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계집애들아, 너희들은 이 좋은 날에도 주둥아리 들이밀면서 싸우고 싶냐? 진짜야? 그러고 싶어?”
원래에 여자들이란 흩어져있으면 강하고 뭉치면 더 강해지는 족속이라고 했다. 그 상냥한 얼굴로 오밀조밀 수줍게 말할 때는 천사 같지만 저들끼리 주방구석에 모여앉아, 저 손님 코를 했다느니 얼굴을 갈아엎었다느니 떠들 때는 악마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몇 개월 동안 지켜봐온 폴은 그녀들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기에 ‘너는 쟤네 중에 누가 가장 마음에 드냐?’라는 쉐프들의 질문에 단 한 번도 대답한적 없었다. 진심으로 폴은 착한 여자가 좋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했고 곳곳의 트리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보스턴의 겨울은 춥고, 보스턴의 크리스마스는 그 몇 배로 춥게 느껴졌지만 역시나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외로울지언정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폴과 함께 일하는 악마 삼인방은 전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진짜, 그 새끼 사타구니를 발로 차버렸어야 했는데! 지금쯤 그 새끼가 여자 끼고 사방팔방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까 열이 오른다니까!”
“바람 핀 남자 이야기해서 뭐해. 중요한건 지금이지.”
“신세가 이게 뭐냐. 크리스마스에 파트타임이나 뛰러 오고.”
“애인 없으면 돈이나 벌어야지. 뭐.”
그녀들이 중얼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정각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루시는 -폴이 보기엔 3분이 넘었다지만- 허리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에이프런의 끈을 묶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란 금발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었다. 예쁘긴 정말 예쁘구나. 폴이 그녀의 하얀 손등을 보며 생각했다.
“어라, 막내. 너 선배가 왔으면 인사해야지 지금 뭐하는 거니?”
“오...오셨어요.”
“참, 너도 딱하다. 이 특별한날에 마대자루랑 댄스나 추고 있고. 약속 없어? 계속 일하는 거야?”
“아....네, 오전오후 풀(Full)로 뛰어요.”
“딱하다. 딱해. 멀쩡하게 생겨서 여자친구도 없고. 하기야 이런 쑥맥을 누가 데려가겠냐먀는.”
“어머, 폴이 어때서 그래. 귀엽잖아. 지배욕이 강한 여자들은 딱 좋아할 타입 아닌가? 가령 루시같은 여자들? 루시, 폴 어때?”
“음- 귀엽지. 사타구니를 차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
“꺄하하하하하! 너무 하다!”
폴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 모습을 본 줄리아가 더욱 더 큰소리로 비웃었다. 정말 큰일이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남자 구실은커녕 사람구실도 못하게 될 판이었다. 역시 오전타임만 한다고 하는 거였는데. 사장님의 부탁에 호의를 베푼 것이 이런 결과라니. 폴이 은근슬쩍 몸을 피하기 위해 마대질을 시작했으나 그것을 가만둘 세 여자가 아니었다. 자기들보다 머리하나가 큰 폴의 앞을 막아서더니 ‘얘, 너 지금 우리 피하는 거니? 우리 무시한 거야?’하고 검은 오오라를 뿌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애인 없어 일하러온 여자들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저...저... 알렉스 형이 시킨게 있어서 마저 해야 하는데.”
“어머, 알렉스가 아직 있어? 오늘 휴일 아니었어??”
“오....오후 6시까지만 일하고 간다고....”
“어머 어떡해! 알렉스 오늘 일나왔었구나!”
루시가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주방에 있는 알렉스에게 전부 들릴 것 같았지만 폴은 딱히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루시의 곁에 있던 엘리너가 쯧쯧 혀를 찼다. ‘망할 년.’ 욕설 또한 빼놓지 않았다.
“야, 이 계집애야. 내가 걔한테 호감가지지 말라고 했지.”
엘리너의 말이 딱딱하게 들렸다. 폴은 그 말을 듣고 물음표를 띄었다. 어째서일까. 알렉스 형은 잘생기고 착한데. 물론 사람이 표현하는게 서툴고 무뚝뚝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닌데. 가끔씩 이곳을 찾아오는 여자 손님들 가운데서는 알렉스를 흠모하는 사람도 몇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터라 몇 번 볼 수 없었지만, 잠시 얼굴이라도 빼꼼 내미는 순간들을 캐치한다고 용쓰는 여자들이었다. 그런 여자들에 비해서 루시는 꽤나 나은 위치에 있었다. 어쨌거나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스텝이었고, 몇 번 말도 섞은 적 있었으니까. 멋지고 예쁜 금발 커플을 생각하자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루시에 비하면 알렉스가 훨씬 아까웠다. 알렉스는 사람이지만 루시는 악마에 가깝지 않은가. 폴이 루시의 앞치마 밑으로 검은 꼬리를 찾고 있는 동안 엘리너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며 루시를 훈계하기 시작했다. 곁에 있는 줄리아는 퍽 재미있단 얼굴을 하며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걔 게이라니까.”
“야, 너 물증도 없으면서 자꾸 그래. 김빠지게.”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루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틴트를 바른 분홍색 입술이 삐죽삐죽거렸다. 바에 어깨를 기대고 있던 줄리아가 소곤소곤 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엘의 말이 틀린건 아니라니까. 왜 있잖아. 알렉스 일 끝날 때마다 기다리는 남자.”
“뭐? 누구?”
“있잖아. 키 엄청 크고, 검은 머리에다가 안경 쓰고. 좀 범생이같이 생긴 남자 말이야. 갈색 코트입고 다니고.”
사실 그 남자라면 폴도 잘 알고 있었다. 폴이 알렉스와 엄청 친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루시와 알렉스가 이야기한 횟수에 비하자면 제법 친한 사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늦게 들어온 터라 잘은 모르지만, 듣기로 그 남자는 알렉스가 이곳에서 처음 일할 때부터 간간히 얼굴을 비춘 모양이었다. 몇 번 본적도 있었다. 줄리아가 말한대로 키가 큰 남자였다. 좀 범생이 같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하버드 생이라고 하던데.”
“뭐?!”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폴의 말에 루시와 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선 그녀들의 공식 언어 ‘어머어머어머’를 외치기 시작했다. 뭐 보스턴에서 하버드생 찾기가 뉴욕에서 스미스 찾기보다 어렵겠냐마는, 확실히 하버드생이란 어디를 가나 특별한 존재였다. 폴이 알렉스에게 ‘그 남자’가 하버드를 나온 수재라고 들은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떤 우연한 기회로 주방식구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알렉스가 있었다. 다른 주방 쉐프들보다 알렉스는 퍽 어린 나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보다 더 어린 사람은 폴밖에 없었다. 폴은 자연스럽게 알렉스의 곁에 붙어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먼일인지 알렉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연신 술잔을 붙잡았다.
‘혼자 살아요?’
‘아니. 친구랑.’
‘와, 부럽다. 친구랑 살면 재미있죠?’
‘재미없어. 범생이라. 만날 책상에서 공부만 하거든.’
‘친구가 학구파인가봐요. 학생? 아니면 직장인?’
‘직장인. 연구소다녀.’
‘와! 연구소! 과학자에요?’
‘.......너 정말 시끄럽다.’
딱히 나쁘진 않지만. 알렉스가 조금 취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시끄럽단 그의 일침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폴은 들이대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알렉스는 같이 사는 친구가 기계공학자이며, 하버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수재친구를 뒀구나. 폴이 감탄할 때 알렉스는 피식 웃으면서 ‘재미는 더럽게 없는데. 엄청 착해. 엄청 잘챙겨줘.’하고 말하며 술잔을 잡았다. 기억하기로 그가 웃었던 것 같다. 물론 장담을 못한다. 알렉스의 웃는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그냥 그가 웃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느낌상으로.
이후로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확실히 술에 취했던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그 친구 이야기를 많이 해줬는데 언제나 결론은 ‘착해.’로 끝나버렸다. 알렉스와 그 친구는 아주 낡아빠진 빌라에 사는데, 가끔씩 물이 막혀 죽을 판이라고 했다. 치사하고 뚱뚱한 집주인은 몇 년이 흘러도 여전히 치사하고 뚱뚱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창문이라고 했다. 아주 넓은 창문이 천장에 붙어 있는데, -다락형식이라 그렇단다.- 그 위로 보이는 풍경이 아주 끝내준다고 했다.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라 떠나지 못할 거라고.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을 마감했다. 알렉스에게 가장 많은 말을 들었던 날이었다.
“알렉스가 하버드생이랑 사귄다고?”
“그게 중요해? 걔가 게이인데, 루시가 걔한테 관심이 있다는 거잖아.”
“...솔직히 그냥 친구일수도 있잖아. 안 그래? 우리도 가끔 서로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주잖아? 그렇다고 우리가 레즈비언도 아니고.”
“아냐, 그런 느낌이 아니라니까. 느낌이 좀 다르단 말이야.”
엘리너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들은 이 소재를 가지고 한참동안이나 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폴은 아니었다. 폴은 어쨌거나 마대자루를 빨아서 주방을 닦아야 했고, 예약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식탁 정리를 끝내야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지라 몇 배로 사람이 많을 텐데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루시에게 잡힌 팔이 마치 아나콘다의 아가리에 잡힌 생쥐꼬리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거리고 있었다.
“느낌이 달라. 느낌이. 그냥 그저 그런 친구의 느낌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면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니고 엄청 친한 친구겠지. 나 알렉스랑 잘해보려고 한단 말이야.”
“알렉스랑 잘해보려는 년이 왜 그렇게 다른 남자한테 관심이 많은데?”
“....알렉스는 좀... 높잖아? 방어막이 쳐져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우선 다른데서 원기를 보충하고 다시 덤비려는 거지.”
“지랄한다.”
그녀들이 서로 수군수군 거렸다. 욕설이 오고가고 저질 농담이 오고갔다. 멀리서보면 천사 같은 아가씨들이 하하호호 웃으면서 ‘오늘 아침에 뭐 먹었어?’ ‘오호호호 이슬 먹었어.’ 하고 대화하는 줄 알겠지만 실상 ‘야, 그런데 게이들 콘돔은 따로 있냐?’ ‘콘돔이 다 그게 그거지 무슨 전용콘돔’ 이런 대화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그나마 알렉스가 게이란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루시만이 뾰로퉁하게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루시가 ‘어.’하고 유리너머를 가리켰다. 입구 너머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폴을 포함한 모두가 저기 서 있는 누군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줄리아가 요란을 떨면서 ‘이것 봐 이것 봐.’하고 깔깔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며 엘리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꾸미질 않아서 그렇지. 뭐... 제법...”
“게다가 하버드....”
그리고 그녀들이 일동 침묵했다. 폴은 그녀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해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보기에, 게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응, 내가 보기에도 그래. 알렉스나 저 남자나 딱히 게이같아 보이지는 않잖아? 게이는 제커리 퀸토나 맷 보머나, 이런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 하는거 아니었나?”
“맞아. 맞아. 딱히 게이같아 보이진 않아.”
속셈을 모를쏘냐. 잘생긴 남자 둘이서 연애하는 것 따위 보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럴 바에야 나랑 사귀자. 이런 흑심들이 가득한 그녀를 보며 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남자에게 접근할 그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특히나 줄리아가 눈을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일번 타자인 듯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들의 속셈을 하늘께서 알아차린 모양이신지 주방에서 불쑥 알렉스가 나왔다. 주방의 열기 때문인지 뺨이 살짝 익어 있었다. 파란색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폴을 보았다. 폴이 멍청하게 그를 보다가 ‘가시려고요?’하고 물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짧게 인사했다. 알렉스의 검은색 코트가 열린 문으로 팔랑 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는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들은 갑작스럽게 알렉스가 나타난 것에 놀랐는지 얼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밖을 바라보는 눈초리만큼은 여전해서 폴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알렉스가 사내의 어깨를 툭 건드리자 남자는 알렉스를 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투덜거렸다. 내용은 모르겠지만 가벼운 핀잔 같았다. 그 말에 알렉스가 살짝 그를 흘겨보고 똑같이 툴툴거렸다. 알렉스의 툴툴거림에 조금 놀란 얼굴을 짓던 남자가 갑자기 변명하듯이 손을 내저었고 이후에는 커다란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며 그의 팔뚝을 잡았다.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는듯한 여자들의 감탄사가 들렸다.- 언뜻 보면 싸우는 장면 같았으나 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종국에 알렉스는 남자를 지나쳐 휙 가버리고 사내는 먼저 가버린 알렉스를 쫒기 위해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들은 ‘정말이야? 정말 게이야?’하고 수군거리며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폴은 겨우 그녀들의 곁에서 벗어나며 한숨을 내리쉬었다.
글쎄, 정말 그들이 사귀는 사이일까. 아니면 그냥 친구일까.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남자를 지나쳐가는 알렉스의 얼굴은 어쩐지 장난기가 가득했고 또 행복해 보였으니까. 폴의 눈이 고장난게 아니었다면 알렉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