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의 고통은 점차 깊어져 가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 불순물이 낀 듯 초점은 조금씩 흐려져 갔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아니, 사실 알렉스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죽음을 힘겹게 잡아당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손바닥이 까질 정도로 알렉스를 잡아당기고 잡아당겨도 나는 대책 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는 지점으로부터 질질 끌려온 흔적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흙바닥 위를 나무막대기로 찍 그어놓은 흔적 같이 초라했다. 나는 초라하게 알렉스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알렉스를 놓을 수 없었다. 내가 힘주고 있는 손을 놓는 순간 죽음은 알렉스를 진공청소기 마냥 흡수해버릴 것이 뻔했다. 나는 그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차라리 팔이 빠지고 손바닥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는 편이 나에겐 나았다. 사실 그것은 알렉스를 살리는 행위라기 보단 내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였다. 알렉스가 죽으면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사라가 알렉스에게 느꼈던 감정이나 알렉스가 사라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 간에 어떤 애정이 존재 했는지 명백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정확한 것 한가지로,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던 것과 달리 난 한 사람의 뒤통수를 계속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행위와 감정이 지속 될 것을 알았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받는 한 가지가 있었다. 알렉스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의 캄캄하고도 괴로운 밤이 지나가고, 새벽과 아침이 지나 점심이 왔을 때 나는 엉성한 계란 프라이를 접시위에 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식탁위에 가져다 놓은 케첩통을 만지작거리던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때의 나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알렉스가 그토록 울며 나에게 전화하고 붙잡은 것은 절대적으로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나라는 존재가 눈물을 토해낼 만큼 중요한 존재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알렉스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그 새빨간 혀가 한 단어를 만들어 냈을 때 내 심장은 나락으로 툭 떨어졌다.
‘사라한테…….’
근 2주 만에 보는 그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또 다시 사라의 이야기였다. 사라. 사라. 사라. 차라리 내 이름을 사라였다면 나았을까. (아니 그것은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이름에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어야 했다. 알렉스의 단어들은 나긋나긋했고 갈라져 있었다. 마치 가뭄으로 갈라진 두렁 같았다. 나는 빈 잔에 물을 부으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비참함과 혼란이 몰려왔다. 이러나저러나 알렉스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필요함이 행크 맥코이 자체로의 필요함인지, 혹은 사라가 비어있는 자리를 메워야하는 행크 맥코이의 필요함인지는 불분명했다. ...아니, 사실은 분명했다. 알렉스와 나의 만남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관계는 분명했다. 불분명한 것은 나뿐 이었다.
알렉스는 삼일 전, 사라의 동생이었던 엘리가 연락을 해왔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녀는 사라와 목소리가 퍽 닮아 있어서 알렉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바보같이 굳어 있었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엘리에게 부산을 떨며 내일 만나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얼굴 보고 싶지는 않아요.’하고 말했단다. 그 상황을 이야기 할 때 알렉스는 찡긋하고 눈가를 찌푸리다가 아이처럼 눈을 비볐다.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한숨을 쉬다가 사라와 똑 닮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그녀와 접한 것은 사라의 장례식이 있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접했다고 하기에도 뭐한 것들이었다. 사라는 가족 장례식을 치렀다. 그 틈에 알렉스의 낄 자리는 전혀 없었다. 햇볕조차 떨어지지 않는 먼 곳에 서서 알렉스는 멍청히 그녀의 관이 내려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엘리를 보았던 것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엘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알렉스가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든 말든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이전부터 끌어안고 있던 이야기라고 서두를 붙이며 엘리는 이 말을 해주는 것은 알렉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고, 이 이야기를 끝으로 완벽한 단절이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알렉스는 나직하게 알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전화 통화를 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알렉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식탁위의 계란 프라이에서는 뜨거운 김이 올라왔고, 방금 끓인 인스턴트 스프에선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우리 둘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서 가만히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침대위로 떨어지는 햇볕은 차차 길어져 우리의 발끝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엘리)의 입을 타고 나온 말들이 알렉스를 고단하게 했으며, 종국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나를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알렉스가 어물어물 거리며 입을 열었다. 괴로움에 입을 열지 못했던 것과 달리, 알렉스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뺨을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사라가 임신했었데.’
“그러니까 모든 진실은 불편하다니까. 많은 사람들이 진실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진실의 물방울이 손끝에 닿는 순간 아! 하고 비명을 지르지. 그제야 깨닫는 거야. 천재 대장장이가 만든 날카로운 칼보다 더 날카로운 것이 진실의 단면이란 것을! 진실은 결코 편하지 않아. 깨끗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지. 그냥 존재할 뿐이야. 그리고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 말의 본론이 뭐야?”
“결론은 진실로 가라사대, 너희 중생들은 10달러씩 내놓음이 마땅하다는 거지.”
“앤! 2달러씩가기로 했잖아!”
“조지, 아까 다 봤어. 너 할머니한테 30달러 받는 거. 넌 나눔의 미학도 모르니?”
“전재산의 3/1이 나눔의 미학이냐!? 강탈이지?!”
“때론 나눔이 강탈이 될 필요가 있지. 그래야 사람은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거든. 두 배로 높이기 전에 어서 내놓으시지.”
“행크 형! 저대로 내버려둘 거야!?”
“그러니까 내가 쟤랑 카드 게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앤이 어서 돈을 내놓으라고 조지와 올리버의 옆구리를 찔렀다. 조지는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피식 웃으면서 바라볼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카드들과 콜라. 그리고 울상을 짓고 있는 사촌동생들이 퍽 평화롭게 보이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보스턴과 달리 캘리포니아는 따뜻하고 나긋하기 그저 없었다. 물론 이곳저곳에 매달려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다른 곳과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매해의 크리스마스를 뜨거운 태양과 해변에서 보내니 이젠 친구들과 공감대 형성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제 짐을 정리하고 하우스(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뉴욕에서 미리 도착해 있는 앤을 만났다. 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동생의 이름을 부르자 앤은 ‘꺄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 품에 안겼다. 안 본세에 많이 말라 있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지냈느냐고 물어보자마자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엄마는 안 반갑니?!’ 투정어린 목소리에 ‘네네-아주 반가워서 미치겠네요.’하고 대충 말하자 자식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궁시렁거림이 귀를 찔렀다. 엄마의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아빠는 어서 나가자며 우리를 크게 불렀다. 간만에 친가로 가는 아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캘리포니아로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긴 것은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와 고모들, 그리고 사촌 동생 녀석들이었다. 아빠의 바로 밑에 있는 안젤라 고모는 아빠와 똑같이 생긴 눈매로 나를 응시하며 내 뺨을 툭툭 쳤다. ‘여자 친구는 있니?’ 만나자마자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그냥 씨익 웃어버렸다.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서 가족들은 저마다 편한 자리에 앉아 여태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나를 부른 것은 막내 고모의 딸 루이즈였다. 루이즈는 나를 부엌 테이블로 불러서 늘어놓은 카드를 자랑했다. 아직 4살인 루이즈가 카드의 룰을 알리 만무했다. 그녀는 그저 카드의 색과 숫자, 모양에 맞춰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나는 크리스가 훌륭한 도박꾼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평소 우리가 유태인이라고 하면 기대하거나 생각하는 것과 달리 크리스는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어떤 것을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표현들은 생각나질 않는다. 어쨌든 녀석은 술을 사랑했고 담배를 사랑했으며, 도박까지 사랑하는 유태인이었다. 이전에 킴이 유태인은 전부 그러냐고 물었는데 크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특별한 거지.’하고 말했다. 옆에 있던 데이빗은 ‘특별한 게 아니라 유별난 거지.’ 하고 대꾸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대로였다.
내가 루이즈에게 카드 이름을 알려주고 모양 맞추기를 하며 놀고 있을 때 어른들 이야기가 지겨웠던 모양인지 은근슬쩍 앤이 껴들었고 이어서 조지와 올리버가 합류했다. 그리고 나와 루이즈를 제외한 세 사람은 소량의 돈을 걸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함께 하자는 올리버의 말에 나는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앤이 눈이 휘둥그렇게 떠질 정도로 카드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카드게임에서 번번이 진 탓에 잃은 용돈과 물건만 해도 엄청났기에 나는 그런 실수를 번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대로 앤은 승승장구하여 카드 패를 뒤집고 있었고 올리버와 조지는 혈안이 되어 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법 느지막해지자 루이즈는 내 품에 안겨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분홍빛 뺨과 오물거리는 입술이 퍽 사랑스러웠다. 난 다시 카드 패를 돌리며 ‘이번에는 20달러!’를 외치는 녀석들에게 루이즈를 침실에 눕히고 오겠다고 말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내 말에 대꾸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루이즈를 안아 올리고 2층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으니 1층에서 떠들썩한 소리들이 퍽 행복하게 울려 퍼졌다. 시끌벅적한 이 분위기가 나는 좋았다. 가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때로 불편하기도 했지만 분명 누릴 수 있는 하나의 행복이었다. 알렉스가 이것들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더더욱 확연해졌다.
알렉스는 지금쯤 늘어놓은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나쵸를 먹고 있을 것이다. (나한테 그럴 예정이라고 말했으니까.) 나는 떠나오기 전 알렉스를 걱정했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그가 명절은 혼자 보낼 것은 눈에 뻔히 보였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라와 함께 트리도 만들고 샴페인도 따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했을 테지만, 이젠 그의 곁엔 사라가 없었다. 게다가 최근 그의 상태는 정말 좋지 않았으니 (이 표현은 순화한 표현이다.) 내 걱정은 점차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침대 위에 잠든 루이즈를 눕히면서 그 곁에 걸터앉았다. 편하게 자고 있는 루이즈를 보니 나도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올리버와 조지가 나를 잡고 나가놀자고 흔들기 전에 어서 자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난 지체하지 않고 슬쩍 루이즈의 옆에 누웠다. 아기 새의 가슴처럼 숨결에 따라 움직이는 루이즈의 작은 몸뚱이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정말 작고 연약했다.
사실 나는 사라가 임신했었다는 사실이 알렉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분명 그에게 있어 그녀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사라가 자살함에 따라 함께 사라진 것이니 그 슬픔은 두 배로 클 것이 뻔했다. 아직 사라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그에게 ‘그와 그녀의 아이’, 혹은 정확히 ‘사라와 함께 죽은 아이’에 대한 존재는 그에게 눈물을 토하게 만들었다. 아이처럼 나를 붙잡고 울며 무방비의 상태로 반쯤 죽어가던 그를 생각하면, 분명 그에게 사라의 임신 사실은 큰 영향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알렉스에게 그것들이 대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것도 내가 알렉스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일까. 어쩌면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알렉스가 어리석어 보여서 일수도 있고. 그것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반쯤 포기하는 것에 대하여 화가 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젠 그런 알렉스를 바라보는데 나 스스로가 너무 지쳐서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알렉스에게 나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은 더욱 더 명백해졌다. 아니, 나뿐만 아니었다. 알렉스에게 타인을 받아들일 여유는 없었다. 그에게는 사라를 위한 자리만 존재했다. 사라뿐이었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은 사라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리를 나는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사실은 포기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난 알렉스의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다고 한들 내 마음이 쉽게 꺼져들리는 없었다. 이것들은 잔돈이 부족해서 사탕을 사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포기가 아니었다. 내가 포기했다는 것은, 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것의 이름은 사랑이기도 했고 관심이기도 했다. 아니, 그냥 좁게 마나 그에게 자리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를 떠나지 못한다는 내 자신에 대한 포기이기도 했다. 난 그의 곁에 있기로 했다. 알렉스를 단순한 지인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내 마음을 깨닫고서 그를 피해 도망 다녔던 날들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결론이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접기 위해 노력하던 내 모든 것들은 나비의 날개처럼 손쉽게 부셔져 내렸다. 하지만 변명하건데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의 곁에 있기를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분명 알렉스는 내가 필요했다. 비록 내가 바라는 ‘필요함’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내가 또 다른 의미로 필요했다. 나는 그에게 맥주를 함께하는 친구가 되어야 했으며, 영화를 함께 보는 관객이어야 했고, 또 그와 사라의 추억을 듣는 관중이 되어야 했다. 나는 알렉스에게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그에게 머무는 이유였다.
사라의 임신사실을 듣게 되었던 그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가 곁에 있길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텅텅 빈 냉장고를 보고 음식을 사오기 위해 코트를 들었을 때 알렉스는 깜짝 놀라 내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어딜 가냐고 물었다. 언뜻 겁에 질린 동물 같아 보이는 그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뭉근해졌다. (이렇게 나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에게 내 자리가 없다는게 믿기 힘들었다.) 마켓에 갈 거라는 말에 알렉스는 자신의 점퍼를 집어 들고 함께 가자고 말했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마켓으로 가는 동안 나는 ‘오늘 자고 가도 되지?’하고 물었다. 알렉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마켓에서 이미 조리되어 있는 음식들을 샀다. (전자레인지로 돌리기만 하면 되는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맥주대신 콜라를 샀다. 알렉스는 맥주를 금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영화 한편을 빌렸다. 나는 최신 영화들을 들어 보이며 그것들을 보자고 말했지만 알렉스는 나보고 영화 취향이 영 좋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봤냐며 하나를 내밀었다. <고스트 버스터>. 유명세야 속히 알고 있지만 보진 않았다. 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니 알렉스가 ‘맙소사!’를 외치면서 나의 무식함을 감탄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평생에 무식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던 나였던지라 조금 열이 받았지만 알렉스의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우리는 <고스트 버스터>를 봤다.
평소 먹었던 피자대신 차이나 푸드를 배달해 먹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대형 마시멜로우 괴물이 나왔을 때는 큰소리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렉스는 이 영화를 봤음이 분명한대도 연속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대였다. 우리는 영화를 한편 더 빌려올까 고민하다가 밖의 추위를 상기하여 깨끗하게 계획을 포기했다. 알렉스가 치즈와 나쵸를 더 가지러 부엌에 간 사이에 나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끼워놓은 책장을 뒤적거렸다. 낡은 책들 몇 권과 함께 끼워져 있는 DVD 팩을 뒤적거리다가 네임 펜으로 휘갈겨져있는 CD한 장을 발견했다. 그 위에는 ‘LA, 청소년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 알렉스가 선수 시절 때의 영상을 담아 놓은 것이라고 추리하며 조심스럽게 CD를 다시 끼워 넣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으나 알렉스의 아픈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알렉스가 내 손을 잡으며 ‘뭐 보고 있었어?’하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란 내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동안에 알렉스는 내가 보고 있던 CD를 꺼내면서 ‘아 이게 여기있었구나.’하고 말했다. 알렉스의 푸른 눈동자에 스쳐가는 순간의 빛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고기의 은색 비늘 같은 CD 표면을 바라보던 알렉스가 ‘볼래?’하고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소파에 기대앉아 지나가는 영상들을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익숙한 얼굴들 몇 명을 가리키면서 ‘저 녀석이 이번에 올림픽에서 은상 수상한 녀석이야. 폴란드 녀석.’하고 말했다. 선수들은 쭉 뻗은 몸을 곧게 세우고 달리다가 장대를 지지대 삼아 날아올랐다.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새와 같았다.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 선수들은 곡선을 보며 내가 감탄하자 알렉스는 ‘멋지지?’라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몇 명의 선수들이 오간다음에 알렉스가 나왔다. 지금보다는 훨씬 앳되어있는 모습에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알렉스는 나 옆구리를 푹 찌르면서 웃지 말라고 협박했다. (사실 내가 웃은 것은, 내가 High School시절에 기억했던 알렉스의 모습과 완벽하게 같았기 때문이었다.) 화면에서 보이는 작은 얼굴은 긴장으로 역력해있었다. 하얀 얼굴은 훨씬 창백해 보였고, 어찌나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입술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3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어린 알렉스가 뛰기 시작했다. 장대를 바닥에 디디며 훌쩍 뛰어 올랐다. 여리지만 탄탄한 등이 휘어지고 손을 뻗었다. 금발 머리카락이 공기에 흩날리는 모습이 저속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나는 내 차가운 손끝을 꼭 쥐었다. 곁에서 화면을 바라보던 알렉스는 ‘이젠 추억이지.’하고 중얼 거렸다.
우리는 말없이 길고 긴 경기를 바라보았다. 같은 선수들이 계속해서 경기를 하고 환호를 지르고, 때로는 실패에 눈물을 흘리는 영상들이 지나갔다. 알렉스는 마지막 3번의 시도 중 두 번을 성공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순위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아쉬워하는 알렉스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알렉스에게 많이 아쉬웠느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알렉스가 갑작스럽게 말을 툭 던졌다.
‘너 짜증 안 나냐?’
뜬금없는 소리에 ‘뭐라고?’하고 물으니 알렉스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뺨에는 브라운관에서 넘치는 빛들이 찰랑거렸다.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의지하는 거, 매달리는 거, 요구하는 거, 짜증 안 나냐?’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말은 안 할뿐이지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솔직히 말하면, 나 진짜 쪽팔리다고. 나도 모르게 너한테 의지하는 거. 온몸을 기대고 있는 거. 너 그래서 한동안 나 피해다닌거 아냐?’
‘그런거 아니야.’
‘아니긴. 나도 다 알거든? 내 얼굴이 철판이라지만 나도 여태동안 일들, 특히 어제일 기억하면 사실 머리가 쭈뼛 선다.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손으로 눈을 덮었다. 알렉스의 거친 손등에서 뼈의 그림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보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그냥 덮고 넘어갈 것들을 알렉스는 굳이 입으로 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알렉스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알렉스에게 ‘괜찮아.’라고 말하고서 덮어버리고 싶은 동시에 그의 진심을 듣고 싶었다. 그에게 묻지 못한 감정들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내가 진짜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보같이 ‘그게 뭐 어때서. 의지하는 것은 좋잖아.’하고 말했다. 알렉스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의 표면에서 TV의 가느다란 빛들이 반질거렸다. ‘나도 너처럼 강했으면 좋겠다.’ 알렉스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서 편안함이 묻어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알렉스가 소파에 편안히 파묻는 움직임을 느꼈을 뿐이었다. 아니, 난 강하지 않았다. 난 알렉스의 앞에서 강할 수 없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내 껍데기였다.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내가 그의 눈에 강해 보일 뿐이었다. 난 그에게 있어 영원한 약자였다. 그러나 알렉스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TV로 시선을 돌리는 알렉스의 얄쌍한 턱선을 보며 그의 단마디에 대하여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에게 ‘나를 어떻게 생각해? 너에게 나는 필요한 사람이야?’ 라던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줘. 사라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네 인생에서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해줘.’라고 말한다면 어떠할까. 그때면 그가 내가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순식간에 밀려든 사념들을 응시하던 나는 하나씩 접어 내렸다. 나는 영원히 그에게 말 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나의 약함을. 알렉스를 붙잡고 싶어 하는 나의 나약함을 알게 된다면, 알렉스는 내 곁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모든 생각은 종결되었다.
경기 영상이 끝났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TV를 보았다. 토크쇼들을 보고 툭툭 이야기를 던지기도 했다. 어제 저녁에 울던 알렉스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알렉스를 붙잡고 함께 슬퍼하던 나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킬킬 웃는 남자애들이었다. 비록 슬픔은 떠나가지 않았지만 숨죽이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서 떠나가는 순간 그리고 내 곁에 알렉스가 머물지 않는 순간에 슬픔은 기회 잡은 좀벌레처럼 고개를 내밀어 우리를 좀먹어 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곧 찾아왔다. 푸르스름한 새벽기운이 깔리고 나는 알렉스가 잠든 것을 확인했다. 며칠 내내 잠들지 못했다던 알렉스는 새벽 5시쯤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나는 알렉스가 잠드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TV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알렉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옷걸이에 있던 코트를 입었다. 코트를 입는 중에도 알렉스를 향한 시선은 떠날 줄을 몰랐다.
이틀이나 하우스를 비웠으니, 새벽이나마 돌아 가야했다. 점수가 깎이게 되면 다음 학기에 기숙사에 있을 수가 없다. 어둠속에서 TV 불빛을 의지하여 써 내린 메모는 조악한 내 글씨가 흐트러지듯 쓰여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게.’ 고민하다가 써 내린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침대에 있던 이불을 소파에 잠든 알렉스의 몸에 덮어주었다. 꼼지락 거리던 알렉스는 다리를 쭉 펴며 몸을 뒤틀었다. 보드랍게 보이는 금발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움직이고 감은 눈덩이는 어둠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알렉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눈을 뜬다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날 정도로 난 알렉스의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숨결이 귓속을 파고들어왔다. 창밖에서 들리는 차들의 경적소리와 사납게 지나가는 앰뷸런스 소리를 제외하고는 모든게 침묵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습하던 어린이 합창단도 지금쯤이면 쿨쿨 잠자며 산타클로스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 도시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마위로 흐트러진 알렉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알렉스의 이마는 따뜻했다. 미모사향이 나는 이불에 잠긴 알렉스의 몸은 따뜻하고 편안해보였다. 마치 이것이 유일한 안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알렉스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내 가슴 언저리, 어딘지 모르는 부분이 시려워왔다. 주먹으로 쳐내는 듯이 아프기도 했고 주사를 놓는 것처럼 따끔하기도 했다.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목에 걸려왔을 때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알렉스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내 입술이 차갑게 느껴질 만큼 알렉스의 이마는 따뜻했다. 입맞춤은 길지 않았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뚜벅거리며 알렉스의 집을 벗어났다. 마치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의 심장에 칼을 꽃은 것이라도 되는 마냥 정신없이 그를 떠났다. 나는 그 상황이 <죄와 벌>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노파를 죽이고서 그곳을 떠나던 라스꼴리니꼬프가 내 모습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내가 알렉스를 죽인게 아니라 알렉스가 나를 죽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 것이었다. 알렉스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또한 죽어가고 있음을. 대가없는 감정에 휘둘리며 나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채찍질에 맞아 상처받고 있었다.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싶었다. 내게 사랑받는 알렉스조차 모르는 내 사랑을 누가 알까 싶었다. 난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데.
순간 TV를 끄지 않고 왔다는 것이 기억났다. 워낙에 작은 볼륨이라 알렉스가 깰 일은 없을 테지만 나중에 나에게 잔소리를 할 것 같았다. 되돌아갈까 고민하며 멈춰 섰다. 그리고 멈춰 섰을 때 내 뺨으로 무언가 뚝 떨어졌다. 뺨으로 떨어진 따뜻한 무언가는 턱 끝에 매달려 차갑게 식고 있었다. 난 그것을 눈물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알렉스에게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우스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었을 때 끝없이 떨어지는 이것들이 눈물이라고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르스름한 하늘 속에 우뚝서있는 가로등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로등 밑에는 병신처럼 울고 있는 내가 있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해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눈물자국에 찬바람에 와 닿자 얼굴이 시리도록 아팠다.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찬바람을 원망하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울먹이는 소리하나 내뱉지 않았다. 그저 울기만 했다.
“오빠- 자?”
“음? 아니. 그냥 누워 있었어. 왜?”
“올리버가 시내에 나갔다 오자고 해서. 같이 가자고 할라 했더니 피곤한가보네. 그냥 우리끼리 다녀올까?”
“...그래, 너희끼리 다녀와. 너무 늦지 말고"
다음날 점심에 알렉스는 어김없이 왜 TV를 끄지 않고 갔냐며 연락했다. 난 깜빡했다고 변명하며 오늘 저녁에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알렉스는 막지 않았다. 내가 캘리포니아로 가야하던 그 전날까지 우리는 함께했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보며 마틴은 여자 친구가 생겼냐며 실실 웃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마틴은 거짓말 하지 말라고 눈을 흘겼다. 그리고 물어보지도 않은 캐서린과의 데이트 일정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다. 이후에는 블룸여사가 크리스마스 이후에 찾아오라고 말했노라고 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 막바지가 되자 하우스가 텅텅 비기 시작했다. 본국에 간다고 했던 킴은 일찍이 자리를 떴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가며 ‘메리 크리스마스다!! 보스턴 촌놈들아!! 하하하하!!’하고 외치다가 데이빗과 크리스의 눈 폭탄 세례를 맞았었다. 그 전쟁 속에서도 유유히 사라지던 검은 머리통이란. 이어서 한명씩 한명씩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하여 가족의 품으로 떠나갔다. 나또한 그래야했다. 떠나기 전날 나는 알렉스를 놔두고서 떠나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보스턴에 머문다면 만나기라도 하겠지만, 캘리포니아는 퍽 멀었다. 내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알렉스는 ‘크리스마스? 일 나가야지. 너 서비스업 하는 사람한테 명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 돈 벌어야지 돈. 보너스도 빵빵하게 준다더라. 그러다가 쉬는 날 있으면 집에서 나쵸 끌어안고 <인디아나 존스>보는 거지. 완벽하지 않냐?’하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난 그 웃음의 이면을 알고 있었기에 덩달아 웃을 수 없었다. 헤어지던 저녁, 나는 가서 연락하겠다는 말을 했다. 알렉스는 징그러운 말하지 말라며 잘 다녀오라고 말해줬다. 그게 끝이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고 알렉스에게 연락한번 하지 못했다. 번번이 어떤 내용으로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평소처럼 인사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 있으면 연락해.”
앤이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문밖에서 올리버와 조지가 ‘같이 안간데?’하고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앤이 녀석들을 잡아끌며 퉁탕퉁탕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란스럽던 소리가 사라지자 다시 루이즈의 가녀린 숨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아기냄새가 나는 루이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다 슬금슬금 휴대폰을 꺼냈다. 앤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다. 지금 전화하더라도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니 전화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메일을 보낼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던 끝에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다. 어떻게 보낼까. 일은 잘하고 있냐고? 아니면 내가 예상하기론 영화를 보면서 나쵸를 씹고 있을 것 같다고? 나는 동생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보내면 뭐라고 답할까? 아니, 가족들 이야기는 빼는 게 좋겠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갈 것 같은데 주말에 함께 영화관에 가는건 어떠냐고 물어볼까. 싫다고 하면 난감해진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종국에는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 상황이 퍽이나 우스웠다. 뭘 이렇게 망설이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알렉스에게 느끼는 내 감정들은 무덤덤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더욱더 또렷해졌다. 그를 향한 감정들이 사라지길 바라며 피해 다녔던 날들을 떠올리면 한심스럽기까지한 결과였다. 여전히 나는 알렉스의 곁에 있는 사라의 존재가 너무 크게 느껴졌고, 내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가망이 없기 때문이었으며, 그에게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길 바랐다.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했다. 그러나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있다면, 내 감정에 대한 보답들을 점차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라라는 거대한 기둥 앞에서 난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는 것은 보답이지 내 감정 자체는 아니었기에. 나는 알렉스의 뒤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망설이던 손끝으로 괜히 커버만을 만지작거리다가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래, 우선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하는 거야. 최소한 어색하진 않겠지. 머리를 굴리면서 M을 눌렀을 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마냥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내 반응에 전화를 건 사람이 깜짝 놀랐는지 ‘행크??’하고 물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틴?”
-“왜 그리 전화를 사납게 받아? 놀랐잖아!”
“...아, 아니. 별일 아니야.”
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깜빡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루이즈는 편안한 미소를 띠우고 자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살금거리며 방을 나섰다. 스탠드를 꺼는 것도 잊지 않았다. 2층 복도의 창 앞에 서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은 크리스마스 장신구로 번쩍 번쩍였다. 아래층에서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마틴을 부르자 마틴은 뜸을 들이다가 ‘잘 도착했냐?’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데이트는 잘했냐고 물어보자 마틴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난 대충대충 말하는 마틴이 의아했다. 평소의 녀석이라면 신나게 떠들며 자랑을 했을 터였다.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다. 마틴이 다시 뜸들이다가 ‘그러니까.’하고 말을 뱉었다.
-“너랑 알렉스랑 최근에 친하게 지내고 있잖냐.”
“...그렇지. 왜? 뭐 할 말 있어?”
-“아니, 할말이라기 보단."
마틴이 우물쭈물 거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틴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마틴의 작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알렉스한테 케이크 좀 가져다주라고 해서 잠깐 들렸거든. 그런데 문을 두들겨도 대답이 없더라고. 안에서 제법 소란스럽게 TV소리가 들리는데 말이야. 그래서 문고리를 돌려봤더니 그대로 열리더라고. 컴컴한데서 TV만 틀어놓았더라고. 어디 갔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알렉스가 소파위에 누워있더라? 자는구나 싶어서 테이블에 케이크만 내려놓고 나오려고 했단 말이야.”
마틴은 그렇게 말하고 한 박자를 쉬었다. 아래층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올리브 오일이 떨어졌다며 크게 외쳤다.
-“살짝 내려놓고 나오려는데, 테이블 위에 뭔가 어지럽게 널려있더라고. 처음엔 잘게 찢은 종잇조각 같은 건줄 알았어. 그런데 만져보니 그게 아니라 알약이더라. 제법 많은 양들이 바닥에도 떨어져있고 테이블위에도 엎어져있고... 순간 수면제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드니까 덜컥 겁이나는 거야. 황급히 알렉스를 흔들어 깨우는데, 안 일어나는 거지.”
엄마의 외침이 점점 커졌다. 아빠가 자기가 다녀오면 된다고 만류했지만 엄마는 그치지 않고 나를 불렀다. 행크! 행크!! 내 이름이 찢어질듯이 울렸다.
-“암만 흔들고 때려도 안 일어나더라. 그래서. ...어.... 그래서... 어, 그래. 빨리 911에 연락하고서 엄마랑 아빠 부르려고 뛰어갔다 왔어. 그리고, 엠뷸런스와서 알렉스 태우고. 나랑 엄마랑 타고. ....그래서 지금 병원이야.”
마틴은 나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창가에 손을 짚고서 가만히 서있었다. 창밖에서 깜빡거리는 불빛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유리창에 흐릿하게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손으로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면서 목끝을 간질이는 감각들을 참으려 애썼다. 그것들은 내가 숨쉬기 어렵게 했다.
-“....행크?”
아래층에선 엄마의 사나운 음성들이 끊이지 않았다. 종국에는 계단 위로 쿵쾅거리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브 오일이라고 했던가?
-“행크?... 행크! 너 듣고 있어?”
여기서 가까운 가게가 있던가? 차라리 마트로 가는게 나을지 모르겠다. 아,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일찍 닫았으려나. 빈손으로 돌아오면 엄마가 뭐라고 할텐데. 그냥 앤한테 전화해서 사오라고 하는게 빠르지 않으려나. 시내 쪽으로 나갔으니까 찾기 쉬울지도 모른다.
-“행크!!”
...찾기 쉬울지도 모른다.
* * *
알렉스가 눈을 떴을 때는 오후 5시쯤이었다. 영문도 모른 체 눈을 깜빡이던 알렉스는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이 병원의 일부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주변을 돌아보자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좁디좁은 병실에는 침대와 TV가 하나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얇은 병원 복을 보았다. 단지 옷하나 바꿔 입었을 뿐인데, 자신의 몸이 더 가느다랗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럽고 뱃속이 땡겼다. 침대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가운 벽의 온도가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과 같은 온도였다.
알렉스는 어제, 밤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떠올랐다. 먹지 않고 남겨뒀던 수면제 덩어리들 또한 떠올렸다. 의사들은 잠이 오지 않는 때에 한 알씩 먹고 자라고 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않고 하나씩하나씩 모아두었다. 마치 저금통의 동전처럼. 그것을 모았을 때 자신은 이렇게 될 거란 것을 알았을까? 외롭고 괴로울 때, 모아뒀던 독들을 마시고 죽어버리자. 그렇게 다짐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살 용기가 없고, 고통을 감내할 수 없을 때를 위하여 남겨둔 방편일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나약한 자신을 인정했다. ...사실 이런 자신을 알게 된 것은 사라가 죽었던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둘도 없는 멍청이가 되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나약한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몸에서 검버섯들이 자라는 것을 상상했다. 어둠이 닥쳐오고 자신은 죽어가고 있었다. 강함을 가지지 못한 나약한 정신은 바람속의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리고 남은 것은 뼛속을 찌르는 외로움뿐이었다. 수많은 알약들을 울며 삼키고 소파에 누웠을 땐 고통에 젖은 허덕임이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귓가에는 캐롤이 들렸다. 얼마 전부터 열심히 연습하던 어린이 찬양대의 깨끗한 음성들이 머릿속에 차분히 스며들었다. 그래, 크리스마스구나. 누구나 행복하고, 누구나 기뻐하는 아기예수님의 생일. 몇 년 전만 해도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보낼 거라 짐작하지 못했다. 방긋 웃는 사라와 그런 사라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이곳에 혼자였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울었다. 따뜻한 눈물들이 뺨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Travis의 음악에 춤추는 사라의 모습. 햇볕 속에서 웃던 그녀의 온화한 얼굴. 마약에 취하며 울듯이 웃었던 애처로운 모습. 임신했다며 농담을 하던 알렉스의 생일 때. 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문을 두들기며 울던 목소리. 멀리서 보이던 단단한 관. 장례식. 장례식. ...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얼굴들의 끝에 알렉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음성을 들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목소리를 계속해서 울며 들었다. 그리고 잠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알렉스는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의 목소리는 사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낮고, 슬프고, 고요한 목소리였다. 알렉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행크!! 잠깐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드는 순간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알렉스는 푸른 눈망울로 앞에 있는 남자를 담아냈다. 남자를 뒤따라온 마틴은 숨을 몰아 내쉬면서 남자의 코트 끝을 잡고 있었다. 급히 뛰어온 듯한 모습에 알렉스는 아연해졌다.
“....아....알렉스 일어났구나. 의사 선생님이 무의식 기간이 길지도 모른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
“거..거참! 행크 이 녀석이 깜짝 놀라서 캘리포니아에서 후다닥 비행기타고 왔다는거 아니냐! 부모님들이 뜯어말린다고 좀 늦었데. 그래도 타이밍 좋게 깨어 있을 때 만나서 다행이다. ...그...그렇지?”
애쓰는 것이 역력해 보이는 마틴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그와 달리 행크의 표정은 어둡기에 그지없었다. 창문에서 떨어지는 환한 빛 때문에 안경에 가린 그의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아무 말 없이 행크를 보았다. 마틴은 안절부절못하며 알렉스에게 배고프지 안느냐고 물었다. 알렉스는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동안 알렉스와 행크는 가만히 서서 서로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굳어있던 입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갑자기 행크의 기다란 팔이 알렉스의 멱살을 잡았다. 깜짝 놀란 마틴이 소리를 지르며 환자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런 마틴의 말에도 불구하고 행크는 더욱 거세게 알렉스를 휘어잡았다. 알렉스는 가슴팍에 닿는 행크의 손가락이 매우 차갑다고 느꼈다. 행크의 일그러져있던 입술이 열렸다.
“죽고 싶으면 제대로 죽었어야지. ...이렇게 다시 눈뜨지 말고 제대로 ...제대로 죽었어야지.”
“야...야! 행크 맥코이!”
“제대로 죽었어야지!! 왜 죽지도 못해?!?! 차라리 죽지!! 차라리 죽어버리지!!!!”
제대로 죽었어야지! 행크의 성난 목소리가 방을 뒤흔들었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왜 다시 눈을 떴냐는 행크의 말들은 불손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 말을 듣는 마틴의 심장이 철렁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듣는 알렉스는 아무런 표정도 하지 못하고 행크에게 뒤흔들릴 뿐이었다. 차라리 죽으라며 행크가 알렉스의 목덜미로 손을 감았다. 곧 힘을 줘서 꺾어버릴 것 같은 동장에 마틴이 행크의 손을 뜯어말렸다. 억센 행크의 손은 아무리 힘을 줘도 빠지지 않았다. 마틴과 행크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와중에 알렉스의 창백한 손이 행크의 차가운 손위에 얹어졌다. 그리고 그때 행크의 성난 움직임이 멈췄다.
안경 안에 있던 행크의 푸른 눈동자가 알렉스의 얼굴을 향했다. 알렉스는 행크의 억센 손위에 있던 손을 옮겨 그의 머리위로 그리고 이마위로 향했다. 행크의 갈색 머리카락이 알렉스의 하얗지만 거친 손끝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행크의 표정이 무너졌다. 성나있던 얼굴위로 슬픔과 괴로움이 밀려들었다. 알렉스가 나머지 한손으로 행크의 어깨를 부여잡자 행크 또한 알렉스를 와락 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내에 상처 입은 짐승들과 같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병실 안으로 행크와 알렉스의 슬픔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그 모습을 마틴은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행크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울었고 행크는 알렉스가 단 하나밖에 없는 구원자인 마냥 허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우는지, 무엇 때문에 슬픈지 마틴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걸음 떨어져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창밖에 머물러 있던 노을이 유리창을 통과해 스며들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금빛머리칼을 더듬어 스며들고, 그의 하얀 환자복으로 붉게 물들었다. 침대위로 가득한 노을빛은 바닥으로 흘러내려 행크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하얀 방이 점차 노을빛으로 젖어들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행크와 알렉스가 있었다. 마틴은 그들이 노을빛에 젖어 가는 것을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그들의 상처에서 콸콸 흘러내리는 피 웅덩이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