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벨소리가 귀를 덮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침묵으로 뒤덮였는데도 나의 주위는 그 우스꽝스러운 벨소리 하나 때문에 침묵이 되지 못했다. 귀를 쟁쟁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손으로 귀를 막을 수도 있었지만 내 양손은 이불 안에서 완벽하게 따뜻했기에 차가운 공기 중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손을 움직이게 된다면 이 수면의 절반이 달아나 버릴 것을 알았다. 내 기분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여전히 소음은 마녀의 머리카락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잔뜩 몸을 웅크렸지만 그것에 만족하기가 어려웠는지 결국에는 몸뚱이가 휴대폰을 침대 밖으로 떨궈 버렸다. 쿠당!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 후에야 침묵이 찾아왔다. 아마 나는 휴대폰 배터리가 분리된 모양이라고 잠결에 추측했다. 그 모습은 아마 오트밀을 쏟아낸 볼(Bowl)의 모양일 테다. 머릿속으로 잠을 깨우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가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더욱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몸뚱이에 와 닿는 따뜻함은 강아지의 혓바닥 같았다. 물론 그보다는 부드러웠지만. 스며들듯이 오는 수마에 미간의 주름을 풀어내며 나긋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끈을 놓으려고 할 때 상자속의 피에로 인형 머리마냥 궁금증이 하나 튀어 올랐다.
‘대체 누가 이 새벽에 전화를 한거지.’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그리고 부리나케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어둠덕분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님이 벽을 더듬는 것 마냥 불을 켜고 탁장위에 있던 뿔테안경을 꼈다. 처절하게 분리되어 있는 휴대폰과 배터리를 결합시키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는 것을 보며 ‘제발, 제발’ 끝없이 중얼거렸다. 이내에 내 여동생의 얼굴이 화면에 뜨고 하얀 박스가 떠올랐다.
‘부재중 전화 1’
Warmly Disconnect AU of The X-MAN : First Class / Hank X Alex
우리 엄마는 잔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우리 엄마뿐 아니라 많은 자식을 둔 엄마들에게 통용되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결단코 우리 엄마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잔소리하기를 아주 많이 좋아했노라고 장담 할 수 있다. 그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와 내몫 이였는데, 한번 술에 취하신 아버지가 엄마를 붙잡고 울면서 ‘여보, 제발 부탁이니까 주둥아리 좀 묶어놔.’라고 호소한 탓에 그날부터 아빠를 향해 있던 잔소리들은 연어 떼처럼 역류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태풍이었고 폭풍이었으며 좀 더 심각한 말로는 지옥이었다. 내가 하버드에 입학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1학년 전원이 올드야드에서 기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그날만을 기다려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게 잔소리를 좋아하는 엄마가 나에게 꼭 한번씩 던지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절대로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 것’이었다. 옆집 제이크는 동네 깡패를 친구로 둔덕에 온 몸에서 담배냄새가 나고 언행이 불량해 졌으며 어쩌면 마약에까지 손을 댔지 모른다고 엄마는 말했다. (사실 내가 보기에 제이크가 껄렁하긴 하지만 그렇게 막나가는 아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이크는 내면에 겁이 많았다.) 제이크뿐 아니라 TV에 나오는 A Boy라던가 B Girl등등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마네킹들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시끄럽게 말할 필요 없이, 나에게 나쁜 친구는 없었다. Middle School부터 High School까지 나는 학급에서, 아니 학교에서 꽤나 상류성적에 속했었고,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친구들끼리 사귀게 되었다. 내가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친구들이 알아서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는 얌체 같은 녀석들도 있었지만 요령 없이 열심히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가끔 학교에서 불량한 녀석들이 공부밖에 모르는 촌놈이라고 놀린 적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그것들이 그 녀석들의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아이들에게 오렌지 주스와 초코 쿠키들을 내주면서 ‘넌 대학에 어디 갈거니? 행크는 하버드를 목표로 하고 있단다.’하며 호호호 웃었다. 난 엄마가 말하는 그 높이 까지 정확히 표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을 엄청나게, 정말 엄청나게, 어쩌면 엄마가 뱉었던 이 말을 쌓아올리면 내가 지내는 하우스(기숙사)의 높이만큼 될지도 모르게 내뱉었다. 엄마가 문을 닫고 나갈 때면 내 친구들은 ‘행크, 너희 어머니 정말 대단하시다.’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나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봐도 우리엄마는 정말 대단했다. 만약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엄마는 나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던져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가정하건데 스파이더맨이 날 구해주려고 날아온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넌 꺼져!!’라고 하며 거미줄을 끊어버렸을 거라 나는 장담 할 수 있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그런 그녀가 만약 알렉스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그녀의 큰 비명에 죽어가는 아빠를 모른 체하고서 더더욱 큰 소리를 지르며 ‘안 돼!! 안된다고!!!’라고 소리 지를게 뻔했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까지 모두 알렉스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알렉스와 나의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알렉스와 나의 관계가 아주 비밀스럽고 에로틱한 것은 아니다. 아주 담백하게 말하자면 알렉스는 내 룸메이트, 마틴의 부모님 옆집에 사는 청년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옆 건물 5층 꼭대기에 살았으며, 그곳은 빈말로도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즉 별사이 아니라는 뜻이다. 마틴의 말을 듣자하니 옆 건물의 주인은 아주 심술궂고 돈만 밝히는 뚱뚱한 유태인 남자인데, 그가 5층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것이 지금 알렉스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물론 다른 층보다야 싸겠지만 가끔 그곳은 비참할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런 환경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내가 보건데 그는 잘 곳이 필요한 것이지 살 곳이 필요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그 와중, 나쁜 것에는 좋은 것이 꼭 숨어 있기 마련이라고 그 집에서 가장 큰 장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창문이었다. 알렉스는 커다란 창문이 기울어 달려 있는 곳에 (다락이다보니 벽에 따라 창문이 기울어져 달려 있었다. 이것은 좀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침대를 두었는데,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바라보면 하늘이 보였다. 한번 알렉스는 거기 누워서 ‘사라는 여기서 섹스하는걸 좋아했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와 알렉스가 뉴욕의 별빛 아래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떠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너 뛰어 온거냐?”
“전화...저...전화를 안 받으니까...안 받으니까...헉.헉. 진짜 숨찬다.”
“너 정말 하버드 다니는거 맞아? 이럴 때면 진짜 멍청하기 짝이 없어.”
알렉스를 처음 본 것은, 아니 두 번째로 본 것은, 아니 세 번째 ......어쩌면 이런 표현들은 전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난 알렉스를 수없이 마주쳤을 거다. 그러나 그것은 내 기억 속에 들어 있지 않으니 난 알렉스를 몇 번 마주쳤는지 모른다. (즉 내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마틴의 부모님이 사신다는 그 건물의 현관에서 알렉스를 발견하기 이전에 나는 알렉스를 이미 알고 있었다. 녹색이 돌고 있는 파란 눈동자도, 얼마 전 같은 과의 헤니가 그렇게 염색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화사한 금발머리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눈매였다. 그 추위 속에서 웅크려 있는데도 난 알렉스를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떠있는 눈이 아니라 감고 있는 눈이어도 난 알 수 있었다. 만약 나에게 알렉스와 비슷한 눈매 사진 1000장을 준다하더라도 난 알렉스를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알렉스의 눈매는 나에게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은 영하 13도의 정말 추운 날씨였다. 나름 몸에 열이 많다고 자부하는 나도 보스턴의 겨울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손에 장갑을 끼고 다니지 않으면 손끝이 얼얼하다 못해 아팠다. 전날에 눈이 내려 바닥은 꽝꽝 얼어가고 있었다. 노인들은 물론이고 건장한 사내들마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가는 판국이었다. 그날 당시 여자친구에게 거하게 차인 마틴을 위로하기 위해 나와 마틴은 펍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틴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마시고 잊어버릴 거야! 나쁜 년! 나를 차다니!! 하버드의 쓴맛을 보여주마!!’하고 소리 질렀지만 천성적으로 술을 싫어하는 탓에 한 모금 마신 술잔을 다신 들지 않았다. 다만 앞에 놓인 크래커만 죽어라 먹으며 그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그녀의 험담을 듣다보니 시간은 무섭게 흘러가 있었다. 기숙사 문이 닫혀있을 거라고 예감한 우리는 넋 놓고 벌점에 대해 고민하기보단 마틴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빌라로 걸음을 옮겼다. 마틴이나 나나 우리 집으로 간다면 절대 살아나오지 못할 거라고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추위에 떨면서 도착지에 발을 딛었을 때 우리는 빌라 현관에 거지가 쭈그려 자고 있는 줄 알았다. 마틴은 퍽 귀찮은 얼굴을 하면서 어떻게 좀 해달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새벽 4시에, 어쩌면 얼어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 걸인을 깨우고 싶진 않았다. 우리가 코앞으로 다가섰을 때, 마틴은 ‘어?’하고 미묘한 소리를 던지더니 ‘이거 알렉스같은데.’하며 중얼거렸다.
미국 땅을 제외하고 보스턴에서만 해도 알렉스라는 이름은 엄청나게 흔한 이름이었다. 그에게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단지 수많은 알렉스들 중 그가 하나일거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틴이 적극적으로 아는 척을 하자 궁금증이 튀어나왔다. 마틴이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남자는 움직임조차 없었다. 마틴이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죽었나봐!’하고 말했다. 사실 남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공포에 질려있는 마틴의 얼굴이 우스웠기에 비죽이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모금 마신 술에 취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마틴은 어둠속에 있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한 모양인지 고개를 돌려 남자의 뺨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내가 ‘알렉스가 누군데?’하고 물어보자 마틴은 ‘옆집 남자애.’라고 단순하게 말을 던졌다. 나 지금 급하니 말 건네지 말라는 분위기가 확연해서 더 웃겼다. 당시 남자, 그러니까 알렉스에게는 술 냄새가 엄청나게 났다. 코감기 때문에 코가 막혀 있는 마틴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마틴이 다람쥐처럼 달려가 옆 건물의 문을 죽어라 두들겼다. 마틴이 미친 듯이 문을 두들기고 있는 사이에 나는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고, 연약한 빚더미에 싸여있는 얼굴을 끔뻑거리며 바라보았을 때, 그제야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알렉스’임을 알았다.
사실 그때에 멍청하게 자리 잡았던 생각은 ‘진짜 세상 좁구나.’였다. 눈을 감고 있는 알렉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여전히 술 냄새가 났으며, 입술은 파리했다. 입고 있는 점퍼는 두터웠지만 영하의 기온을 막을 만큼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멍청하게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마틴은 자고 있는 주인을 깨우는데 성공했다. 딱 봐도 옆구리에 엄청난 지방들을 보살피는 대머리 남자가 충혈 된 눈으로 마틴을 향해 소리 질렀다. 하지만 마틴은 그런 남자에게 지지 않고 ‘사람이 죽어간다고요!!’라고 맞받아쳤다. 마틴의 뜬금없는 소리에 주인은 고개를 내밀어 알렉스와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쓰며 ‘또 야!’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그의 괴성에 물음표를 달았지만 그는 그런 나는 안중에도 없었는지 성큼성큼 위층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서 여전히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나와 마틴을 보며 ‘안 데려오고 뭐해!?’라고 소리 질렀다. 그제야 마틴과 나는 빠릿하게 알렉스를 내 등에 업었다. 알렉스의 몸은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하지만 마틴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숨을 쉬고 있었으며, 코로 나오는 숨결은 따뜻하기까지 했다. (왜 마틴은 그가 죽었다고 외치기전에 그의 발숨을 확인하지 않은 걸까?) 겨우 5층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장은 숨을 헥헥 몰아쉬었다. 주머니에 있던 여러 열쇠를 훑어보더니 그중 하나를 잡아 철컥철컥 문을 열었다. 마틴은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그는 ‘다음에 또 이런다면 그냥 방 빼버릴 줄 알라고해!!’라고 소리 지르며 위협했다. 여전히 나는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주인장이 새벽 4시의 노크소리에 일어난 것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라고 예측할 뿐이었다.
정신없이 집안으로 들어가서 알렉스를 침대에 눕히고 허리를 들었을 때 뿌득하는 소리가 나와 신음을 하며 허리를 두들겼다. 나보다 작다 하더라도 성인남자의 무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마틴은 코를 훌쩍이며 어디선가 빨갛고 작은 난로를 가져와 콘센트에 꽂아 넣었고 역시나 허우적거리다가 전원을 틀었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켜지는 난로 빛으로 마틴의 얼굴이 붉게 익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시선을 돌려 알렉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알렉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렉스는 잠꼬대 하나 없이 축 늘어져 있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코 아래로 숨결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약하게 그의 몸에서 온기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틴은 그런 알렉스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코를 킁킁 거렸다. 마틴의 빨갛게 된 코를 보면서 약 4,5년 전의 알렉스를 생각했다. 지금도 확연하게 깊은 사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4,5년 전에는 정확하게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알렉스와 나는 같은 High School 안에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그저 그렇게 공부를 하는 애였지만, 알렉스는 조금 유명한 케이스였다. 육상이었던가, 미식축구였던가 아니면 야구였던가.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운동을 했었고 나름 성적이 좋았던 모양인지 교장은 매번 ‘알렉스 서머즈’라는 이름을 거론하며 그의 우수성을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어쩌면 그래서 알렉스의 이름과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 되었는지 모르겠다. 덧붙이자면 교장의 사랑을 받았던 알렉스는 반반한 얼굴로 여자애들에게 제법 인기도 많았지만 누군가와 몰려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늘 혼자 있거나 아니면 제 여자 친구와 있었다. 그 두 경우뿐이었다.
자주 마주쳤을지, 어쩌면 정말 손에 꼽게 마주쳤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알렉스는 단 한 번도 이야기 한적 없었다. 가끔씩 사물함에서 책을 꺼낼 때 그를 보게 되거나 교실을 이동할 때 봤던 게 전부였다.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졸업한 뒤로 그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동창이긴 하지만 그것에 큰 의미는 없었다. 알렉스 서머즈는 알렉스 서머즈일 뿐이었고, 나 행크 맥코이는 행크 맥코이일 뿐이었다. 그 두 이름 간에 접전은 전혀 없었다. 어쨌거나 잊고 있던 동창의 얼굴을 묘한 곳에서 발견한 나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는 당황스러움보다는 어째서 그가 이 영하의 기온에 남의 집 앞에서 만취상태로 자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마틴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그 작고 초라한 집에 알렉스를 남겨두고 마틴의 집으로 돌아왔다. 기숙사를 내버려두고 새벽부터 쳐들어온 아들과 아들 친구에게 마틴의 어머니는 잔소리를 하셨지만 이내 침구들을 주시며 어서 자라고 말씀하셨다. 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다. 놀랍게도 마틴의 어머니, 블룸 여사는 옆 건물 다락방에 사는 청년에 대하여 제법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아, 홍차 티백하나 있다. 이거라도 줄까?”
“유통기간 지난거 아니야?”
“계집애 같기는. 지났으면 어때, 어차피 홍찬데.”
“홍차도 유통기간 있거든? 세상의 것에서 유통기간 없는 건 없다고.”
“어쭈, 아주 철학자 나셨구만.”
요즘같이 이웃사촌이라는 표현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마틴은 옆집, 그것도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 알렉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는 확실하게 이 가정(블룸家)과 알렉스간에 교류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마틴이 ‘어제 우리 집 앞에 알렉스가 쓰려져 있었어요.’라고 말을 꺼내자 블룸여사는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 ‘그래서! 알렉스는 괜찮니?!’ 하고 요란을 떨었다. (이후에 마틴이 투덜거리길, 자신이 쓰러졌다고 했다면 나오지 않았을 리액션이라고 했다.) 마틴이 토스트를 우적우적 씹으며 우리가 집까지 데려다 줬다고 하자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하며 이제는 더 이상 소년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나와 마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이 어제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알렉스를 도우라는 신의 지시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우리의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미 그녀의 남편이 남기고 출근한 빈 그릇을 싱크대에 넣으며 ‘그래도 사라가 있을 때는 알렉스도 괜찮았는데 말이야.’하고 말했다. 내가 그녀의 깊은 한숨을 바라보고 있다가 소곤거리며 마틴에게 사라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답한 것은 마틴이 아닌 블룸여사였다. ‘사라는 알렉스의 여자 친구였단다.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정말 사랑스러운 애였어. 상냥하고 웃음도 많았고, 특히 미소 지을 때 쏘옥 들어가는 보조개가 정말 매력적이었단다.’ 그녀는 마치 사라의 얼굴을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어쩌면 그녀가 High School 시절, 알렉스와 함께 있던 여자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돌연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여자아이의 얼굴과 사라라는 이름이 매치되면서 확신으로 변했다. 사라 굴드. 12학년 때 나와 같은 반에 있던 여자아이였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블룸여사가 말 한대로 그녀는 까만 머리칼에 까만 눈동자의 히스페닉계열의 여자애였고 확실히 웃는 모습이 예뻤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해서 그나마 기억하는 것은, 역시나 같은 반이었던 에밀리과 그녀가 대판 싸움을 벌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밀리는 치어리더부에 있는 퀸카였는데, 콧대가 높고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소문으로 그녀는 알렉스를 좋아하고 있는 듯 했는데 (소문이란 듣고 싶지 않아도 어떻게든 들어오기 마련이다. 특히 학교에선 말이다. 이것을 밝히는 이유는 결코 나는 루머를 듣기 위해 귀동냥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는 뜻이다.) 몇 번이고 알렉스에게 차인 듯 했다. 버젓이 알렉스의 여자 친구가 있는데도 그렇게 어택을 했던 것을 보면 어지간히 자신 있던 모양이었다. 사연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이유일 것이 틀림없는 계기로 두 사람은 머리를 쥐어뜯고 할퀴는 등의 전형적이게 여자다운 싸움을 벌였다. 선생과 학생들이 뜯어말렸지만 놀랍게도 싸움은 2시간동안 지속되었으며, 이후 알렉스가 그녀들을 뜯어말릴 때 무마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알렉스는 에밀리를 내버려 두고 그의 여자 친구만 쏙 데리고 나가 콧대 높은 퀸카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이후로 에밀리가 알렉스를 꼬셔보겠다고 난리 친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알렉스는 나의 High School 시절에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내 기억속의 사라와, 블룸 여사가 묘사하는 사라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블룸 여사는 사라가 알렉스의 아파트에 살 때에는 자신과 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고 가끔 카페에서 수다를 떨 때도 있었노라고 말했다. 완전히 추억에 젖어있는 그녀를 보며 마틴은 혀를 내둘렀다. 나는 알렉스와 사라가 나와 동창이었다는 사실을 숨기며 ‘그런데 왜요? 두 사람이 헤어졌나요?’하고 물었다. 마틴이 관심을 가지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으나 애써 무시했다. 블룸여사는 나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의 푸른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이는 듯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마틴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사라는 죽었어.’하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여겨졌다. 내가 깜짝 놀라며 정말이냐고 물어보자 눈물을 닦아낸 블룸 여사는 한숨을 쉬며 ‘자살했단다. 정말 슬픈 일이야.’라고 대답했다. 덧붙여 그녀는 알렉스나 사라나 착한 애들이었지만 유혹에 너무 약했다는 미묘한 대답을 남기고 부엌을 나가버렸다. 내가 벙찐 얼굴로 그녀의 빈 흔적을 바라보고 있자 마틴이 테이블 위에 코를 대고서 흡입하는 모션을 취하며 ‘이거야. 이거.’라고 말했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내가 그게 뭐냐고 물어보자 마틴은 조금 답답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마약 말이야.’하고 대답했다.
“....어, 너 지금 허밍한거야?”
“............아냐.”
“아니긴 뭘 아니야. 너 방금 포트내리면서 ‘흐응~~흐으으으응~’하고 흥얼거렸잖아.”
“아니라잖아.”
“아냐, 너 그 멜로디 자주 흥얼거린단 말이야. 시도 때도 없이 그러잖아. 그 노래 뭐야?”
“거참, 아니라니까 그러네. 입 다물고 주는거나 쳐마셔.”
무슨 운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동을 했던 알렉스가 마약을 했다는 것은 확실히 나에게 있어 충격적이었고 의아한 일이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그녀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렉스가 학교에서 튀는 존재긴 했지만 속히 노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되레 더 건실한 타입이었다. 그런 알렉스가 마약까지 했었고, 게다가 여자 친구와 동거를 했으며, 그 여자 친구가 자살을 했다니. 혹시 알렉스가 술을 마시고 새벽의 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이유가 여자 친구 때문이냐고 물어보자 마틴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것까지는 모르지. 그런데 최근에 그런 일이 자주 있었던 건 사실인가 봐.’하고 말했다. 알렉스에 대해서 지나치게 궁금해 하는 내가 의심스러웠던 모양인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끝없이 물어왔고, 결국에 나는 알렉스와 내가 High School 동창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하지만 알렉스와 나는 말 한마디 섞은 적 없는 타인이며, 알렉스는 내 얼굴도 모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마틴은 이 우연이 신기한 듯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흥미롭기는 나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흥미로운 우연’이라는 자체에 그쳤으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나도 알렉스와 나의 관계가 이렇게 변화 할 줄은 몰랐다. 예를 들면, 새벽 늦은 알렉스의 부재중 전화에 화들짝 놀랄지 몰랐고. 또 알렉스가 전화를 받지 않는 상황에 대해 불안해하며, 캠퍼스에서 이곳까지 뛰어오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왜 전화 한 거야?”
뜨끈하게 데워진 찻잔을 매만지면서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는 잠기운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말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냥. 심심해서.’라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건조하기까지 했다. 그래, 난 심심해서 전화한 놈의 부재중 전화에 헐레벌떡 이곳까지 뛰어온 거구나. 그것도 담장까지 넘으면서. 사실 속에서 울컥하는게 올라왔지만 사실 내가 알렉스를 탓할 수는 없었다. 내가 화를 낸다 하더라도 알렉스가 ‘누가 여기까지 오래?’하고 말하면 한방에 끝날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따지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앉아 유통기간이 지난게 틀림없는 홍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뜨거워서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잠은 좀 잤어?”
“....아니”
알렉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얼마 전 불면증이 너무 심하다며 3일 동안 1시간도 못 잤다고 말했었다. 나는 맞추고 있던 퍼즐에서 시선을 때며 ‘한 시간?! 하버드 애들도 그것보단 더 잔다고!’하고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는 비유가 재수 없다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딱히 알렉스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 얼굴에서는 피곤함이 철철 묻어나왔다. 하얀 피부에 그을린 듯한 다크서클이라던가, 아니면 퀭한 눈동자라던가. 하루라도 못자면 목구멍이 붓고 열이 나는 나에게 있어서 잠은 참 중요한 존재였다. 난 알렉스에게 ‘병원이라도 가봐.’하고 재촉했다. 그런 내 대답에 한참 손가락 장난을 치더니 ‘병원 다니고 있어.’하고 말했다. 병원을 다니고 있다고? 다녀왔어도 아니고 다니고 있다고? 어디 아픈 건가? 내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알렉스는 작게 웃으면서 ‘나 치료받거든. 내가 말하면 의사가 들어주는 치료. 엄청 웃긴 치료.’ 하고 대답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내가 잠시 입을 벌리고 있자 알렉스는 여전이 그 잘생긴 입매로 웃으며 ‘진짜 웃겨. 내가 처음 간 날에 힘든거 있으면 다 말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사는게 힘들다고 말하니까. 자기도 공감한데. 제기랄. 뭐 어쩌라는 거야.’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물 좀 마셔야겠다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알렉스는 좀 위태한 구석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느껴졌다. 어쩌면 알렉스와 재회한 그 만남이 퍽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와 몇 마디만 나누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알렉스를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 사람을 다 안다고 말하겠는가. 그냥 예측할 뿐이지. 알렉스와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고, 어쩌다 모르게 대화한 것들이 늘어나면서 알렉스가 가지고 있는 위태함은 결국 나까지 위태하게 만들곤 했다. 마치 알렉스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식물 같았다. 물을 주고 햇볕을 줘도 다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식물. 그래서 나는 불안했다. 알렉스가 곧 죽어 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알렉스는 동시에 강해 보이기도 했다.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가 곧 죽을 것 같은 식물 같았다면, 또 질경이처럼 밟고 밟아도 죽지 않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내가 알렉스를 위태해 보인다고 표현해도 절대 약하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알렉스와의 재회에서 그의 연약한 면을 발견했다면, 그 이후로 만난 두 번째 (정확히는 몇 번째인지 모르는) 만남에서는 의외로 질경이 같은 알렉스를 발견했다. 그 두 번째로부터 시작해서 난 알렉스를 ‘High school 당시 동창이었던 남자애’를 넘어 다르게 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이어져서, 심심해 전화한 놈의 부재중 메시지를 받고 담장까지 넘으면서 달려오게 된 것이다.
“수면제 안 받았어?”
“받았어.”
“그런데 왜 안 먹어?”
“.......그냥, 별로야 수면제.”
“....?.......아.”
이런, 바보 같은 행크 맥코이! 지금 그딴 걸 질문이라고 던진 거야? 이 바보 같은 행크 맥코이! 속으로 천둥처럼 다가오는 소리들이 들렸다. 알렉스의 씁쓸해진 표정을 보며 아차 싶은 것이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알렉스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라는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30알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어렵사리 알렉스의 입으로 이 이야기를 들은게 언젠데 벌써 잊고서 ‘그런데 왜 안 먹었어?’라니. 이 멍청한 행크 맥코이!
“그런 표정 안지어도 되거든? 넌 보면 볼수록 멍청해. 너 같은게 하버드에 다닌다니 정말 미국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네가 걱정 안 해도 앞으로 백년간의 미국은 거뜬해.”
“전 세계의 반미 운동가들에게 있어 매우 슬픈 이야기네.”
“전 세계에서 찾아볼 필요 없어. 미국인의 5/1이 반미주의자니까.”
“그건 오버야.”
“아냐, 진짜야.”
넌 거짓말을 너무 진짜같이 한다며 알렉스가 웃었다. 아, 웃으면서 눈매가 접힌다. 저건 정말 웃는 것이다. 난 여러 가지 증명을 대면서 알렉스에게 ‘미국인의 5/1은 반미주의자!’라고 설명했지만 알렉스는 닥치고 그 차나 마시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마저 조금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었다.
비록 알렉스는 단지 심심해서 전화를 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내가 예상하기로 ‘단지 심심해서는’라고 치부하기 힘들어 보였다. 아니 힘들었다. 알렉스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또 그의 과거들을 듣고 난 후부터 난 알렉스가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알렉스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두려웠다. 가끔 알렉스는 새벽이나 늦은 저녁에 전화를 하곤 했다. 전화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밥 먹었냐. 오늘은 뭐했냐. 아니면 내가 수업들은 내용이나 (알렉스는 매우 재미없어하는 목소리였지만 계속 말해보라고 했다.) 아니면 알렉스가 치료받은 내용. 때때로 특별한 날, 뭐 이미 지나가긴 했지만 할로윈이라던가. 아니면 곧 오게될 크리스마스 이야기. 그런 거였다. 정말 아무런 할 말이 없을 때엔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수화기를 붙잡고서 내일 수업의 예습을 하곤 했고 아니면 그냥 책을 읽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늘 알렉스가 잠드는 것으로 끝났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엄청 웃겼다. 어디서도 볼 수 없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은 그런 통화를 그만 두지 않았다. 알렉스가 잠들기 전에 나는 떠들거나 침묵했고. 그리고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을 때마다 든 생각은 내가 알렉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뿌듯함과 위태로운 알렉스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그러고 보면 알렉스가 잠들지 못했다던 요즘은 저녁 중에 연락한 적이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하곤 했지만 이전과 달리 일찍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게 참 의아했다. 그래서인가. 새벽의 전화, 그리고 다시 걸어도 받지 않는 상황에 두려워 나는 이렇게까지 뛰어온 모양이었다. 아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의 내면은 알렉스를 더욱 불안해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다 마셨으니까 나 가볼게.”
“가려고? 기숙사 문 닫히지 않았어?”
“응. 다시 넘어가면 되지.”
“내일 수업 몇 신데?”
“내일? 1시부터.”
“그러면 자고가.”
“뭐?”
“귀먹었냐? 자고가라고.”
자고가라고? 자고가라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나를 보면서 알렉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고.가.라.고.’ 하고 또박또박 말해주면서 나중에 담 넘다가 뼈 부러지고서 원망하지 말고 그냥 자고가라고 말했다.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네가 침대서 자.”
“너 자려고?”
“그러면 안자냐?”
“아니, 너 잠 안 온다며.”
“....음, 사실 좀 나른한 것 같기도 하고. 한번 눈 붙여보지 뭐.”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담요를 꺼내 소파로 왔다. 난 집주인이 침대에서 자야지 무슨 소리냐고 말했지만 그는 닥치고 침대로 가라면서 나를 밀었다. 나는 멍청하게 찻잔을 든 채로 서서 누우려고 준비하는 알렉스를 보았다. 진짜로 잘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소파 위로 빼꼼히 고개를 들더니 ‘네가 불 좀 꺼라.’라고 말하고 다시 누웠다. 황당한 나는 한참 동안 찻잔을 들고 있다가 근처 테이블에 내려두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불을 껐다. 그러나 침대로 가던 도중, 탁자에 다리를 찧어버렸다. 고통스런 신음을 내고 있으려니 알렉스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쩔뚝거리며 침대에 눕자 이 집의 유일한 자랑인 창이 나를 반겼다. 별들은 보이지 않았고 새까만 하늘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는데 알렉스의 숨소리가 들렸다. 다 큰 남자애답지 않게 새근새근 거리는 소리가 꼭 아이 같았다. (아이 같은 얼굴로 천둥같이 코를 고는 마틴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그 소리를 한참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베개와 이불에서 미모사 향이 났다. 아마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알렉스가 사용하는 유연제 냄새 일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이 좀 더 확실하다면 알렉스는 사라가 미모사를 특히 좋아했노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 * *
사라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언제나 알렉스였다. 사라는 빌라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음률에 맞춰 몸을 흔들거렸다. 알렉스는 그녀의 춤이 영 훌륭하지 못했기에 웃으면서 ‘그만 둬라. 창피하다.’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만두긴 커녕 알렉스의 손을 이끌고서 춤을 추자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춤에 영 소질이 없었던 알렉스는 자신은 못한다며 내뺐지만 사라는 ‘언제부터 내 남자 친구가 이렇게 요조숙녀셨어?’하고 놀렸다. 하지만 정작 알렉스가 한발자국 나서면서 춤을 추면 ‘너 정말 못 춘다!’하고 알렉스를 놀렸다.
특히 사라는 Travis를 좋아했다. 그녀가 Travis를 좋아하는데는 별별 이유가 다 있었다. 보컬이 자기 타입이라느니 (솔직히 알렉스는 이 말에 조금 질투했다.) 목소리가 너무 좋다느니, 아니면 자신은 영국이 좋다느니. 하지만 그녀가 Travis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결정적으로 Sarah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정말 단순하게도 자기 이름이 제목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가사에 알렉스는 ‘이런 가사인데도 좋아?’하고 따졌지만 그녀는 ‘그래도 좋아.’하고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 멋대로 가사를 바꿔서 노래를 불렀다. 예를 들어서 ‘사라는 춤도 잘 추고 아름다워-’ 혹은 ‘알렉스는 춤을 못 추지만 내 멋진 남자친구지.’ 그리고 ‘하지만 정말 춤을 못 봐주겠어.’ 라는 등등. 그 노래의 끝에는 늘 알렉스의 장난 어린 간지럼 공격이 있었고 그녀는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며 알렉스의 공격을 피해 다녔다. 그 도망과 추격의 끝엔 어린 연인의 다정한 키스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후로 알렉스는 사라를 위해 이 트랙이 담긴 CD를 사왔고 그녀는 매일 같이 이 음악을 들었다. 지겹도록 익숙해져서 인지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이 노래를 중얼 거렸다. 사라 덕분에 가사는 엉망진창으로 외웠지만 허밍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는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행크가 말하기 전까지는.
* * *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외동아들 같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에게는 여동생 하나가 있다. (아마 나를 외동아들처럼 생각하는 것은 우리 엄마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 봐도 ‘어, 행크 네 동생 아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큼 그녀는 나와 매우 닮았다. 하지만 성격은 영 딴판이다. 한마디로 그녀의 성격을 이야기하자면, 유일하게 우리 집에서 엄마와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것 하나면 완벽하게 그녀의 성격을 설명 할 수 있다. 그녀는 지금 뉴욕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다. 엄마는 그녀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길 바랐지만 그녀는 ‘지금 나보고 그딴 걸 하며 살라는 거야? 엄마나 해.’라고 아주 반항적으로 뱉으면서 자신은 디자인공부를 할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초반부터 이렇게 살벌한 이야기가 오고간 것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주 길고 긴 싸움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었고, 지금은 자유롭게 행로하며 날아다닌다. 사납기 짝이 없는 성격과 달리 그녀는 나를 좋아해주었고 나도 그녀를 좋아했다. 가족끼리 ‘좋아한다.’는 표현이 뭐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그 표현이 우리 집에서는 가장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표현이니 이해해줘야 한다. 하루는 그녀가 나에게 전화하더니 대뜸 이런 말을 던졌다.
‘뉴욕에 오지 않을래?’
뜬금없는 소리에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이번에 좋아하는 밴드가 뉴욕에 온단다. 그래서 티켓을 두 장 예매해놨는데 혼자 가기는 싫고 나랑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친구가 없냐는 타박을 하노라니, 기껏 생각해줬더니 이런 반응이냐며 투덜거렸다. 고맙긴 하지만 나는 됐다고 말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어폰을 끼고 운동하며, 혹은 출근하며 음악을 듣는 것에 반해, 나는 그 흔한 MP3 하나 없었다. 무슨 음악을 좋아하느냐 물으면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차르트 미뉴엣?’ 하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인연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여동생은 나에게 공연을 권유만큼 음악을 좋아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건지 혹은 그녀가 유독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랬다. 그녀는 내 거절에 서운한 기색도 없이 ‘그래?’하고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참 싹싹하고 착한 동생이었다. (아빠는 그런 그녀가 냉정하기 짝이 없다며, 아들이나 딸이나 마누라나 다 똑같다고 흐느꼈지만 난 그래도 이런 그녀가 좋았다.) 그다음 그녀가 물은 것은 다름 아닌 알렉스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알렉스를 이렇게 불렀다.
‘하늘을 나는 왕자님.’
처음 알렉스에 대한 이야기 했을 때, 그녀는 알렉스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알렉스를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또 그녀가 ‘하늘을 나는 왕자님’ 따위의 이상한 표현으로 알렉스를 부른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대체 그게 뭐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오빠, 그 사람이 얼마나 유명했었는데!’하고 말하며 깔깔 웃었다. 당시 알렉스가 아주 유명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2살차이 나는 동생이 알렉스를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줄은 몰랐다. 그녀는 알렉스가 장대높이뛰기 선수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얼굴과 몸매에 대해서도 유별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너무 밝히는 거 아니냐 물어보자 그녀는 여전히 깔깔 웃으면서 ‘오빠가 몰라서 그래, 당시 우리 반 여자애들한테는 우상이었단 말이야. 왕자님 같잖아!’하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알렉스가 왜 ‘하늘을 나는 왕자님’이라고 불렸는지 이해가 갔다. 물론 남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어느 정도의 선이 있었지만.
그녀에게 알렉스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알렉스와 다시 마주쳤던 그날이었다. 술 취해 얼어 있는 알렉스를 그의 집에 던져두었던 그 날을 기점으로 난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사실 그렇게 헤어지던 때에도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한적 없었다. 다만 그와의 만남이 우연적이고 신기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가끔 샤워할 때라던가, 지겹기 짝이 없는 문학 교양 시간 때에 알렉스와 사라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지만 그것은 정말 잠시뿐으로 그는 내 생활 속에서 거의 없는 사람이나 같았다. 마틴이 그의 부모님 댁을 다녀온 날, ‘알렉스 잘 지내더라. 뭐. 어쨌든 살아 있으니까 잘 지낸다고 해도 되겠지. 오늘 집 앞에서 만났는데 최소한 만취상태는 아니더라고.’ 은근하게 알렉스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푸른색 목도리를 풀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체 만 체하면서 ‘어어.’하고 대답했다. 내일 있을 전공 시험이 더 급했다. 마틴은 엄마가 챙겨줬다며 유자로 만든 머핀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찌르자 금세 허기가 들었다. 그런 나를 눈치 챈 모양인지 마틴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입에 머핀을 처박았다. 뭉개진 머핀이 내 입술을 더럽혔지만 군소리 없이 머핀을 먹었다. 마틴은 여전히 나와 알렉스에 대해서 궁금한 듯 싶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해 했다. 그냥 우연하게 만난 동창이고, 그 동창이란 단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알렉스는 운동을 했던 유명인이었고 나는 그냥 공부벌레였다. 그나마 우리에게 접전이 있었다면 그의 여자 친구가 나와 같은 반이였다는 그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마틴은 나와 알렉스의 사이에 뭔가 더 있는 것처럼 굴었다. 미안하지만 난 아무런 이야기도 해줄 수 없었다.
도리어 내가 마틴에게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판이었다. 나는 머핀을 한손에 들고서 침대에 걸터앉는 마틴을 보았다. ‘그런데 사라는 왜 죽은 거야? 알렉스의 여자 친구라는 그 아이 말이야.’ 내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마틴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 말했다. ‘나도 몰라. 자살했다는데 그 이유를 어찌 알겠어. 엄마도 그건 모르겠다고 하더라. 이유라면 알렉스 걔가 알고 있겠지만 걔를 앞에 놓고 ‘네 여자 친구는 왜 죽었니?’ 하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 암만 생각해도 내 기억속의 사라는 당당하고 예쁜 여자애였다. 비록 알렉스를 두고서 치정싸움을 벌이긴 했어도 언제나 알렉스는 그 아이의 손을 들어줬다. 대체 그런 애가 왜 알렉스를 두고 자살한 걸까? 희미한 기억 속을 헤매면 헤맬수록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사라 걔가 죽기 전에 알렉스랑 싸운 것 같긴 했어.’
‘뭐?’
‘엄마가 그러더라고. 어느 날부터 사라가 보이지 않아서 알렉스에게 사라 어디 갔냐고 물어봤더니 잠깐 다른 곳에 가있기로 했다는 거야. 엄마는 그걸 듣고 얘들이 싸웠나보구나. 하고 생각했데.’
‘그런데.’
‘그래서-... 그런데 우리 지금 엄청 아줌마들 같은거 알아?’
‘아니까 계속 말해봐.’
‘짜식, 짜증내기는. 하여튼 한동안 사라가 안보였데, 1-2주일 동안? 우리 엄마는 사라랑 장도 보고 수다도 떨고 그랬으니까 좀 서운했겠지. 한동안 못 보는데 인사도 안하고 갔다면서 투덜거렸었거든. 그런데 하루는 밖이 소란스러워서 나가봤더니 사라가 문을 두드리면서 알렉스를 부르더라는 거야. 인터폰으로 알렉스한테 문열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종국에는 막 울기 시작하더래. 엄마가 깜짝 놀라서 사라한테 가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사라 상태가 좀 이상하더라는 거야. 그리고 그때 안거지. 사라가 약에 취해있다는 것을.’
‘....약에 취해 있었다고? 마약 말이야?’
‘그래. 사실 그전부터 한 번씩 그런 이야기는 했었어. 사라가 안색이 안 좋은데 혹여 나쁜 일이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면서. 난 그냥 오지랖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연결점이었던 거지.’
마틴의 말을 따르자면, 블룸여사는 사라를 붙잡고 자신의 집안으로 들였다고 한다. 간만에 보는 사라는 얼굴이 엉망이었고 엄청나게 말라있어서 그녀는 깜짝 놀라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알렉스가 문을 안 열어줘요. 안 열어준다고요. 나랑 헤어질 생각인가봐요.’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고.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른 블룸 부부는 사정이야 어떻게 됐든 울다 지친 사라를 비어있는 마틴의 방에서 재웠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사라는 없었고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해요.’라고 쓰인 작은 쪽지만이 그들에게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로 사라가 알렉스에게 문을 열어 달라면서 보채고 화를 내고 울면서 부탁하는 일들이 몇 번 있었지만 알렉스는 단 한 번도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고 또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고 마틴은 말했다. 그도 그의 엄마에게서 들은 것이니 정확하다 보장 할 수는 없지만. 뭐, 블룸 여사가 아들에게 거짓말을 할 일은 또 뭐란 말인가. 다만 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체 뭔가 싶었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비록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나온 결론이었지만.) 애인을 냉대하고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지 않았다. 그 알렉스가 말이다. 알파카처럼 머핀을 씹으면서 멍청하게 생각하는 내가 웃겼는지 마틴은 실실 웃었다.
‘사라가 마약을 해서 알렉스가 헤어진 건 아닐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틴은 ‘모르지~’하고 아무래도 좋다는 말을 던지며 샤워하러 가겠다고 나가버렸다. 문을 닫고 나가버린 마틴의 흔적을 보면서 잠시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던 알렉스를 떠올렸지만 이내에 생각들을 접고 시험공부에 몰두했다. 하지만 기분이 찝찝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아마 문제의 기점이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시험을 끝냈지만 시험 문제는 다들 어렵다고 난리들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던 크리스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종국에는 엉엉 울면서 시험지를 내고 갔다. 겉으로 티만 안냈지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폴 교수는 씽긋 웃으면서 ‘맥코이, 기대해도 되겠지?’하고 말했다. 정말 그건 공포였다.) 한숨을 쉬며 강의실을 나가는데 마틴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의 내용은 자신이 오늘 연달이 시험을 치는데, 깜빡하고 오픈 북에 사용할 책을 부모님 댁에 두고 왔다는 것이었다. 결국 책 좀 가져다 달라는 이야기였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는데다가 빙판이 아직 녹지 않아 정말 미끄러웠다. 나는 그냥 문자를 못 본 채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후의 보복이 두려워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오늘 시험은 끝냈고 내일은 공강이니 나에게 바쁜 일은 없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그냥 터벅터벅 걸으며 마틴의 집으로 갔다. 최소한 그곳에 가면 블룸 여사가 해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은 마실 수 있을 거라는 욕심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다음 주에 시험 볼 문학교양 필기노트를 들고서 외우며 가던 도중 빙판에 발을 헛딛어 완벽하게 넘어졌다. 마치 골대에 들어가는 아이스하키의 볼만큼이나 완벽하게 넘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날 보면서 놀라거나 웃었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서 뛰듯이 도망쳤다.
다행히 내가 넘어진 곳에서 마틴의 집은 멀지 않았다. 아픈 팔뚝을 문지르면서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두 번째 재앙이 닥쳤다. 집에 사람이 없는 것이다. 설마.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속으로 수없이 설마를 외치면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정말 사람이 없었다. 먼 거리까지 왔는데, 넘어지기까지 했는데 사람이 없는 거다. 맙소사. 그때 속으로 튀어나오는 F word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젖 먹는 힘까지 써야했다. 마틴 이놈 새끼. 오늘이 Fool's Day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겨우겨우 F word는 막았다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당최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조금 더 블룸 여사를 기다릴 것인가. 어쨌든 마틴에게 전화해보자고 생각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세 번째 재앙이 드러났다. 핸드폰 액정이 나간 것이다. 더불어 전원이 켜지질 않았다. 아까 넘어지면서 단단히 부셔진 모양이었다. 재수 없는 놈들은 타고나게 재수 없다지만 그것이 나에게 속한 말들 일줄 누가 알았겠는가. 속으로 오늘의 재수 없는 일들을 순위로 매겨 꼽고 있는데 갑자기 무릎이 시큰시큰하게 느껴졌다. 아까 넘어지면서 부딪힌 것 때문인가 보다. 서러운 기분으로 내려다보는데...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네 번째 재앙이었다.
피는 제법 많이 흘렀다. 입고 있던 청바지를 적실 정도였으니 제법 이란 말도 약과 아닌가 싶다. 이걸 어찌해야하나. 여기서 청바지를 무릎까지 까보자니 주변 사람들 눈이 의식되었고 또 병원을 가자니 유난스럽고. 그렇다고 이대로 학교까지 돌아갈 수도 없고. 택시를 타고 돌아갈까. 그런데 지갑을 안 가져왔는데. 속으로 끙끙 거리면서 어찌할 바 모르고 있을 때,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오만불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이다.
‘어이, 형씨.’
처음에는 그게 날 부르는 건지 몰랐다. 그냥 주위에서 들리는 소음인줄 알았다. 그런데 똑같은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렸고 이내에는 내 어깨까지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금발 머리카락이 보였다. 알렉스였다. 알렉스는 그 푸른 눈으로 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의외의 사람을 만나니 (사실 장소 상 의외라고 할 순 없었지만, 정말 알렉스를 만날 줄은 몰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한걸음 물러서려는데 알렉스가 내 다리를 가리키면서 ‘피나는데.’하고 말했다. 어떤 의도도 담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내 다리에서 피가 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당황해서 ‘으...응. 피나.’하고 말하자 알렉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이 빌라 살아?’라고 말하면서 내가 줄기차게 초인종만 누르던 빌라를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알렉스는 날 향해 뭐라 뭐라 말했고 나는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알렉스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아직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얘가 날 기억 못하는구나. 뭐, 당연한 건가.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하지.’ 등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 도중에 알렉스가 ‘듣고 있는 거야?’하고 신경질 적으로 말했을 때 나는 물음표를 머리에 달고서 멍하니 그를 보았다.
‘지금 들리려는 곳에 사람 없는 거면, 그 상처 우리 집에서 치료하라고.’
그 말은 아주 의외의 것이었다. 어머니, 여기 또 오지랖병 환자가 있어요. (오지랖병 환자 1,2위는 블룸 여사와 그 아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대놓고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는 따라오라며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만약 거기서 상처를 치료해주겠다는 사람이 알렉스가 아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단칼에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험한 세상인데 모르는 사람을 따라간단 말인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알렉스를 따라가는 내가 아닌, 나를 초대하는 알렉스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집으로 부르는 것일까? 만만해 보여서? 불쌍해 보여서? 아니면 진짜 딱해 보였나? 여러 가지 생각들을 끌고서 어렵사리 꼭대기 층에 도착했을 때 알렉스는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내가 어정쩡하게 굴며 서있노라니까 녀석은 날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고 나는 한번 앉은 적 있었던 그 소파에 앉았다. 처음 술 취한 알렉스를 저 침대에 눕혔던 그날과 전혀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어디선가 구급상자를 들고 온 알렉스가 ‘내가 발라줄까? 아니면 네가 할래?’하고 물었고 나는 황급히 구급상자를 받으면서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살점이 찍혀 출혈이 많았다. 나름 능숙하게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있는 동안 알렉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동시에 알렉스가 원래 이런 애였나 싶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제 여자 친구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꺼려하고, 이렇게 모르는 사람을 집에 초대할 만큼 친절한 애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게 내 예측이고 알렉스에 대한 편견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생각했던 알렉스의 모습과는 꽤나 달라서 놀랐다. 마지막 내가 데일밴드까지 붙이자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서는 알렉스를 보고 깜짝 놀라니 알렉스는 ‘....안 때리거든?’하고 웃으면서 냉장고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얼 마시겠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맥주랑 보드카 밖에 없어.’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내가 그때 무얼 마셨고 알렉스가 무엇을 권했느냐가 아니었다. 알렉스는 나에게 줄 마실 것을 뒤적뒤적 거리다가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오래된 것으로 의심되는 음료수 한 캔이었던 것 같다.) ‘너, 맥코이 맞지?’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깜짝 놀라 눈이 까집어 졌다 ....라고 말하면 너무 오버려나. 어쨌거나 놀라긴 놀랐다. 알렉스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올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놀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스는 나에게 음료수를 던져주면서 ‘행크 맥코이. 아냐?’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알렉스가 이야기하기로, 어제 마틴과 대화하면서 내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고 한다. (정말 마틴은 입이 싼 녀석이었다.) 마틴은 이전 알렉스가 술 취한 그날 밤을 이야기 하면서 내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마 ‘내 친구가 너랑 동창이었데. 행크 맥코이 알아?’ 정도로 끝낸 것 같다. 알렉스가 앨범을 뒤적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것보다 알렉스가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날 밤 고마웠다.’하며 웃었다는게 중요했다. 나는 그에 대해서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그쪽이나 내 쪽이나 불편한 종류의 이야기였다.
‘졸업한지 꽤 됐는데, 날 용케 기억했네? 게다가 너랑 나 같은 반도 아니었잖아.’
‘...뭐, 그래도 넌 유명인이었으니까.... 그래도 너야 말로 같은 반 아니었던 건 기억하네?’
‘나 너 기억하는데.’
‘응?’
‘나 너 기억한다고. 너 12학년 때 A반 이었잖아? 아냐?’
놀라웠다. 대체 알렉스가 내가 12학년 때 A반인 것은 대체 어떻게 아냔 말이다. 내가 놀라서 고개를 끄덕이니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너 우리학교 탑이었잖아. 또 하버드 간걸로 유명하기도 하고. 학교생활은 잘하냐?’ 라고 말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졸업하기 전 한 번도 대화한적 없던 상대가 대학생활은 잘하냐며 물어보는 이 상황이. 내가 여전히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녀석은 어느새 다 마신 맥주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깨끗한 호선을 그리며 들어가는 맥주 캔을 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 녀석이 농구를 했었던가? 그런 생각을 했다. 농구? 미식축구? 아니면 야구였던가? ...아니야, 육상 계열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그게 기억 안날 리가 없는데, 알렉스의 얼굴은 그렇게 뚜렷하게 기억하면서, 알렉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 종목이 기억나지 않는게 이상했다. 그, 뭐였지. 막대기 쥐고서 뛰다가... 아, 장대높이뛰기. 그 엄청나게 높이 뛰는 그 육상경기 일종.
‘설마 기억 안나냐? 이전에 네가 수업 도중에 기절한 여자애 업고서 양호실까지 갔었잖아.’
내가 알렉스가 했던 운동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을때 알렉스가 갑자기 말을 툭 던졌다. 갑작스럽게 방향이 나를 향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어버버 거리고 있노라니까 그런 내가 어수룩해 보였는지 혹은 이상해 보인건지 알렉스는 피식 웃으면서 ‘기억 안나?’하고 물었다. 수업 도중에 기절한 여자애? 눈동자를 떼록떼록 굴리며 생각하고 있는데 알렉스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에, 히스패닉계열 여자애 말이야. 좀 마르고...’ 하고 덧붙여 표현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어색함이 하나 없었다. 눈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알렉스가 표현 하는 것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사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었나. 내가 사라를 업고서 양호실로 뛰어갔었던가. 어설프게 기억이 남긴 했지만 그게 누구라고 떠올리진 않았기에 희미한 뭉게구름처럼만 둥둥 떠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알렉스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와 사라가 맞았기에 나는 살짝 알렉스를 올려다보면서 ‘사라 말이야?’하고 말했다. 그러자 알렉스가 ‘기억하네.’하며 씨익 웃었다. 마치 그녀가 살아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대사에선 전혀 그녀의 부재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이질감에 나는 기분이 더 거북해졌다. 알렉스는 내가 그녀의 죽음을 알고 있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겠지. 만약 그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뭐라고 할까. 옆집의 오지랖 넓지만 입이 가벼운 모자에게 기분 나쁜 감정을 품을까.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고개만 끄덕일까. 하지만 내가 그런 고민의 끝을 내기도 전에 알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죽음을 말했다.
'그 애, 죽은 것도 알아?’
나는 알렉스가 ‘사라는 지금 외출했어.’라고 말하는 줄 알았다. 너무나도 가볍게 그는 그녀의 죽음을 말했다. 어색하긴 하지만 잘생긴 입매에 웃음까지 띠고서 말이다. 나는 모두가 그렇듯이 죽음이란 틀림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흰색보다는 검은색에 가까우며 기쁨이나 무감정함보다는 슬픔이나 고독을 닮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알렉스를 보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알렉스에게선 전혀 슬픔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쁨을 볼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알렉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하얀 편지지 위에 의미 없이 ‘그녀가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까 아니면 저을까 고민했다. 끄덕인다면 마틴의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혹여 마틴에게 해가 될까봐 그건 싫었다. 종국에 나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하기야. 네가 알고 있는게 더 이상하지.’라고 말했다.
간만에 만나는 동창에게. 덧붙이자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단 한마디도 붙여보지 않은 동창에게, 사실 나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학교생활을 잘 하느냐는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듣는가하면, 그의 여자 친구에 대한 죽음까지 듣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이야기에 나는 살짝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이 자리가 기가 막히게 어색했다. 나는 비실거리면서 피가 젖어 있는 바지를 휴지로 슥슥 닦고 음료수를 마셨다. 음료수는 차가웠지만 대체 어떤 맛이 느껴지는지는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차갑기만 했다. 혹시 마틴을 기다리는 것이었냐는 알렉스의 말에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지를 깨달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마틴의 책과 블룸여사의 부재를 그에게 말하면서 전화를 써도 되겠냐고 물었다. 알렉스는 그러라면서 전화기를 가리켰고 나는 열성적으로 마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마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험 중인가? ...아, 그러고 보니...! 시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문득 생각나는 마틴의 시험에 시계를 보았다. 이런, 늦었다. 마틴은 이미 책 없이 오픈북 시험을 치르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영문도 모르는 녀석은 내가 다리를 다친 것도 모르고 있는 대로 나를 까면서 흐느끼고 있겠지. 한숨이 푹 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머니의 부재를 확인하지 않은 녀석의 탓 아닌가. 이대로 허무하게 끝나버린 하나의 사건에 나는 긴 신호음이 이어지는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볼일은 끝났으니 이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알렉스에게 대충 사정을 설명하고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일이 끝나기도 했고 또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친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또 그가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더 없이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 같았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가려는 나를 막지 않았다. 나는 치료 공구함을 힐끔 가리키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알렉스는 목덜미를 긁으면서 ‘별로.’하고 말했다.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을 때 나는 힐끔 알렉스의 머리꼭지와 그 밑으로 이어지는 목덜미를 보았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그냥 갑자기 멀리 뛰기를 하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정말 갑자기 스쳐지나간 생각이었다. 저 허리와 목덜미가 휘어지면서 높은 곳에 있는 막대를 넘는 모습이 정말 기가 막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 머리칼도 분명 멋질 것이다. 짧은 순간에 그 영상을 다 떠올렸다. 하지만 나에게는 짧은 순간이었을 지라도, 알렉스에게는 멍청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이 꽤나 길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너 괜찮냐? 정신 나간 것 같아.’ 그가 툭 말을 뱉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알렉스의 머리 꼭대기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순식간에 몰려든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에 허둥지둥 거렸다. 그리고 어쨌거나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서 후다다닥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뒤에서 뭐라고 외쳤지만 듣는 체도 하지 않고서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몇 번째인지 모르는 계단을 밟았을 때 몸이 부웅 뜬다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무거운데 억지스럽게 떠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을 더 느끼기도 전에 엉덩이를 덮치는 고통이 스며들었고 이어서 온몸이 때굴때굴 구르다가 쾅! 하고 부딪힌 발목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다섯 번째 재앙이라는 거.
“-코이...”
“.......”
“맥-코.....맥코이.”
“.......?”
“행크 맥코이!!!”
“??!!! 네!!!”
“자네 내 수업이 재미없나?!”
“아...아닙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내 말에 옆에 있던 크리스가 킬킬 웃었다.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맥퀸 교수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했다. 미쳤다고 맥퀸 교수의 수업에 딴 생각을 했구나. 정신을 차리자 덮쳐지는 현실에 등골이 오싹했다. 또 뒤끝이 쩌는 저 양반이 날 얼마나 볶을까. 안 그래도 이번 시험도 망쳐서 (폴 교수가 이 남자였다. 폴 맥퀸. 우리 과에서 가장 악명 높기로 유명한 공학 교수였다.) 앞날이 두려운데. 살이 떨렸지만 이내에 맥퀸 교수의 시선이 돌려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살짝 들고 있던 엉덩이를 내렸다. 곁에 있던 크리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넋을 놓고 있는 거야?’ 라고 말했다. 앞에 있던 킴 또한 자세를 돌리면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넌 이제 끝났어. 맥퀸한테 찍히다니. 너의 F 학점을 진심으로 기뻐해주마.’ 나는 책상위에 있던 지우개를 던져 킴의 머리통에 맞췄다. 맞은 곳을 부여잡고 아파하는 킴을 보면서 내 굳은 목덜미를 주물 거렸다. 정말 정신이 나가있었다. 뺨을 툭툭 치면서 앞을 바라보니 맥퀸이 칠판을 두들기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가 적어내리는 공식들을 보고서 연습장에 똑같이 적어 내렸다.
알렉스에 대한 생각을 잇다보니 온 정신이 빠져나갔다. 하기야, 그 당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언제고 정신이 쑥쑥 빠져나가곤 한다. 내 인생에서 다시없을 치욕스러운 순간이니. 여동생에게 그때 벌어졌던 이야기를 해주니 처음에는 알렉스와 나의 우연히 신기해하다가 나의 멍청한 짓에 깔깔 소리 내면서 웃었다. 그녀가 너무 즐거워하는 게 느껴져서 나는 전화를 끊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그녀는 안부전화를 하면서 알렉스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귀찮아하면서도 알렉스와 함께 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알렉스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늘어났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명백하게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진 나는 심하게 발목을 접질렸다. 그 커다란 덩치로 계단을 부셔버릴 듯이 굴러 떨어진 나를 보고 알렉스는 부리나케 달려와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하지만 난 전혀 괜찮지 않았다. 엉덩이고 어깨고 모두 다 아팠지만 특히 발목이 정말 아팠다.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인데도 떨어져 나갈듯이 아팠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끙끙 거리고 있자 알렉스는 ‘계단 미끄러우니까 조심하라 했잖아!’하고 말했다. 아마 위에서 말했던 소리가 그것인 모양이었다. 그의 꾸지람에도 나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발목을 붙잡고 우는 소릴 냈다. 알렉스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후다닥 위층으로 올라갔다. 날 두고서 그냥 튀어버리는가 싶었는데 위에서 황급하게 전화하는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911에 전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쪽팔리게 911이라니. 큰소리를 내서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알렉스는 이미 전화를 끝내놓고 나에게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아 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신음밖에 없었으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통으로 몸을 떠는 일 뿐이었다. 몇 분 안 있어서 앰뷸런스가 왔고, 이어서 나를 실고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얼떨결에 보호자가 되어버린 알렉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만큼 그 상황에 당황한 알렉스는 횡설수설하며 ‘그러니까, 계단에서 미끄러졌는데. 그게, 그러니까 완전 그, 다람쥐 통처럼. 아니 그것보단 뭐랄까, 깡통이 굴러가듯이, 아니 그것보단.’하고 말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런 표현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야, 정신차려. 맥퀸이 너 째려보잖아.”
크리스가 옆구리를 찌르며 하는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드니, 맥퀸 교수는 전혀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크리스가 킬킬 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가.
“교수님!”
“음? 뭔가 맥코이군?”
“제 곁에 있는 크리스가 방금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에 있어 매우매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의문이 든다고 하는군요.”
“...의문? 아.....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러면 말해보게나 크리스 아이젠군. 어떤 부분이 의문이 드나 말이지. 몹시 궁금하군그래”
의문이라는 한 단어에 맥퀸 교수의 눈이 째삣해졌다. 크리스가 당황하면서 ‘네?...아 그게...’하고 더듬더듬 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힐끔 나를 째려보았다. 앞에 있던 킴은 상황을 눈치 챘는지 조용하게 ‘너의 F 학점도 진심으로 기뻐해주마.’하고 킬킬 웃었다. 억지로 말도 안 되는 의문을 만들어 내는 크리스의 모습을 보다가 나는 시계를 힐끔 보았다. 2시 30분. 6시에 알렉스의 집으로 가니까... 아직 제법 남았다. 이 수업이 3시에 끝나고 뒤로 교양 수업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을 듣고 가면 딱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저녁은 뭘 먹을까. 평소 때처럼 피자를 먹는 것도 좋지만 태국 음식도 괜찮다. 베트남 음식도 좋고. 그러고 보니 기숙사에 있는 전단지 중에 이번 새로 생겼다던 일식 음식점이 있지 않았나. 마틴이 제법 괜찮다고 했었는데. 배달은 되는지 모르겠네. 볼펜으로 연습장 위에 낙서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전 11시쯤에 알렉스에게 문자가 왔다. ‘이번에는 네가 빌려오기로 한거 잊지마라.’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마다 알렉스와 나는 그의 좁은 집에서 영화를 틀어놓고 저녁을 먹곤 했다. 저번 주에는 <좀비 랜드>를 봤는데 먹던 음식을 다 토하고 싶었다. 은근한 개그코드도 좋았고 엠마 스톤도 예뻤지만 그렇다고 잔인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식사시간에 사람의 내장이 터지고 그걸 씹어 먹는 좀비들을 볼 생각 했냐는 나의 성화에 알렉스는 조금 민망해 하면서 ‘재미있다고 해서 빌려온 건데...’하고 말했다. 내가 승질을 내면서 밥맛 떨어진다고 하니 가만히 있던 알렉스도 열 받았던 모양인지 ‘그럼 이번엔 네가 빌려오던가!!’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더 오기가 생겨서 ‘알았다고!!’하고 소리 질렀다.
음. 그러고 보니 어떤 영화를 빌릴지 생각을 못했구나. 가기 전에 구글 좀 해봐야겠네. 최대한 알렉스가 잔소리 하지 못하도록 재미있는 영화를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조금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발목을 삐어 앰뷸런스를 탔던 그 기억과 오늘 함께 영화를 보며 저녁을 먹을 상황이 이어지니 이런 상황들이 굉장히 낯설고 어이없게 여겨지는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알렉스와 친해지게 된 것은 그때 그 기점이 맞다. 의사는 다리 엑스레이를 찍고서 별별 검사를 다 해보더니 ‘그냥 삐었네요.’하고 말하며 약을 받아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듣던 알렉스의 표정은 정말 웃겼다. 온 용천을 다 떨면서 병원까지 왔는데 그냥 삐었다며 약이나 받아가라니. 알렉스는 허무하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내 얼굴을 보고서 하하 웃었다. 힘없이 웃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이내에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나는 알렉스가 미쳐버린 건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다행이도 그건 아니었다. 알렉스는 그냥 이런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재미있었단다. 한동안 자신에게 있는 일이라곤 술 마시고 일 나가고(알렉스는 그의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공사현장에서 일했다. 험하긴 하지만 제법 짭짤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만취 상태로 공원 벤치에 자고, 다시 일 나가서 돈 벌고,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내가 드라마나 시트콤에 나오는 상황을 연출해주니. 나에게 있어서는 불행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선 재미있는 일이었나 보다. 기뻐해야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것으로 인해 알렉스를 더 알게 되고 그와 친해졌으니 딱히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날 병원에서 나오면서 나는 알렉스의 보조를 받아야 했고, 알렉스에게 돈을 꿔가면서 택시를 잡아야 했다. 그때 알렉스는 나에게 ‘너 전화번호 좀 줘라.’하고 말했다. 그때 나는 첫 번째로 처참하게 부셔져버린 내 핸드폰이 생각났고 두 번째로 어째서 알렉스가 내 전화번호를 물어보는지 궁금했다. 알렉스는 잠깐 망설이는 나를 보고서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라고 말했다. 그 말투가 꼭 내 여동생 같았다. 나는 싫은게 아니라 그냥 당황스러웠을 뿐이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알렉스의 핸드폰을 받으면서 난 내 번호를 꾸욱꾸욱 눌러 다시 내밀었다. 알렉스는 다시 휴대폰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너랑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기분 나쁜 말이기도 하고, 날 우습게 생각하는 건가 해서 허무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때 나는 알렉스가 살짝 웃으며 하는 그 말에 심장이 살짝 뛰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두근두근 뛰었다는 게 아니다. 그냥 그 순간만큼은 알렉스가 사람답게 보였다는 것이다. 뭐, 그 전에도 알렉스가 사람같이 보이긴 했지만. 뭐랄까. 그때에는 알렉스가 참 ... 외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 좀 연약해 보였다. 그래서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렉스가 빌려주는 돈을 받고 택시에 올라탔다. 알렉스는 택시를 타는 나를 보면서 ‘돈 꼭 갚아라!’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아까전의 연약함은 오간데 사라지고 장난기만 가득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출발했을 때 시선을 돌려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그 안에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알렉스가 보였다.
그 뒤로는, 뭐 이렇다. 처음 알렉스가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자에 답장을 했다. 가끔 마틴의 집에 갈 때 알렉스의 집을 들렸고, 주말이 끼어있던 날에 처음으로 알렉스의 집에서 잠을 잤다. 그때도 영화를 보다가 잠에 들었다. (그때 본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알렉스는 이 시리즈를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람도 아니라며 나를 억지로 보게 시켰다. 놀랍게도 알렉스는 영화광이었으며 <인디아나 존스>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의 집에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전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에 나온 작품은 정말 쓰레기 같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렇게 시간을 지내다 보니 알렉스와 함께 하는 이야기가 늘어났다. 가끔은 내가 수업을 끝내고, 알렉스가 일을 끝낸 저녁 시간, 강변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술기운이 돌면 알렉스는 꼭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알렉스가 기억할지 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로인해 알렉스와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거의 모든 것을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틴과 그의 모친에게서는 들을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알렉스의 입을 타고 나왔다. 사라와의 첫 만남, 고백, 첫 섹스, 졸업한 뒤 함께 살게 된 이야기. 마약에 대한 이야기, 잠시의 헤어짐. 그리고 영원한 헤어짐까지. 알렉스는 언제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더 많은 술을 마셨고 종국에는 내가 그를 업고 그의 집으로 와야 했다. 알렉스를 업고서 길을 걷는 날이면, 언제나 내 어깨는 알렉스의 눈물로 젖어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맥퀸 교수의 말과 함께 수많은 학생들이 부산스럽게 일어섰다. 옆을 힐끔 보니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크리스가 씩씩 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 당하기 전에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일어섰다. 크리스가 나를 향해서 뭔가 말하려 입을 연 순간 저 멀리서 맥퀸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군은 잠시 남도록. 난 아직 자네의 이야기에 납득하지 못했거든. 심도 깊게 이야기해보도록 하세.”
그 말에 크리스가 입을 꾸욱 닫고 커다란 눈으로 맥퀸 교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짐을 다 챙기고 일어선 킴이 ‘넌 뒤졌다.’하고 말하며 종종 걸음으로 나가버렸다. 나도 후다닥 짐을 안고서 킴의 뒤를 따랐다. 뒤를 돌아보니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하는 맥퀸 교수와 좆 됐다는 얼굴로 맥퀸을 바라보는 크리스가 보였다. 한보 앞에는 타인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라며 즐겁게 웃고 있는 킴이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어떤 영화를 빌려 가면 좋을까?
“야, 킴. 너 좋은 영화 아는 거 있냐?”
“....<원초적 본능>?”
“아 그런거 말고!”