한 정도였다. 그녀의 사랑이 그녀의 약혼자와의 상황을 악화시킬 만큼 무거웠을지, 혹은 그저 심심풀이로 괜찮은 남자를 향한 흥밋거리였는지, 직원들 사이에서 수많이 거론되었으나 결론적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끝으로 치달아 버렸다.
505호의 남자가 그녀에게 저주를 걸던 밤으로 이틀이 지나고, 그녀는 쟝의 모든 금전을 들고 약혼자와 도망쳐버렸다. 쟝이 모아두었던 금고속의 귀중품이 텅 비어버렸다. 쟝은 이후로 일주일 동안 호텔이 나오지 않았다. 카밀로는 모든 것을 도맡아 호텔을 보살펴야했다. 호텔은 병약한 환자 같았고 카밀로는 돈 없는 인도의 의사 같았다. 그 와중에도 505호의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실제로 그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그저 자신의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사실 카밀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쟝은 미쉘과 약혼자 사이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가 비록 쟝의 모든 재물이 탐났다 하더라도 그것을 훔쳐 도망갈 필요는 없었다. 카밀로의 생각이 맞다면 쟝은 분명 그 모든 것을 하나뿐인 딸에게 물려 줬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녀는 제 아버지를 버려두고 도망갔고 쟝은 홀로 남겨졌다. 알 수 없는 일이 투성인 가운데에서 오로지 사내만이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
겨울바람이 혹독해진 때였다. 이젠 명백한 겨울의 중간에 뉴욕의 모든 사람들이 서있었다. 카밀로는 온 몸을 얼어버릴듯한 차가운 온도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텅 빈 종이자락이 있었다. 이번에도 온몸이 구겨져있는 편지지는 초라하다 못해 서글퍼보였다. 대체 어떤 말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밤에는 밤새도록 그녀에게 모든 것을 퍼부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가장 처음과 같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어린애 같은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종이를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곁에 있던 필립은 그러다가 눈에서 광선이 나오겠다며 킥킥 웃기만 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한다고 손과 발이 저릿했다. 몇 안 되는 손님들이라지만 손님의 수와달리 호텔에서 치러야할 일들은 수많았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회계장부, 호텔 직원들의 월급 장부, 수도 세금 등등, 게다가 제품들은 어찌 고물인지 화장실이 막혔다던가, TV가 맛이 가는 등등 아주 난리들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403호의 남자는 매사 그것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가 침대위로 풀썩 누웠다. 머릿속에서는 엉엉 울었던 마리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편린으로 남아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유일한 휴식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울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위로가 된다니. 자신만큼 나쁜 남편도 없을 터였다.
카밀로는 비스듬히 누워 비어있는 편지지를 보았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어떤 말이라도 지어보지만 결국은 구겨버리거나 찢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와 힘들어 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어떤 위로의 말을 전달해야 할 텐데, 자신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카밀로는 결국 침대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온몸을 늘어뜨리고 누워있으려니 입안으로 한 구절이 맴돈다. 그러자 사내의 검은 일기장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