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i et Amo. 카툴루스를 상징하는 이 유명한 구절은 로마인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감정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 이 구절은 현대인과 로마인을 떠나 알렉스의 인생과 그의 사랑을 상징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증오하고 사랑하다. 태초의 아담과 하와의 시대부터 내려온 죄악은 사람을 완벽하지 못하게 했다. 사람이 만드는 물건들은 언제가 부식되며, 역시나 사람이 만든 자식도 언젠가 죽고. 또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하는 사랑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내가 마지못해 증오하는 (그러나 명백컨대 사랑하지 않는) 문학교양 교수는 인간의 사랑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란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다. 이 역설적인 말에 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질문을 던졌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늘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던 여학생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어제 뉴스에서 부인이 외도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살해한 남자가 잡혔다는 이야길 들으셨나요? (그녀의 말에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들은 이들 안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약 그렇다면 이 사랑이 아름다울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물음은 매우 도전적이었다. 안경을 치켜 올리며 묻는 그녀의 물음에 교수는 살짝 교단을 내려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고 학생들을 바라본 것은 약 1분 정도가 흐른 때였다. 교수는 학생들을 보고 빙그레 웃더니 ‘아름답다고는 했지만, 도덕적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하고 말했다. 정말 아리송한 말이었다. 곁에 있던 마틴은 (놀랍게도 이 친구는 문학도였다. 내가 문학교양을 듣게 된 것도 이놈 때문이었다. 죽일 놈. 나에게 이런 수업을 추천해?) 옆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더니 ‘무슨 소린지 알겠어?’하고 소곤거렸다.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나는 저 사람의 말의 반도 못 알아듣겠는데. 내가 고개를 젓는 순간에 교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사랑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정말일까요? 사랑이 도덕적일까요? 여러분이 하는 사랑은 도덕적입니까? 한없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아름답기만 합니까? 여러분, 사랑에는 증오가 있습니다! 사랑과 증오는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부인을 죽인 남자 안에는 증오가 있었죠! 그녀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는 평생을 맹세하고 결혼까지 했던 여자를 죽였습니다! 증오!!!.... 증오입니다 여러분. 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다고 할 수 있나요? 그 안에 사랑이 없나요? 그는 질투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그녀와 그를 질투했죠. 여러분 질투가 뭐죠? (누군가 ‘시샘입니다.’하고 말했다.) 시샘. 좋은 표현이네요. 하지만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질투는 좀 더 복합적인 감정입니다. 여러분, 질투 안엔 좋은 것에 대한 열망과 동시 그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잘못된 감정일수도 있지요. ...물론 그 남자의 죄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살인은 나쁘지요. 그런 오해는 말아주세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교수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제 말은 사랑이란 것은 완벽하게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마냥 깨끗할 수 없어요. 사랑하면서 질투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면서 대상을 미워하고 증오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인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족, 친구, 혹은 저와 여러분처럼 사제관계, 모두 마찬가지에요. Odi et Amo!! 나는 증오하고 사랑한다!! 카툴루스의 시는 상대를 향한 지독한 열망과 증오로 범벅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 좋지만 동시에 이렇게 나를 만드는 당신이 증오스러워요!! 나를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동시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워요!!.....이것을 순수하다고 할 수 있나요? 그래요. 어쩌면 지독하게 감정적이라는 부분에서는 순수 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도덕은 아닙니다. 여러분, 사랑은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의 이면엔 증오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페르소나를 뒤집으면, 그 안엔 증오가 있습니다. 추해요! 생각해보면 추하기 짝이 없죠. 사랑하지만 미워해야 하는 건 더럽고 경멸스럽습니다. 왜 사람은 완벽하게 순수하고 도덕적이기만 한, 그런 사랑을 못하는가!...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아름답습니다. 만약 사랑이 순수하고 도덕적이기만 했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가치가 없었겠죠. 셰익스피어뿐입니까? 헤밍웨이, 헤르만 허세, 스콧필츠제럴드. 모두에게 칭송받고 사랑받는 작품들은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했을 겁니다. 여러분,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나 알아요. 하지만 왜 아름다운지는 모릅니다. 어째서 아름다운지. 그리고 어째서 그토록 비극적이며 희극적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요! 저요? 저는 단지 포수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공을 던지지 않으면 당신 앞에 서 있는 포수와 타자는 그냥 석상에 불과해요. 야구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투수가 필요합니다. 포수와 타자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건 투수에요! 그리고 그 투수가 공을 던질 줄 알아야 하죠. 여러분. 공을 던지십시오. 공을 던지 줄 모른다면 던지는 방법을 배우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배워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왜 아름다운가. 꼭 생각해보십시오. 모두에게 다를 것입니다. 다음 주에 제가 물어볼 겁니다. (이러면서 교수는 장난기가 묻어나는 얼굴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교수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몇 명은 후다닥 교수에게 달려갔다. 분명 질문을 하는 거겠지. 나는 그냥 가방 안에 책과 노트를 넣으면서 내일까지 마무리 해야하는 전공 과제를 생각했다. 증오하고 사랑하다. 뭐 좋은 말이긴 하다만 나에게 그런 불같은 사랑은 없었다. 물론 그의 말처럼 나는 우리 가족들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지만 (특히 엄마는) 그가 설명하려는 표현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사실 내가 알바 아니라는 생각도 했고. 그때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알렉스의 얼굴이었다. 이전 <Sunshine>을 보면서 알렉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감탄하는 나를 아주 무색하게 만들었다. ‘죽음은 그런 거야.’ 가볍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듣는 입장으로는 5톤짜리 망치로 내리 누르는 것만큼 무거웠다. 가끔 알렉스는 사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대부분 알콜 섭취후의 상황으로)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알렉스가 표현하는 사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애교도 많고 앙큼한 여자 아이었다. 한번 알렉스는 자신의 생일날에 그녀와 집에서(아마 지금의 빌라겠지) 저녁식사를 했던 이야기 꺼냈다. 그것은 알렉스와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의 1년 후로, 함께 동거하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알렉스가 다리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둬야했던 때이기도 했다.
당시 장대높이뛰기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였던 알렉스는 국가대표로 추천받았을 만큼 장래가 탄탄했다. 하지만 어느 겨울날의 연습에서 알렉스는 도움닫기를 하다가 발목이 부러졌다. 처음 의사는 나쁘지 않노라 말했지만 증상은 점차 나빠졌고 종국에는 운동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렉스는 그때의 고통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의 손에는 두 번째 맥주 캔이 있었고 늘 하얗던 뺨은 불그스름하게 변해있었다. 나는 알렉스가 말을 하다가 자는 줄 알았다. (그런 일은 일상다반사였음으로) 하지만 알렉스는 다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소파로 쭈욱 뻗어있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알렉스는 그 이야기는 뚜욱 끊은 채로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즐거운 생일날임에도 안색이 좋지 않은 알렉스를 보면서 걱정스러워했다. 그녀는 알렉스가 운동을 그만뒀다고 그를 떠나지도 않았고 또 그가 우울한 시기를 보내는 불안정한 남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되레 더욱 꽉 잡고서 위로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알렉스를 사랑했다. 알렉스의 외모나 운동하는 모습에 반했던 여자아이들과 전혀 달랐다.(고 알렉스는 말했다.) 식사를 하던 도중에 그녀는 알렉스를 보면서 이제 생일 선물을 주겠다며 씩씩하게 말했다고 한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선물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배를 내밀었다. 알렉스가 특유의 인상을 쓰면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말.
‘나 임신했어.’
‘그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겠어. 마시던 콜라를 사라 얼굴위에 뿜었다니까! 내가 정말 당황한 얼굴로 진짜냐고 물으니까 한참이나 말이 없는 거야. 난 사라가 삐진 줄 알고서 ‘싫다는 게 아니야! 정말 기뻐! 너와 나의 아이라니! 하...하지만 난 일자리도 없고, 무...물론 일자리는 구하면 되지만. 아, 그래 그러면 깁스 풀고서 바로 일자리 찾아볼게.’....이러면서 멍청이같이 더듬더듬 거렸단 말이지. 그런데 사라가 ‘거짓말인데!!’하고 나뒹굴면서 웃는 거야!’ 알렉스는 그때의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는 듯이 말했다. 말하다 흥분해서 소파를 퉁퉁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라 이야기를 할 때만큼 알렉스는 즐거웠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때로 알렉스는 복합적으로 그녀를 증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만취한 상태가 될 때면 알렉스는 꼬부랑거리는 혓소리로 그녀를 욕했다. 못된 년이라는 등, 정말 저주스럽다는 등, 그녀가 다시 태어나면 온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 뺨을 날려줄 거라는 등.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알렉스의 눈가는 늘 젖어 있었고 슬퍼보였다. 그녀를 욕하는 순간까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어쩌면 그 교수의 말처럼 사랑과 증오는 한 몸일지 몰랐다. 나는 당신이 정말정말 좋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이 그만큼이나 증오스러워요!! 이 모든 것이 알렉스의 행동에서 드러나지 않던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도저히 정리되지 않던 것들이 알렉스를 떠올리자 차곡차곡 정리되었고, 어쩌면 나는 그 교수의 말을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내가 착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을 느끼는 것은 알렉스의 감정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난 누군가를 교수가 말하는 만큼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마 나에게 있어 그런 순간은 오지 않을 거라고 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사랑보단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그게 편했으니까.
“....마틴, 이게 다 뭐야?”
수업을 끝내고 하우스(기숙사)로 돌아오자 나를 반긴 것은 수많은 폭죽세트들이었다. 일본어가 쓰여있 는 작은 폭죽세트부터 시작해서, 무식하게 커다란 폭죽모형까지 있었다. 마틴의 침대와 더불어 내 침대까지 장악한 폭죽들을 보며 어이없단 얼굴을 하자, 마틴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미안, 좀 어지럽지.’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좀 어지럽지 않았다. 많이 어지러웠다.
“뭐랄까, 청춘의 이벤트? 그런거?”
“넌 추가시험을 보면서 그런 이벤트를 즐기고 싶냐?”
“추가시험 이야기는 좀 그만해줄래?”
저번 오픈북 시험에서 가장 저조한 성적을 자랑한 마틴은 D 학점 대신 추가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교수를 졸랐고, 다행히 교수는 그런 마틴의 처절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추가시험이 내일일 텐데 이벤트를 준비한다니? 혹시 내일 추가시험을 보기 전, 교수의 연구실로 이 모든 폭죽을 쏴 그를 죽일 생각은 아닐까. 내가 그렇게 엄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틴은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청춘사업이지. 청춘사업.’하고 말했다. 맙소사. 차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새 여자 친구를 만든 건가. 내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니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부처의 얼굴과 같아 눈이 부셨다. 누구냐는 내 물음에 마틴은 ‘우리 과(Major) 1학년 C양.’하고 말했다.
“캐서린 아이젠?”
“!! 네가 캐서린을 어떻게 알아!”
“맙소사! 네가 캐서린 아이젠을 꼬셨다고!?”
“캐서린을 어떻게 아냐니까!”
캐서린 아이젠, 같은 과(Major) 친구인 크리스의 여동생. (맥퀸 교수에게 쩔쩔매던 그 놈이 맞다.) 저번 크리스가 자기 동생이 우리 학교에 들어 왔다고 말했었다. 이과계열인 자신과 달리 문과계열에 속해있다면서 밑도 끝도 없이 동생 자랑을 늘어 놓던게 생각났다. 만약 자신의 동생에게 쓸모없는 놈팡이가 붙으면 처부셔줄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모습 또한 기억났다. 혹시나 해서 찍었는데 진짜냐. 이 넓고 넓은 캠퍼스에서 고작 찍은 여자가 시스터콤플렉스 오빠를 가진 여자라니. 어떻게 알았냐고 달라붙은 마틴을 떼어내면서 외투를 벗었다. 밖과 달리 하우스 안은 따스했다. 최근에 옷 하나라도 더 걸치지 않으면 거리를 쏘다닐 수 없는 추위가 엄습했다. 원래 춥긴 했지만 뉴스에서도 이래적인 추위라며 말들이 많았다. 얇은 옷들은 차곡차곡 개어서 집으로 보냈고 두꺼운 옷들만이 서랍에 들어있다. 돌돌 말려있던 목소리는 잘 개어서 책상위에 두었다. 얼마 전 동생이 소포를 보내왔다. 저번에 같이 가자고 했던 공연이 제법 괜찮았던 모양인지 그 밴드의 앨범과 함께 목도리를 보내왔다. 폴 스미스인가, 폴 매카트니던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전화했더니 그녀는 구구절절 그 목도리가 명품이라고 늘어놓았다. 목에 걸면 다 똑같은 거 아니냐는 내 말에 동생은 ‘하버드 생이라고 공부만 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오빤 <소셜 네트워크>도 안 봤어?!’하고 화를 냈다. ‘아,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앤드류 가필드한테 사기 치는 그 내용?’ 내 말에 그녀는 더욱 화를 냈다.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말해주면 뭔가 변하냐? 내가 말해주면 캐서린하고 헤어질 거야?”
“미쳤냐! 내가 걔를 어떻게 낚았는데!”
“그래, 어부씨. 변하는거 없는데 왜 그렇게 알고 싶어 해? 그냥 모르는 게 약인거야.”
내 말을 듣고서 마틴이 ‘....그런가?’하고 말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그 태도에 등을 돌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킴의 부재중 전화가 하나 있었다. 아마 술 마시자는 거겠지. 눈에 그려지는 통화 내용에 다시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되었다. 저녁시간에 술고래인 킴의 옆에서 맥주를 홀짝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킴은 그게 동양인의 특유 버릇인지 아니면 킴의 나라에서만 특히 그런 건지 몰라도 자꾸 옆에 있는 사람에게 술을 먹이고 싶어 했다.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시달릴게 뻔하니 전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어서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한사람이 문득 떠올랐다. 저번 주 금요일에 평소처럼 피자를 먹고 영화를 보고 헤어졌었다. 또 평소처럼 전화도 하고 알렉스가 잠들기 전까지 수화기를 붙들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어제는 평소 같은 동시에 전혀 평소 같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알렉스의 목소리가 상당히 열 받아 있었다. 씩씩 거리는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로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 가끔 알렉스는 같은 일터에 다니는 남자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우리보다 10살 정도 많은 남자로 얼굴은 본적 없지만 알렉스의 말에 따르자면 굉장히 비열하게 생겼다고 한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알렉스를 상당히 싫어하고 고깝게 여겼다. 알렉스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또 비웃었다. 그걸 또 듣고만 있을 알렉스는 아니었다. 알렉스는 꽤나 다혈질에다가 욱하는 성격이 있었다. 상대가 대놓고 비꼬는데 모른 척 웃으면서 넘어가는 타입은 아니란 뜻이다. 말은 안하고 있지만 마주보며 신랄하게 비꼬는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러니 사이가 더 나빠질 수밖에.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는 나의 물음에 알렉스는 듣기 거북한 욕들만 내뱉다가 씩씩거리는 숨을 참으려고 애썼다. 나는 가만히 수화기를 붙잡고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마틴은 내가 수다라도 떠는 줄 알았던지 계집애 같다고 놀리며 ‘페디큐어라도 발라드릴까?’하고 히히거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침대 옆 테이블에 있던 볼펜 뚜껑을 던졌다. 마틴의 용써서 피했지만 내가 이어서 던진 베개는 피하지 못하고 얼굴로 받았다. 끙끙 거리며 아파하는 모습이 볼만했다. 그것 참 꼬시네. 겨우 진정한 모양인지 알렉스가 투덜거리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일하는 곳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고 워킹 클래스 계열이 많다보니 툭하면 저녁마다 펍으로 모여들어 술판을 벌이곤 했다. (워킹 클래스에 대한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마는.) 알렉스는 평소에 그 모임에 끼지 않다가 친하게 지내는 아저씨의 권유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모습을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어린 애송이가 낄 자리 못 낄 자리 모른다며 욕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그럼 또 가만히 있을 알렉스가 아니었다.
쌈박하고만. 그렇게 말을 던지는 알렉스의 모습에 눈에 선하게 보여서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닌 듯 했다. 남자는 알렉스에게 버릇없다면서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고 알렉스도 그 바가지의 딱 두 배만큼 욕을 퍼부었다고 했다. 이후로 어떻게 안건지 이 남자가 사라 이야기를 꺼낸듯했다. 직접적으로 사라 이름을 거론한 것은 아니고, 알렉스가 동거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더라. 이정도만 들은 것 같았다. (게다가 남자는 사라가 자살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데 다른 것을 어찌 알까.) 아마 어린새끼가 여자 맛을 아네 마네 이렇게 천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남자가 사라의 얼굴을 알던 모르던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알렉스는 사라가 그의 천박한 입에서 거론되는 순간 눈깔이 뒤집혔을 게 뻔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괜찮냐고 물으니 알렉스는 그냥 욕을 중얼거렸다. ‘만나서 술 한 잔 할까?’ 속이라도 풀어줄까 싶어 이렇게 말하니 조금 뜸들이며 ‘...내일.’하고 말했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내일 저녁에 보자고 말한 뒤 연락을 끊었었다. 음. 지금쯤 연락 끝났으려니. 알렉스에게 전화할까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여전히 내 말을 곱씹고 있던 마틴이 문자를 받더니 후다닥 나갈 준비를 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뻔히 보였다. 마틴은 오늘은 그냥 지나치겠지만 나중에 꼭 말해달라는 애교어린 말투와 동시 나중에 캐서린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할 때 도와줘야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나갔다. 대체 저 폭죽들로 어떤 이벤트를 하려고 저러나. 여자들이 전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니 마틴이 문을 닫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연애에 목숨 건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알렉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고 긴 신호음이 이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받을 텐데 받는 것이 영 느렸다. 의외로 성격이 급한 알렉스는 행동의 틈에서 자주 실수를 하곤 했다.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성격이 변해 온 건지 욱하는 성격도 제법 있었다. 그래도 속이 깊어서 그렇게 화를 내거나 실수를 하고나서 민망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데다가 사과도 빨랐다. 이전 고등학교 시절 때 봤던 알렉스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터라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혹시 일이 끝나지 않은 건가 싶어서 나중에 다시 전화하려고 하는 순간에 알렉스가 전화를 받았다. 내가 조금 놀라서 ‘알렉스?’하고 부르자 알렉스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알렉스? 혹시 알렉스 휴대폰 아니에요?”
-“맞아.”
“?? 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알렉스는 아무 일도 없다고 말했지만 목소리는 전혀 아무 일도 없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를 참으려는 듯이 씨근덕거리고 있는데다가 주변이 약간 소란스러웠다. 밖인 것 같은데, 어딜 가는 건가. 창밖을 보니 어둠이 차차 밀려오고 있었다. 겨울밤은 하루의 절반을 넘게 잡아먹으니 골치가 아프다던 알렉스의 대사가 기억났다. 알렉스는 밤을 싫어했다. 내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알렉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내가 말을 던지면 그에 맞는 짧은 대답만 던졌다. 뭔가 있구나. 내가 어딜 가는 중이냐고 물으니 알렉스는 살짝 망설이더니 ‘넌 몰라도 돼.’하고 중얼 거렸다. 몰라도 된다니. 이런 대답은 또 처음 들어본다. 어디냐고 물으면 시원 털털하게 ‘나 지금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 이라거나 ‘너희 학교에서 가까운데. 내가 그쪽 갈까?’하고 하거나. 감추는 사실 조차 감추고 싶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게 티가 나는 알렉스 서머즈씨에게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너 그 아저씨한테 복수하러 가냐?”
끝에 어설프게 ‘하하하’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답하지 않았다. ...진짜야? 내 얼굴이 수화기 너머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알렉스가 내 멍청한 얼굴을 더 화를 낼 것이 뻔했으니까. 사실 어제 알렉스가 들입다 욕을 하는 것을 듣고 오늘 일할 때는 괜찮을까 싶었다. 일 자체도 피곤하고 스트레스 받는데, 주변 사람이 짜증나게 하면 스트레스는 몇 배로 높아진다. 어제 그렇게 욕을 하며 싸운 사람이 알렉스를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혹시 주먹다짐이라도 하는게 아닌가 걱정스럽기 까지 했다. 물론 알렉스가 그 남자에게 맞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또 미스터 다혈질의 알렉스께서 남자를 곤죽으로 만드시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 했다. 폭력사건에서는 나이든 사람들이 유리한 법이다. 물론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싸움 이후의 법적공방에 대한 이야기다. 또 그 남자가 그렇게 좋은 사람 같지도 않고, 어떤 거짓말과 언변으로 알렉스를 곤란하게 할지 어떻게 아는가. 알렉스가 내 말을 들으면 사내자식이 이후 일부터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겠지만 난 알렉스와 달랐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난 확실히 엄마 자식이 맞았다.) 내가 머릿속으로 묘한 생각들을 이어가고 있을 때에 알렉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대로 듣지 못한 내가 ‘뭐?’하고 물으니 알렉스는 감정이 가득 담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새끼가....했다고!”
“뭐? 뭐라는 거야? 하나도 안 들려!”
알렉스는 그 말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쪽팔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끊어.’라고 난폭하게 말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내가 ‘대체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하고 외쳤다. 내가 들어도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급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나는 알렉스가 그 남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얼어붙었다. 물론 알렉스가 그 남자를 죽이진 않을 거다. 그래봤자. 그냥 죽도록 패는 그런 정도겠지. 아무리 남자가 알렉스를 짜증스럽게 하고 열 받게 하고 화가 나게 하고 사라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고, 내가 지금 듣지 못한 어떤 짓을 했다지만, 과연 알렉스가.....어쩌면 죽이고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둘 수는 없다. 얼마 전 리더십 특강에서 들었던 ‘타인을 설득하는 방법 12가지’를 떠올렸다. 첫 번째가 뭐였더라. 아 그래, 타인의 의견과 생각을 경청하라. 내가 한숨을 몰아쉬면서 알렉스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나 끊는다.”
툭 전화가 끊겼다. ...진짜로 끊은 건가?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수화기를 내려다보고 바보같이 외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알렉스? 알렉스 서머즈? 이 개자식아?!’ 맙소사 진짜 끊었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알렉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반복되는 여자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밖을 보니 어둑했던 하늘은 아예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알렉스가 가는 곳이 어딜까. 아무래도 밖인 듯싶었고 걷는 것인지 색색거리는 숨소리도 들렸다. (분명 그 숨결에는 분노 또한 있겠지만)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라는 것은 결국 펍으로 간다는 것이겠지. 저녁마다 그곳에서 술판이 벌어진다고 했으니까. 나는 외투를 허겁지겁 입으면서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거칠게 목에 목도리를 낚아채면서 생각했다. 저번 알렉스가 현장 옆에 괜찮은 펍이 있다고 했었다. 아마 그곳일 것이다. 아니라고 해도 현장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니 그곳에서 멀지 않겠지. 그러다가 문득 떠올린 단어에 나는 멈칫했다. ‘현장 사람들’ ...과연 거기서 하버드 약골인 내가 주먹이라도 휘두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알렉스의 주먹을 막으려고 가는 것이긴 한데 거기서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그냥 흠싯 두드려 맞다가 돌아오는 건 아닌가. 무작정 알렉스를 끌고 나오면 좋기야 하겠지만, 붉은 천을 본 황소 같은 알렉스를 어찌 막아낼 수 있을는지도 고민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면서 방을 왔다갔다 거리고 있을 때 문득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그리고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어쩌겠는가. 이판사판이다.
* * *
COLDPLAY - PARADISE (in Mylo Xyloto)
얼마 전, 앤 맥코이가 목도리와 보내온 앨범.
함께 배송된 푸른색 카드에는 ‘요즘 엄청 행복해 보이는 것 알아?’라고 쓰여 있었음.
남자는 알렉스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재수 없게 째져있는 눈도 그렇고 비열하도록 얇은 입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자신의 멍든 상처를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알렉스에게 마치 ‘나는 널 전부 알아.’라고 말하는 듯해서 더 거북했고 열 받게 만들었다. 알렉스가 펍안으로 들어섰을 때 알렉스를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반쯤 걸치고 있던 의자에서 엉덩이를 일으켜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알렉스는 그 곳에 가만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 남자에게 얻어맞은 뺨이 얼얼했다. 인부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잠시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을 때 남자는 알렉스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비아냥거림을 가득 담아 공격했다. 영문도 모를 공격에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노라니 남자는 피우고 있던 짧은 담배를 알렉스에게 휙 던졌다. 피하기도 전에 쓰고 있던 안전모를 맞고 떨어진 꽁초를 보며 알렉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알렉스의 반응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너 고아새끼라며, 톰이 그러더라고? 나름 하던게 운동이었는데 다리병신 돼서 그만 뒀다고. 핏덩이 애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모습에 왜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나 했더니. 운동 좀 꽤나 했나봐? 그거 믿고 나선거야? 이거 순진한 새낄세.’
남자의 터무니없는 말에 알렉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에 남자는 더 비위가 상한 모양인지 덧붙여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전히 남자는 사라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 또한 몰랐다 다만 그녀가 알렉스의 곁에 머물었거나 혹은 머물고 있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것은 그에게 상관없었다. 다만 그는 알렉스를 화가 나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어젯밤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알렉스를 화가 나게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남자가 사라를 그년(Bitch)라고 칭하면서 그녀가 알렉스의 곁에 있었던 이유는 너와 같이 머리가 비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눈이 획가닥 돈 알렉스가 주먹을 던졌다. 그러나 알렉스의 공격을 예상한 그가 알렉스의 손을 피하면서 되레 알렉스의 얼굴로 주먹을 내리 꽂았다. 제법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알렉스가 흙과 눈덩이가 모여 있는 곳에 뒹굴었다. 식사를 마치고 컨테이너에서 나오던 톰의 무리들은 깜짝 놀라 둘에게 다가갔고 남자에게 덤비려는 알렉스를 막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남자의 얼굴 한번 후려치지 못한 체로 강제귀가 처분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이 부당했다.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알렉스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호구로 볼게 뻔했다. 이 일이 짭짤하기에 포기하기 아쉬웠지만, 자존심까지 다 팔아가면서 이곳에 있고 싶진 않았다. 자르라면 자르라지. 알렉스는 느직한 시간에 펍으로 향했다. 그곳에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 뻔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리고 알렉스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남자 외에도 알렉스를 발견한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알렉스를 보았다. 그들 중 한명은 손을 흔들며 아는 체했으나 알렉스는 무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시선이 결코 온순한 성격은 아니며, 이곳이 싸움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알렉스와 남자, 두 사람은 전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걸음을 옮기기 전에 알렉스가 빠르게 달려들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알렉스는 이런 부류가 싫었다. 멀쩡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놈들. 저들도 약자면서 더 힘없는 약자를 누르고 싶어 하는 좀벌레같은 새끼들. 저들도 인간이라며 바르작거리는 벌레들. 아니 벌레보다 못한 새끼들. 자신도 모자라 사라까지 거들먹거리며 어떻게든 도발해버려는 못돼 처먹은 인간. 알렉스에게 멱살이 잡힌 남자는 휘청거렸다. 그에게는 술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알렉스는 남자의 얼굴에 훅(Hook)을 넣었다. 남자가 자신에게 남긴 멍자국이 있는 장소와 같았다. 남자가 뒤 테이블로 휘청거리며 쓰러졌고 술을 마시다 봉변을 당한 사람들은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남자가 일어서기 전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무색하게 남자는 달려드는 알렉스의 배를 발로 차올렸다. 쿠당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가 나가떨어지자 남자는 입가의 핏줄기를 닦으면서 씨익 웃었다. 되레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바르작거리며 일어나는 알렉스에게 남자가 다가갔다. 그리고 옆구리를 발로 차올렸다. 커다란 타격음과 함께 알렉스의 신음이 울렸다. 뒤에 있던 동료들은 남자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그를 말리기 위해 어깨를 잡았으나 남자는 그 손을 뿌리치면서 알렉스를 구타했다. 알렉스는 입에서 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으려 애쓰며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깊숙한 곳에서 경멸과 분노가 섞여들어 범벅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알렉스!!”
갑자기 훅 끼쳐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동시에 커다란 전봇대가 펍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남자가 발길질을 멈췄다. 알렉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흐릿한 눈동자로 익숙한 신발이 보였다. 무식하게 커다란 발과 남색 스니커즈. 알렉스가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전봇대는 ‘으아아아!!!’거리며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배가 터질 것 같은 아픔에도 알렉스는 그 비명이 지독히 너드같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전봇대의 등장에 남자는 당황한 듯 했으나 어수룩해 보이는데다가 공부밖에 안했을 샌님 같은 면모에 비웃음을 날리며 ‘넌 뭐야’ 라는 양아치 같은 대사들을 지껄였다. 알렉스가 남색 스니커즈를 보며 판단한 이 하버드생은 ‘넌 몰라도 돼!’하고 용기 있게 외쳤으나 알렉스는 그것이 매우 계집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여전히 비아냥거리며 다가서자 행크는 멈칫했다. 겁먹은 얼굴이 여실히 드러났다. 저 덩치에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주변에는 노골적으로 웃음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행크는 나름 무서운 얼굴을 지어보이더니 주머니에서 뒤적이며 라이터를 꺼냈다. 그러면서 ‘가까이 오지 마!’하고 말했다. 사람들은 행크가 주먹에 쥔 것이 수류탄인줄 알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기로는 분명 라이터이지만, 보통 라이터를 들고서 위협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바닥에 기름이 깔린 것도 아니고.
건달에게 소리 지르는 아가씨 같은 모습에 남자는 실실 웃었다. 그리고 가까이 가지 않으면 어쩔 거냐는 듯이 웃었다. 그새에 알렉스는 비실거리며 일어났고 앞에서 멀뚱히 있는 행크를 무시한 채로 남자에게 덤비려 했지만 행크가 커다란 손으로 알렉스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행크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농구공만한 (그리고 그것은 목도리로 감싼 것이 틀림없는) 털뭉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건 폭탄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이없기만 했다. 대체 이 또라이는 뭐란 말인가. 갑자기 나타나서 저 노란머리 애새끼를 외쳐 부르질 않나, 아가씨마냥 소리치질 않나, 품에서 털뭉치를 꺼내며 폭탄이라고 중얼거리질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알렉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행크는 대단한 일이라도 끝낸것 마냥 웃으면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물러서라고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되레 어이없이 웃으면서 ‘폭탄이라며, 불붙어봐.’하고 말했다. 행크가 당황해 했다.
“...너 미쳤냐?”
행크의 팔에 붙잡힌 알렉스가 말했다. 행크는 들고 있던 라이터를 꼼지락 거리면서 들고 있다가 남자를 향해 ‘이...이건 진짜 폭...폭탄이다!’하고 다시 외쳤다. 구체의 털복숭이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별 또라이를 다 보겠네.’하고 말했다. 그리고 행크가 폭탄이라고 격렬하게 칭하는 털뭉텅이를 발로 차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행크가 깜짝 놀라며 ‘안 돼!’하고 외쳤다. 알렉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행크를 바라보다가 다시 덤비라는 남자의 도발에 표정을 바꾸었다. 그때였다. 무언가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를 붙잡고 있는 행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꽤나 아프게 쥐어오는 손길에 알렉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하얗게 질린 행크의 표정이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걷어차 버린 행크의 폭탄이 펍의 벽면에 있는 화로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털복숭이 폭탄은 불에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하지만 타는게 영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목도리로 감싼 것 같던데 (그것은 행크가 최근에 자주하고 다니던 목도리였음으로) 목도리가 저렇게 격렬하게 타던가? 알렉스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에 무언가 파팍!! 터지면서 피융-하고 날아왔다. 이어서 펑펑!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화로 안에서는 오색의 빛깔들이 예쁘게 빛을 내다가 터져 올랐고 작은 불꽃들은 점차 커져 이내에 펍의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란스럽게 커졌다. 그리고 불꽃의 규격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멍하니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가 분명 저건 폭죽의 형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행크는 손을 붙들어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행크의 커다란 손에 붙들린 알렉스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이 펍을 바로 벗어나자마자 건물 안에서 총소리보다 몇 배는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펑펑!’하는 빛깔들은 곱고 아름다웠지만 그 소음과 사람들의 비명은 그러하지 못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펍을 바라보았고 이어서 펍 밖에 있는 행크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경찰서에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놀란 눈을 하고 뛰쳐나왔다. 알렉스가 발을 슬금슬금 옮기다가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알렉스의 손에 붙잡힌 행크가 발걸음에 맞춰 끌려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뒤에서 들리는 폭죽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남겨두고 미친 듯이 달렸다. 한참을 달려도 폭죽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찌나 귀가 아프게 들리는지 코앞에서 폭죽이 터진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행크는 얼굴을 쓸어내리는 찬바람을 맞으며 마틴이 준비했던 폭죽 세트의 위력을 다시 생각했다. ‘마틴, 아무래도 저건 이벤트용이 아니라 살인용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쓸데없는 생각을 덧붙였다.
정신없이 뛰어온 곳은 두 사람이 가끔 맥주를 마시곤 하던 찰스 강 근처였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한 행크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고 알렉스 또한 머지않은 곳에 멈추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2분 정도의 적막이 흐를 때에 알렉스가 갑작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큭큭 거리던 작은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종국에는 커다란 웃음소리로 변했다. 배를 끌어안고서 웃는 알렉스는 정말 즐거워보였다. 푸하하하 웃는 알렉스를 보던 행크는 이내에 자신의 입가에서도 웃음이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 그 목도리 안에 폭죽들이 가득 들어있을 줄은 전혀 몰랐겠지. 게다가 그것을 화로로 차버린 것은 자신도 아닌 그 남자였으니, 결국 무덤을 판셈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행크 역시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푸하하 웃기 시작했다. 저녁에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주저앉아 웃는 두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행크와 알렉스는 멈추지 않고 웃었다. 어느새 알렉스의 눈초리에는 눈물까지 묻어 있었다. 행크는 웃음을 겨우 삼키며 조명에 반짝이는 강가를 바라보았다. 매서운 찬바람이 온몸을 후려치고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니 알렉스 역시 겨우 웃음을 삼키며 강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에 빛나는 알렉스의 하얀 뺨을 행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에 마주치는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알렉스는 행크가 놀라는 얼굴이 바보 같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행크는 그 말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문득 동생이 보내온 카드가 생각났다.
***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죽고 싶어. 정말 딱 죽고 싶을 정도로 내가 저주스럽고 역겨워.’
‘.......’
‘그때 내가 그 순간에 발악하는 그녀를 끌어안고만 있었더라면, 그녀의 팔뚝에 모르핀을 놓지 않았더라면.’
‘.......’
‘...지금 사라가 내 곁에 있을까?’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모른다. 행동하는 순간, 말을 뱉는 순간, 눈을 마주치는 순간, 손끝이 스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한 존재인지 모른다.
알렉스가 내게 사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한 것은 사실 꽤 지난 이야기다. 당시 사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히 인간들이 말하는 인간애와 동족애 정도의 단계에서만 슬퍼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복잡 오묘한 슬픔과 안타까움만으로도 그 순간이 벅찼다. 그래서 최근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에 대해서 나는 의아함과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이 감정들은 어디 숨어 있다가 나를 찾아온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점차 알 수 없는 미지의 단계를 떠나 나에게 고통이 되고 슬픔이 되는 계단을 걷게 했다. 이 행동들은 모두 ‘어디선가 튀어나온 감정’이 나에게 강제적으로 시킨 것들이며, 나의 자의적인 생각과 행동은 전혀 없었다. 나는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되며 또 잠정적인 사형수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한 감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알렉스가 술에 취할 때마다 사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아침에 세수하는 만큼이나 정형화된 습관이었다. 술기운 때문에 붉어진 눈시울은 거뭇한 그림자가 흐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가만히 물다가 ‘사라는’하고 입을 열곤 했다. 그때면 난 지문조차 찍히지 않은 깨끗한 안경을 괜히 벗어 겉옷으로 닦으며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나 이야기는 ‘사라는’으로 시작했고 ‘사라는’으로 끝났다. 타인은 절대 그 이야기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술 취한 알렉스의 혀는 사라만을 찾았다. 알렉스가 사라의 죽음을 이야기 한 것도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사라는’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그 어미는 ‘사라는 나 때문에 죽었어.’라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알렉스가 한참 운동을 그만두게 되고 고통을 겪을 당시, 일을 하지 못하는 알렉스를 대신해 사라는 늘 일을 해야 했다. 건물 청소, 슈퍼마켓 카운터, 서빙. 그녀는 일이 끝나고 나서 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알렉스의 앞에서만은 원더우먼처럼 전혀 힘들지 않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하지만 알렉스가 희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끝을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분명 사라는 알렉스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녀가 고통을 감수하고 받아들일수록 알렉스는 괴로워졌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자책과 스스로에 대한 분노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탈선의 시작이었다.
알렉스는 과거를 말하면서 자신이 그 이전에 캔디, 그러니까 마약을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유혹은 많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신의 선수생활이 그대로 무너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거부해왔다. 하지만 선수 생활이 무너지고 또 그가 정신적인 자학으로 인해 구렁텅이 빠져 있을 때에 마약은 그의 심장의 뿌리로 스며들어왔다. 코카인으로 시작되어 모르핀, 메사돈 그리고 크랙까지 경험하자 그의 손안의 주사기는 왕좌의 왕처럼 버티고 있었다. 알렉스는 마약을 할 때마다 잘 알던 선배의 위로를 받았다. 그는 알렉스에게 처음으로 캔디를 권유했던 사람이었고 또 처음 주사를 놔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단계고, 알렉스가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이것들이 (그러면서 그는 주사기와 멀건 용액이 담긴 케이스를 들어보였다고 했다.) 분명히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실제로 알렉스는 그것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몸 안에 퍼져가는 약기운은 지옥 같은 세상을 파라다이스로 만들었다. 행복. 그렇게 죽도록 아파하며 추구했던 그 행복이 이 주사한방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누이며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라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가 일요일이었을걸. 그 전날에 사라랑 엄청 싸웠었단 말이야. 사라는 내가 밤늦게 술 취해서 들어오는 것을 정말 싫어했어. 그 애는 밤늦도록 일을 하고, 나는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웃기지?’
알렉스가 처음으로 사라의 팔뚝에 모르핀을 놔준 것은 일요일 오후, 햇볕이 침대위로 아스라니 떨어지던 초겨울이었다. 전날에 격렬한 싸움을 나눈 두 사람은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라는 한마디도 없이 획하니 밖을 나섰다. 약물에 절어있는 몸들은 차차 부작용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장은 터질듯이 두근거렸다가도 곧 꺼질 것처럼 둔탁하게 울렸다. 밤이 되어도 잠은 오지 않았고, 불면증에 걸린 사람마냥 하루 종일 멍했다. 모든게 엉망진창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나는 초점이 나가있는 알렉스의 눈을 상상 할 수 없었다. 분명 그는 피로하고 슬픈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것은 생기가 돌았고 반짝거렸다. 혹시나 해서 지금도 마약을 하냐는 내 어리석은 질문에 알렉스는 어이없단 얼굴로 나에게 먹고 있던 팝콘을 던졌다.
‘안 해, 멍청아.’
당시 알렉스는 집안에서 가루를 마시거나 주사기를 가지고 논적은 없다고 했다. 사라가 눈치가 빠르거나 예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분명 집안에서 그런 짓을 하다가는 의심을 당할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 날만큼은 자신을 방기했다. 텅 비어있는 집안을 멍하니 둘러보다가 가방에서 주사기와 유리 케이스를 꺼냈다. 긴팔을 걷어내자 탄탄한 팔뚝에는 수많은 바늘자국이 있었다. (알렉스가 그 말을 던졌을 때 나는 힐끔 그의 팔뚝을 보았다.) 흐릿한 눈동자로 팔뚝에 바늘을 꽃아 넣었을 때 무언가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는 사과파이로 예측되는 음식이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당황한 얼굴의 사라가 있었다. 알렉스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는 듯 했다. 사라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아이보리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뒹굴고 있던 사과파이는 옆집의 블룸여사에게 받아온 것이 틀림없었다며 장담하기까지 했다. 꽤나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난 아차 싶었어. 사라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면 어떻게 하지? 아 이제 완전 끝났구나. 어떻게 사라를 붙잡지? 아니야. 그냥 놔줘야 할지도 몰라. 이제는 이 아이를 놔줘야 할 때야. 나 같은 짐승을 먹여 살린다고 자신의 인생을 소비한 애야. 나 때문에 제 부모도 포기한 애야. 이 아이를 붙잡아 둘 순 없어. 보내야해. 보내야해. 하지만 사라가 없으면 난 어떻게 하지? 사라 없이 난 어떻게 살지? ...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들었어. (알렉스는 말하면서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매우 애달파 보였다.) 바늘이 부러지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사기를 빼낼 수 없을 만큼 난 패닉에 빠져있었어. 하지만 사라는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화장실로 쑥 들어가 버렸어. 나와 뭉개진 사과파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지.’
꽤나 긴 시간동안 사라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알렉스는 점차 두려워졌다. 문 너머에서는 사라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끝없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환상을 느낄 세도 없이 알렉스는 주사기를 내려놓고 화장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2시간이 흘렀을 때 사라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눈가는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떨리는 입술을 막기 위해 앙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알렉스를 지나쳐 그가 앉아있었던 침대맡에 앉았다. 그리고 알렉스가 들고 있었던 주사기를 들었다.
‘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멍하니 보고 있으니까 그 애가 이러는 거야. ‘그냥 찔러 넣으면 되는 거야?’ ... 그리고 정말 아무렇게 찔러 넣을 것 같이 팔뚝을 걷고 주사기를 놓으려고 했어. 내가 후다닥 달려가서 손목을 잡고 이러지 말라니까 갑자기 울더라고.’
‘나도 행복 할래,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녀가 울면서 알렉스에게 외쳤다. 알렉스가 잡고 있는 손목은 가느다랬고 그녀의 손등은 차가운 바람 때문에 갈라져 있었다. 홀쭉한 뺨으로 눈물이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알렉스가 거친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하자 그녀는 냉정하게 알렉스의 손을 내치면서 ‘네가 해줄 거 아니면, 내가 할 거야.’하고 말했다. 그리고 알렉스가 빼앗은 주사기를 다시 빼앗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의 반항은 점차 커져갔고 이내에 알렉스의 가방을 뒤져 다른 주사기를 꺼냈다. 그녀의 행동들은 마치 미친 짐승 같았다고 알렉스는 회상했다. 주사를 놓다가 바늘이 부러지면 굉장히 위험했다. 알렉스는 반항하는 그녀의 몸을 붙잡으며 알겠다고, 내가 해주겠다고 그녀를 달랬다. 그 한마디에 그녀는 반항하던 몸을 멈추고 그에게 주사기를 내밀었다. 마찬가지로 알렉스는 그 순간을 매우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침대에 앉히는 단계부터, 주사기 안으로 투명한 모르핀을 빨아 넣는 단계, 그리고 그녀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넣는 단계까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분명 그에게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되었을 텐데도 그는 표정하나 구기지 않았다.
햇볕이 침대위로 켜켜이 쌓이고,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위로 따사로운 빛들이 쏟아져 내리던 것을 알렉스는 기억했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서 그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꽃아 넣던 자신의 모습까지 기억했다. 알렉스에게 그 장면을 들을 때, 나는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과 왕자님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은 동화가 아닌 처절한 현실이었다. 마약에 취한 남자친구에게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다며 모르핀을 놔달라고 하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에게 모르핀을 놔주는 남자. 성스러운 햇볕들이 그들을 감싸고, 침대위로 스며 나오는 미모사 향기가 그들을 둘러싼다한들, 그들에게 있어 평화와 향기와 안식은 전혀 존재하지 못할게 틀림없었다. 차차 쾌락에 빠지기 시작한 그녀를 침대에 누이며 알렉스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갔고, 갈라진 입술사이로 헐떡이는 탄성이 흘러나왔고 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등위로 키스를 퍼부으면서 알렉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것을 계기로 차차 마약에 빠져나온 알렉스와 달리, 그녀는 그것을 계기로 마약으로 빠져들어 갔다. 알렉스가 마약에서 빠져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단번에 끊은 것은 아니었다. 마약을 끊기 위해서는 사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투에서 여러 번 패했었다고 알렉스는 말했다. 그래도 경각심을 가지고 있던 알렉스와 달리, 그녀는 마약이 도피처라도 되는 듯이 끊임없이 그것을 찾았다. 사라는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들기 전에 알렉스에게 ‘주사 놔줘.’하고 말했다. 알렉스가 망설이기라도 하면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누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가방에서 모르핀을 꺼내왔다. 그녀의 가녀린 팔뚝에 주사를 놔주고 자신의 팔뚝에도 주사를 놓았다. 쾌락의 고조가 올 때면 그녀는 알렉스를 끌어안으며 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리고 알렉스도 그녀를 껴안으며 달뜬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내내 울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죽음이 그 마약 때문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 알렉스는 마약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 때문이다. 라고 늘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알렉스’ 때문이기도 하고 ‘마약’ 때문이기도 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녀의 죽음에 있어 알렉스는 분명 큰 역할이었다. 죽음 자체가 알렉스 때문은 아니지만 분명 원인은 알렉스에게 있긴 했다. 그는 차차 마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그럴 필요가 있었다. 마약에 빠져드는 사라를 볼수록 더욱더 계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영향력에서 거의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사라를 붙잡고 말했다. 이젠 그만둬야 한다고. 분명 사라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분명 옳은 길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사라가 알렉스에게 반항하거나 혹은 먼저 시작해 놓고 왜 선생질이냐는 폭언을 던졌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내 생각과 달리 사라는 알렉스의 말에 수긍한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사라라는 큰 계기로 마약으로부터 멀어진 알렉스와 달리 사라에게는 계기가 부족했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녀는 점점 위험한 세계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알렉스의 눈을 피해 모르핀을 구하고, 때로는 크랙을 구해오곤 했다. 그리고 그의 눈을 피해 환락의 세계에 머물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장 괴로워 한 것은 다름 아닌 알렉스였다. 알렉스는 그녀의 취한 모습에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을 키워갔다. 알렉스의 품안에 있는 괴물은 날마다 떨어지는 먹이를 먹으며 몸을 부풀려갔다. 알렉스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알렉스가 약물에서 벗어나고 (그것은 순전히 그의 자력이자 동시 사라를 사라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나는 그런 알렉스가 대단하고 무서웠다.) 사라와 자신을 위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사라는 엉망진창의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밤중에 알렉스와 크게 소리를 내 싸우기도 하고 서로를 붙잡고 울며 다시는 약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수십 번, 그런 순간들을 연속해서 겪음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변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사라가 영원히 변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알렉스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기로 했다. 특히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갈라진 그의 입술에서 물기 섞인 단어들은 역시나 자책과 후회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속에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는 물기하나 없이 건조하기만 했다.
‘사라가 나를 견뎠던 것만큼, 나는 사라를 견디지 못한 건 아닐까. 사라가 날 사랑한 만큼, 내가 사라를 사랑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가정이 아닌 진실. 완전한 진실을 담아 그는 이야기 했다. 그의 대답들이 의문으로 끝나고 있었지만 절대 의문은 아니었다. 알렉스의 핏빛 고해들은 나를 점잖고 늙은 신부로 만들었다. 그의 고해성사는 끝나지 않는 철길처럼 계속해서 이어졌다. 알렉스는 그녀의 부모에게 전화했다. 알렉스와 동거하기로 한 그날부터 사라는 그녀의 부모들과 일절 연락한적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더 이상 그녀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며 차디찬 말들을 뱉어냈으나 분명 몇 번 딸의 휴대폰으로 전화했을 것이 틀림없었노라고 알렉스는 말했었다. 그녀는 끝없이 거부했다. 그녀가 부모들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알렉스와 관계는 단절을 뜻했다. 비록 그들은 여리고 어리석은 존재들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으며 끝까지 사랑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박살내는 것은 그녀를 부모의 품으로 보내겠다는 알렉스의 한마디였다. 그녀는 인정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충혈 된 눈으로 알렉스를 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연락해야했다. 그녀를 이대로 둘 수 없었다고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몰래 연락을 했어. 그리고 대화를 했어. 그들은 처음에 나에 대해서 지독히 욕을 퍼붓다가 울기 시작했어. 그리고 긴 울음 끝에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거야. 당장 데리러 가겠다고.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어? 만약 내가 좀 더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면 전화할 일은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버러지 같은 놈이었고 능력도 돈도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화한통이었어. 그뿐이었어. 그것뿐이었어.’
그들이 사라를 데려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은 약물치료센터에 연락을 넣었다.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사라의 손을 쥐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 작은 방에서 알렉스는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흐트러지는 까만색 머리카락, 날카롭게 할퀴는 손톱들, 그리고 알렉스를 바라보는 까만 눈. 그것을 보며 알렉스는 오로지 혼자만 시간을 정지한 것처럼 서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붙잡혀 사라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고. 그는 사라를 개장수에게 팔아버린 기분이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어, 행크 왔냐? 한잔 할 거지? 밀러 500CC?”
“나 오늘 안마실거다.”
“웃기지마 하버드 범생이!! 오늘 우리는 끝까지 달려야해!”
“얜 또 뭐야. 넌 하버드 범생이 아니야?”
“선생님! 전 하버드 범생이가 아니어요! 전 하버드 킬러가 될 것이어와요!”
“이 새끼 완전 맛이 갔네.”
한동안 알렉스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움이 커져 미칠 것 같을 때면 그녀가 있을 센터나 혹은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부모의 집 앞을 서성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를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쉽사리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의 화인처럼 남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늘 알렉스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늘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알렉스를 찾아왔다. 그녀는 문을 두들기며 알렉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문을 열지 않았다. 알렉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문을 여는게 아니라, 그녀의 부모에게 전화한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은 그녀가 아직 치료를 받는 중이었으며, 아마 시설을 빠져나간 것이 틀림없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전화를 끊은 알렉스는, 시설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 가만히 문을 보고만 있었다. 사라의 울 듯한 목소리와 손목이 부셔져라 두들기는 소음과 눈에 보이는 진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몇분 뒤 남자 몇 명과 사라의 실랑이가 들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알렉스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고 했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오랜 시간동안 텅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음이 틀림없을 거라 생각했다.
“난 오늘 마시고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더니?”
“여동생이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잖아. 너 오기 전부터 울며불며 난리다.”
“.....아아. 캐서린 말이지?”
“남자 친구가 생긴건 틀림없어 보이는데 도무지 말을 안 한단다. 대체 어떤 늑대 같은 놈이 낚아채간 것이냐면서-”
“나쁜 새끼! 내가 찾아서 죽여 버릴 거야! 하버드 킬러가 되어 그 새낄 죽여 버릴 거야아아!!!”
“나 집에 가도 되냐?”
"가려면 얘 데리고 가라.”
“여기요! 버드와이저 500CC 주세요!”
그렇게 몇 번씩 난동이 계속 되었다. 알렉스는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코 자신이 그녀를 버리려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에 사라를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사라가 자신의 곁에 있으면 한없이 연약해 질것을 알았기에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다문 입은 몇 십 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았다. 나는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입속에 가두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알았다. 그렇게 알렉스는 사라를 보낸 것이었다. 그녀를 차가운 문밖에 둔 체로.
사랑만을 믿어왔던 연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상처 입은 알렉스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다만 알렉스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해한다.’라고 표현하긴 어렵다. ‘생각했다.’는 것이 더 어울린다. 이해한다는 표현은 때론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것은 위로보단 자만의 의미를 품고 있을 때가 있다. 결코 알렉스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고 추측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알렉스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것을 전부로 하고서 떠나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난 점점 사라에 대해서 말하고 추억하고 그 기억을 더듬으며 자책하는 알렉스가 증오스러워졌다.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과거에 대한 것들이 궁금하면서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래, 이것은 불쑥 찾아온 감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창문틀의 먼지같이 켜켜이 쌓여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너 금요일마다 바삐 어디를 가더니 오늘은 웬일이냐?”
“그래, 너 금요일마다 정기적인 약속 있다고 만날 우리 바람맞혀놓고는. 그러고 보니 너 저번 주에도 그냥 하우스에 있더라? 이제 시간 널널한거야?”
“바람은 무슨 바람을 맞혔다고 그래. 나야 늘 널널했잖아.”
“반신반의해서 전화했는데 온다고 하니까 깜짝 놀랐지 뭐냐.”
“우리 바쁘신 미스터 맥코이께서!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왔다 이거야!! 나 크리스 아이젠을 위해서!!”
“넌 아가리 닥치고 이거나 처먹어.”
킴이 짜증난다는 팝콘을 크리스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크리스는 우왁거리면서도 쑤셔 넣어주는 팝콘을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인형마냥 양 볼이 붉게 물든 크리스는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예상한대로 여동생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게 충격인 듯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 룸메이트 녀석이 네 여동생의 남자친구. 아니 네가 말하는 ‘죽일 놈의 남자친구’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힐끔 본 시계는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별이 총총 뜬 이 시간의 펍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학교 앞에서 가장 안주가 맛있기로 유명한 이 펍에는 미리부터 자리를 잡고 있지 않으면 엉덩이 붙일 곳이 없었다. 킴에게도 말했지만 난 술을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하우스 안에서 멍하니 벽을 보다가 나오라는 데이빗의 전화에 외투를 걸쳤을 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펍에는 크리스와 킴 그리고 데이빗이 있었다. (여담이지만 우리 넷은 1학년 때부터 몰려다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들 메이트가 되어있던 것이었다.) 데이빗과 킴이 말 한대로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알렉스와 늘 영화를 보곤 했던 금요일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하며 하루 종일 지냈겠지만 오늘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저번 주에도 그랬었다. 이주동안 나는 알렉스의 집을 찾지 않았다. 싸움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싸우지 않았다. 함께 있는게 불편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미묘하긴 하지만 불편하진 않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고 다시 물어본다면, 문제가 있다는 자체가 문제인거다.
“어어 행크- 맥주 왔다. 맥주 받아라.”
“아, 저기 밀러 1000CC랑 과일안주세트 좀 주세요.”
“데이빗, 너 그렇게나 먹으려고?”
“나 혼자 다 먹겠냐? 시험도 끝났는데 스트레스나 좀 풀어보자고.”
“소시지 세트도 시켜! 시키란 말이야!!”
“....물론 더 쌓일 수도 있겠지만”
삼일 전 알렉스가 전화를 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자 알렉스가 낮은 목소리로 대뜸 이름을 불러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너 내가 불편하냐?’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알렉스가 불편하지 않다. 알렉스와 함께하는 것은 되레 재미있다. 사라에 관련한 것을 제외하고서 녀석은 관계에 대해서도 깔끔하고 쿨하다. 생각보다 말주변도 있는 편이다. 이런 알렉스와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분명 난 알렉스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이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나는 알렉스를 좋아하기 때문에 편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불편한 것이다. 알렉스와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내 생활 속에서 단단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앤이 나에게 보냈던 카드는 정말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나도 모르게 알렉스와 함께하면서 즐거워졌고 행복해졌다. 알렉스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그래, 문제는 우리가 너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위협했다.
어린아이와 성인의 차이는 벽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갈라진다. 아이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은 벽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 탐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벽이란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벽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꽃을 미간에 대고서는 그것에 꽃인지 혹은 볼펜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해야만 꽃의 모양도 알 수 있고 색도 알 수 있다. 유명한 구절에도 그런 것 있지 않던가, 왜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는가. 어린 아이들은 타인과 스스로의 경계선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느끼는 것들이 모두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같지 않게 될 경우 이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어른이 되면서는 이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나도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 거리를 지키고 벽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배워왔다. 사실 그것은 나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간격만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간격이 너무 심하게 좁혀졌거나 멀어졌을 때는 움직이면 된다. 한발 앞으로 혹은 한발 뒤로. 그러나 알렉스와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힘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알렉스의 코앞에 서있었다. 나의 시야는 전부 알렉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겁을 먹었다. 더 이상 알렉스가 뱉는 사라의 이야기는 그저 알고서 넘어가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그가 사라에 대해 회상할 때, 마치 그녀가 살아있다는 듯이 표현할 때도 ‘그렇구나.’하고 지나 칠 수가 없었다. 알렉스와 영화를 보는 순간들, 함께 밥을 먹는 시간들, 좋아하는 야구선수가 트레이드 된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며 떠드는 이야기들, 이 모든 것들이 이전과는 달랐다. 조금씩 변화되는 것들에 대해서 나는 의문을 느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던 것이다. 차차 변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으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난 나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애써 무시했다.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들을 꾹꾹 눌러 닫고 그저 애써 웃으며 알렉스를 마주했다. 내가 웃으면 알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주었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라면 충분했다.
“그나저나 캐서린을 낚은 그 녀석은 대체 누구냐?”
“누군진 몰라도 운이 좋으면서도 운 나쁜 새끼인건 틀림없어. 캐서린 같은 예쁜 여자 친구 만들었다는 건 둘째 치고(여담이지만 캐서린은 저번 축제에서 메이퀸 타이틀을 따냈다.) 이런 시스터 콤플렉스 만땅인 오빠를 둔 여자를 낚아봤자. 앞길만 고생이지.”
“캐서리이인, 캐서리이이인. 오빠가 대학 나오고 연애하라고 했잖아아아아아~ 그랬자나~~!! 엉엉엉엉!!!”
하지만 분명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Amor vincit amnia!(사랑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지금 남자친구가 앞에 있는데, 늙은 오빠 말이 귀에 들어오겠냐? 그냥 내버려 두라고. 다 경험하면서 사는 거다.”
“네가 오빠 되어봐라!! 그게 마음대로 되나!!!”
알렉스가 친히 ‘한 너드의 폭죽사건’으로 부르는 그 때를 시작으로 분명 나에게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금붕어 꼬리만큼이나 연약했고 촉촉한 소프트 렌즈 만큼이나 부들부들한 것이었다. 이 변화의 방향을 지켜보던 나는 단 하나의 생각으로 입술을 꽉 깨물어야했다. 나는 알렉스와 친한 친구로서 남길 바랐다. 단지 그것뿐이면 됐다. 알렉스가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위로해주는 친구면 됐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그것들은 유지하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의 금요일. 그러니까 알렉스와 내가 비어있는 맥주를 이리저리 까놓고 텅 비어 있는 피자 박스를 테이블 위에 두고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을 때였다. 영화가 별로 재미없었는지 알렉스는 소파 위에 드러누워 쿨쿨 자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서 자고 있는 모습이 꼭 아기 같았다. 창문너머로 들어오는 붉은 빛은 알렉스의 금발머리를 쓰다듬었고 하얀 피부위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감춰진 푸른 눈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에 좀 취해있는 상태였고 솔솔 졸음이 오고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갈까, 아니면 자다가 아침에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책상위에 놓여있는 못생긴 솜인형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이 방에 남은 수많은 사라의 흔적 중 하나였다. 토끼인지 곰인지 알 수 없는 어정쩡한 귀가 특히 눈에 띄었다. 알렉스는 저 인형을 파인애플이라고 불렀다. (물론 내가 뭐냐고 물어본 뒤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솜인형 이름을 파인애플이라고 부른다는 자체도 우스웠지만, 당최 우리 또래의 남자애들이 솜인형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난 더 어이없었다. 그것을 눈치 챈 모양인지 알렉스는 두 손을 저으면서 ‘사라가 붙인 이름이라고. 색깔이 파인애플 색깔이라면서 그렇게 붙인 거야.’하고 대답했다. 어둠속에서 힐끔 보이는 솜인형은 무섭다기 보단 애처로웠다. 그 애처로움은 죽은 사라를 위한 것이 아닌, 사라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끌어안고 사는 알렉스를 향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알렉스처럼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낸다면, 난 그 사람의 흔적을 견디지 못하고 전부 없애버렸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알렉스는 그러지 않았다. 사라가 남긴 CD와 책, 인형과 퍼즐들. 그리고 이제는 먼지가 쌓인 화장품들까지 알렉스는 전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생활 속에서 그것들을 언제나 마주하면서 살아갔다. 그가 괴롭지 않은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것은 알렉스가 자신에게 내린 형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죽으면 알렉스처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남지 않아도 내가 남긴 물건들을 껴안고서 살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은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견디지 못하면서, 나를 위해 누군가는 내 죽음을 견디어주길 바라는 바보 같은 생각.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생각이 결국은 시작이었다. 변화의 시작. 조짐. 몽우리. 소파에 기대어서 알렉스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온몸을 쭈그려 자는 게 안타까웠지만 동시에 번데기 안의 나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금발머리카락을 넘겨주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내가 분명 취해있는 상태가 맞긴 맞았나보다) 그 이마에는 작은 상처가 하나 있었다. 최근에 알렉스는 공사일을 그만두고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 상처는 그곳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릇을 깼는데 유리파편이 이마를 긁고 지나갔단다. 그리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기에 나는 해리포터 같다면서 낄낄 웃었었다. 손을 가져다대고 옅은 상처를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가녀려보였다.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다. 정신적으로 알렉스는 가녀려 보였다. 알렉스를 처음 만났을 때 보다는 분명 그는 활달해지고 웃음이 많아졌다. 내가 알렉스와 친히 지내는 것을 알게 된 마틴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래도 알렉스 표정이 많이 좋아졌더라. 밤중에 술 마시며 방황하는 일도 없고.’라고 말했다. 그거야 마틴보다는 내가 더 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렉스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만약 사라가 살아 돌아온다면 사라질, 그런 종류의 우울함이었다.
“조니 녀석은 지금 여자가 4명이야. 그 새끼 그러면서 걸리지도 않는다니까.”
“조니? 네 동생 말이야?”
“그래. 반반하게 잘생긴 내 아우 말이야. 그러고 보니, 행크 너도 여동생 있지 않냐?”
“어. 있지.”
“저번에 사진 봤어. 예쁘장하던데.”
“걘 남자한테 관심 없어.”
“....그 의미 설마 그런 거냐?”
"아니거든. 지금 공부하는 게 재미있어서 남자에는 흥미가 안 생긴데. 귀찮으시단다.”
"행크으으- 그거 모르는거다아아-!! 우리 캐서린도 처음엔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자기의 연인은 에라스무스고, 허밍 웨이라던 녀석이 지금은!! 지금은!!!”
“아 진짜 크리스, 너 좀 닥쳐. 귀가 울린다고.”
“그런데 행크 동생이면 그럴만 하지 않냐? 3년 동안 봐왔지만 행크 이 녀석이 여자랑 있는 것을 생전 본적이 없단 말이지. 너도 기계랑 결혼했냐? 맥퀸 교수가 만날 그러지 않냐. ‘여러분, 저는 기계와 결혼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거 정말 보기 좋지 않아.”
“야야, 속단하지 말라고. 모르잖아. 또... 우리 행크가... 브리티니 스피어스보다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좋아할지도...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의미로 말이야.”
“...오 저런... 행크, 안타깝게도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게이가 아니야. 여자가 비엔나소시지처럼 늘어져 있잖아. 차라리 가능성 있는 리키 마틴을 좋아하라고”
“제발 부탁이니 닥쳐주지 않겠어?”
한 가지가 궁금했다. 내가 죽으면 알렉스가 슬퍼해줄까?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스스로를 탓할 때는 언제고 다시 생각은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알렉스가 사라가 죽은 것처럼 슬퍼해줄까? 날 기억해줄까? 알렉스의 하얀 이마를 끝없이 쓰다듬으면서 흘러가는 생각들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가까웠다. 집게손가락으로 고운 금빛 앞머리를 흘려 내리듯이 쓰다듬으면서도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다만 그가 나를 위해 괴로워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쫒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NO. 아니었다. 그래, 친구로서는 슬퍼해줄 수 있겠지.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웃고 함께 도망치던 사이로서 알렉스는 분명 나의 죽음을 슬퍼해줄 것이었다. 분명 정 많은 녀석이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슬픔은 그게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난 사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알렉스가 사라에게 보내는 그리움과 같은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알렉스가 죽은 사라를 향해 보내는 순애보적인 마음과, 그 처절한 죄책감들.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분명 나에게 있었다. 그 생각들이 지독하게 깊거나 넓은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두려웠다. 분명 그것들은 포자처럼 퍼져 나갈 것이고 종국에는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바라게 될 것이. 그래, 명확히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자는 사겨봤어?”
“이런 대화 꼭 해야겠냐?”
“남자끼리 있는데 이런 대화를 안하는 게 더 웃기지 않아?”
“난 여자이야기 싫다고.”
“아이고, 성 세바스찬 나셨네. 빼지 말고 말좀 해봐. 사귄 적은 있냐?”
“....없어.”
“맙소사. 행크, 인생이 너무 덧없이 않니? 여자라도 낚아보라고.”
“설마 몇 십 년에 걸쳐 짝사랑해온 여자가 있다거나 그런거 아니야?”
“우리가 나이 먹음 얼마나 먹었다고 몇 십 년이야, 몇 십 년이.”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한 부분들에서부터 나는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명할 표현이 없기에 불편하다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단지 불편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렉스에게 바라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불편했고, 또 알렉스가 내가 바라는 것들을 하지 않을 거란 사실 또한 불편했다. 모든게 불편하고 불편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알렉스에게 한발자국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하는 그의 전화에 심장 끝이 아팠다. 평소라면 가볍게 던질 말도 던지지 못한 체로 입안에 머물게 했다. 맥주 캔을 집을 때 살짝 닿는 온도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찔거렸고, 눈동자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알렉스가 자신이 불편하냐며 퉁명스럽게 연락한 것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괴롭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럽고싶지 않았다. 알렉스가 사랑스러운 사라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괴로운게 아니었다. 그 말들을 평온히 듣지 못하는 내 자신이 괴로웠다. 그러니 방법이란게 더 있겠는가. 이 고통스러운 것들이 잠시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비록 알렉스가 나에게 서운함을 느낄지라도 난 그러해야했다. 그게 나와 알렉스를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사랑이 아닌가? 다시 그렇게 묻는다면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알렉스를 향한 마음들 중에 애정 어린 감정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불같은 사랑은 없었다. 그를 향해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Odi et Amo. 알렉스가 사라를 향한 감정이 사랑과 증오였다면, 나 또한 알렉스를 향한 감정이 사랑과 증오였다. 분명 그 ‘사랑’이라는 점에서는 불확실 했지만 ‘증오’라는 점에서는 확실했다. 내 변화를 인정하고 또 마음의 크기를 인정 할수록 내가 알렉스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밤늦도록 전화하는 일이 사라졌다. 금요일에 알렉스를 찾아가지 않았고. 휴대폰 메일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가끔 수업중이라 전화와 메일을 보지 못했다는 어색한 답장을 보냈다.) 함께 펍에 가서 술을 마시는 일도 없었고, 역시나 찰스 강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사라졌다. 알렉스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서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나에게 요즘 왜 그러냐는 전화를 하긴 했지만, 분명 그 전화를 하기 전까지 알렉스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스트레스들은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우스운 것은 내가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알렉스를 보며 안도하고 있었단 사실이다. 내가 그에게 부재의 이유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알렉스의 전화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 내 마음을 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음은 꺼질 생각도 하지 않고 부피를 더해갔다. 마치 굶주린 괴물이 마구잡이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괴물이 배가 차길 기다려야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평소였다면 알렉스와 맥주와 피자와 영화를 즐기고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 알렉스가 아닌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더 이상 알렉스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것은 다행스러우면서도 날 불안하게 했다. 바보같이 내가 알렉스를 멀리해놓고 휴대폰만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는 자리에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또 내가 그에게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모든 게 바보 같고 엉망진창이었다. 고개를 내밀어 내안의 괴물이 음식을 다 먹었는지 확인할 때면, 괴물은 우적우적 거리는 이명으로 날 괴롭혔다.
“있긴 있는 모양이다?”
“....없어.”
“어허! 말본새가 매우 수상하구나!”
“킴, 너부터 여자 친구를 만들고 이런 말을 해라. 너도 여자 친구 없잖아.”
“난 잠재적 인간이잖아. 원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다고.”
“.....나 속이 안 좋아.”
“킴, 크리스가 속이 안좋다잖아.”
“나를 시기하는 자가 이리도 많다니.”
“....그게 아니라....욱....”
“으악!”
크리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곁에 있던 킴과 데이빗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으악으악 소리를 질렀다. 아까 전부터 그렇게 퍼마시는 것을 알아봐야했는데. 내가 벌떡 일어서자 두 사람도 벌떡 일어나 크리스를 끼고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마치 그 모습이 토미 리 존스와 윌 스미스에게 잡혀가는 외계인 같아서 우습기도 했지만 이후 벌어질 상황이 역겹기 그지없을 것 같아 마냥 웃을 수많은 없었다. 약이라도 좀 사와야겠다는 생각에 옆의 약국을 가려는 때에 진동이 울렸다. 난잡스런 상황에서 울린 전화라 누군지 확인도 못한 체로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에서 울리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누구냐고 물었지만 묘한 정적뿐이었다. 장난 전화인가 싶어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다름 아닌 알렉스였다. 그때부터 목을 타고서 긴장감이 스며 올라왔다. 알렉스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알렉스가 어떤 일로 전화를 한 것인지 혹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서운하다면서 불만을 토로 할수도 있고 대뜸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나는 옮기던 발걸음을 뚝 멈춘 체로 서 있었다. 들고 있는 지갑에 힘을 꽉주고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렉스?”
놀랍게도 수화기 너머로 터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숨을 삼키는 소리였다. 단지 숨을 삼키는 것이 아닌, 아이들이 울음을 참을 때 훌쩍이는 그 소리. 처음에는 내가 잘못들은 것인 줄 알고 눈을 깜빡이며 알렉스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다급하게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른 끝에 알렉스가 대답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이라기 보단 응답에 가까웠다. 갑작스럽게 내 귀에서는 알렉스가 흐느끼며 우는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작게 흐느끼던 소리는 종국에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변했고 뭉그러진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수없이 심장이 무너져 내린다는 소리를 들었고, 나도 몇 번씩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여태동안 난 정말 심장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스의 울음소리가 머릿속을 뱅뱅 돌고 가슴으로 내려가자 근육이 바싹 타들어가듯이 아파왔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며 나는 알렉스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알렉스는 그저 울기만 했다. 감성적이라기 보단 마초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감정보이기를 꺼려하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술이 깨어 있을 때는 거의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알코올의 도움이 있을 때였다. 하지만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단지 ‘이야기’일뿐 감정은 최소화했다.) 그런 녀석이 울고 불며 수화기를 잡고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다.
난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며 테이블에 있던 내 짐을 들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알렉스에게 곧 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숨넘어가게 말을 던졌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는 나에게 알렉스가 울면서 전화를 끊지 말라고 외쳤다. ‘끊지 마! 끊지마...끊지마아..’ 그 칭얼거림에 나는 전화를 끊지도 못한 채로 세게 얼굴을 비볐다. 택시를 잡으려 손을 흔들었지만 택시들은 손님을 태우고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뺨을 때리는 바람은 차가웠고, 택시들은 쌩하니 스쳐지나갔으며, 알렉스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동동거리던 내 발은 종국에 뛰기 시작했다.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뛰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횡단보도의 신호를 무시하고 뛰어가자 욕설이 뒤통수를 찔렀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뛰었다. 알렉스에게 곧 간다고 몇 번씩이나 되놰 말했다.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알렉스가 왜 울고 있는지. 또 어째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인지 등등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알렉스가 울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깨위로 쌓이는 눈들은 제법 굵었지만 그것들을 털어낼 시간은 없었다. 한참을 뛰니 저 먼곳에 알렉스의 낡은 빌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전화가 끊겼다. 당황해서 화면을 바라보니 배터리가 닳았던 모양인지 전원이 꺼지고 있었다. 뛰어가는 내 걸음이 더 바빠졌다.
빌라 안으로 들어가려던 뚱뚱한 남자를 거칠게 스치고 지나가자 뒤통수로 찌르는 욕설이 커다랗게 울렸다. 평소에 그렇게 힘들게 여겨지던 높은 계단은 전혀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에서는 내가 뛰는 소리만이 울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지만 멈출 수는 없었기에 더 거칠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안경에는 김이 끼어 주변이 하얗게 보였다. 엄마가 내 모습을 보면 꺅꺅 소리를 지르면서 ‘이게 걸인이야! 사람이야!’하고 내 등을 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드디어 알렉스의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흔들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지도 못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어둠이 있었다. 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방바닥에는 종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맥주 캔들이 뒹굴고 있었다. 부셔진 낡은 오디오. 쓰러진 옷걸이. 깨진 스탠드. 도둑이 든 것마냥 엉망진창으로 되어있는 곳을 둘러보며 나는 계속해서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가 없었다. 혹여나 부엌에 있어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역시나 난장판이 되어있을 뿐 알렉스는 없었다. 그때 화장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자 어둠속에 앉아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두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어 보이는 것은 동그란 뒤통수뿐이었다. 알렉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코를 찌르는 술 냄새가 났다. 숨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막으면서 나직하게 알렉스의 이름을 부르자 천천히 고개가 들었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눈망울과 벌겋게 달아올라있는 눈시울이 가슴 아릴만큼 처참했다. 뺨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자 갑작스럽게 알렉스가 목덜미를 껴안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울음이 아닌, 나를 끌어안고 우는 육성의 울음이었다. 나는 알렉스의 뜨겁고 축축한 등과 목덜미에 차가운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가만히 알렉스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쉽사리 멈출 것 같지 않았지만 난 끝까지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여기 있는 이유였다. 알렉스가 울음을 멈춘 것은 내 차가웠던 손이 그의 체온에 의해 뜨겁게 변했을 무렵이었다.
* * *
LIBERA - Be Still My Soul
알렉스가 살고 있는 빌라의 한블럭 너머에는 낡은 성당이 있다. 최근에는 크리스마스를 위한 어린이 성가대의 연습이 이어지는 중. 알렉스가 행크의 품에서 울고 있을 당시, 행크의 귓가에서 알렉스의 울음소리와 함께 들리던 합창곡.
크리스마스 연휴를 얼마 남기지 않았다. 킴은 크리스로 인해 오바이트 파티를 벌인 자신들을 쏙 빼두고서 튀어버린 행크를 한참 욕했다. (지난주의 이야기를 아직 꺼내는 그들을 보면서 알렉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내에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은 한국에 다녀올 생각이라면서 흥분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유대인인 크리스는 어차피 집에 가봤자 심심하기만 할 테니 기숙사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데이빗은 늘 가족들과 명절을 지냈기에 이번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고 말을 이었다. 데이빗과 마찬가지로 행크는 늘 성탄절을 가족들과 지내야했다. 그것은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뉴욕에 있는 앤도 곧 집으로 돌아오겠지. 다만 보스턴에 머물 데이빗과 달리 행크는 할머니가 계신 캘리포니아로 가야한다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이러니하게 행크는 성탄절을 늘 땡볕아래서 즐겨야 했다. 이런 행크를 보며 킴은 부럽다고 했지만 행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즐겨보고, 쌀쌀한 날씨를 만끽하며 커다란 트리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차차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행크를 만나기 위해 듣지도 않는 수업의 강의실에 쳐들어 왔던 크리스와 킴은 슬금슬금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도망가는 두 사람의 꽁무니를 보고 행크는 웃었다. 학생들을 쭈욱 훑어보던 교수는 씨익 웃더니 출석부를 뒤지기 시작했다.그리고 ‘행크 맥코이’하고 불렀다. 행크가 깜짝 놀라 ‘네!’하고 대답했다. 순서상 자신의 이름을 먼저 부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행크의 얼굴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교단 밑으로 내려와 학생들을 쭈욱 바라보았다.
“여러분, 잊지 않았겠지요? 저번시간 때 ‘Odi et Amo’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은 완벽하게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우리의 사랑은 증오가 함께 한다는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물어본다고 했는데 기억합니까? (학생들 몇 명이 웅얼거리듯이 말했다.)그렇습니다. 기억하는 학생들이 제법 있군요. 사랑이 어째서 아름다운지. 왜 아름다운지 물어본다고 했습니다. 저번 수업 시간 때 제가 했던 말들은 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의 대답을 원해요. 여러분의 경험과 또 세계관을 담은 이야기를 원합니다. 자, 그러면 행크 맥코이? (행크가 고개를 들어 교수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군요. 맥코이군에게 사랑은 왜 아름답습니까?"
행크는 교수의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의실 안으로는 정적이 스쳐지나갔고 몇 명의 학생들은 뒤를 돌아 행크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늘 앞자리에 앉아 안경을 빛내던 여학생은 노골적으로 행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행크는 그 눈빛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교수는 행크의 침묵에 웃음을 띠우고서 인내하고 있었다. 행크의 푸른 눈동자가 안경에 숨어 있었다. 교실 안으로 째깍째깍 초침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크의 담담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